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하녀가 아니라 마님(들)이 주인공이다






김기영 감독의 원작이 무려 1960년도 작품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50년 전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서 리메이크를 한다는 기획 자체가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흥행 성적이야 내 걱정할 바는 아닌 거고, 그저 한 사람의 유료 관객으로서 보기에 영 어색하지나 않을런지 괜한 걱정이 앞서는 쪽이었다. 때 맞춰 깐느 경쟁부문에도 진출했겠다, 꽤 많은 상영관을 차지하며 개봉했지만 역시나 수도권 상영관 안의 객석은 상당히 한산한 편이다.

‘하녀’라는 단어가 주는 전근대적인 뉘앙스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원작의 설정이 지금의 관객들에게 그리 큰 호감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사실 지금이나 원작이 만들어졌던 그 시절에나 ‘하녀’라는 전근대적인 단어가 매우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잘 사는 집안이 아니더라도 식모나 그외 집 안 일 도와주는 언니 한 명 쯤은 데리고 살았던 그 시절에도 그들을 ‘하녀’라고 부르며 하대하지는 않았기에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하녀>라고 이름 지을 때에는 그녀의 역할이나 좀 더 확장된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이 다시 만든 <하녀> 역시 단 한 번도 은이(전도연)를 하녀라고 지칭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하녀가 존재했던 봉건 시대에나 동명의 두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에도 그 역할 자체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녀>의 도입부는 누군가의 집 안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에 온갖 아랫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그 하녀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고 그 댓가를 돈으로 받아 생활하는 우리 대부분의 하녀 또는 하인 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되고자 한다.











그러나 하녀의 정의를 새롭게 하는 것은 영화 <하녀>가 관객들을 그 이야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취한 출발점에 불과하다.

주인공 은이의 캐릭터 역시 원작의 이상성격자와는 많이 다르다. 지극히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나이브한 면까지 갖춘 – 그리하여 어린 애한테 착하고 불쌍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 성격의 소유자로 그리면서 관객들이 은이의 입장에서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 뿐이다.

정작 <하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은이가 하녀의 입장이 되어서 들어간 ‘그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영화 <하녀>는 제목이 되고 있는 하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하녀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그들이 아주 무서운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때 그 사람들>(2004)을 통해 10.26 사건 현장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때 그 분들’의 이야기에 집중된 작품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듯이 임상수 감독은 <하녀>를 통해서도 하녀의 윗분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임상수 감독의 장기인 동시에 한계가 되는 점이기도 한 바, <하녀>는 임상수 감독이 카메라로 다시 쓴 <재벌(의 사생활)을 생각한다>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안의 딸로 출연한 아역 안서현의 큰 눈과 뚱한 표정이 우리나라 대표 재벌가인 이씨 집안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하녀>의 마지막 컷을 차지하는 얼굴도 다른 주연 배우들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역 안서현의 차지가 된다. 어쩌면 <하녀>라는 영화 자체가 임상수 감독이 내던지는 조롱 섞인 농담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주인 남자(이정재)와 여자(서우), 그리고 은이(전도연)의 뻔한 갈등 관계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하녀>가 충분히 각색되고 의도된 작품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주연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주인 남자의 장모(박지영)와 집사 조병식(윤여정)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주인 남자가 가진 막대한 부의 힘을 잘 이해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메카니즘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기생형 인물이라는 점이다.




추측컨데 왠만큼 잘 사는 집안 출신인 장모조차도 주인 남자 집안의 절대 권력 앞에서는 기도 못펴는 수준이 되고 마는 바, 장모는 시집 보낸 딸을 통해 그 권력의 쾌적함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계획과 의도에 방해가 되는 은이의 존재를 제거하는 데에 처음부터 몸소 앞장 서는 역할을 한다.

조병식은 고참 하녀로서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꼴을 오랜 세월 동안 감수하며 자기 아들을 또 다른 권력 체계에 편승시키는 데에 성공한 인물로 은이를 마음으로부터 동정은 하되 그 집안이 요구하는 바를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하수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이 원작에서 서스펜스 스릴러를 걷어내고 그 대신 ‘게임의 법칙’을 채워넣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주인 남자의 장모와 집사 조병식이고 <하녀>가 원작을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으되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각색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 역시 두 인물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박지영이 연기한 장모 역할 덕분에 – 결국 그 시스템 안에서 머물기로 하는 한 어느 누구도 하녀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하녀들>이 되었을 때 영화의 메시지에 좀 더 부합한다 –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영화이긴 했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한 수준인 것은 아니다.

영화제 출품 일정을 맞추느라 서둘렀던 탓인지 약간 생뚱맞게 보일 수도 있는 에필로그와 함께 – 이 에필로그 때문에 <하녀>는 확실하게 하녀가 아니라 하녀를 부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장면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분위기가 영화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붕 뜨는 느낌을 준다 – 은이의 최후 역시 후련한 감은 있지만 극적인 상황을 좀 더 길게 이끌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은이가 하혈을 한 후 조병식이 주인 남자를 보며 무언가 의사전달을 하다가 다음 컷에서 갑자기 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은 분명 기술적인 실수다. 주절주절 많은 설명을 하는 법이 없는 이런 영화에서 주요 등장 인물들의 표정 하나가 이야기의 흐름에 맥을 짚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점프 컷에 가까운 이 부분의 편집 실수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라 하겠다.

아울러 은이의 폭주에 앞서 조병식의 입장이 갑작스럽게 전환되는 부분 역시 통렬한 느낌을 전달해주기 보다는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마지막 씨퀀스를 위해 좀 더 많은 촬영을 해놓고도 러닝타임 때문에 대폭 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 앞 부분에서 이미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해버린 참이었으니 아마도 별도의 디렉터스컷 따위는 만들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영진공 신어지

 




 

“멋진 하루”, 진정 사랑하니까 우린 헤어집니다.

사랑이 어려워 우울합니다

이별이 힘들어 우울합니다


생활이 답답해 우울합니다


후회와 회한도 우울합니다


그래도


그대의 추억은 행복입니다


10대와 20대의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숨막히고 행복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도 사랑은 두근 두근 행복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생활에 사랑은 늘 공격받고 약해져 가는가 봅니다.
아님 사랑이 약해지는게 아니라 인간이 이기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대개 10대와 20대의 영화가 대부분입니다
30대와 40대의 사랑을 그리는 영화는 그 해피엔딩의 공식에 철저히 따르는 미국 영화 조차도
별로 없거나 아님 씁씁하거나 아님 그깟 사랑보다 자아를 찾자라는 교훈성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나이든 사랑은 우울합니다.

“멋진 하루”는 지나간 사랑에 대한 반성 또는 추억입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어 사랑따위는 잠시 접고 살아야 하는 우리 대다수의 이야기 입니다.

희수(전도연)는 현실주의자이고 병운(하정우)은 로맨티스트로 보입니다만,
오히려 희수는 현실에 지친 패배자로 보이고 병운은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힘차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아이러니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겉으로 보이는 에피소들들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게는 영화 내내 흐르는 분위기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추억과 그 추억에 대한 자신의 회한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 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사랑은 그져 묻혀 지나가거나 흘러지나갈 수도 있는 하나의 조건에 불과해 보여집니다.  인생 한 때의 절대적인 가치에서 내려와 평범한 추억으로 남는 그런 사소한 일상이 되어 버리는가 봅니다.

하지만 그 사소한 일상 때문에 늘 가슴 한구석에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아 있는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영진공 클린트

“멋진 하루”, 인생의 두가지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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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스위스의 아마추어 심리학자 모녀 마이어스Meyers와 브릭스Briggs가 칼 구스타프 융의 성격이론을 기초로 개발한 성격검사도구인 MBTI는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심리검사 중의 하나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중에도 이 MBTI를 해보신 분이 꽤나 많을 겁니다. 이 검사에서는 인간의 성격을 내향성(I)과 외향성(E), 감각형(S)과 직관형(N), 사고형(T)과 감정형(F), 그리고 판단형(J)과 인식형(P)으로 나눕니다. 이 검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kr.blog.yahoo.com/id_solution2006/2.html?p=1&pm=l&tc=4&tt=1222787717
http://www.mbti.co.kr/


마이어스와 브릭스여사, 그리고 융

그런데 제가 이 검사 도구에 대해서 배울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의 3가지 축의 검사결과는 쉽게 바뀌지 않지만 마지막 축인 판단형과 인식형의 점수는 꽤나 쉽게 바뀐다는 겁니다. 똑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아 여가시간이 많거나 여러 가지로 삶에 여유가 있을 때는 인식형인 P점수가 높아지는 반면에, 바쁘게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빠듯하게 시간과 돈을 쪼개어가며 살 때는 판단형인 J점수가 높아진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선생님은 이 점수는 일종의 스트레스 지수라고 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J점수가 높을수록 스트레스에 몰려있다는 뜻이란 거죠.

왜 그럴까요? 이 검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대충 답이 나옵니다.
인식형P과 판단형J 검사축은 그 자체가 생활방식 혹은 실천하는 방식을 의미하거든요.
그 중에서도 ‘인식형’의 모토는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해보자”입니다. 즉, 유연하게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모든 가능성을 다 찔러보고 그 결과를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태도죠. 인식형은 꼭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습니다. 처음에 목표가 있을지는 몰라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내 경험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유유자적 느릿느릿 제멋대로입니다. 일을 미적미적 미루다가 마감일 직전에야 불이 붙어서 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획대로 해야 하는 일은 답답해하고 오히려 아무 계획 없이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실력발휘를 하는 경향이 있죠.

반면에 ‘판단형’의 모토는 “계획대로 하자” 입니다. 판단형은 모든 것을 단계별로, 계획에 맞춰서 해나가기를 원합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상황을 정리하고 계획부터 세워야 합니다. 물론 맹목적으로 한가지 계획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1차 계획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이나 차차선책까지 치밀하게 세우니까요. 일단 계획을 세운 다음에는 모든 것이 그 계획대로 돌아가야 마음이 놓이죠. 정해진 계획이라는 뚜렷한 기준이 있으니 되는 일과 안되는 일이 분명히 나뉩니다. 이 유형에게 이것저것 찔러보는 일 따위는 낭비죠. 인식형이 막판에 몰려서 갑자기 일을 끝내는 반면에 판단형은 시간에 맞춰서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나갑니다.
어떤 성격심리학자는 이 둘의 차이가 불안감에 대한 내성의 차이라고도 합니다. 판단형인 사람들은 목표만 있고 달성이 안 된 상태가 주는 불안감에 매우 약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해감으로써 불안감을 줄여나간다는 거죠. 하지만 인식형인 사람들은 불안감에 대한 내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들은 단지 내성이 강한 정도가 아니라 불안감이 어느 게이지 이상 높아지지 않으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불안감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기 보다는 그냥 영화 <멋진하루>를 보시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병운(하정우)과 희수(전도연)이 인식형과 판단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이 화상…

병운이는 인식형의 화신입니다. 뼈 속까지 지독한 인식형이죠. 이 인간은 사업하다가 부모재산 날려먹고 집도 날리고 마누라도 떠나보낸 와중에도 여유롭게 경마장에서 남의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희수의 빌려간 돈 내놓으라는 독촉에도 느릿느릿 여유를 잃지 않네요. 영화는 병운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대충 설명을 해줍니다만, 아마 병운이는 원래부터 인식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돈을 받자!!

반면에 희수는 판단형의 화신이죠. 영화에서는 비록 희수가 갑자기 나타나 빌려간 돈을 찾아야겠다고 우기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 희수의 주장은 바로 그날 정해진 것이 아닐 겁니다. 희수 입장에서는 벌써 며칠 혹은 몇주전부터 결정된 일이겠죠. 그 동안 희수는 단계별로 차근차근 병운이의 거처를 수소문해서 최종 위치를 확인해 D-day를 정했을 것이고, 그 날이 바로 D-day였던 것이죠. 희수는 불안합니다. 주차할 때마다 네비게이션을 글로브박스에 집어넣는 희수의 행동도 바로 그 불안감의 결과죠. 희수가 병운이를 찾아온 것도 사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일단 받아낼 돈을 받아놓자는 불안감의 결과물일 겁니다. 희수의 입장에서 이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곳이거든요. 희수가 결혼을 하지 못한 것도 결국은 그 불안감 때문이었죠.

처음에 희수의 눈에 보이는 병운이는 한심무인지경의 인간입니다.(아, 대부분의 관객들이 보기에도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서서히 의외의 모습들이 나타나며 영화는 흥미로워집니다. 어쨌든 이 영화 <멋진하루>는 인식형과 판단형의 화신이 만나 한쪽은 으르렁대고 한쪽은 능청맞게 얼러대며 벌이는 화학작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던 희수가


이러더니…


이렇게 변해가는…

왜 이 둘의 만남이 ‘끔찍한 하루’가 아니라 ‘멋진 하루’일 수 있냐면, 우리는 인식형의 태도로만 세상을 살 수도 없고(만약 그렇다면 병운이처럼 빵꾸 인생이 되겠죠), 그렇다고 판단형의 태도로만 세상을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식형은 판단형을, 판단형은 인식형을 필요로 하지요. 그래서 인생이 오묘하고 멋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는 스포일러..(읽고 싶으시면 긁어내리삼)

결론을 살짝 말씀드리자면, 시간이 흐르면서 희수는 병운이의 여유를 조금 얻습니다.
아마 희수가 마지막에 남긴 돈 20만원은 그 여유의 댓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여, 혹시 이 영화에 관해서 Film2.0에 쓴 글과 전혀 분위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질책하신다면,
이번에는 병운이 입장으로 모드를 바꿔서 써봤다고 변명을 해보렵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