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인 : 최후의 결사단”, 중국 블럭버스터의 현주소

요즘 국내에 수입되는 중국 영화들을 보면 – 좀 더 정확히는 중국 영화들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상당한 격세지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 감상의 요점이란 결국 중국 영화에 대한 우리나라 관객들의 관심이 예전만 못하다는 건데요, 홍콩의 영화 제작 기술과 배우, 스텝들이 중국 본토의 막대한 영화 시장과 자본, 정부 지원 정책 등과 만나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좀처럼 다시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홍콩의 재능과 중국의 막대한 물량이 만났음에도 기대되는 만큼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장예모
감독의 <영웅>(2002) 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컨텐츠의 천편일률성입니다.

중국 정부의 정책적 방향 때문인지 아니면 현시점에 중국 내수 영화 시장에서 요구하는 컨텐츠의 특성 때문인지는 좀 더 면밀한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 되겠습니다만 – 결국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은 것일 수도 있겠네요 –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제작되어 국내에 수입된 중국 블럭버스터들이 하나 같이 ‘전체/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스펙타클을 펼쳐 보인다 하더라도 매번 선보이는 작품들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엇비슷한 내용과 주제만을 강조하니 식상하다는 반응을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는 영화의 문화 산업적인 특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 80년대에 홍콩은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미국이나 유럽과 같이 선진화된 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홍콩에서 물 건너 온 것은 어찌되었거나 좋은 것들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음악이, 그리고 영화에 있어서 국산품이 수입품을 누르고 내수 시장을 점령하는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홍콩은 중국에 반환이 되면서 영화 산업계의 지각 변동을 맞았지요. 이제 홍콩과 중국 영화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국내에 소개되는 영화들은 더이상 선진 문물로서의 프리미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역으로 중국 영화들은 분명히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헐리웃 영화가 국내 시장에서 갖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볼 수도 있게 됩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중국 본토의 관객들이 선호할 만한 소재를 찾아내고 그들의 대중적인 감성과 집단 의식을 자극하려는 전략은 <8인 : 최후의 결사단>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20세기 초 청나라 말기, 영국령이 되어버린 홍콩을 배경으로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 훗날 신해혁명으로 불리게 된 1911년 손문의 홍콩 방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 몽고족에 의한 오랜 지배와 부패, 외세에 대한 무기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족들의 ‘거룩한’ 희생을 다룬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한족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역사가 바로 칭기스칸에 의해 중국 대륙이 몽고족에게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인 관계로 칭기스칸과 청나라에 대한 해석이 미국과 중국에 의해 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시점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청나라 황실은 혁명지도자인 손문을 암살하려고 하고 홍콩의 혁명가들은 손문을 지키려고 합니다.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손문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무사히 홍콩을 다녀가기까지 암살자들의 위협을 죽음으로써 막아낸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이들 인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배치한 이후 후반부 기다리던 손문의 홍콩 도착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아날로그 액션을 전개하며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영화 만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한 마디로 더이상 손 댈 구석이 없을 만큼 세련되면서도 거의 완벽한 만듦새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년 전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우들 – 장학우, 양가휘, 증지위, 임달화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의 여명, 견자단, 사정봉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튀는 이 없이 하나의 작품 안에 완벽하게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액션이면 액션, 드라마면 드라마, 그외 미장셴과 배경음악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가 없는 외양을 갖추었음에도 관객으로서 영화 속으로 흠뻑 빠져들지 못하고 마는 이유는 결국 그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전개 방식과 천편일률적으로 반복되는 주제 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중적인 블럭버스터 영화가 갖는 한계는 비단 중국 영화만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지금 중국의 블럭버스터들은 온통 자기 자신들에게만 신경을 집중시키느라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느낌을 주곤 합니다. 같은 중국계 영화라 하더라도 이안 감독의 작품들, <와호장룡>(2000)이나 <색, 계>(2007)가 중국인이 아닌 외국 관객들에게까지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들을 생각해보면 최근 몇 년과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되리라 예상되는 중국 영화들의 한계 –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도통 재미가 없는 – 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중국 영화가 과거 한국 내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영광의 나날을 되찾을 수 있으려면 국내 관객들이 중화풍의 것들에 대한 선망의 시선을 갖게 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거나, 아니면 중국 영화가 지금보다 스타일이나 내용 면에서 좀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두 가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중국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한국영화의 해외 경쟁력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요. 제조에 강한 나라가 문화 컨텐츠의 강국으로 거듭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중국은 본래 가진 것이 많은 문화적 거대 잠룡이라고 할 수 있어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이겠지만 우리나라는 과연 국내외 관객들에게 보여줄 어떤 것들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ps. 글 내용 중에 언급된 중국 역사와 관련해 지적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확인해본 결과, 원나라(칭기스칸/몽고족) -> 명나라(한족) -> 청나라(여진족/만주족)이 정확한 역사더군요. 위에 언급된 내용 가운데 칭기스칸/몽고족과 청나라를 연결해서 언급한 부분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니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신어지)

영화의 반전(反轉)에도 원칙이 있다.

    

1. 제대로 된 반전의 조건

요즘에는 반전 없는 영화는 앙꼬없는 찐빵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개나 소나 반전을 집어넣는다고 난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많은 자칭 반전 영화 중에 쓸만한 반전의 짜릿함을 건네주는 넘을 찾기란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이건 아마도 영화 만드는 이들이 반전 원칙을 숙지하지 못한 탓이리라 사료된다.
 
이에 이러한 작태를 짜증스레 여겨 제대로 된 반전의 기본 조건을 풀어놓으니 모든 영화제작자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제발 반전 같지도 아니한 반전을 만든다고 삽질 좀 그만 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반전의 기본 구성은 아래와 같다. 이건 제멋대로 만든 게 아니라 Incongruity-Resolution Theory (번역하면 ‘부조화 해소 이론’쯤 된다)의 기본 도해이다.
 

이 도식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우선 모든 이야기(혹은 사건)에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요소들을 포함하는 초기설정이 존재한다.
② 관객들은 이 초기설정을 근거로 나름대로 이야기의 결말을 예측한다.
③ 만약 이야기의 결말이 관객의 예측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관객은 그 이야기에서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보통 말하는 “뻔한 스토리”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④ 그러나 이야기의 결말이 관객의 예측을 벗어난다면 관객은 우선 놀라움을 경험한다.
⑤ 그리고 관객은 이야기의 초기설정에서 어떻게 그런 결말이 도출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탐색해 본다.
⑥ 만약 관객이 초기설정 속에서 문제의 예측 밖의 결말의 근거나 규칙을 찾지 못한다면, 역시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쉽게 말해 그 이야기는 “황당한 스토리”가 된다.
⑦ 그러나 만약 관객이 초기설정 속에서 문제의 예측 밖의 결말의 근거나 규칙을 찾아낸다면, 관객은 비로소 제대로 된 즐거움을 경험한다.

예상외의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유주얼 서스펙트』를 처음 보았던 관객이 이 영화의 결말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면, 이 영화는 폭삭 망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은 관객의 예측을 벗어난 결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결말이 뜻밖이었다 하더라도, 영화 속에 절름발이가 무서운 악당일 개연성이 전혀 심어져 있지 않았다면, 역시 이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객들은 뜻밖의 결말에 놀랐지만, 돌이켜보니 그거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결말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재미를 느낀 것이다.

이는 영화 『식스센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결말의 단서는 이미 영화의 도입부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에 시치미를 떼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따라간다. 왜 주인공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구는지, 처음에는 그냥 이 넘 충격이 컸었구나 정도로 생각하던 관객들은 영화 마지막의 반전을 통해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단순히 ‘외로운 심리치료사의 설정’ 정도로 봐주기에는 2% 부족하던 사소한 사건들(왜 마누라는 주인공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왜 주인공은 애 말고 다른 사람과는 한마디도 대화를 하지 않았는지, 왜 이 인간은 맨날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지…)도 완전히 설명된다. 이게 반전의 파괴력이다.

여러분도 다들 알 듯이 이런 단서들을 복선이라고 부른다. 복선이 얼마나 치밀하게 반전과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황당한 영화와 짜릿한 영화의 갈림길이 나눠지는 것이다.

물론 어디에나 개인차는 있다. 『식스센스』를 보면서 영화 초반부터 무슨 반전이 있을지 예측해버린 관객이 있는가 하면,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을 못하는 관객도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어쩔 수 없다고 치고(이건 지능의 문제니까), 첫 번째 같은 영악한 관객들을 위한 대책은 있다. 이들은 애초부터 기막힌 반전을 기대하지 않고 영화관에 들어선다. 대부분 영화의 기본 공식에 빠삭하기 때문에 앞에 돌아가는 몇몇 에피소드만 봐도 다음에 예상되는 수준이라 별로 짜릿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반전이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지 않고 영화 기본 공식을 지켜가되 보다 창의적인 변주를 하는 장르 영화다. 사실상 영화의 기본은 “말이 되는 이야기”다. 그게 갖추어진 다음에야 반전이고 뭐고 찾을 수 있는 것이다.

2. 반전과 속임수의 차이

이렇게 반전 얘기를 푸는 이유는 사실, 영화 『연인』을 보면서 경험했던 충격 때문이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서, 그놈의 어줍쟎은 반전 집착이 영화를 얼마나 쒯스럽게 만들고, 관객을 도탄에 빠트리는지를 뼈속 깊이 느끼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소위 반전이랍시고 내놓은 것들은 모조리 관객을 허탈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뿐이다.

스포일러 있다능 …  주의하라능 …

첫 번째 반전, “”장쯔이”가 사실은 장님이 아니다”를 보자.
이 반전이 제대로 먹히려면, 얘가 장님 같지만 장님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 ‘콩따라 북치기’ 가 그런 거였다고? 무협영화의 공식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그 퍼포먼스는 장쯔이가 얼마나 대단한 장님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지, 결코 두 눈 멀쩡한 애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 눈 멀쩡하고 팔다리 멀쩡해도 고수가 아니면 결코 그런 고난도 퍼포먼스는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장면 뿐만 아니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던 목욕탕 결투 장면에서도 장쯔이는 초지일관 소리에만 집중한다.  장님이 아니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느냔 말이다.  이렇게 아무런 단서도 없다가 갑자기 또릿또릿 바라보며 말하는 장쯔이를 보는 관객들의 심정은 금성무보다 더 허탈하다.  이게 도대체 뭐다냐… 반전이 주는 짜릿함은커녕, 전반부에 쌓아왔던 모든 이야기의 무게가 그냥 날아가 버리는 거다.

두 번째 반전, “”유덕화”가 사실은 첩자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협판 “무간도4″다)도 마찬가지다.

역시 문제의 목욕탕 결투. 여기에서 유덕화는 장쯔이를 정말로 작살내버린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말이다.  둘이 애인이고 같은 편이라면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감독이 이 둘의 결투를 아주 중요한 사건인 것처럼 슬로모션으로 보여준다는 게 문제다. 그 느린 화면 어디에도 이 둘이 짜고 친다는 단서는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둘이 같은편이었네~ 하면 반전이 되나?  관객들이 느끼는 건 배신감 뿐이다.

이 같쟎은 반전의 행진을 보며 갑자기 장예모는 혹시 반전을 속임수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여기서 반전은 그냥 속임수다. “장쯔이”의 속임수, “유덕화”의 속임수, 그리고 감독의 속임수… 뭐 유주얼서스펙트 같은 영화에서야 속임수가 반전이었지만, 식스센스의 서늘한 반전은 속임수가 아니었는데…

3. 말이 되는 이야기

그러면 이야기 자체는 말이 되느냐 … 솔직히 이 영화가 어떻게 흥행에 성공하였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아무리 이성의 세기인 20세기가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왜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영화가 흥했했던 것일까? 예전 영화들 중에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성공한 적이 있던가? 그렇지는 않은거 같은데 … 갑자기 관객들이 비이성적이 되기로 결심한건가? 아니면 사람들은 애초부터 논리 같은건 따지지 않았던 걸까?

그래 뭐 “유덕화”는 무간도에서 처럼 완벽한 내부첩자였다고 치자. 그리고 “장쯔이”는 아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서로 뻔히 아는 “유덕화”와 싸울 때 조차도 장님행세쇼를 했다고 치자. (뭐 주변에 관객들도 있었나부지) 중국의 기후가 워낙 개떡같아서 한가을 날씨가 순식간에 한겨울로 바뀔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거 까지는 말 된다고 믿어주자…

아무리 그래도 “비도문” 진영까지 와서 벌어진 일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비도문 두목은 새대가린가? “유덕화”가 왜 그동안 비도문에 충성해왔는지 두목은 진정 몰랐단 말인가? 둘의 대화는 듣지 못하고 몸싸움만 봤냐?
“장쯔이”의 배신을 비참하게 인정하고 돌아가게 만들면 “유덕화”가 조직에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될지 두목은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장쯔이”가 “금성무”에게 어떤 감정인지 대강이라도 짐작 못했나? 그걸 알면서도 “장쯔이”에게 “금성무” 처치를 맡겨놓고 둘이 들판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놀수 있도록 내비둔거냐? 혹시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내비뒀나? 둘이 같이 도망가라고?

그렇게 부하들의 마음을 모르고서도 두목 행세 할 수 있냐?

“금성무”, “장쯔이” 너네들도 그렇다. 아무리 서로 눈빛만 마주쳐도 불타오를 단계라지만 그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있던가?


아아… 이런거 따져서 무엇하리…

아무래도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포르노 비디오와 동일한 구조였던 모양이다.
포르노 영화에서 모든 사건은 결국 섹스장면을 위한 곁다리에 불과하듯, 이 영화에서도 모든 사건이나 모든 반전이나 모든 이야기(그렇게 불러줄 만한게 혹시라도 있다면)는 결국 뽀대나는 고속촬영장면을 위한 곁다리에 불과했던거다. 그래서 감독도, 관객도 지금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끄고 장쯔이의 우아한 춤사위나 몸놀림, 칼이나 화살의 비행을 고속촬영으로 감상하는 거에만 집중하기로 약속된 영화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약속이 있다는걸 관객에게 미리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고 본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