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공 64호]<랜드 앤 프리덤>

과거사진상규명위
2006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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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자유,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것.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와 책은 많지만, 켄 로치의 이 영화가 특별히 회자되는 건 그 복잡다단했던 정치적 지형, 그리하여
이제껏 은폐되거나 숨겨져왔던 스페인 내전의 ‘계급혁명적 본질’을 제대로 담아낸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막연하게 ‘프랑코의 쿠데타에 반대한 반 파시즘 전선’으로, 혹은 “키스할 때 코는 어디에 두어야 하나요?”로 대표되는,
낭만적(전쟁터만큼 낭만주의가 활짝 만개할 수 있는 공간이 또 있을까) 로맨스의 공간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일군의 좌파들이
바라보는 스페인 내전의 성격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다. 제2 공화국의 어수선하고 힘없는 공화국 인민정부가 시스템적 권력을 명목상
가진 반면 철도, 전화 등 공공부문을 장악하며 힘을 키워가던 노동조합이 실질적 권력을 가지며 인민정부와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고
또한 카탈로니아 분리주의 운동이 힘을 얻어가던 상황에서,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던 인민정부 대신,
반동세력을 막아내고 노동자, 농민의 혁명을 이뤄야 한다는 기치 하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어나 싸웠던 전쟁, 그리하여 혁명을 향해
한걸음 성큼 나아갔던 전쟁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다. 그렇기에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내전’이 아니라, 스페인 ‘혁명’으로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반-프랑코 전선에 섰던 사람들은 입장이 다양했으며, 이들을 대략 셋으로 분류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파시즘 전쟁과 혁명은 동시에 달성되어야 한다는 입장 : 통일노동자당(P.O.U.M, 품)과 전국노동자연맹(CNT,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둘째, 일단 반파시즘 전쟁에 승리하고서 혁명을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 : 통일사회당(P.S.U.C.)과 노동자총연합(UGT, 사회주의 계열 노동조합)
셋째, 반파시즘 전쟁에 승리하고 자본주의적 정부 구성 – 혁명 반대 : 우익 자유주의자, 공산당(일명 스탈린주의자)

혁명을 반대하는 세번째 입장에 공산당이 들어가 있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어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소련은 국제역학적
관계 때문에 결코 스페인의 혁명을 원하지 않았고, 스페인 공산당은 다른 나라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소련 공산당을 추종했으며,
스페인 혁명의 실패는 이 세번째 계열의 배신 탓으로 설명되곤 한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소련의 무기를 공급받은 세번째 계열이
권력을 장악해갔는데, 이 와중에 첫번째 계열은 숙청의 대상이었고, 두번째 계열은 포섭과 회유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통일노동자당은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라 낙인찍히며(스탈린 집권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한국의 7, 80년대 ‘빨갱이’란
말만큼이나 위력적이었다), 파시스트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불법단체로 선포되었고, 통일노동자당 소속 의용군들은 무장해제를 당하며
투옥되거나 암살당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랜드 앤 프리덤>이 취하고 있는 관점이기도 하고, <랜드 앤 프리덤>과 세트라 부를 수 있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가 취하고 있는 관점이기도 하다.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 데이빗 카(이안 하트 분)와 조지 오웰은 모두
통일노동자당 소속의 의용군에 속해 있었다. 영화의 말미, 제복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인민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이
와중에 블랑카가 죽는 장면은 바로 통일노동자당이 불법단체로 선언되고 이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시기, 1937년경이다.
<랜드 앤 프리덤>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혁명을 위해 싸우며 희망과 좌절과 상처를 동시에 안는 의용군들의
모습을, 외국인 참전병인 데이빗 카의 시점으로 다룬다. 어수룩한 기강과 후진 무기에 환멸을 느낀 데이빗 카는 도중에 당적을
공산당으로 바꾸고 인민군으로 적을 옮기지만, 바르셀로나 시가전(조지 오웰도 묘사하고 있다.)에서 CNT 동지들과 대치하면서 느낀
환멸 때문에 결국 공산당원증을 찢고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의 전선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위에서 길게 서술한 내용은,
<랜드 앤 프리덤>이 취하고 있는 시/공간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일 뿐,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영화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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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유품에서 나온 동지들의 사진

<랜드 앤 프리덤>은 역사 교육용 텍스트가 아닌 ‘영화'(feature – 극영화)인 것은, 주로 인물의 묘사를
통해 드러난다. 남녀 할 것없이 혁명에 대한 신념으로 총을 잡은 이들은 비록 기강은 엉망이고 허술한 무기로 무장했을지언정,
단순히 ‘죽고 죽이는 인간 사냥게임’이 아닌, ‘혁명’의 과정에 함께 하고 때로 지켜보면서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사랑과 상처와
눈물과 웃음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켄 로치의 영화를 보며 항상 감탄하는 것이 그가 인물을 그리는 방식인데,  글로 이렇게
서술해놓으면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것같지만 실제로 그의 영화 안에서 인물들은 제대로 발을 펴지도 못하고 참호 안에서 잠을 자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웃고, 농담하고, 사랑에 빠지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살아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묘사된다. 블랑카와
쿠간의 ‘연애행각’을 두고 동지들이 던지는 편견과 추측의 말이나, 그 블랑카를 두고 농담으로 데이빗 카를 놀려먹는 동지들,
쿠간의 죽음 앞에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마음을 다잡는 블랑카의 모습 등은, 혁명같은 거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인간적 보편성’으로 호소하는 힘이 있다. 이념에 홀려 기계가 돼버린 인간이 아니라, 신념이 있지만 때로 회의하고,
갈등하고, 절망하는 인간. 나약하고 불안하기에 더욱 강해질 수도 어리석어질 수도 있는 인간, 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상처와
눈물을, 켄 로치는 대단히 건조하면서도 호소력 넘치게 전달하는 힘을 갖고 있다.

켄 로치의 영화에서는 ‘토론’의 장면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내가 멋대로 한 계열로 묶어버린 <랜드 앤
프리덤>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는 공통적으로 극장에서 뉴스릴을 보는 장면과 살벌한 토론 장면이 길게 들어
있는데, 이 장면들은 두 영화 모두에서 인물의 심적 변화나 사건 전개에 있어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제공한다. 좌파적 이념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영화적 테크닉’으로는 낮은 점수를 줄 수도 있는 이 장면들을, 나는 켄 로치 영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장면 구성 방식으로 여긴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소위 ‘문학적 완성도’를 해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11장을 굳이 넣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11장이 오웰의 빛나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토론 장면은, 바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직접 행사하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준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이 장면은 사실 스페인 내전을
둘러싼 저 다양한 정치적 노선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모든 농토의 집산화를 이루는 입장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를 지지하는 입장의 대립은, 사실 위에서 서술한 두번째 입장과 세번째 입장이 그대로 대립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자, 토론과 논쟁을 통핸 민주주의적 의결방식의 작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미국 공산당 출신의 로렌스(톰 길로이 분)가 나중에 인민군 장교로 등장해 품의 동지들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하는 장면은 그러므로, 영화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장면이 된다.

한편 뉴스릴을 보는 장면은 내게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켄로치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여겨진다. 새로운 사건에 대한
정보를 굳이 책이나 신문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두컴컴한 극장의 뉴스릴을 통해 접하는 것. 켄 로치는 인터뷰 등에서 곧잘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말을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이 몰랐던 사실에 대해 알고 그
혁명의 기운을, 역사를 받으며 변화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할아버지의 유품을 통해 스페인 내전을 알게 된 데이빗의
손녀가 영화 마지막, 장례식에서 붉은 손수건의 흙을 무덤에 함께 부어주며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올리는 것처럼, 그리고
‘투쟁!’이라고 나지막히 속삭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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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퇴행은, 여자동지들의 손에서 총을 뺏던 그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비디오가 아닌 ‘필름’의 위력은, 그리고 뭔가를 조금 알고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영화의 시작, 그 붉은 손수건 안의 흙이 나오던 시점부터. 바르셀로나 시가전 장면, 거리를 하나 사이에 두고 저
전화국의 CNT 동지들과 대치하며 주고받는 총성과 외침, 어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오늘, 적이 되어 총을 겨누고 있게 된 그
기막힌 상황, 그리고 영화의 말미, 심지어 한 부대에서 싸웠지만 인민군 장교가 되어 부하들과 함께 이들에게 총을 겨눌 때, 그
분노와 절망과 상처의 외침과 눈물, 그리고… 블랑카가 죽는 슬로우 모션 장면. 가슴이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저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며 콸콸 눈물을 쏟아내는 수밖에.

하지만 극장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내 눈물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역사 한 켠에 스러져 가는 낭만적인 혁명의 기억에 대한
소비일까. 이미 오래 전 지나간 역사이기에 마음놓고 감상에 젖어들며 감정을 소비하는 사치의 행위일까. 비극으로 마무리 된 잘
짜인 플롯의 드라마 한 편에 대한 의례적인 반응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혁명의 기록을 담은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문화소비자인 자신에 대한 역겨움과, 죄책감 때문에 씁쓸했다. 혁명은 지금도 진행중이어야 하지 않나. 켄 로치가 원했던
건, 그리고 그때, 저 멀고먼 스페인 땅에서 죽어간 저 노동자 선배들이 원했던 건, 그저 한 편의 문화상품을 소비하며 감상에
젖는 건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본지 2주가 넘은 지금, 다시 이렇게 멍청하게 중얼거리고 있다 : 언제고
다시, 또다시 보고 싶다, 이 영화. 진정한 걸작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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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진상규명위 상임간사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영진공 64호]켄 로치

산업인력관리공단
2006년 12월 1일

이번에 켄 로치 특별전에서 본 영화들에 대해 감상문을 써보고자 시도하지만, 쉽지가 않다. 몇번을, 시도했다 지우다를 반복하다, 그냥 닥치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를 다시 읽고 있다. 통일노동자당(일명 P.O.U.M, 품)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스페인 내전이 서술되는 것은,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나 [카탈로니아 찬가]나 비슷하다. 심지어 오웰과 데이빗 카(이안 하트,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가 P.O.U.M의 의용군에 소속된 계기 – 우연히 열차 안에서 그쪽 사람과 만나 합류했기 때문에! –
도 비슷하기 때문에, <랜드 앤 프리덤>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느슨하게 각색한 것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아마 데이빗 카가 속해있던 정당도 독립노동자당이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이 독립노동자당원이었다.)

두 작품이 비슷한 것은 같은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인”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의용군에
입대하게 되는 과정, 전선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다들 비슷비슷했을 테니까. 언어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겪는 것과 함께, 스페인
내전이 정치적인 방향에서 진행된 양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도 비슷했을 테니까. 다만 조지 오웰은 데이빗 카처럼 공산당에 입당하고
국제여단으로 적을 옮겼다가 다시 의용군으로 돌아온 적은 없다. 오웰은 휴가 나왔다가, 데이빗 카는 부상 치료차 후방에 왔다가
‘엉겁결에’ 바르셀로나 시가전에 휘말리는데, 이때 둘은 서로 반대편이다. 오웰은 통일노동자당 계열 의용군으로서 당시
노동조합(정확히, CNT 계열)이 관리하고 있었던 전화국을 사수하는 입장이었지만 데이빗 카는 마침 공산당에 입당하여 제복을 입고
전화국을 접수하기 위해 공격하던 입장이었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데이빗 카가 CNT의 플랭카드가 달린 전화국
저쪽에서 영국인을 발견하고 그에게서 “대체 그쪽에서 뭘하고 있는 거요?”란 소리를 들을 때, 그 영국인이 조지 오웰일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상상하는 건 관객-독자가 취할 수 있는 즐거운 특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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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앤 프리덤>은 5, 6년 전, 처음으로 본 켄 로치 영화이기 때문에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 바로 뒤에
본 <레이닝 스톤>과 함께 이 영화는 내게 ‘켄 로치 영화’에 대한 일종의 ‘각인’으로 너무 강하게 남아있어서, 나는
켄 로치의 영화들을 내멋대로 <랜드 앤 프리덤> 계열과 <레이닝 스톤> 계열로 나누곤 한다.
사회/역사적인, 거시적 질서 안에 개인이 휘말려 들어가는 걸 다루면 <랜드 앤 프리덤> 계열, 개인 혹은 그의 가족이
겪어나가는 사건들을 찬찬히 미시적으로 다루면 <레이닝 스톤> 계열. 구분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라 당연히도 두 계열에
속하지 않는 영화가 더 많긴 하지만 하지만 이게 그래도 내게는 꽤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자 계열이라 할 수 있는 켄 로치의
최근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랜드 앤 프리덤>과 플롯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하층민들>, <내 이름은 조>는 전형적인 <레이닝 스톤> 계열. <달콤한 입맞춤>은
<레이닝 스톤> 계열로 넣을 수 있겠지만 살짝 변종으로 느껴진다. 역시 근작이라 그간 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롤랑 조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켄 로치 영화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점을 딱 집어 표현한 게 롤랑 조페다. “켄 로치
영화에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꼭 껴안아주고 싶다.” 나는 켄 로치 영화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픽션의 인물들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도저히, ‘만들어진 인물’이라 느껴지지 않는 그 생동하는 인간들, 생생한 인간들. 심지어 그 인물들이 ‘배우들’이라는
너무 당연한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선 어! 빌리 엘리엇네 아빠 아냐? 이러고 있다;;) 켄 로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시나리오가 개연성이 없다는 둥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는 둥 하는 소릴 들으면, 난 그들이야 말로 ‘이념을 갖기 싫다는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탈정치를 외치는 이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정치적이다.) 그 이념의 편견 때문에 켄
로치의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켄 로치 영화에서 혁명의 선전과 이데올로기적 공세만 본다면, 당신은 켄 로치 영화의
3/4을 그냥 망막 위로 흘려보내버린 것이다. 극히 일상적인, ‘영화의 사건’이 될 성 싶지 않은 사건들을 묘사하면서도 그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의 연결이 아닌 ‘플롯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짐 앨런, 폴 래버티의 시나리오와, 낭비 없이 간결하고 건조하게
바로 들어갔다 빠지는 배리 애크로이드의 카메라, 켄 로치와 함께 하는 게리 루이스, 로버트 칼라일 등 켄 로치 전문 배우 혹은
이전엔 연기란 걸 해본적이 없는 비전문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이 모두를 조율하며 구현해내는 연출 등, “켄 로치와 그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성과는 사실,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도큐멘터리 아닌 ‘극영화’로서의 기본기에 충실한 영화를 보여주곤 한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지고 있다는 소릴 듣고 있긴 하지만(그는 이미 70세의 ‘할아버지’감독이고, 아무래도 그의 최전성기는 90년대
초중반이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한편으로는, 한결 여유로워진 그의 후기 영화를 오히려 이전 영화보다 더 좋아하는 관객들도
분명 존재하리라.

켄 로치는 지금 또 신작을 찍고 있다. 변함없이 폴 래버티의 시나리오를, 이번에는 <9.11> 때 잠깐 같이 한
– 물론 <랜드 앤 프리덤>과 <히든 아젠다>에서 한참 밑엣 스탭으로 참여한 적이 있긴 하지만 – 나이젤
윌로비 촬영감독과 함께 한다. 프로듀서 짝꿍 레베카 오브라이언도 여전히다. 참 노인네가 정정도 하지. ㅎㅎ 그저 부디,
건강하시라. 그래서 그 식지 않는 열정으로 계속, 영화를 보여주시라.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