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자의적 불감증의 시대를 향해 쓰다






이창동 감독의 다섯번째 영화. 논란이 될 만한 내용과 관점을 다루기는 하되 비교적 대중적인 화법을 견지해오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2007년작 <밀양>과 특히 이번 <시>를 통해서 비교하자면 거의 순수 문학에 가까운 연출 스타일로 변모하고 있음을 – 서정시나 풍경화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미학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있어서 – 확인시켜주고 있다.

영화의 소재와 주제 의식에 있어서는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으면서도 작가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되도록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니 자칫 이런 훌륭한 작품들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너무 적어지게 될까 싶은 걱정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몇 명의 가장 뛰어난 우리나라 영화감독들 가운데 작품을 통해 다루는 내용과 주제의식에 있어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있는 이가 바로 이창동 감독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시>는 어린 여중생의 죽음에 관해 시 한 편을 남기는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다. 늘그막에 시 문학에 심취한 여성의 이야기라고 해서 언듯 인생과 예술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예술가 영화 쯤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비극적인 사건에 연루된 범죄 행위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인지에 관해 묻는 매우 민감한 주제의 작품이다.

때마침 노무현 대통령의 1주기를 맞아 개봉한 이 작품을 놓고 우리 시대의 가장 뜨거운 작품이라 생각해보는 것 역시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러고보면 같은 주에 개봉한 <하녀>(2010)에서 은이(전도연)가 복수의 방법으로써 선택했던 그것 역시 두 영화가 동일한 시대 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하녀>가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했다면 <시>는 그 안에서 마취된 상태로 살고 있는 우리의 양심과 윤리 의식을 일깨운다. <시>에서 양미자(윤정희)가 정물이 아닌 자살한 소녀에 관한 시를 남겼듯이 이창동 감독은 이 시대가 죽음으로 몰고간 누군가에 관한 영화를 만든 셈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던 사람이나 그를 죽게 만든 다른 이들에 관한 영화라기 보다는 그런 사건들과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태도에 관한 영화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죽은 여중생에 관해 알고 싶어했던 미자가 사실은 그 사건으로 인해 매우 복잡한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는 영화의 설정과 전개는 내가 직접 관련되지 않은 비극적인 사건 사고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들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 쓰기에 몰두하느라 죽은 여중생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서도 엉뚱한 소리만 하다가 돌아나선 미자가 결국 자신의 시작 노트를 통해 강 노인(김희라)과 지극히 현실적인 필담을 나누게 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시>에는 누군가를 죽게 만든 이들과 그런 잘못을 덮어버리려고 애쓰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당장의 악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사람들의 속물적인 행동들 속에서조차 삶의 진실을 발견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밀양>에서 확인되었던 바다. <시>는 ‘그들의’ 무감함을 비판하기 보다 ‘우리가’ 다시 살려내야 할 도덕적 감각을 일깨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작품이다.











에필로그처럼 들려지는 양미자의 시, “아녜스의 노래”가 진정성을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순간적인 감상을 제대로 포착해낸 솜씨있는 언어의 조합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감각을 일깨우던 미자가 마침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낸 결단을 관객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중생 박희진(한수영)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다시 그녀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러고 보면 영화 <시>는 병원에서 처음 박희진의 죽음에 관해 알게된 미자가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 여중생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감정을 이입하다가 마침내 그 입장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클라이막스는 미자가 함께 배드민턴을 치던 손자를 경찰에 넘기는 장면이었다. 세상에 아파트 단지에서 한가롭게 배트민턴을 치는 장면 하나가 이토록 보는 이의 가슴을 뒤흔들 수 있다니. 그 자체로 놀라운 반전이기도 했지만 등장 인물의 극도로 자제된 감정이 스크린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넘치는 광경이기도 했다.

너무 완벽한 귀결이라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하건만 그 순간의 터질 듯한 감정을 꾹 눌러버리는 연출 앞에서는 그저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내젓는 수 밖에 없다.



노년의 나이로 인해 치매 현상이 찾아온 미자에게 의사는 “처음에는 명사를 잊게 되고 그 다음은 동사”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새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핑계로 자의적 치매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이어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법 마저 잊고 만다.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한 정치적 사건이나 작금의 상황과 굳이 연관지어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다.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하고 심지어 나름의 대가를 통해 가족으로부터 조차 잊혀지게 된 어린 소녀의 죽음을 매개로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완성해내는 삶의 불가역성과 예술의 상관 관계에 관한 영화로만 보여지더라도 – 그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달리 읽혀질 수 있는 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시>는 수준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을만 하다.

그러나 영화 한 편을 통해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해내고 시를 쓰는 예민한 감각으로 그 죽음에 관련된 일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기적은 오직 영화 <시>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일이다.


영진공 신어지

 

이창동과 윤정희, 거장의 필체와 선택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 그리고 ‘시’ .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창동감독 작품에 대한
무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겠지만 웬일인지 1960년대 대활약 한, 이제는 노인이 된 배우 윤정희에게도 깊은 호감이 간다.

윤정희는 배우로서의 자긍심과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지적이고 성실한 배우의 지위를 구축했다.
<안개> <분례기> <석화촌> 등 작품 선정에도 워낙 신중하여 그녀의 출연작은 한국영화의 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 1970년대 초반까지 활동을 유지하던 윤정희는 1973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영화사
‘196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에)

여배우의 삶을 쉽사리 논할 순 없겠다. 다만 여성으로서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갖고 한결 몰입하는 것이 특히 이 땅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가 대충 가늠해 본다.

대중의 인기(인정)를 한 몸에 받는 위치에서 학업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는데 또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녀 스스로
어떤 그릇이 되고자 큰 줄기의 빛이 반짝였을 그때에 감히 유학길에 올랐을까. 그리고 <시>로 다시 펼쳐 보이는 연기는
어떤 색일까.

나는 윤정희라는 배우가 실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시>를 통해 볼 그녀의
연기, 눈빛, 어쩌면 연륜까지가 전부 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내 미래를 비춰보고자 함은 <시>의 기회가 비단
거저 온 것은 아닐 거라는 예감 때문이다. 누구보다 깊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비우고 채우는 삶이 있진 않았을까. 자신의 분야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숨은 노력을
깃들이진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노년에 더욱 빛나는 여성의 모습을 <시>를 통해 입증해 주진 않을까.

<시>의 정갈한 타이틀 로고는 이창동감독의 필체다. 아직 못 봤지만 웬일인지 영화와 꼭 맞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더해 주인공 윤정희의 캐스팅 또한 이창동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기를 바라본다.

영진공 애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어른스럽고 예쁜 … 사랑의 여러 면들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영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대해서 쓰자면, 가슴이 일단 아프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주 여러번 이 영화를 본 나는, 볼 때마다 매번 같은 장면에서 울곤 하는데 조제가 츠네오에게 울면서 “가, 가란다고 진짜 갈 놈이면 가버려…”라고, 영화 내내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과, 맨 마지막, 츠네오가 오열하는 장면이다. 아, 츠네오가 조제를 낮에 처음으로 외출시켜주는 장면도. 아파트촌 거리를 “자전거에게 질 순 없다!”며 마구 달리는 장면.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장면인데, 영화의 결말을 알고 나서부턴 이 장면에선 울게 된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스탭 모두가 울면서 찍은 장면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밥 먹고 가란 소리에 불편한 표정으로 뻘쭘하게 앉아있다가 미역된장국 국물을 맛보곤 ‘오옷~’ 하면서 츠네오의 표정이 변하며 정말 맛있게 밥을 푹푹 먹는 장면에선 항상 웃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러 관객들 / 블로거들의 지적대로, 이 영화는 실패한 사랑, 서투른 사랑의 기억이 있는 모두에게 감독이 바치는 따뜻한 위로의 선물이다. 그저 좋아서 연애는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그녀를 더 배려하지 못 하고, 잘해주지 못하고, 화난다고 신경질에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안 좋은 일 있었다고 짜증을 내고, 한참 눈에 콩깍지가 씌워졌을 때만 해도 오히려 그/그녀의 매력으로만 보였던 어떤 모습들에 어느 순간 짜증을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에게 깜짝깜짝 놀라고 죄책감을 느껴봤던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는. 살벌한 조폭처럼 말하는 그녀의 특이한 말투에 호기심을 느꼈으면서도, 휴관인 수족관 앞에서 업혀있던 조제가 그를 때렸을 때 얼굴을 구겼던 츠네오처럼. 처음엔 그냥 그녀의 특징인 것처럼 느껴졌던 그녀의 장애가, 결국은 부모한테 보이기 힘든 어떤 결점처럼 느낀 츠네오처럼. 또, 그가 있으니까 바깥 외출도 필요없고, 필요한 건 다 그가 해주리라 믿고, 천년만년 그의 등에 업히면 된다고 생각했던 조제처럼.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포지션에 있든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들이지만 나름 이기적이고, 약하고, 어느 순간 무배려하고, 때로 공격적이다. 감독은 그런 인물들의 약하고 부족한, 이기적인 면마저 따뜻하게 응시한다. 그리고 격려한다. 네가 그것을 뉘우치는 한 너는 좋은 사람이라고. “감히 장애인 주제에 내 애인을 뺏었다”고 조제를 후려친 카나에도, 조제한테 자신이 한번은 뺨을 대주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조제는, 자신이 그녀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원작소설에선, 츠네오와 조제가 ‘여전히’ 함께 사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에선, 츠네오가 결국 조제를 떠난다. 츠네오는 내레이션을 통해 단 한 마디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은 단 한 가지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절대로, 친구로도 그녀를 다시 보지 않을 것이라는 츠네오의 다짐은, 조제를 향한 자기 식의 마지막 배려다.

배우들의 연기가 참 빛난다. 코멘터리에서 감독도 지적하지만, 둘이 섹스하기 직전 츠네오가 하는 “이런… 눈물이 날 것 같아” 같은 대사는, 처리하기 대단히 힘든 대사다. 물고기의 성 호텔에서 하는 조제의 독백도. 무엇보다도, 츠마부키 사토시는 적당히 여자 좋아하고 밝고 단순하게 살고 그렇게 착하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은 평범 그 자체인 대학생 츠네오를, 정말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적당히 재미있는 남자애로 연기하고 있다. (나는 그가 한국에 왔을 때 찍힌 사진을 나중에 보고서야 그가 ‘엄청난 꽃미남’이란 걸 느꼈다.) 이케와키 치즈루의 조제 역시, 너무나 매력적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고히 가지고 있고, 험한 세상에 대한 방어본능으로 때때로 내세우는 날선 공격성 역시 충분히 수긍갈 뿐 아니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바다를 처음 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그 표정을 보라. 물고기의 성 호텔방에서 불이 꺼졌을 때 나타나던 파란 바닷속 조명의 물고기를 보며 놀라하던 그 표정도. 무엇보다도 둘은,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처럼 찾아왔을 때 조제의 가란 소리에 삐져서 가던 츠네오, 그런 츠네오를 향해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조제, 조제와 헤어지고 나오던 길, 결국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해 정말 서럽게 앉아 오열하는 츠네오. 이들은 진짜 츠네오고 진짜 조제다.

소박하고, 리얼리스틱하면서도 사랑의 여러 면들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영화. 그리고 기어코 사람 감정선을, 오바하지 않고, 매만져주는 영화. 나에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런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오랫동안, 오바하지 않고 사람 감정을 막 쥐어짜지 않으면서도 사랑에 대해 담담하게, 그 아름다움과 찬란함과 고통을, 제대로 보여주는 연애영화를 기다려왔다. 사랑을 통해 서로 상대에 대한 환상만을, 혹은 악다구니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스스로 성장하는 그런 어른스럽고 예쁜 사랑영화를 기다려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나의 오랜 기다림에 대한 답 중 하나이기도 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vs. 오아시스

많은 이들이 장르와 분위기가 완전히 다름에도 이 영화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자주 비교한다. 장애인 여성과 비장애인 남성의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솔직히 내 경우도, 『조제..』를 한 세 번째 보면서, 『오아시스』 생각을 했다. 이전에 나는 『오아시스』 옹호자에 속했는데, 재미있게도 『조제…』를 보면서 『오아시스』가 참 나쁜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현실의 비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용기있게 보여주는 건 좋은데, 말하자면, 할 수 있는 한 최악의 상황을 하면서 관객에게 감동을 ‘협박’의 방식으로 억지로 끌어내는 영화란, 급수가 낮은 이들이 하는 짓이자 나쁜 영화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영화가 해피엔딩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조제…』의 엔딩은 통상의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에서는 언해피 엔딩이다. 그러나 조제가 그토록 싫어하던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딱 잘라 언해피 엔딩이라 말하기도 힘들어진다. 『오아시스』에서도 이창동 감독이 하려고 했던 것은, 문소리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사람된 설경구의 모습과, 설경구를 보내놓고 비로소 자기 힘으로 방 청소 – 노동 – 를 하는 문소리를 보여줌으로써,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비루하더라도 사랑이 이들의 삶을 어떻게 주체적이고 용기있게 바꾸어놨는지 보여주는 것이었을 게다.

하지만 『오아시스』가 끌어낸 감동이란 결국, 보는 사람들을 공포에 질려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만듦으로서 끌어낸 것이 아니었을까나. 이전에 이런 생각을 전혀 해보질 않았다가, 『조제…』를 보고서야 비로소 하게 된 것인데, 그건 그만큼 『조제…』가 일견 환상적이고 예쁜, 팬시한 영화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해도 – 러브호텔 씬! – 더없이 리얼리스틱한, 그리고 아무리 악한 사람들이라도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약하고, 깨지기 쉽고, 이기적이고, 아프고, 잘해보고 싶고, 착하게 굴고 싶은 부분을 최대한 끌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엔딩, 유모차도 내다버리려고 했던 그녀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드디어 도로를 질주하며 삶을 영위하고, 자기 몫의 삼치를 구워 혼자만의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이 영화의 구성상 사족처럼 느껴진다 해도 굳이 영화의 가장 맨 마지막 장면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것은, 이 영화가 조제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창동이 하고 싶어했던 것, 즉 문소리가 비로소 방 청소를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에 서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문소리의 방 청소 장면과 똑닮은 휠체어 질주 장면 – 그녀는 장을 봐오고 있다. (이전엔 복지과 사람들이 해주던 것) – 은, 환상의 자기 세계를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세계에 용감히 발을 내딛고, 자기 삶을 시작한 조제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문소리의 장면이 이창동 감독의 희망사항을 담았음에도 억지처럼, 감독 자신도 별로 믿지 못하는 듯 느껴졌던 것과 달리, 조제의 휠체어 장면은 충분히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간의 악”에 대한 직시만으론 힘들다. “그럼에도 변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어야 한다. 『오아시스』에선, 감독 자신이 그런 믿음과 희망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믿어야 한다고, 희망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억지로 설득시키려는 느낌, 그리고 봉합하려는 느낌말이다.


Quruli, “Highway”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