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포르노


머리에 뇌라는 것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는 남자라면 포르노가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노를 안 본 남자를 찾지 못해 연구를 접어야 했다는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 연구팀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도 여성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다.

포르노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은 슈퍼맨 영화를 보고서 스판바지를 입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짓과 같으며 우린 이런 부류를 일컬어 변태라고 일컫는데에 남녀모두 사회적 합의를 보고있다. 그래서 누구도 바바리맨이나 강간범, 성추행범을 향해 나의 꿈을 이뤄줘서 고마워라고 만세 삼창하지 않으며, 그 놈을 호되게 처벌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다.
  


나이 80을 먹어도 야동에 끌리는건 어쩔 수 없다지만 …
포르노는 포르노일 뿐 환타지에서 그쳐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의 격이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했다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를 깨고 바바리맨을 상상력의 총아로 덧칠하는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광화문 중앙분리대에서 펼쳐진 스노보드 경기를 놓고선 자신의 좁디좁았던 상상력을 한탄한다든지 하는 등의 일이다.

난 그런 거 상상도 못했다능, 그래서 내심 걱정했지만 해놓고 보니 내 졸렬했던 상상력이 부끄러웠다능,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편견을 버리자능 … 등등 …

아 … 정말 상상력은 안드로메다에 두고 국영수만 열심히 들고파야만 했던 주입식 교육의 병폐가 뼈져리게 느껴진다. 고작 그런 상상조차 못하고 살았다니. 지금도 애들 상상력을 홍어 거시기 마냥 만들어놓는 교육부는 정말 줄빠따 맞아야 쓰겠다.


광장의 의미가 무언가. 요즘 언제 광장이 ‘광장’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촛불시위 이후 광화문에 급조되어 광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중앙분리대가 실은 시민의 의사표현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광장도 아닌 곳에 스노보드 대회를 하든 스키 대회를 하든 물을 채워서 요트 경기를 하든 놀랄 일은 아니다. 저 곳은 그렇게 쓸려고 만든 거니까.
 
그런데 그 곳이 정말 광장이라면,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인시위조차 강제연행 하면서 카드회사의 마케팅에는 얼씨구나 통째로 내주는 건 상상력이 아니라 그냥 횡포일 뿐이다.

게다가 저 저렴한 상상력은 이미 아랍의 졸부들이 두바이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 사막 위의 스키장? 인공섬? … 그 막대한 에너지들은 그 졸부들 만의 것도 아닌데, 그들이 안 그래도 피곤한 지구를 쥐어짜서 한다는 짓이 고작 사막에서 스키를 타기 위함이라니 이건 재앙에 가깝다.

 

사막에선 낙타를 타고 스키는 스키장 가서 타라.

근데 그런 아랍 졸부를 보고 우리도 그 뒤를 따르잔다. 그러니  4대강에 콘크리트 부어서 유람선 띄우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머릿 속에서 끝내야 할 일과 현실로 끌고 나와도 될 일들을 구분을 못하고 있다.

포르노는 그냥 포르노에서 끝내야 하는데 현실로 가져와 재현을 하려고 하면 변태가 되듯 두바이에서 벌어지는 저 돈지랄이나 4대강 살리기나, 펌프로 물 끌어다가 수도물 쏟아붙는 ‘하천’ 을 만든 것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게 아니라 현실을 재앙으로 만드는 행위다. 이래선 남극대륙에 사파리를 건설하겠다는 놈이 나와도 하등 이상할게 없는 현실이 되어버릴 지경이다.

이대통령은 그의 변태스런 삽질 정책을 녹색성장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녹색 삽으로 삽질할 건지 녹색 시멘트를 바를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녹색성장’ 만큼이나 모순적인 제목이 붙은 ‘그린 포르노(Green Porno)’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이 단편영화는 여배우 출신인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각본, 감독, 출연한 영화다. 자연보호와 생태를 주제로 담고 있는 이 짧막한 영상들은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직접 곤충이나 생물들로 분장하여 교미장면을 코믹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짝짓기 행위는 정확한 고증을 통해 묘사하였다고 한다.

선댄스 영화제 측의 지원으로 모바일 동영상 플레이어 포맷으로 제작되었으며 링크를 따라가면 전편을 볼 수 있다. 재밌으니 한번 보시길.

이런게 포르노와 그린이라는 모순적인 단어를 접목시켜 만들어낸 ‘상상력’이란거다. 녹색 삽으로 삽질하는게 녹색 성장이 아니라.

각설하고, 상상력타령 따위의 설레발은 서울 시장이 광화문 광장에 제대로 된 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차량 통행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개선할 때나 경기도 의회에서 당론에 개의치않고 상큼한 모습으로 초등생 전원 무료급식을 통과시키거나 할 때에 쳐주시기 바란다.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대로 다 하는 걸 상상력이라든가 신념이라든가라는 말로 포장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의 모든 패륜이 용납되어지고, 모든 횡포와 배신에 대한 비판이 편견으로 인한 오해로 해석되고 말터이니.

영진공 self_fish 

“아바타”, 화려한 CG 속에 감춰진 빈약한 철학

하반기 영화계 최고의 화제작인 “아바타”가 개봉을 하였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12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라서 많은 영화 팬들이 기다려왔고 또한 시사회 등을 통한 사전 입소문이 워낙 호평인지라 잔뜩 기대를 하고 보았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크게 나무랄 데가 없어보이는 이 영화 … 사실 오락영화로는 꽤 괜찮다 할 수 있지만 … 과연 그리도 호들갑스러운 호평이 쏟아질만한 작품인지에 대해선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일단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화려하고 정교한 CG가 돋보이는 수준급 오락영화라고 해야겠다. 허나 이 영화에는 “걸작”이라든가 “혁명”으로 불리기에는 적절치않은 요소가 곳곳에 있다.


1. CG


3D로 구현되면 더 멋지다는 이 영화의 CG, 사실 2D로 보아도 이 영화 속 CG가 매우 멋지고 정교하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크게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엄지 두 개를 추켜세워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놈의 사실성이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물에서 CG가 사실성을 얻게되는 요인은 관객들이 그 CG를 자신의 경험이나 상상과 비교할 수 있는 어떤 레퍼런스가 있어서이다. 그 공간이나 배경이 제아무리 환상적이라해도 결국은 내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과 비교해도 납득이 가고 그럴듯할 때 우리는 ‘리얼’하다고 표현한다. 그에 비해 만화의 경우는 그런 리얼함이 없어도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건 만화니까 …


이 영화의 CG는 그 점에서 뭔가 좀 메롱스럽다.


공간적 배경은 ‘판도라’행성이고 시간적 배경은 2154년. 이건 어디에서 어떻게 레퍼런스를 끄집어 내야할지 난감해진다. 무엇과 비교하여 이 CG가 리얼하고 정교한지 판단을 해야 할까. 그냥 환상의 세계니까 받아들이라고 우기면 어쩔수 없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영화의 메시지와 은유가 현재 지구의 우리 현실과 매우 밀착되어 있으니 그저 판타지 만화라고 하기도 어색하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나비족이나 동, 식물은 “에일리언” 등의 영화에서 구현하는 완전 별종도 아닌 현재 지구의 인간 그리고 열대우림 속 생물들과 약간의 디테일만 다를뿐 거의 판박이들이다. 게다가 무기도 “매트릭스” 등에서 보아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전투장면도 기존의 영화들에서 본 것과 유사한 설정과 전개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감독의 어떤 상상력이 CG를 통해 “영상 혁명”적으로 새롭게 구현된 건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못난 의문점 하나.


영화에서 CG의 존재이유 또는 지향점이 뭘까. 너무나 리얼하여 도저히 실사와 구분할 수 없는 경지인가. 진짜와 똑같아지려고 한다면 뭐하러 그러지 … 그냥 진짜를 쓰면 될텐데. 그리고 거기에 가면 더 이상 실제 배우와 물리적 특수효과는 필요가 없게 되는 건가. 실제의 배우와 특수효과는 고비용 저효율이라 기술로 그걸 어찌해보려는 건가. CG는 영화에 있어서 보조수단이어야 할텐데 왜 우리는 자꾸 그것이 마치 영화의 메인인 것처럼 취급하는지 의문이 든다.


2. 메시지 또는 철학의 허술함


제임스 카메론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틀이 잡히고 무르익은 감독의 메시지 또는 철학을 보고자 하는 건 무리인 걸까. 그러나 그의 대표작 중 “에일리언” “어비스” ” “터미네이터” 등의 작품에는 단순히 상업성을 위해 마구 지어낸 얘기 이상의 메시지가 담겨져있고 이는 관객들에게 잘 전달이 되어 여전히 그 현재성이 건재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의 작가로서 또한 감독으로서의 온전한 의도였는지는 “트루 라이즈”나 “타이타닉”같은 스펙타클형 오락영화를 보게되면 판단하기가 조금 애매해진다.


어쨌든 그에게는 그때 그때 관객들이 보고자 하는 화면과 느끼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시하는 특출한 재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작품 대부분이 상업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메시지들이라는게 줄곧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거나 매우 즉흥적인 것으로 느껴져왔고 실제 작품 내에서도 어물어물 버무려지는 걸 볼 수 있다. 그렇다해도 그 나름의 그런 재능을 억지로 깎아내리려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감독 스스로 매우 풀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풀 수가 없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화면 하나하나가 화사한 색감을 자랑하며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인간의 탐욕과 자본의 폭력성을 다루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존재할 수 없는 이 주제에서 감독은 무협지식 악의 상징을 내세우고 모호한 선의 모습을 제시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하고 리얼한 CG를 구현하여 관객들에게 근사한 오락거리를 제공하고자 만든 영화에서 제임스 카메론은 왜 굳이 이런 주제를 담으려 한 것일까. 차라리 잔혹한 외계생물체에 맞서서 싸우는 지구방위대 아니 행성연합방위대의 활약을 담을 수도 있고 인류에게 소중한 자원이 가득한 어느 행성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훈훈한 이야기를 그려낼 수도 있었을텐데.


환상의 세계에서 굳이 현실의 지구를 연상시키려고 애쓰는 이런 모습이 혹시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이전 작품들에서 그저 어렴풋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선과 악의 문제, 또는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 등이 12년 간의 세월 속에서 현실의 문제로 구체화되어서 나온 결과는 아닐까. 그래서 그는 2145년의 판도라를 현실 지구의 아바타로 형상화하려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인류의 역사와 지구촌의 현실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과 사유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많은 영화와 도큐멘터리가 인간의 탐욕과 자본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했고, 많은 관객들도 이에 대해 공감하고 분노하고 고뇌하다가 마땅한 답이 없음에 안타까이 답답해했던 문제를 이런 오락영화에서 다시 들고 나와서는 어설픈 결말로 허탈하게 마무리 짓는 건 참으로 무책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에  이 영화를 그럴듯하고 뭔가 있어보이게 하기 위해
이런 주제를 양념 삼아 뿌려놓은 거라면 매우 실망스러울 터이다.


3. 그리고 이런 저런 것들 …


* 판도라의 상자는 다 아시다시피 한 번 열면 안에 있는 내용물이 다 튀어나오고 다시는 이를 주워 담을 수 없다. 행성 판도라의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맨 아래 하수인을 물리치고 나머지 병력을 몰아낸다고 해서 과연 지구의 권력자들이 행성 판도라를 포기할까?

그럴리가 없다. 그들은 둘 중의 하나 또는 둘 다의 방식을 택하여 다시 올 것이다. 더 강력한 병력을 보내든가 아니면 평화사절단을 보내서 유화책을 쓰든가. 그리되면 나비족은 갈등하고 대립하게 될 것이다. 현실론을 주장하는 이들과 투쟁을 주장하는 이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이들로 나뉘어서 말이다. 이건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보고 또 보고 또 보아온 과정이다.

그러다가 나비족은 소위 문명의 발달이라는 포장 안에서 지구인들처럼 탐욕의 존재로 변해 가거나 아니면 지구 고대 문명의 부족들처럼 멸망하든가 할 테고 말이다.


** “Unobtainium”, 즉 불가득물질이라는 말이다. 상용의 과학용어도 아니고 지구상에는 없는 상상의 물질을 비유하는 의미로 “터미네이터”에서 비슷한 용어가 나오기도 한다. 애써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자면 ‘울트라 짱 캡쑝 물질’정도 되겠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 명칭의 물질 때문에 지구에서 판도라를 침탈하고 나비족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되는데, 적어도 이런 중요 물질에 대해서는 그나마 물질의 용도에 대한 설명이나 의미있는 명칭이라도 붙여주는게 최소한의 성의는 아닐까.

*** “Karma(카르마)”라는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행위”를 의미하고 우리에게는 “업(業)”이라는 단어가 있다. 은근히 미국 쪽에 이런 걸 다루는 극이 많은데 “내 이름은 얼”이라는 TV 시리즈의 주제가 바로 이 카르마이다. 업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사람은 그 의도가 어떻든 나쁜 짓을 많이 하게 마련인데, 어떤 형태로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다시 태어날 정도의 속죄가 있어야 죄가 갚아지고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도 어느 정도 카르마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의도가 좋든 나쁘든 판도라의 침탈에 관여한 중요인물들은 그 죄값을 치르게 하고 다시 태어나는 제이크는 새로운 삶으로 전이하여 승화시키니 말이다.

영진공 이규훈

기예르모 델토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산업인력관리공단>, <영진공 66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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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un's Labyrinth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해 새삼 생각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화려한 비주얼에 취해
한동안 잊고 있었다. 판타지는 현실의 고통, 세계와 세계의 충돌과 그로 인한 파괴와 재생의 순환, 그 과정에서 유혹받는 인간의
나약함과 악과 타락을, 그리고 시험에서의 승리를 은유적으로 다룬다. 판타지는 당연히 잔혹하고 격렬할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판타지에서는 그러므로, ‘전쟁’이 빠질 수 없다. 판타지는 원래 현실에서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견디게 해주는 힘을
선사해주는 존재이다. 때로 그래서 판타지는 현실도피적이라는 비난을 받곤 하지만, 만약 그마저도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판타지가 현실도피적인 게 아니라, 현실에서 ‘너무 쉽게’ 도피하는 사람들이 판타지를 남용하는 게 문제인 게
아닐까. 판타지의 본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퇴행적 핑계로 후퇴하지 않는, 간만에 훌륭한 판타지 영화를 봤다. 하지만 난 확실히
어른인가보다. 오필리아가 요정나라의 공주로 갔으니 기뻐해야 마땅할텐데, 영화 본지 하루가 지난 지금도 가슴이 이토록 아프며
슬픔의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영화의 배경인 1944년의 스페인은, 스페인 혁명이 패배하고 혁명은커녕 (부르주아적이라며 혁명세력에게 비판받았던) 공화국
정부도 지키지 못한 채 프랑코의 독재정권에 권력을 내주었던 때다. <랜드 앤 프리덤>과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혁명의
공기를 숨쉬며 자신의 존엄성을 걸고 일어났던 사람들은 이제 정부의 군대에게 쫓기며 산 속에서 생활하는 게릴라(빨치산!)가 되어
있다. 오필리아의 모험은, 만삭의 어머니와 함께 새아빠인 (프랑코 군대의) 비달 중위가 주둔해있는 기지로 이사오면서 시작한다.
어른들의 절망과 슬픔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느껴지기 마련이고, 게다가 이 아이는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새아빠는 냉정하고 무서우며 엄마는 몸져누워서는 오필리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고통을
이해해 달라고 요구한다. 외로운 아이는 부대의 안살림을 도맡아하는 메르세데스에게서 아파 누운 어머니가 줄 수 없는 또다른 모정을
느끼지만 메르세데스와 온전히 교감할 수는 없다. 그 와중에 요정의 초대를 받고 나무요정 판을 만나며, 자신의 원래 신분 –
요정나라의 공주 모아나 – 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너무 오래 살았기에, 요정나라로 돌아가려면 세 가지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M_ more.. | less.. |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스페인 내전 직후라는 정치적 현실에서 근거한, 게릴라의 활동과 비달 부대의 토벌 작전.
비달의 부대에서 일하는 메르세데스와 부대에 출입하며 부상자와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돌보는 의사 역시 실은 게릴라들을 돕고 있다.
또 한 축은, 이 살풍경한 환경에서 도저히 적응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며, 그리하여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오필리아의 내밀한 여행. 메르세데스나 오필리아는 각자 비밀을 가지고 있고 서로에게 호감과 애정을 느끼지만 그 비밀을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다. 오필리아에겐 게릴라니 전쟁이니 하는 게 도저히 이해 안 갈 어른들의 고통이며, 메르세데스에겐 요정과 판의
이야기란 아이들에게나 존재하는 동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각자의 비밀의 흔적(메르세데스의 조심스러운 행동,
오필리아가 그려놓은 마법의 문)을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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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원래 정체는 요정나라의 공주 모아나. 혹은 혁명의 노동자.

나는 이 영화가 혁명 실패의 슬픔과 고통을 은유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이 사라지고 모두가 서로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며 새로운 희망을
품었던, 실제로 혁명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스스로 파시스트에 맞써 싸우고 있었던 당시 스페인 국민들에게 혁명의 실패가 주었던
암울한 고통과 슬픔은, 자신의 힘으론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워 할 수밖에 없는 오필리아의 절망적인 상태와 연결된다.
게릴라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 즉 메르세데스와 의사선생, 그리고 토벌작전 중 잡혀온 말더듬이(‘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고문에 의해 동지를 팔아넘길 말만을 강요당하는 민중, 그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매우 상징적인 캐릭터) 등의 이야기를 꽤
자세하게 전개시키고 있으며, 스페인 내전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에겐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이
이전에 연출했던 영화 <악마의 등뼈> 역시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군(이자 게릴라) 부모를 둔 아이들의 이야기였음을
기억한다면, 이 영화가 오필리아의 암담한 현실을 그리기 위해 스페인 내전을 그저 끌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확연해진다.
오필리아의 죽음은 곧 혁명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현실에서의 오필리아는 죽었다 해도 사실은 훌륭하게 미션을
마치고 – 그것도 가장 어려운 미션을 자신의 희생으로서 지혜롭게 통과하고 – 요정나라의 공주로 돌아간다. 그녀는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오필리아의 주검은 안고 눈물을 흘리는 메르세데스는 오필리아가 남긴 웃음의 의미를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이가 더 들면
알게 될 것이다. 현실에서 표면적으로 혁명은 실패했지만, 혁명은 결코 끝나지도 실패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이들은
어른들의 선생님이란 말은 과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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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관문의 수문장. 영웅신화와 판타지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특징을 골고루 가진.

어린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 공주 따위 안 돼도 좋고, 그래서 ‘뭐든 무조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는 (노예의) 맹세를
깨고 아가를 지키겠다는 자신의 주관을 실천하고서는 비록 뭣같은 새아빠에게 총을 맞는다 해도, 바로 그 순간이 요정나라의 공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이었음이 드러날 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토록 자신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대위일지라도 그의 아가는 소중하게 품어안고, 그 부대에 있는 어린 소녀를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메르세데스의 선택과 행동은 정확히
오필리아의 선택 및 행동과 겹친다. 혁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무리 친부인들 독재자의 하수였던 그의 이름조차 아이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는 것, 애초에 누구의 핏줄이건 혁명의, 자유의 가치를 주고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 지금 흘린 피는 비록
외견상으로 헛된 죽음에 불과해 보일지라도, 바로 그것이야말로 요정나라의 공주로 돌아갈 수 있는 어려운 관문. 혁명은 언제나
‘내일’을 꿈꾸고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아가는 길이다.

메르세데스 언니 만만세. 혁명의 주체는 역시 여성. 허릿춤에 감춰둔 감자깎는 칼의 위대함. 그럼에도 역시나 영화의 맨 첫
장면(이자 끝부분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메르세데스의 눈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 어른이라서, 더없이
완성된 성인 어른이라서, 저미는 슬픔을 그저 조용한 흐느낌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던 메르세데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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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