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우강호”, 사랑은 강호의 악연을 넘어





서극 감독의 영화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에서 얻은 실망감은 왠지 한 주 뒤에 개봉한 오우삼 감독의 <검우강호>로 – 엄밀히 말하자면 오우삼 감독은 제작자에 가까웠던 것 같고 실질적인 연출은 대만 출신의 수 차오핑 감독이 도맡은 듯 – 반드시 상쇄시켜줘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관람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의도했던 대로 결과는 꽤 성공적이네요. 무협 영화에 관해 특별히 축적된 이력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충분히 재미있었고 또 기대했던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부분들 역시 많았습니다. 장르의 특성상 와이어에 의존하게 되는 무협 액션에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거나 광동어로 연기하는 정우성의 모습에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 경우만 아니라면 누가 보더라도 크게 흠잡을데 없이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인정할만 합니다.




<적인걸>이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기술적으로 80년대 홍콩 영화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액션과 함께 이제는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나오려고 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결합 때문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텐데요, 일단 <검우강호>는 주제와 내용 면에서 최근 중국 블럭버스터들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 대신 고전적인 무협에 멜러적인 요소를 버무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와호장룡>(2000)을 연상케 하기도 했습니다.

너를 산 채로 묻어 저 위의 다리를 지날 때마다 널 생각하겠다는 잔뜩 뒤틀려버린 사랑과 서로 칼을 겨눌 수 밖에 없었던 악연을 끝내 극복해내는 진심어린 사랑을 직접적으로 비교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더군요. 나아가 <검우강호>는 탐욕과 배신,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혈전의 연속선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명을 극복하고 평범한 삶의 행복을 되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제 곧 50세의 나이가 되시는 양자경 누님이 <예스 마담>으로 처음 알려진 것이 80년대 중반이었으니 바야흐로 25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멋진 쿵푸 액션을 보여주고 계신 거네요. 이제는 슬슬 예스 마님 역을 해주셔야 할 시기에 우리의 한류 배우 정우성과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는 역할을 맡으셨으니 – 아마도 해외 배급을 위한 선택이었던 듯하고 양자경이 직접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이걸 말이 안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격려의 박수를 쳐드리고 싶더군요.

재미있는 사실은 <적인걸>과 <검우강호>에는 공통적으로 얼굴 성형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설정으로 들어가 있는데요, <적인걸>의 성형이 비과학적인 변신술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검우강호>에서의 성형은 나름대로 고대 의학 기술의 쾌거임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 다르더군요. 영화 속에서 양자경은 정우성과 멜러의 합을 맞추는 데에 있어서 물론 분장을 잘하고 나온 덕도 있었겠지만 성형 수술을 통해 한 차례 개조된 얼굴이라는 설정의 덕도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검우강호>에서 정우성은 영화의 절반 이상 어리버리한 연기를 하다가 – 이 역시 설정의 덕을 보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역시나 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쾌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세우(양자경)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분노하는 부분에서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배우는 아니지만 필요한 때에는 제대로 터뜨려주곤 하는 정우성의 장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들과 대립각을 이루게 되는 흑석파의 고수들의 면면도 각자의 개성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허황되지 않는 캐릭터들이어서 보기가 좋더군요. 특히 냉소적인 표정과 자세로 일관하는 여문락의 캐릭터 연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흑석파의 두목으로 출연한 왕학기는 어디에서 낯을 익힌 배우이신가 찾아봤더니 <8인 : 최후의 결사단>(2009)의 마님이셨더군요. 흑석파 두목은 자칫 의도와는 달리 희화화되기 쉬운 캐릭터였는데 왕학기의 연기 내공이 잘 커버해준 것 같습니다.

영화 전반적으로도 고전 무협의 상상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잘 소화해낸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영진공 신어지







 

“놈놈놈”, 채 완성되지도 않은 영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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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 어처구니가 없어여.

씬과 씬 사이에 있어야 하는 그림이 없는 경우가 수두룩이에여.

마지막 대추격전 바로 다음 장면. 송강호만 혼자 사막을 달리고 있죠. 대추격전 상황에서 송강호가 어떻게 벗어났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어여. 액숑 영화 원투번 보나? 뻔한 거, 그냥 관객이 알아서 생각하라는 건가요?

그런가 했더니 또 그 다음 씬에서 이병헌이 갑자기 누군가를 죽이면서
“붙었으면 끝까지 해얄 거 아냐? 어쩌구 저쩌구 불라불라”거려요.

아. 이건 뭥미? 대체 누구랑 왜 싸우는 겅미? 거기 보니깐 처음 보는 가방이 등장하던데 그거 때문에 싸운 겅미? 글고 병헌이는 어떻게 이긴 겅미? 이 역시 ‘아 거참 액숑무비 원투번 보나? 나쁜 놈들이랑 싸웠겠지’하고 관객이 알아서 유추해야 하는 겅미?

아니요. 전 오히려 편집자의 고뇌가 느껴지더군요.

붙지도 않은 그림,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그림들만 잔뜩 있는데 그것 갖고 어떻게든 편집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편집자의 담배 세 갑 스트레이트 끽연 고뇌.

그러니 칸 공개 버전과 국내 버전 편집이 달라졌겠죠. 국내 버전이 더 높은 퀄리티라고 제작사 측에서 얘기한 것 같은데, 칸은 영화제 일정에 맞춰 시간에 쫓기며 편집했을 테고 국내 버전은 그보다 시간 여유가 있었을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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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처럼 버전이 다르다는 사실은, 시나리오대로 혹은 최초 콘티대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럼 왜 콘티대로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대규모 인원과 가축이 나오는 각종 폭파 액션씬을 해외에서 찍어야 했으니 생각만큼 그림을 얻질 못했을 거예요. 대충 짐작은 갑니다. 그리고 모든 영화가 꼭 콘티대로 가야 한다는 법칙도 없구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붙어야죠. 이 꺼끌하고 엉성한 편집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오토바이에 애들 태우고 달리던 송강호가 별 설명 장면 없이 혼자 달리고 있는가 하면, A급 가죽 케이스에 보관돼 품에 잘 있을 거라고 생각됐던 지도가 마지막엔 너덜 세트가 돼있고, 송강호랑 병헌이네 패거리들이랑 싸우고 있는데 어느새 병춘이네 패거리가 끼어 들어 싸우고 있고. 기타등등등등등.

흔히 영화를 평할 때 완성도를 놓고 그걸 기준삼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르자면 이 영화는 정말 ‘완성도가 없는 영화’예요. 당연하죠. 아직 덜 만들어졌는데 완성도가 있을 리가 있나요? 물론 마음이야 부족한 그림 다시 가서 찍고 싶었겠지만 여건상 그렇게는 안됐을 테고 말이죠. 그래도 결론은 그거예요. 이건 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럭저럭 졸지 않고 영화는 무난하게 봤어요. 하지만 이건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기본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중국집 가서 짱게를 시켰는데 바쁘다고 짜장에 양파 안 넣고 볶아내오는 경우란 말이죠.

요즘 영화 관람 생활을 많이 안해서 모르겠지만 예전 광시곡 이후로 그림 안 붙는 영화는 처음이네요. 물론 광시곡 만큼은 아닙니다. 광시곡은 전위영화였으니까요.

하지만 언니들 지갑 자동개봉 국내 최고 초호화 캐스팅으로 떡하니 내놓은 영화가 광시곡을 떠올리게 하다니.

솔직히 김지운 감독님 요즘 조낸 쪽팔려 하고 계시죠?


영진공 철구

<님은 먼 곳에>: “수애에 의한, 수애를 위한, 수애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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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꽤 좋았습니다.

최근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희노애락을 고루 담은 영화였는데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더군요. (남은 쥐를 마저 잡자…까지 ㅎㅎ)

수애(순이)가 왜 그 곳까지 기어코 가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평이 많던데
순이의 동기는 적어도 <놈놈놈>에서 왜 걔네들이 그 지도 가지고 난리를 치는지 이해하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아마 제가 순이였다고 해도 그랬을 것 같으니까요.
순이는 남편에게도 시어머니에게도 심지어 친아버지에게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책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닌 일로 비난만 당했죠.
그렇지만 베트남에 가서 순이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주변 사람들로 부터의 인정, 도덕적인 정당성, 심지어 어느 정도의 권력까지…

쿠르트 레빈K.Lewin 이 이 상황을 봤어도 순이의 선택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평가했을겁니다. 순이에게 주어진 심리학적 장(field)에서 순이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냥 도망가는 길도 있지 않았느냐고요?
아마 그건 순이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왜 그 미군장교는? 글쎄요. 전 그게 일종의 자기 능력 실험처럼 보였습니다.
순이의 마지막 무대공연 때부터 계산하는게 보이거든요.
결국 그녀는 자기의 힘으로 거기까지 간겁니다.

덧붙여,
이준익 감독 영화가 계속 변화한다고는 하지만 제가 보기엔 늘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의 변치않는 테마는 “공연” 입니다. (이 “공연”은 허접한 코미디 영화에 늘 등장하는 노래방 공연과는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황산벌>에서 양측 병사들이 벌이는 욕 공연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엔 아예 대놓고 광대 주인공들만 내세우고 있죠.
그리고 이준익 감독은 이 공연을 묘사하는데 있어 꽤 능숙합니다.
덕분에 공연자들이 겪는 미묘한 순간들이 이 정도로 잘 묘사되는 영화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듭니다. 무대에서 느껴지는 공연자와 관객사이의 긴장감,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그게 다른 감정으로 변화되는지… 이 영화에서도 그런 묘사가 가끔 나오는데 꽤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수애 간지…d-_-b
<놈놈놈>의 정우성 간지만큼이나 확실합니다.

남자 배우들이 꼭 한번 해보고 싶었을 역할이 그 영화에서 정우성 역할인 것 처럼,
여자 배우라면 아마 이 역할 꼭 해보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남자배우라고 아무나 정우성처럼 총을 돌리지 못하듯,
수애가 없는 <님은 먼곳에>도 상상하기 힘들죠.


영진공 짱가

*추가1: 덧붙여 정우성 간지

* 추가2: 크레딧을 보니 엄태웅은 자그마치 “특별출연” 이더군요.
원래 그거, 출연료 안받(거나 최소한도만 받)고 나오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엄태웅의 비중이 특별출연 수준은 아니던데…
이준익, 참 무서운 감독입니다…-_-;;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보는 쾌감 뒤에 남는 미미한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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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가 훨씬 맘에 듭니다.
널따란 벌판에서 말 달리며 총질만 해대면 다 서부영화 혹은 웨스턴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차피 존 포드와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정통 서부극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건 미국도 아닌 이탈리아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가 만든 이른바 마카로니 웨스턴이 아니었던가. ‘정의로운’ 주인공들이 땅과 여자와 집과 마을을 지키는 정통 웨스턴에서 적은 소위 ‘미개하고 야만적인 인디언’이라 불리던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나 텍사스 저쪽에서 넘어온 뮬라토나 히스패닉, 혹은 더럽고 비열한 수를 쓰는 다른 백인 무법자들이었고, 이들은 우리의 정의로운 주인공들의 집과 땅과 여자와 가축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침략자였다. 이들의 정의는 백인의 정의였으며 이것은 ‘보안관 뱃지’로 보증되었고 이들이 정의를 관철하는 방식은 결국 ‘총’이었다. 그러나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대로 오면 정의로운 자와 무작정 악인의 구별이 그렇게까지 또렷해지지 않는다. 물론 정의로운 주인공도 악인도 나오지만, 여기에서의 정의는 백인의 정의라기보다는 보다 개인화된 정의에 가깝고, 이 공간을 실질적으로 하게 지배하는 것은 돈의 힘, 돈의 룰이다. 이 공간은 오히려 법이 법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가장 훌륭한 총질솜씨로 서열이 매겨지는 공간이며, 온갖 무법자들이 자신의 유명세를 각인시키고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다투는 무국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미국인), 무법천지의 공간이다. 주인공은 여전히 백인들이지만 이들의 혈통이 앵글로 색슨계인지 아일랜드계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인디언에게서 이미 뺏은 땅을 자기들끼리 누가 더 많이 갖는가를 두고 다투고,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가방 하나만 둘러맨 채 벌판을 떠돈다.


전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것이 마카로니 웨스턴이었기에 변종 웨스턴으로는 그토록 마카로니 웨스턴만이 언급되지만, 사실 전 세계적으로 저 서부영화의 틀을 변형한 각종 로컬화된 웨스턴들은 지역마다 나왔다. 한국에서도, 홍콩에서도 유명 감독들이 웨스턴을 만들었다. 이 중에는 신상옥도, 이만희도 포함돼 있다. 타란티노보다 훨씬 많은 홍콩 무협영화 및 (국적불문의) 아류들을 보고 자라며 영화의 자양분을 얻었을 류승완 감독이, 타란티노가 <킬빌>을 내놓고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후에야 용기를 내어 소위 퓨전/로컬화된 현대무협극 <짝패>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 혹은 그럼에도 홍콩 무협의 현대적 변용의 대표명사는 여전히 타란티노인 것. 그것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미국에서 미국인 배우와 유럽인 배우를 섞어 영화를 만들고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뒤에야 세계 각지에서 로컬화된 변종 웨스턴들이 쏟아져나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렇게 웨스턴이 다종다양한 방향으로 변형, 지역화된 역사가 이미 존재한다면, 그럼에도 웨스턴의 어떤 특징들이 보인다면, 그 영화를 웨스턴이 아니라 칭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더이상 웨스턴처럼 보이지 않음에도 그럼에도 웨스턴처럼 보이게 만드는 어떤 특징들, 그것을 뭘로 꼽을 것인가. 즉, 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을 한국식 웨스턴이라기보다 홍콩누아르의 변형에 웨스턴의 향을 슬쩍 덧입혔다고 무비스트에서 단평을 내린 바 있는데, 그럼에도 <놈놈놈>을 이런 식의 변종 웨스턴이 아니라고는 또 말을 못 하게 할 요소들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근대화된 법과 국가의 힘보다 물리력과 생존기술이 더 우위에 있는 공간, 특히 흙먼지가 날리는 너른 벌판에서 총을 무기로 치러지는 투쟁”이 아닌가 한다. 이런 공간에서는 당연히 국적도 출신도 중요하지 않으며, 법과 근대적 제도가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 하는 아나키 상태가 주를 이룬다. 성문화된 법보다는 소위 ‘선수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형성돼온 관습법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서부와 마찬가지로, 만주는 너무나 훌륭한 웨스턴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어딜 가나 산이 솟아있고 남쪽은 바다로,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혀있는 좁디좁은 남한땅에서는 불가능한 ‘벌판을 떠도는 유랑인’의 존재가 만주에서는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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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쾌감, 한국관객들에겐 드물게 맛보는 것. 아울러 정우성은 그림도 된다.


만약 <놈놈놈>이 이 공간의 특징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면, 나는 별다른 아쉬움 없이 <놈놈놈>을 현대식, 한국식으로 변용되고 로컬화된 변종 웨스턴으로서 아무 거리낌없이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온갖 패거리가 몰려들어와 맨앞에 가는 한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이고 죽이는, 다양한 집단이 얽히고 꼬이는 플롯이 ‘도입되다가 말고’, 그 와중에 모두가 각자 오해를 하고 이 오해를 향해 달려가며 벌어지는 코미디 플롯이 ‘도입되다가 말고’, 한다. 넣으려면 제대로 넣고 말려면 말던가,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하는 설정들 때문에 오히려 영화에 아쉬움만 잔뜩 커졌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까지의 꼬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예컨대 온갖 집단들이 윤태구(송강호)를 쫓아가는 벌판 육박씬을 보자. 사실 서부영화에서 그토록 폭탄들이 뻥뻥 터지고 그토록 스피디하게 질주하는 것도 좀 낯설긴 했지만 어쨌건 박력은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병춘(윤제문)이 속한 마적단과 박창이(이병헌)가 이끄는 마적단, 일본제국군, 만주국 군인,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까지 얽힌 이 추격전에서는 오로지 물량과 속도만이 강조된다. 과연 이 씬의 엄청난 속도감과 박력, 그리고 물량을 때려박으며 뻥뻥 터뜨려 만든 폭발력은 시각적, 청각적 쾌감이 상당한 편이다. 그렇게 대규모의 박력있는 말발굽 소리를 한국영화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 씬이야말로 그 ‘다양한 집단의 꼬임’이 폭발해야 하고, 각자 오해로 인한 동상이몽들이 맞부닥치며 벌어지는 코미디가 작렬해야 하는 씬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런 것들을 ‘하려다 말고’ 버려둔 뒤, 영화의 코미디는 그저 송강호의 개인기와 캐릭터 유머에만 의존하고 있다. 나아가 저 만주라는 공간이 그 국적불문 무법천지의 혼란스러운 아나키의 느낌을 살리고 있던가. 별로 그런 것같지는 않다. 사실 이것도 ‘하려다 만’ 느낌이 더 강하다. 그리고선 기어코 세 주인공의 총싸움씬을 집어넣는다. 결국 이 영화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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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웨스턴’을 드러내는 캐릭터는 이 캐릭터뿐이다.


아니, 이 정도라도 좋다. 사실 <놈놈놈>은 굳이 간지럼을 태워놓고 긁어주지는 않아 계속 미미하게 남는 아쉬움을 제외하면 그래도 썩 보는 쾌감이 있는 한국식 블록버스터다. 기럭지와 폼으로만 버티기엔 이제 나이를 먹어버린 정우성이 아무리 국어책을 읽는다고 해도, 적어도 그가 달리는 말에서 엉덩이를 뗀 채 양 다리로만 말 옆구리에 딱 붙인 채 몸을 지탱하며 라이플을 쏜달지, 가끔 힘에 부치는 티가 나기는 해도 한손으로 멋지게 라이플을 돌려가며 장전하고 밧줄을 타고 날아다니며 쏘는 장면도 그림이 어느 정도 나온다. 이병헌이 고풍스러운 양복으로 멋을 부리는 무법자라기보다는 역시 홍콩누아르의 조직 두목처럼 보이기는 해도, 한류팬들을 위한 팬서비스용으로 잘 단련된 전신 근육을 까서 보여준 건 한류팬이 아니라도 분명 효과가 있었다. 골목과 지붕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총격씬, 벌판 질주씬도 분명 쾌감이 있었고. 카메라가 가끔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 걸 빼면,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돈 들인 티’가 난다. 100억을 들이고도 ‘100억원짜리 저예산’ 운운의 소리를 듣고 있는 모 영화를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가 화면에 확실히 드러낸 돈발은 과연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 만주. 만주는 과연 저렇게 묘사돼도 좋은 것일까.


미국의 웨스턴들은, 그 영화가 불러낸 시기가 ‘서부개척사’라 불리는 데에서 드러나듯, 실질적으론 침략의 땅따먹기를 ‘개척’으로 표현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은둔고수가 숨어들기에 좋은, ‘너무나 넒기에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기도 하며, 모든 것을 잃고 정착의 의지마저 잃어버린, 그리하여 결코 제도화된 근대 국가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소위 ‘자유로운 영혼’들이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떠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가 만주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굳이 정통 웨스턴에서 안 가져와도 될 그 제국적 속성을 가져온 게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다. 물론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만주에 왔다는 태구의 말에서 익명과 유랑의 공간으로서 만주의 성격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벌판 질주씬에서 이 느낌은 다른 것에 완전히 압도된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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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누아르의 중간보스가 타임머신을 잘못 탄 듯한. 비주얼은 멋지다만.


윤태구의 지도를 뺏으려고 국경 근처에 진을 친 아편굴의 아편장사치(손병호)가 “만주와 간도는 원래 발해 땅” 운운하는 건, 영화 속 무수한 캐릭터 중 한 명의 대사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 영화가 그토록 벌판에서 ‘지축을 울리는 어마어마한 말발굽들의 질주’를 강조한 것에서, 조갑제 씨가 한사코 우리 본성이라며 강조하는 ‘만주벌판 말 달리는’ 기마민족의 꿈을 내가 떠올려 버린 것은 나의 과민함 때문만은 아니다. 기자시사회가 끝난 뒤 상영장에서 있었던 기자간담회장에서 김지운 감독이 분명 그런 식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 땅이었던 만주땅을 시원하게 내달리는 느낌. 김지운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였다고 한다. 170억의 어마어마한 제작비에 한국만이 아닌 일본과 동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대규모의 이런 블록버스터가 결국 꿈꾸고 있는 것은 제국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현재 지구상 그 어느 국가보다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가장 진취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밀어부치며 미국에게 오히려 한미FTA의 조속 비준을 요구하는 한국이 꿈꾸고 있는 ‘제국의 꿈’, ‘제국을 향한 욕망’과 닮아있지 않은가.


영진공 노바리


ps1. 사실 내가 남자배우였으면… 무조건 한다고 덤볐을 거다. 세상에 한국에서 말타고 총쏘며 폼잡을 수 있는 영화란 게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 이건 완전 남자의 로망 아닌가. (나같은 여자의 로망이기도 한데, 실은, 쩝.)

ps2. 고생은 정말 많이 했겠더라. 그러고보면 또 서부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열차’, 흔한 소재가 되는 ‘열차강도 씬’도 있다…

ps3. 사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에 대한 내 판단은 저 버디님 글과 정확히 똑같다. 표절도 오마쥬도 아닌데 어디서 많이 본 그림들로 온통 짜깁기 돼 있는 듯한 이 느낌은 참… 영화를 만들고 나면 크게는 아니어도 항상 표절 운운 얘기(그것도 항상 일본영화)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 아닐까. 100년이 넘은 현대 영화란 게 따지고 보면 다 어디서 본 장면들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영화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 얼마나 자기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느냐, 그리고 한 영화 내에서 어떻게 톤의 일관성을 유지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