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교과서] 이런 걸 교과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 집권세력의 핵심 지지기반이라는 ‘뉴라이트’가 주도하여 출간했다는 대안교과서.
나온지 꽤 되었다는데 최근에야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일단 몇 대목을 살펴보자.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하였다.
그 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게 뭔 소리냐?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에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했다고?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었으면 우리 스스로는 근대국가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없었다는 거냐?
게다가 “근대국민국가”는 어디서 나온 용어냐? 
내용은 둘째 치고라도 글이 앞뒤가 안 맞고 한 쪽의 논리에 지나치게 편향되어있다.

우리가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기르고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 인해 빼앗기고 폭력으로 지체되어 근대국가의 형성이 왜곡되고 더뎌졌다는 걸 부인하자는 것인가. 







“한편 일본군은 한국, 만주, 중국, 동남아, 남양군도에 이르는 전 주둔지에서 군 시설의 일부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그곳에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 출신의 여인들이 위안부로 노예처럼 수용되어 일본군에 성적 위안을 제공하였다. 일본군은 노예제를 금한 국제 협약을 위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한국 여성이 위안부가 된 사정에 관해 당시 심문을 맡았던 미국군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42년 5월 상순 일본인 대리업자가 ‘위안봉사’를 시킬 한국인 여성을 모집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이 대리업자가 여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큰 돈벌이, 가족의 빚 갚기, 쉬운 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삶 등이었다. 이러한 꾐에 빠져 많은 여성이 해외 취업에 지원하고, 몇 백 엔의 전대금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무지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었다. 대개 800여 명이 이렇게 모집되어 1942년 8월 20일까지 랑군에 도착하였다.””


위 내용에 분개하기 이전에 지은이들에게 묻는다.  저렇게 기술하게된 근거가 뭐냐?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당시 단순히 민간업자의 꾐에 빠져 자발적으로 나선 거라고 판단하게 된 근거가 있으면 제시해 달라.  그리고 이러한 범죄가 그저 민간 대리업자에 의해 저질러지고 일본군과 정부는 노예처럼 수용한 죄만 있다고 기술하게 된 근거도 있으면 함께 제시해 달라.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여진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서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이 인용문은 1993년 8월 4일 일본국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 중 일부이다.
소위 “대안교과서”에 따르자면 저 담화문의 내용은 사실을 왜곡한 거다.  그리고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나 미국 하원본회의 위안부 결의안 등도 잘못된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참고 링크)

이 교과서의 지은이들과 지지자들은 그걸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대답해보라. 





“김구(1876~1949), 황해 해주 출생, 호는 백범(白凡) … 1896년 민왕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살해하였다. 체포되어 복역 중에 탈출하였다 …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활동을 시작하였다. (중략)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수많은 후진국의 정치적 지도자 가운데 이승만처럼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의 비타협적 반공주의는 신생 대한민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동질적 국민의식을 배양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반공의 이름으로 반대파가 탄압되거나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부정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의 반공주의는 보통사람의 의식속에서 두려움으로 내면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후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올바로 잡는데 동시대 어느 느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는 건 인정하는 바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과서는 여느 단체의 조직원 교육자료가 아니다.  적어도 기술방식의 형평성은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에게는 미사여구와 변명거리를 덕지덕지 덧붙이고 그렇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시각만 단정지어 제시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식의 기술방식을 보통 윤색, 왜곡, 편향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런 내용과 기술방식의 서적을 정녕 교과서라고 해야 하는 건지 참으로 당혹스럽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와 인물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존재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줄 “교과서”에는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근거가 희박한 주장, 일부의 극단적 시각, 정치적 의도, 편향과 왜곡 등은 특히나 피해야 할 것들이다.

역사 교과서는 우리의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고 익혀 스스로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걸 돕는 책이어야 한다.  어느 특정 세력이나 단체의 일방적 시각을 호도하고 이를 주입시키고자 하는 도구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들과 지지자들이 혹여라도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중단하고 범사회적 협의와 합의에 의한 교과서 저술 및 발간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