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터법과 18세기 프랑스

18세기 도량형은 나라마다 달랐을 뿐 아니라 한 나라 내에서도 지방마다 서로 달랐다. 다양한 도량형은 소통과 교역을 방해하고 국가의 합리적 행정을 방해했으며 다른 나라의 학자들끼리 실험결과를 비교하는 것 또한 어렵게 했다. 당시 앙시앵 레짐 하의 프랑스에서도 약 800개의 이름으로 25만 개나 되는 도량 단위가 쓰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도량형을 통일하여 통화 개혁과 경제적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미터법을 제정하기로 하였다. 이 미터법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여 세상 모든 이들의 척도가 되는 도량형을 정하기 위해 영구적인 지구의 크기를 그 기준으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1792년 들랑브르와 메셍은 자오선의 거리를 측정하러 각각 남북으로 길을 떠나 7년간 됭케르트와 파리, 바르셀로나로 이어지는 자오선 호의 거리를 재고 이를 바탕으로 북극과 적도 사이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1미터로 정하였다. 많은 사건들 속에서 프랑스는 1840년 1월 1일 미터법 사용을 의무화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도량형의 다양성은 비합리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관행이기는 커녕 앙시앵 레짐(프랑스 구체제)의 경제를 지탱하는 뼈대였다. 많은 도량 단위들, 특히 물품 제작에 관계된 도량 단위들은 그 기원에 인간의 필요나 이해관계에서 유래한 인체 측정적 의미를 가졌다. 그렇다고 그 단위들이 신체의 크기, 이를테면 피트는 왕의 발 길이나 사람의 평균 발 길이를 직접 반영한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앙시앵 레짐의 도량 단위는 한 사람이 주어진 시간에 할 수 있는 노동량을 반영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어느 지역에서 석탄의 계량 단위로 쓰인 ‘샤르주’는 하루 생산량의 12분의 1을 의미했다. 이 인체 측정적 단위들은 실제로 땅에서 일을 하거나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과 일차적인 관련이 있는 단위들이다. 경작지는 흔히 ‘주르네’로 표시됐는데, 이는 농부가 하루 동안 쟁기로 갈아엎거나 수확할 수 있는 크기의 땅을 나타냈다. 따라서 작업장이 8주르네 포도밭을 수확하기 위해 농부 네 명을 고용한 경우, 일꾼들은 각자 이틀치 품삯보다 적게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의미에서 앙시앵 레짐의 인체 측정적 도량 단위들은 생산성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고 생산성 자체가 실은 평가될 수 있는 하나의 가치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은폐하는 구실을 했다.


이런 이유로 일부 18세기 지주들은 노동 단위보다는 기하학적 단위로 소유지를 측량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측량사를 고용했다. 지주들은 새로운 면적 단위로 생산성을 관리하고 이익을 챙기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생산성 향상을 판별할 수 있는 정보가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인체 측정적 단위들을 근대적 단위로 바꾸는 과정에서 앙시앵 레짐의 생산성을 규정하는 정보 자체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앙시앵 레짐의 단위들은 적절한 사회적 균형에 대한 공동체의 감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새 도량법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그런 사회적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위험한 일로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농부들은 측량사들을 싫어했다. 블랑브르와 메셍이 측량 여행 동안 그처럼 깊은 불신에 시달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들 역시 일종의 측량사였고 농민 경제의 활력소였던 인체 측정적 단위들을 새로운 단위로 대체하려는 자들이었다.

<참고 도서> 캔 애들러 저, 임재서 역/ 만물의 척도/ 사이언스 북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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