“나이트 플라이트”,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한계


호러영화는 원래부터가 여성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스릴 혹은 샤커(shocker)를 주무기로 하는, 호러에서도 슬래셔라는 서브 장르는, 가장 약해보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갖 갖은 고생을 시키면서, 역으로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소외된 결과물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또다시 혐오와 공포를 강화시키는지) 그 어느 장르보다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
 

『스크림』 호러 컨벤션이 여기서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졌다

영화에서 섹스를 한 여자주인공이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잔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10대의 성에 대한 경고라는, 지극히 꼰대적인 가치관에서 비롯한다.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보여준 것은 이제껏 공고하게 쌓아올려진 호러장르의 가장 전통적인 장르 컨벤션을 정확히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었고, 내 눈에 가장 강하게 띈 것은 역시나 여주인공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옆집 여동생같은 여린 소녀(“니브 캠벨”이 TV 시리즈 『파티 파이브』를 통해 스타가 된 배우임을 상기하라.)는 단적으로 섹스를 하고도 살아남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듬직하고 믿음직한 남자주인공의 노력과 보호를 착취하다가 막판에서야 뭔가 시늉을 하고 살아남는 여자 캐릭터가 아니라, 철녀도 아닌 주제에 갖은 고생을 하며 오히려 옆집 오빠(“데이빗 아퀘트”)를 구해내고, 당연히 그녀를 지켜주다가 장렬히 죽을 것같았던 남자친구가 오히려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스크림 2, 3는 1에서 오히려 퇴행한 결과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몸은 젊은이라고, 또한 진보라고 떠들어대는 숱한 젊은 (남자) 호러감독들이 하지 못했던 것(혹은 하기 싫어했던 것을 오히려 “웨스 크레이븐”이 ‘아버지의 권위로’ 해낸 것이라는 점이다.

수꾸임~!

그러나 『스크림』시리즈가 가진 맹점은, 기존의 호러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었다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기존의 호러 컨벤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브장르가 바뀌긴 했지만(『나이트 플라이트』는 슬래셔가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결과, 그러나 아직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영화가 바로 『나이트 플라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0분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영화가 맥빠지고 심심한 영화로 느껴지는 것은 비행기가 도착한 후부터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안타까움과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절대적인 공포의 담지자일 것만 같았던 ‘그’는 알고보니 허풍쟁이 삼류에 어설픈 마초근성을 드러내다가 망신을 산다. 마초의 법칙은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다. ‘상황논리에 맞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숫컷의 법칙을 따르라’ 블라블라는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다.

‘그녀’가 눈부신 방어자이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폭력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폭력의 희생자와 다른 점은, 그녀가 단지 폭력의 ‘희생자'(Victim)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 폭력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다시는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것이, 그녀가 다시 닥친 일생 최대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고 다른 이의 목숨까지도 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참으로 눈부시게, 킬러가 초라해보일 정도로, 고난을 이겨낸다. 너무 쉽다 싶을 정도로.)

여기서 또다시 재미있는 것은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욕망을 느끼는 딸의 관계, 이른바 프로이트적인 아버지-딸의 고착은 스크린 안과 밖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호러영화의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새로운 여성성을 부여해준 존재가 B급 호러 영화의 대부, 즉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자’인 “웨스 크레이븐”이다.

아 그러게 폼만 그럴 듯하면 뭐하냐고 ... (그래도 넘 예뻐, 킬리안! ㅠ.ㅠ)

스크린 안에서, 다 큰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포악한 아버지'(“브라이언 콕스”, 『트로이』에서 아가멤논을 연기한 바 있는 그는 이제껏 너무나 자주 ‘포악한 아버지’를 연기해왔다)가 아니라 그녀 또래의 미성숙한 젊은 남자 잭슨(“킬리안 머피”, 뭇 젊은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게스모델 출신의 ‘예쁜’ 남자배우)이다.

이 영화의 갈등구도는 마치, 딸이 데려온 남자친구를 번번이 트집잡아 싫어하다가 딸이 마침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기자 ‘거봐, 내가 뭐랬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며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그녀 주변인물들은 이러한 딸에 대한 아버지의 욕망을 온통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뿐이다.

딸보다 어린 남자는 ‘연필을 잃어버리고 당황하는’ 바보일 뿐이고, 딸의 친모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그 친모의 친모는 막 죽었으며(그녀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딸의 어머니 세대의 다른 여성은 그녀의 호의를 입었으면서도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희망도 되지 못하고 실망만 끼친다. (그녀의 호의로 전달된 ‘책’은, 나중에 그녀의 SOS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개가 됨에도 부주의하게 분실되어 악당의 손으로 들어간다.)

반면 여전히 사회적인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을 단단히 보호하는 것은 아버지 또래의 남자, 키프 의원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딸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는 딸을 구한다. 딸에 대해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착된 딸의 이상한 근친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그들 부녀 사이에 이제는 아무도 (아무것도) 쉽게 끼어들 수 없다.

(유사) 아버지와 딸 - 아버지의 새로운 후계자이긴 한데 ...

아버지는 비리비리한 아들 – 여전히 남성적 권위를 지탱해주는 사회 제도와 법에 기대어 정작 그 자신의 주체는 나약할 대로 나약해져버린 아들 – 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게임을 치르고 그 누구도 돕지도 돌봐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살아남아 자기 혼자 훌쩍 선택해버린 딸을 선택했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의 세상이 아들이 아닌 딸들의 것이 될 것이라 예감한 아버지의 ‘약삭빠른’ 지분거림일 수도 있고,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폐기당한 것은 아닌 아버지의 권위로 승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이트 플라이트』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갖는 의미는 이것이다. 아버지는 호기롭게 딸을 승인한다. 딸을 통해 구원받은 아버지의 보상은 자랑스러운 딸에 대한 인정과 승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부와 키프 의원, 둘 다에게서 인정을 받는다.)

기존의 신화구조에서 언제나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다. 새로운 세대는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딸 역시, 아들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자신을 살해하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아들이 두려워 후계자를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되도록 오래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 존재로서 딸을 선택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받은 딸에게 굳이 아들처럼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 단계가 필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또다른 방식으로든 뭐든 아버지를 극복해야만 하는 단계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딸은 아버지 권력의 대리자, 즉 아버지를 제몸에 승화시킴으로서 구세대적 – 낡은 권력을 되도록 오래 지탱해주는 새로운 지지대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승인과 인정은, 아들이 아닌 딸의 가능성과 딸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한 발 나아간’ 진보에도 불구하고, 단지 아들이 아닌 딸을 자신의 ‘후계자’로 승인했을 뿐 여전히 자식에 대한 소유권과 그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굳건한 아버지의 권위’를 고수하며 자식에게 ‘아버지 살해’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앙시엥 레짐이다.

(브루주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에게 추파를 보내는 귀족?) 여전히 이것이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그리고 이미 ‘아버지’인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영진공 노바리

 

아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 …

작년까지만 해도 믿었다.

아들은….

아빠 지금 뭐해?

응, 지금 아빠는 파워포스레인저 레드와 지구를 지키기 위한 회의를 하고 있다.

거짓말.

아니야, 잠시만 기다려봐.

(광주씨, 아들, 설명좀 해줘.)

안녕 수겸아, 아저씨는 파워포스레인저 레드야!

으아아아아아아~ 엄마, 레드가 나한테 전화했어!!!!!

아빠는 영웅이 된다.

지구를 구하는 우주전사들과 연석회의라니.

하루는 그렌라간의 시몬을 만나고

하루는 사오정과 함께 손오공의 만행에 대한 토론을 하고

하루는 원피스의 크로커다일과 함께 해양한국, 빛나는 조국의 미래를 이야기 하고

그리고 또 어느날은 격동 50년, 역사스페셜의 주인공과 인사를 한다.

아들이 특히 감격하는 건 여자 주인공들과 조우할 때다.

물론 목소리만으로 조우해야지.

하지만 만나면 끝나는 그 환상이란 …

… 우울한건 이야기 하지 말자.

얼마 전, 트랜스포머를 보고 나오는 아들이 말한다.

아빠, 저건 그러니까 거짓말이지?

아들, 거짓말이 아니라 영화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주는 동화 같은거야.

그러니까 가짜잖아.

응.

후… 그럼 만화도 다 가짜잖아.

으…응…

싸늘하게 표정이 굳은 아들은 바람처럼 라페스타를 가로질러 간다.

8살의 속력을 넘는다.

세상은 항상 정의가 승리하는 만화같은 세상이 아니다. 아들.

50 미터는 넘게 앞서고 있는 아들에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모기만하게 이야기 할 뿐이다.

영진공 그럴껄

영화 속 아버지의 초상

『파송송 계란탁』을 보면서 내내 절 울게 했던 것은 ‘전인권'(“이인성”)이란 아이가 처해진 슬픈 소아암도, ‘대규'(임창정)가 살아가고 있는 슬픈 삶의 현실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무식한 아버지’의 자식의 병에 대한 ‘무식한 태도’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좌절감을 주는가가 영화내내 동화되어 슬픔을 자아냈습니다.

제 부모님은 아마 상당수의 제 또래 부모님이 그러하듯, 그리 좋은 학력을 가지고 계시진 않습니다. 허나 부모의 마음은 학력의 고저를 불문하고 인간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일이기에. 전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행운아입니다. 한때 부모님의 실수로 제가 큰 병을 얻어 몸져 누었을때, 제 아버지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란게 무식해서 아를 이꼴로 만들었으니 이를 우짜면 좋으냐…’

나는 내가 태어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부모님은 제가 안쓰러워 어찌할 줄 모르고 계셨더랬습니다. 무엇을 어찌 할줄도 모른채 의사만 바라보아야 했던 부모님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드셨을까요.

영화 『존 큐』는 비록 무식해도 착하게 살아왔던 아버지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공감이 가도록 그려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한 생명이 사라져 가는 절박한 상황을 타파할 수 없는 ‘삶의 한계’는 무식한 아버지의 절규를 불러냅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이고, 그 생명은 나로 인해 만들어진 생명이며, 나의 정서와 내 사상, 나의 철학을 이어 받고 자란 아이이기 때문일겁니다.

지금의 저는 비록, 사회에서의 교육으로 인해 자꾸 변해가고 있지만, 아버지와의 대화로 부터 받아온 아버지가 깨달은 삶의 정수들은 벌써 저의 원칙이 되어가고 있고 철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실없는 이야기라며 웃을 일일지도 모릅니다만, 제 아버지는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와 달리, ‘사람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여기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 하셨고, 당신께선 늘상 즐기시는 ‘바둑’을 사람을 속이는 기술이라 배우지 않길 권하셨고, 배운사람을 믿는 방법보다 솔직한 사람을 믿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네, 삼국지를 본다고 생명경시풍조가 생기는 것도 아니며, ‘바둑’을 배운다고 ‘권모술수’에 능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허나 비록 저런 말씀들이 타인에겐 ‘무식한 아버지’로 보일지 몰라도, 지금까지 제가 지켜야 할 원칙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그런 가르침은 저의 논리 전개과정에 늘 합당한 이유를 부여했습니다.

<1992년 영화 '로렌조 오일' 영화 포스터>

영화『로렌조 오일』은 어찌 보면 모든 아버지의 로망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의 아픔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논리적 역량을 다하고, 없는 지식을 긁어 모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그로 인해 결국 “로렌조”를 구해내는 이 실화는, 아마 지구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자식이 아플때 진정 원하는 바를 표현해준 이상에 가깝지 않을까요. (물론 자식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걸 보는게 가장 큰 이상이겠지요 …)

영화의 모티브인 로렌조와 아버지. 로렌조는 서른 살이 되던 2008년에 운명하였다.

자식이 육체적 병을 얻어 아프던, 심리적 압박으로 괴로워 하던. 같이 아파해줄 사람, 같은 시각으로 이해해 줄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 누구도 제 아픔을 같이 아파할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없을 테니까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현실의 한계로, 아는 것 없음의 한계로.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슬픔은 그 무엇보다 억울하고 괴로울 겁니다. 그런 마음을 늘 갖고, 가족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우리네 아버지.

하루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전화 한통화 하세요.
효도는 해도해도 모자랍니다.

영진공 함장

패륜아 -1




할머니는 열두 평 임대 아파트에 살았다. 현관문을 열면 집안의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배가 고프면 그곳 냉장고 안을 지범거렸다. 할머니는 베란다와 잇댄 큰 방에서 맞은 편 아파트 옥상에 겨우 걸린 태양을 보며 담배를 태웠다. 앞 동에 가려 볕은 들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말했다. 애비나 새끼나 키워놔도 생판 남인디 개새끼를 키울 걸 그랬어야. 대꾸 없이 배를 채우고 현관문을 닫았다. 내가 사는 반지하 쪽방은 노인 고린내가 나지 않았다.


그날도 배가 고팠다. 현관문을 열자 여전하게 집안의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쪽 문짝이 떨어져 나간 신발장 안에 광나게 닦인 비닐 구두 두 켤레가 끝줄을 맞추고 있었고, 나일론 털이 삐친 빗자루와 이 나간 쓰레받기가 신발장에 가지런히 기대 있었고, 바닥에 쇠솔 자국이 선명한 스텐 냄비가 가스렌지 위에 갸우뚱 앉혀져 있었고, 몇 년 전부터 닦지 못한 기름때 몇 방울이 알루미늄 싱크대 상판에 얼룩져 있었고, 크기가 다른 각종 고지서가 원목색 시트지를 새로 입힌 팔십 리터짜리 냉장고에 붙어 있었고, 그 고지서 중 도시가스 이용료, 지방세 독촉장, 의료보험 체납 알림서, 캐피탈 대출금 최고장이 부엌과 큰 방을 나누는 미닫이 문지방 아래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빈 소주병 세 개와 깨진 소주병 한 개가 그 주위에 나뒹굴고 있었고, 푸른색 나선이 끼어들어간 빨랫줄이 미닫이 문틀에 둥글게 매듭져 있었고, 그 문지방 위로 의자를 놓고 올라 선 아버지가 빨랫줄에 자기 목을 집어넣고 있었고, 2단 짜리 TV장 밑으로 등을 보이고 떨어진 TV가 전선 피복 타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머리가 산발이 된 할머니가 사지를 쭉 뻗은 채 큰방 구석 이불 보퉁이 옆으로 엎어져 있었고, 한 나절 태양이 남긴 잔 볕이 베란다 너머 맞은 편 아파트 옥상 모서리에 겨우 걸려 있었다.





가족 앞에서는 무서운 게 없는 분이었다. 왼쪽 뺨을 여덟 바늘 꿰매고 오른쪽 갈비 두 대가 나간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도망쳤다. 씨펄놈아, 내가 다 죽인다. 내가 다 죽인다고. 의자에서 발만 떼면 멱이 조일 텐데 가족 앞이라 그런지 아버지는 여전히 무서운 게 없어 보였다. 조용히 아버지의 곁에 가 섰다. 청년 시절 아버지는 프레스에 한 번 잘라먹고, 선반에 한 번 밀려먹어 손가락이 여덟 개밖에 없었는데, 손가락이 모자란 모든 장애인이 이렇진 않을 것이었다. 또 그 후 아버지는 세 번의 실직과 세 번의 사기, 끝으로 한 번의 사업실패를 당했는데, 막장에 몰린 모든 가장이 이렇진 않을 것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다가 잊을 만하면 술에 취해 이곳을 찾아와 그나마 멀쩡한 세간만 찾아 부셨다. 할머니는 칼을 들고 아버지에게 나가 뒤지라고 악을 썼고 나는 그 옆에서 밥솥을 열어 끼니를 챙겼다. 다만 이번에는 할머니가 칼을 안 뽑은 모양이었다. 엎어진 채 눈동자가 위로 뒤집어진 할머니의 목 주위로 울혈은 보였지만, 칼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입가에 침이 말라 버짐처럼 허옇게 번져 있었다. 개새끼를 낳지 못한 할머니의 잘못이었다. 역시 개새끼를 키우는 게 나았다.


오 세이 캐앤 유 씨, 오우 세이 캔 유우 씨, 세에이 캔 유우 씨이, 오오 세 캔 유 씨. 아버지가 노래를 불렀다. Oh, Say can you see. 줄곧 부르던 미국 국가였는데 첫 소절 가사만으로 끝까지 부를 수 있었다. 엄숙하게 노래를 마치고는 소리쳤다. 나 죽는 거 똑바로 봐라, 씨펄놈아. 용달 일을 한 전력이 있어선지 아버지가 엮은 교수형 매듭은 짱짱해 보였지만 과연 그게 아버지를 죽일 수 있을지는 의심이 갔다. 아버지의 여윈 몸은 줄에 붙들려 무겁게 늘어지는 게 아니라 장대에 널린 이불홑청처럼 가볍게 펄럭일 것 같았다.


씨펄. 아버지는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는 때 탄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어무이. 아버지는 다시 소리쳤다. 이번에는 때 탄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의 어머니는 그의 뒤에서 눈을 까뒤집고 엎어져 있었는데 아버지는 몸을 틀어 그 모습을 확인한 후 재차 어무이를 외치며 울었다. 통곡은 길었다. 곁에 서 있는 내 다리가 아플 만큼 길었다. 나는 아버지의 울음과 아버지가 한 짓과 아버지가 하려는 짓 모두를 이해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로 인해 행복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도 행복하지는 않았다. 씨펄거리며 흘리는 아버지의 눈물을 나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딛고 있는 의자를 발로 찼다.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아버지의 몸이 사방으로 펄떡였다. 아버지의 몸에 남아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생명력이 한 모금의 산소라도 더 마시기 위해 생동했다. 그 생명력은 목을 죄는 빨랫줄 사이로 여덟 개의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진을 짜듯 말했다. 살.려.줘. 나는 아버지의 여덟 손가락을 붙들어 강제로 옆구리에 붙이고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발을 뗐다. 나의 체중이 빨랫줄에 더해졌다. 중력이 빨랫줄을 따라 아버지의 척추로, 나의 척추로, 지구의 적도와 자전축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바닥 없는 우물에 떨어지는 두레박처럼 추락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축 늘어진 아버지의 몸에서 여덟 손가락이 소나기 쏟아지듯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손가락들은 엎어진 할머니에게로 꼬물꼬물 기어가 치마 속 고쟁이에 붙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두 개의 손가락이 담배를 끼고 다섯 개의 손가락이 라이터를 켜고 한 개의 손가락이 춤을 췄다. 불붙은 담배가 환하게 밝아지며 타들어갔다. 맞은 편 아파트 옥상에 걸려있던 잔광은 이미 사위어 있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를 걸어 나올 때 할머니의 임대 아파트 창안으로 불꽃이 넘실거렸다. 그 모습이 꼭 화장터 소각로의 작은 유리 너머로 날름대는 불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멀리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