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아 -1




할머니는 열두 평 임대 아파트에 살았다. 현관문을 열면 집안의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배가 고프면 그곳 냉장고 안을 지범거렸다. 할머니는 베란다와 잇댄 큰 방에서 맞은 편 아파트 옥상에 겨우 걸린 태양을 보며 담배를 태웠다. 앞 동에 가려 볕은 들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말했다. 애비나 새끼나 키워놔도 생판 남인디 개새끼를 키울 걸 그랬어야. 대꾸 없이 배를 채우고 현관문을 닫았다. 내가 사는 반지하 쪽방은 노인 고린내가 나지 않았다.


그날도 배가 고팠다. 현관문을 열자 여전하게 집안의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쪽 문짝이 떨어져 나간 신발장 안에 광나게 닦인 비닐 구두 두 켤레가 끝줄을 맞추고 있었고, 나일론 털이 삐친 빗자루와 이 나간 쓰레받기가 신발장에 가지런히 기대 있었고, 바닥에 쇠솔 자국이 선명한 스텐 냄비가 가스렌지 위에 갸우뚱 앉혀져 있었고, 몇 년 전부터 닦지 못한 기름때 몇 방울이 알루미늄 싱크대 상판에 얼룩져 있었고, 크기가 다른 각종 고지서가 원목색 시트지를 새로 입힌 팔십 리터짜리 냉장고에 붙어 있었고, 그 고지서 중 도시가스 이용료, 지방세 독촉장, 의료보험 체납 알림서, 캐피탈 대출금 최고장이 부엌과 큰 방을 나누는 미닫이 문지방 아래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빈 소주병 세 개와 깨진 소주병 한 개가 그 주위에 나뒹굴고 있었고, 푸른색 나선이 끼어들어간 빨랫줄이 미닫이 문틀에 둥글게 매듭져 있었고, 그 문지방 위로 의자를 놓고 올라 선 아버지가 빨랫줄에 자기 목을 집어넣고 있었고, 2단 짜리 TV장 밑으로 등을 보이고 떨어진 TV가 전선 피복 타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머리가 산발이 된 할머니가 사지를 쭉 뻗은 채 큰방 구석 이불 보퉁이 옆으로 엎어져 있었고, 한 나절 태양이 남긴 잔 볕이 베란다 너머 맞은 편 아파트 옥상 모서리에 겨우 걸려 있었다.





가족 앞에서는 무서운 게 없는 분이었다. 왼쪽 뺨을 여덟 바늘 꿰매고 오른쪽 갈비 두 대가 나간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도망쳤다. 씨펄놈아, 내가 다 죽인다. 내가 다 죽인다고. 의자에서 발만 떼면 멱이 조일 텐데 가족 앞이라 그런지 아버지는 여전히 무서운 게 없어 보였다. 조용히 아버지의 곁에 가 섰다. 청년 시절 아버지는 프레스에 한 번 잘라먹고, 선반에 한 번 밀려먹어 손가락이 여덟 개밖에 없었는데, 손가락이 모자란 모든 장애인이 이렇진 않을 것이었다. 또 그 후 아버지는 세 번의 실직과 세 번의 사기, 끝으로 한 번의 사업실패를 당했는데, 막장에 몰린 모든 가장이 이렇진 않을 것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다가 잊을 만하면 술에 취해 이곳을 찾아와 그나마 멀쩡한 세간만 찾아 부셨다. 할머니는 칼을 들고 아버지에게 나가 뒤지라고 악을 썼고 나는 그 옆에서 밥솥을 열어 끼니를 챙겼다. 다만 이번에는 할머니가 칼을 안 뽑은 모양이었다. 엎어진 채 눈동자가 위로 뒤집어진 할머니의 목 주위로 울혈은 보였지만, 칼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입가에 침이 말라 버짐처럼 허옇게 번져 있었다. 개새끼를 낳지 못한 할머니의 잘못이었다. 역시 개새끼를 키우는 게 나았다.


오 세이 캐앤 유 씨, 오우 세이 캔 유우 씨, 세에이 캔 유우 씨이, 오오 세 캔 유 씨. 아버지가 노래를 불렀다. Oh, Say can you see. 줄곧 부르던 미국 국가였는데 첫 소절 가사만으로 끝까지 부를 수 있었다. 엄숙하게 노래를 마치고는 소리쳤다. 나 죽는 거 똑바로 봐라, 씨펄놈아. 용달 일을 한 전력이 있어선지 아버지가 엮은 교수형 매듭은 짱짱해 보였지만 과연 그게 아버지를 죽일 수 있을지는 의심이 갔다. 아버지의 여윈 몸은 줄에 붙들려 무겁게 늘어지는 게 아니라 장대에 널린 이불홑청처럼 가볍게 펄럭일 것 같았다.


씨펄. 아버지는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는 때 탄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어무이. 아버지는 다시 소리쳤다. 이번에는 때 탄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의 어머니는 그의 뒤에서 눈을 까뒤집고 엎어져 있었는데 아버지는 몸을 틀어 그 모습을 확인한 후 재차 어무이를 외치며 울었다. 통곡은 길었다. 곁에 서 있는 내 다리가 아플 만큼 길었다. 나는 아버지의 울음과 아버지가 한 짓과 아버지가 하려는 짓 모두를 이해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로 인해 행복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도 행복하지는 않았다. 씨펄거리며 흘리는 아버지의 눈물을 나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딛고 있는 의자를 발로 찼다.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아버지의 몸이 사방으로 펄떡였다. 아버지의 몸에 남아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생명력이 한 모금의 산소라도 더 마시기 위해 생동했다. 그 생명력은 목을 죄는 빨랫줄 사이로 여덟 개의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진을 짜듯 말했다. 살.려.줘. 나는 아버지의 여덟 손가락을 붙들어 강제로 옆구리에 붙이고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발을 뗐다. 나의 체중이 빨랫줄에 더해졌다. 중력이 빨랫줄을 따라 아버지의 척추로, 나의 척추로, 지구의 적도와 자전축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바닥 없는 우물에 떨어지는 두레박처럼 추락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축 늘어진 아버지의 몸에서 여덟 손가락이 소나기 쏟아지듯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손가락들은 엎어진 할머니에게로 꼬물꼬물 기어가 치마 속 고쟁이에 붙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두 개의 손가락이 담배를 끼고 다섯 개의 손가락이 라이터를 켜고 한 개의 손가락이 춤을 췄다. 불붙은 담배가 환하게 밝아지며 타들어갔다. 맞은 편 아파트 옥상에 걸려있던 잔광은 이미 사위어 있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를 걸어 나올 때 할머니의 임대 아파트 창안으로 불꽃이 넘실거렸다. 그 모습이 꼭 화장터 소각로의 작은 유리 너머로 날름대는 불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멀리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영진공 철구

“놓아라, 다 놓아라. 꽃피는 봄은 어차피 오지 않더냐?”, 『꽃피는 봄이 오면』



그러니까 30년이 지난 오래된 이야기다.
나는 일곱살이었고 은퇴하신 할머니는 할 일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부지런히 세 번째 사업 실패를 준비 중이었고 어머니는 아파트 상가에 아동복 점포를 알아보러 분주하였으며 밤이면 두분의 싸움이 잦았다.
낮은 길었다. 7살의 낮은 하루의 전부였으며 시간은 사각사각 지나갔다. 7살 세상은 홍옥 같이 사각사각했다. 어른들이야 어쩌건….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손수 손주의 양말의 벗겨주시며 손을 씻으라 하셨고 얼굴을 씻으라 하셨으며 그 물을 버리지 않고 내 발을 손수 씻겨주시는데 쓰셨다. 뽀득뽀득 꼭 발은 닦아 주셨다. 난 발정도는 씻을 수 있는 7살이었다.

발을 누가 씻겨주는 것. 참 기분좋은 일임을 그 때 알았다.
내가 교회를 가기로 마음 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나즈막히…
“예수님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셨단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 교회를 그만두게 된 건 누구의 발을 닦아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보다 최하 3개국어 방언 실력에 두둑한 염봇돈을 내며 기도할 때마다 울부짓고 고함을 질러야 3개월 속성 회개 2급 자격증을 따는 이 땅 교회들의 웃기면서 기막한 포퍼먼스 를 본 뒤다.

사랑은 요란하지 않고, 아픔은 눈물에 있지 않고, 진실은 열띠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허진호”는 멋진 감독이다. 요란한 세상에 요란하지 않은 이야기를 제대로 쓴 사람은 “허진호”가 처음이었다.

‘철구'(“이한휘”분)가 ‘정원'(“한석규”분)의 “주정”을 말없이 받아주는 요란하지 않은 사랑, ‘다림'(“심은하”분)이 일없이 사진관에서 자고 가는 것을 봐야만 하는 정원의 아픈 웃음, 정원이 아버지에게 리모콘 사용법을 몇 번이나 가르쳐야 하는지 역정 낼 때 나오는 죽음에 대한 사실, 혹은 진실.

사랑이 뒤돌아가는 사람의 숨죽인 호흡에 있다는 것, 아픔이 억눌러 참아가는 사람의 어깨 들썩임에 있다는 것, 진실은 그리 거창한게 아니라 일상의 관계 속에 소소하다는 것. 난 참 크고, 빠르고, 우렁차고, 요란한 것에만 집착하고 즐겼지.

“류장하”의 『꽃피는 봄이 오면』을 기대한 건 그 “허진호”의 조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수연”을 떠나보내야 하는 “현우”는 도계초등학교 음악교사로 떠난다. ‘탄’밥을 먹어가며 살아온 관악부 아이들에게 음악은 꿈이자 오락이지만 “현우”에게 음악은 비루한 삶을 있게 만든 장본인이자 끝내 잡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다. 아이들과 “현우”의 대립은 그 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좋은 설정에서 시작한 영화가 육수에 물탄듯, 콜라 김 빠지듯 하기 시작하는 건 “류장하” 감독의 욕심 때문일까? 아니면 런닝타임이 빠듯했기 때문일까?

“연희”와 “현우”의 말랑말랑한 관계는 니맛도 내맛도 없이 흐지부지
“수연’의 결혼과 “현우”의 괴로움은 끝에가선 아무일도 없다는 듯 대사 한마디로 흐리멍텅
“재일”과 재일 할머니의 사랑은 소소한 할머니의 사랑 하나 없이 민숭맨숭
관악부 아이들의 캐릭터는 하나같이 얼렁설렁

소소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보여주는 방식은 감독이 알았지만
왜 소소한 이야기 속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매듭이 어떠하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왜 몰랐을까? 결국 어떤 플롯의 영화든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이야기가 열린 이유에 합당한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에 반해 조연 연기자들의 절륜의 연기는 감동적이었다.

깐깐한 엄마 역으로 나온 “윤여정”의 툴툴 털어내는 대사는 장삼이사의 옆집 엄마들 푸념처럼 정겨웠고(그녀를 누가 『화녀』(1971년작)에서 분한 팜므파탈이라고 연상하겠는가?), 특히 “김영옥”의 말한마디 없이 수수한 할머니 눈빛은 절절한 이시대를 부대껴온 할머니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이 또한 누가 그녀를 보고 마징가 쇠돌이역의 성우라고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최민식”, 이제는 절정인 듯한 폐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이 얼기설기한 그물같은 시나리오에 마지막 끈으로 역할을 다 한다.


할머니는 18년 전에 돌아가셨고 나는 아직 그 발가락 사이에 뽀드득하던 할머니의 늙고 가는 손가락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 분의 사랑하는 방식은 이리도 소소하셨다. 사람들은 아직도 큰 소리로 싸우고, 왁자지껄하게 사랑하고, 미친년 널 뛰듯이 요란하게 슬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꼭 적이 된 그녀를 총구 앞에 두고 마지못해 죽여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꽃피는 봄이 오면』은 아쉽지만 외면할 수는 없는 영화가 된다. 아직 세상이 이 영화가 필요할 만큼 충분히 지랄중이다.

 


영진공 그럴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