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티지>, “우리가 마술을 보면서 바라는 게 뭘까?” <영진공 71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007년 4월 1일

원래 한참 게으름을 피우면서 나중에 쓰려고 마음먹었지만 일루셔니스트를 보고 맘이 바뀌었어. 쌍벽을 이룰 정도로 나에겐 좋은
영화라 그걸 보고 나면 이 영화만 집중해서 뭔가 글남기기가 힘들거 같았거든. 내가 원래 게을러서 보통 여기에 글 남길때는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해서 쓰는건데, 이건 말로 때워서 뭐 안써도 될뻔한 스토리야. 그런데 일단써놓으니깐 나중에 기억하기
편하더라고. 디씨질만 하면 뭐하겠어?^^;; 가끔 생산적인 일도 해야지. 예전에 날아라 횽이 보고 싶다고 해서 약속한 다음에
맘에 좀 걸렸는데 후련하네.

스포가 다수 있으니 안본횽들은 바로 백스페이스

1. 프레스티지의 배경

우리가 마술을 보면서 바라는 게 뭘까?

꿈? 믿을 수 없는 환상? 아니면 공포?

마술사가 무엇을 보여주던 간에  무엇이든 간에 사람들이 마술을 보면서 궁극적으로 기대하고 만족하는 것은 상황에 대한 완벽한
통제야. 아무리 위험하고 종잡을 수 없어도 마술사가 그러한 상황을 통제함으로서 모두가 안전하다는 환상. 사실 마술을 즐기는
관객들은 그런걸 기대하고 마술을 보는 거야. 상상해봐. 마술사가 시작은 했지만 전혀 통제를 할 수가 없어서 점점 종잡을 수
없어져가는 그런 상황을. 몸서리가 쳐지지?

그런 점에서 근대의 마술은 이전의 마술과는 달라. 물론 아도르노 같은 학자가 말한것 처럼 선사시대의 주술사도 환경을 통제하고
이용하려는 욕망에서 생긴 거라지만 그래도 그 주술이나 마술실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존재였거든. 이를테면 토템이나
신 같은 거 말이지.

결국 자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마술은 근대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정교한 알레고리가 되는 거야. 우리가 세상을, 시간과 공간,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여기서 근대가 시작이 되는 거지. 데카르트가 세상을 좌표의 격자로 나누고 모든 존재를 하나의 연장(tool 말고 延長)으로서
취급하면서 시작된 세계관 말야. 세계를 구획짓고 그 구획과 분석을 통해 개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세계관 말이지.

그래서 그 당시의 마술은 과학의 은유였고, 마술사들은 과학자의 속화된 이미지였어. 사람들이 마술을 즐기러 가는 것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 간 거지. 마술을 보고 그 마술 속의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고.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빅토리아조 영국)는 사람들은 세상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믿었거든. 이를테면 마술사는 루팡과 같은 도둑이었고, 그 비밀을 푸는 관객은 탐정 같은
거지. (그때 유독 탐정소설이 발달하고 탐독되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지. 지금 CIS 같은 드라마의 기원은 사실 그러한 근대적
세계관에서 온거야. X파일같은 드라마는 그 반대의 세계관에서 연원한 거고. 약간 옆길로 세자면, 근대라는 세계의 매력이 좀 덜
해지니깐 탐정소설의 주인공들도 명민하고 이성적인 탐정에서 액션히어로 같은 타입으로 변화했지.)

프레스티지의 배경은 바로 이렇게 근대가 열리고 모두가 과학과 마술에 열광하던 때였어.

2. 미친 과학자 혹은 사기꾼.

그런데 사실 과학이라는 게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게 아냐.
과학의 단맛을 보던 과학자들은 점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고, 자신이 상황을,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에
휩싸이게 되지. 그 근저에는 어느정도 개인적인 컴플랙스도 작용하고 말야. 마징가제트의 헬박사, 백투더퓨처의 뭐시가더라..하여튼
그 박사, 에반겔리온의 주인공 아버지, 슈퍼맨의 렉스 루터까지, 수많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러한 미친 과학자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어. 그래서 그 과학자들은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망상에 빠지게 되지. 라이벌간의 경쟁도 심해져. 일단 대중들에게 갈채를 받게 되면
동종집단에서도 인정을 받고 싶어 하거든. 그래야 진정으로 자신의 힘을 느낄 수 있으니까. 보든과 엔지어가 빠진 상황도 이런
거였어. 이중매듭 묶기 말이지.

근대성의 사고방식은 세상을 모델화해서 몇 가지 변수들을 뽑은 다음 그 변수들을 통제하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인데,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 현대에 와서는 카오스-프랙탈이니, 양자역학이니 하는 과학적 성과 때문에 이러한 근대적
사고가 환상이었다는 걸 알게 된지 오래지만 아직도 대중들은 근대성의 환상에 묶여있어. 그때는 과학자들도 그랬지. 뉴튼이 세상의
신비를 모두 밝혔고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그러한 연구들을 세상에 적용해서 정교화 시키는 일뿐만 남았다고 생각했지. 이미 미래의
로드맵이 머릿속에 있었던 거야.

하지만 현실은 이론이 아니지. 현실은 실제로 이론이 간과한 “불안요소”들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그런 곳 이야. 능남 감독이 북산에게 진 것도 그런 이유 아니겠어? ㄲㄲ

그래서 사실 과학계에서는 미리 실험결과를 조작하거나 왜곡해놓고 미리 정한 결론에 끼워 맞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그런 쪽 공부를 아는 횽아들이 있다면 절감할꺼야.

결국 보든이 엔지어의 애인에게 이중매듭 도전을 종용했다가 실패한 것은 예정된 일이었어.

엔지어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엔지어는 애인을 잃은 후, 보든의 순간이동 마술에 자극받아, 비슷한 마술을 계획하지. 자신과 닮은
배우를 끌여들여서 순간이동마술을 선보여. 그러나 그 배우는 오히려 통제권을 가진 엔지어를 조종하면서 상황을 파국으로 만들어가.
과학자가 그 성과에 대해 전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거.

엔지어는 나중에 테슬라기계를 이용한 마술에서도 아예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로 스텝을 구성해서 전권을 통제하려고 해. 자기
자신만이 모든 사실을 통제하는 그러한 세상이지. 실제 역사에서도 많이 봤지? 이를테면 핵폭탄 같은 거 말야. 슈퍼맨의 렉스
루터나, 헐크의 주인공 아버지 과학자. 다 비슷한 은유라고 할 수 있지.

또 나중에 엔지어가 테슬라를 찾아가서 순간이동기계를 부탁하는 에피소드가 나오지? 테슬라는 사실 그 기계에 대한 통제력이나 지식이
전혀 없었어. 테슬라는 단순히 영감과 자신의 계산에 의해서 기계를 만들고 기계의 성능을 예측했지만 그가 만든 기계는 이미 원래의
계획과는 안드로메다만큼 떨어져 있었던 거지.

게다가 과학자들은 인정욕구 때문에 자기 자신도 통제 못해. 환호를 대신 받는 가짜 대신 지하에 숨어서 밖에서 들리는 환호에
취하는 엔지어. 이건 자신과 자신의 성과물을 구별하지 못하고 냉철함을 잃어버리는 과학자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황우석 생각이 많이 날까? 엔저어를 돕는 커터가 엔지어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단호하게 마술을 그만둘 것을 종용하지만
엔지어는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해. 자신의 성과물에 의해 조종받는 노예가 되어있기 때문이지. 이게 근대의 아이러니야. 자신이
주인인줄 안 노예의 이야기지.  

근대성의 한계를 무시하면서 근대성이 담보한 통제력을 확인하려는 의지. 그게 사실 근대 과학의 필연적인 한계야. 미친 과학자는 그러한 한게에 도전하면서 자신을 파국으로 이끌어가는 인간조건의 상징이고 말야.    

3. 피 묻은 손-최초의 자본 만들기.

보든이 커터의 마술단에서 쫓겨나서 견습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하는 마술이 새장 사라지게 하기야. 새가 들어있는 새장을 손으로
내려쳐서 사라지게 한 다음, 옷소매에서 새가 나타나게 하는 마술 말야. 그런데 이건 그냥 그 마술에 속는 관객들이 이해하는
스토리고 진실은 무시무시해. 손으로 새장을 내려치는 순간 새장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접히면서 안에 있는 새는 짜부라져서 죽는
거지. 마음의 눈을 잃지 않은 사라의 조카는 단박에 그 비밀을 알아채. 그러나 우리 같은 관객들은 뭐 그냥 당하는 거 아니겠어?

사실 과학자들이 업적을 만들어가거나 지금은 그야말로 근대의 주역이 되어버린 재벌들의 성공담 뒤에는 그러한 더러운 역사가
숨어있지. 근대의 주역들은 모두가 근면하고 자신의 재능을 살리면 성공한다는 신화를 만들어내지만 사정은 전혀 달라. 뉴튼의
라이프니쯔 업적의 강탈, 에디슨의 전기의자, 황우석의 줄기세포,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 등등. 실제 성공스토리는 그야말로
역겹고 더럽지. 스콜세지의 대부시리즈나, 갱스터 오브 뉴욕, 올해 개봉한 드림걸즈도 어느 정도 그런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예를 들면 에디슨과 극중에서도 등장하는 니컬러스 테슬라는 당시 유명한 라이벌 관계였어. 에디슨이 쇼맨쉽에 능한 황우석(물론
에디슨은 진짜였지)타입의 과학자였다면 테슬라는 이민자출신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부족한 고독한 천재타입이었어. 예를 하나
들어볼게. 에디슨이 전기의자를 발명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지? 왜 그랬는지 알아?  테슬라는 당시 교류전원을 이용하는
송전방식을 주장하고 에디슨은 직류전송박식을 주장했는데, 사실 교류전송방식이 당시 기술로서는 훨씬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기술이었지.
하지만 에디슨은 라이벌이 인정받고 성공하는 걸 원치 않았어. 그래서 교류가 얼마나 위험한지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서 교류를
이용하는 전기의자를 만든 거. 결국 그 전기의자는 네거티브선전의 산물이었던거지. 아무도 에디슨 위인전에 이런 이야기들을 써넣진
않지만 말야.

이러한 과학자들의 더러운 경쟁은 보든과 엔지어의 경쟁에도 그대로 투사되고 있어. 사실 보든은 천재 테슬라에 가깝고, 엔지어는
포장에 능한 에디슨에 가까운 사람이었지. 그들은 익명으로 상대의 마술쇼에 잠입해서 쇼를 망치는 방식으로 서로를 끊임없이
방해하지. 아예 엔지어는 보든의 마술을 그대로 포장만 새롭게 해서 자기 것으로 탈취하고 말야. 이러한 모든 풍경이 근대라는
합리성의 환상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만화경이었어.

4. 현실-흐려지는 경계

그렇다면 실제 현실은 어떨까. 명료하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놀라우면서도 안전하고 예측가능한 근대쇼의 커튼 뒤에서는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사실은 더럽고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 걸까?

위에서 말했던것처럼, 모더니티의 세계관은 환상이었어. 세상은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않고,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통제가능하지도 않아.

근대의 시발점이 되는 자기정체성부터가 그래. 사실 자신을 인식하고 남과 구별하면서 통제할 수 있는 자아정체성은 근대의 핵심중의
핵심이야. 사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이 사람들의 분노를 산 것은 이러한 근대인의 의식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야. 자기
안에 자기가 모르는 영혼의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거 말이지. 이러한 근대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은 사실 근대이전, 정확하게 말해
서구의 근대 밖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성이야. 그들에게 있어서 오리엔트나 극동은 근대성의 빛이 미치지 목한, 탐험하고
개발되어야할 처녀림이나 같아. 보든과 엔지어가 새로운 마술에 대해서 고민하자 커터는 중국인 마술을 구경하고 오라고 하지. 거기서
그들이 발견했던 것은 두 개의 인생을 모순 없이 살아가는 중국인의 모습이었어.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역할 을 할 수 없다는 근대적 의식을 가지고 보든과 엔지어의 순간이동 마술을 즐겼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 중국인 마술사의 몸에 깃든 두 개의 삶, 보든과 조수가 사는 하나의 삶, 끊임없이 복제되는 엔지어.
과학자 테슬라와 쇼비지니스트인 그이 조수의 쌍생성(나는 이 부분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연상됐어. 점성술이라는 막내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천문학에 대해서 말한 그 코페르니쿠스말야)이것이 사실 근대라는 환상 속에 숨겨져 있던 세계의 참모습이고,
실제로 포스트모던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주목했어. 영화이론에 빠질 수 없는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에 관한 논의나,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들, 양자역학, 비선형이론 물리학자들. 아직도 현대인의 의식구조는 거의 근대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사실 일부
서구인들이나 산업사회를 제외하고는 근대에 도달도 못했지만 최소한 지식인사회는 근대가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지 80년은 넘었지.
바야흐로 현대가 도래한 거야. 사실 1914년의 그끔찍한 비극이후에 이미 근대에 대한 회의는 시작됐거든. 문학이 이러한 주제를
다룬것도 크게 보면 100년쯤은 됐고, 본격적으로 쏟아져나온것도 50년은 됐어. 영화는 그보다 조금 느렸고 요즘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하는 대중영화들도 끊임없이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지. 수면의 과학, 바벨, 일루셔니스트.올해만 해도 상당히 많네.

이 영화는 결국 근대라는 환상적인 마술쇼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꺼야. 물론 이 텍스트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해내느냐 하는 것은 당연히 감상자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5. 결말.

영화는 엔지어가 사실은 끊임없는 복제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죽고, 보든은 형제 중 한명이 죽고 한명이 살아나가면서 끝나. 글쎄?
이게 그냥 반전일까? 아니면 나름대로의 헤피엔딩일까. 뭐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봤어. 결국 자신의 일부를 억지로
죽이면서 결국 파멸에 이르게될 운명을 가진 근대성 자체 말야. 늦든 빠르든 말이지. 헐리우드의 관습은 절대로 노골적인 비극을
허용하지 않아. 나름대로 그 관습을 어떻게 비트느냐 하는것이 일종의 기예자랑이 되어버렸지^^

여기까지 읽어분 횽아들한테는 언제나처럼 땡큐.

사족: 테슬라로 분했던 데이빗 보위의 연기가 압권이었어. 능글맞게 슬라브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보위란 참…^^

사족2:언젠가 한번 한 이야기지만 일루셔니스트는 비슷한 시기의 비슷한 소재를 다룽 녕화지만 주된 주제는 상당히 달라,
프레스티지가 조금 더 내 취향에 맞는 영화였지만 일루셔니스트의 소품들이나 상징들은 보는 내내 즐거움을 주는 영화였어. 주제의식도
조금 더 소박하지만 더 전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고 말야. 내일 천년을 흐르는 사랑하고 같이 한번 더 보기로 했는데 보고 나서
며칠내로 리뷰 올려볼게.  

사족3: 영화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지만 더욱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소설을 읽고 싶으면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을 읽어봐.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다룬 쿤데라의 “정체성”도 좋은 선택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특수 2팀
Rockid(rockid@gmail.com)

[영진공 64호]<프레스티지> – 코디가 안티???

상벌위원회
2006년 12월 4일

1.

[유주얼 서스펙트]의 관람을 기다리며 줄을 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절름발이가 범인이다아~!!!”를 외치던 그 녀석으로부터.

[식스 센스]포스터에 박힌 브루스 윌리스의 넓다란 마빡마다
“이 새끼 유령”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넣고 다니던 그 녀석을 지나

각종 포털사이트의 댓글란마다 돌아다니며 “[쏘우3]의 범인은 누구누구다.” 식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테러를 감행하는 수많은 또라이들까지

도대체 3박4일을 고민해봐도”심심하니까”혹은 “욕 먹고 싶어서” 외에는
그 이유를 도-오저히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스포일러들이
강원도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처럼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판이니.
누구나 한번은 이들의 제물이 되어 영화관람을 망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하고야 말았던 가장 극악무도한 스포일러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반전이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그런 종류의 영화가 아니라
생뚱맞게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몽땅 외우고 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의 [21그램]을 관람하러 들어간 극장에서, 표를 받던 아가씨에 의해서 행해졌다.
미소띈 한마디(유독 다른 관객들 다 내비두고, 나한테만… 왜 그랬지? 미쳤나?)로 말이다.

“마지막에 반전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서 알아맞춰 보세요.”

….
반전? 어라? 21그램에 무슨 반전이 있지? 그닥 뒤집어지는 반전이 있을만한 내용이 아닌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단 말인가?
극장에서 일하는 아가씨니까, 뭔가 알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거겠지….? 오호라, 그렇다면 역시 뭔가 있는 것인가?


국 혼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이냐리투 감독의 전작 [아모레스 페로스]의 이야기 비비꼬아 전개시키기 신공을 생각해 낸
후, 21그램 역시 뭔가 기똥차고 획기발랄한 반전을 깊숙히 짱박은 영화일 것이라고 당연하게 결론내고 말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노무 반전에만 신경을 집중시킨 채
오로지 “끝이 어떻게 날 것인가”에만 골몰하고 대굴빡을 서른여섯방향으로 굴려 대는 통에
영화 자체에는 단 한순간도 집중하지 못하고

감상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는건데, 아마 그녀는 숀 펜이 죽는것을 황당스럽게도 반전이라고 표현했던 모양이다….이, 이런 썅…)

아무리 똥꼬가 탈장을 하고 콧구멍이 뒤집어져 콧털들이 죄다 발딱 일어서는 어마어마한 반전을 인디아나 존스도 찾지 못할만큼 조낸 깊숙히 짱박은 영화라고 해도,
“반전이 있다.”라는 사실을 인지해 버리는 순간 이미 영화가 주는 재미의 절반은 뚝 떼어 덜어버리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무릇 뒤통수를 화끈하게 후려갈기는 반전의 맛이라는 것은, 아예 그것의 존재 유무조차 모르고 있을 때 당해야 제대로 당하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던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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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아니고 휴 잭맨도 아니고 크리스챤 베일도 아닌
“기똥찬 반전”이란 타이들로 당 영화[프레스티지]를 광고하는 것은 그야말로

코디가 안티적인 행위

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음이다.
왜 이렇게 관객들로 하여금 최대한 재미없게 영화를 보게 해야겠냔 말이다. 응?

그놈의 반전히 뭔지 한번 알아맞혀 보시겠다고, 그래서 남들 다 놀라 자빠질때 혼자 팔짱끼고 껄껄대며 “내가 진작에 다 알아봤거등.”등등의 대사 한번 날려보겠다고
눈을 헤드라이트를 튜닝하고 덤비시지만 않는다면.
[프레스티지]는 충분히 볼만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변칙이 아닌, 명확하고 클래식한 서사구조로도 멀쩡히 영화 잘 만들수 있음을
[인썸니아]에서 입증한 바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번엔 보든(크리스챤 베일)과 엔지어(휴 잭맨)두 주인공의 관점을 시간차로 나누어 세개의 시점으로 영화를 전개시킨다.(써놓고 나니 뭔 말을 한건지 모르겠다.)


점과 시점 사이마다 관객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킬만한 의문점들을 하나씩 남겨 놓은 후에 – 보든의 비밀, 엔지어의 비밀, 두
주인공간 대결의 결말 등등 – 후반부에 이것을 한방에 몰아 확 까발리는 전법을 취하고 있는 당 영화의 전개방식은

과정을 생략하고(또는 의도적으로 가려놓은 후에)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보는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도 마술사가 마술을 보여주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무릇 마술이란 비밀을 알고 난 후엔 허무하리만큼 간단한 법.

그러므로 당 영화가 막판에 까발리는 비밀이란 그렇게 기똥차게 기발하지도 않고, 뒤집어지게 놀랍지도 않다. 새장을 통채로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 손수건을 걷어내고 나면 그저 새를 통채로 눌러 죽이는 무식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마술에 목숨 걸고 피똥싸는 경쟁을 펼치던 두 주인공이 끝끝내 감추려고 했던 커튼을 걷어서 보여주는 것은 엄청난 비밀이 아니라 끝없는 경쟁 속에 스스로의 손을 더럽힌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이다.

놀란 감독이 당 영화의 반전을 그저”관객들 한번 뒤지게 놀래켜보자”라는 식으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무리. 이렇게 뻔한 결말에 목숨을 걸 만큼 멍청한 사람일까.

커터(마이클 케인)의 대사처럼, 관객들이 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굳이 비밀을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 긴 상영시간동안 “너무 미리 알려고 하지 않는”미덕을 지킬 수 있는 분이라면
탁원한 이야기꾼인 놀란 감독이 “보여주는”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상벌위원회 정규직 간사

거의 없다(1000j100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