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션 에이전트”, 친구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주인공 핀 역을 맡은 “피터 딩클리지”, 굉장히 낯익은 배우라 생각했는데 막상 imdb.com 필모그래피에 낯선 영화들만 있습니다. 결국 저 역시 이 사람을 그냥 ‘난장이 배우’로 봤던 것일까요. 신체상의 특성이 필요한 역에 언제나 조연으로 출연하다가 드디어 주연을 맡는구나! 라면서 축하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편견이란 놈의 위력은 셉니다. 저 역시 어쩔 수 없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인 것이죠.

졸지에 뉴저지의 낡은 역사에 가게 된 핀. 정신없고 산만한 사고뭉치 아줌마 올리비아와 연일 시끄럽게 말 거는 조와 엮이게 됩니다. 핀은 난장이이고, 올리비아는 좀 정신 나간 아줌마고, 조는 이민 2세에 핫도그 파는 청년이죠. ‘성별과 연령과 장애와 상처를 넘어선 우정’이라고 혹자들은 나이브하게 말하겠지만, 그들이 친구가 되는 건, 아니 딱 그들로만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난쟁이이고 아들을 잃은 후 정신이 나가버린 아줌마이며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거 별로 없는 이민 2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들 약점이 있고 주류 사회에 결코 낄 수 없는 ‘헛점투성이’ 인간이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과, 소위 자신을 정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뭐, 이런 설정과 줄거리, 그리하여 이들이 마침내 마음을 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아름다운 우정을 갖게 된다는 영화는 세상에 넘쳐나고 흔합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영화가 제 기대 이상이었고 어필을 했던 건 배우들의 호연 탓이겠죠. 감독이 차분히 연출을 쌓아가는 솜씨도 꽤 안정적이고요.

핀과 올리비아가 서로 상처를 뱉어내며 결국 오열하는 장면에서 같이 울고 말았습니다. 역시나,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저 어떨 땐,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결국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를 할퀴어대고, 결국 그 앞에 허물어져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는 거죠.

소소한 하나 하나에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은 오히려 강력한 방어기제를 갖고 더욱 무뚝뚝하게 굽니다. 핀의 도피처는 기차였고, 올리비아의 도피처는 그림이었지요. 남의 친절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고 귀찮기만 합니다. 때론 나의 친절은, 다른 이에게 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가면의 제스처이기도 해요. 남 앞에서 적당히 빵긋빵긋 웃으면, 상대는 더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기술마저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고 때로 그 상처를 한 잔의 술이나 한 개피의 담배로 겨우 폭발 직전 상태로 진정시키며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그 상처들이 ‘낫지는’ 않아요. 다만 우리는, 누구나 그런 상처를 하나쯤은 가슴 깊이 숨겨둔 채, 그저 혼자 있을 때 혼자서만 분출하다가, 다른 이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긋 웃을 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실, 상처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상처를 가리는 기술이 늘고 방어기제의 기술이 세련되지는 것에 불과한 건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저 혼자 아프고 저 혼자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철딱써니들이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인지도 몰라요. 남들의 웃음 속에서 아픔을, 상처를, 절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 웃는 얼굴 뒤에 나보다 더 큰 상처를 꾹꾹 억누르고 있으려니, 라는 상상은 절대로 해보지 못하는 사람들.

약해빠지고 아무 대책 없고, 이를 악물고 그저 ‘오늘 하루’ 잘 버티는 게 오늘의 희망사항인 사람이 단지 남에게 폐끼치고 싶진 않다는 이유에서 상처를 숨기면, 상처가 없는 줄 알고 상처를 하나둘, 셋, 계속 안겨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 뻔뻔한 인간들은, ‘당신은 강하니까 잘 버텨낼 거예요’ 같은 말을 덧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위로를 한답시고, 실은 내가 주는 상처 버텨내라고 강요의 주문을 하고 있는 셈이죠. 상대가 얼마나 아플지는 피상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그만큼 아파봐야 알까요? 아니요, 자기가 그만큼 아프면, 이 바보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아픈 줄 알고 날뜁니다.

어찌됐건 이들은 그럭저럭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친구가 됩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를 나눠마시는 모습은 진부한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핀과 올리비아와 조에게 각자 서로 친구가 생긴 건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희망을 구걸하는 시대



희망은 근원적인 거였다.

국민학교 입학 전 내 희망은 산타의 흰수염을 잡아채면서 실재하는 신화를 구경하는 것이었고 입학후 내 희망은 5층짜리 건물에 1층 만화가게를 세 주어 공짜로 실컷 만화를 보는 것이었고 중학교부터는 온통 프리섹스의 희망이 마음 가득 했었다.

고등학교 들어 대학생만 되면 중학교의 그 꿈이 이루어질 줄 알았지. 사실 희망은 될 턱이 없는 거잖아. 근데 왠걸? 그게 반쯤은 되더라고. 고마워 오렌지족. 주는 게 쿨하다고 생각한 20세기 마지막 유흥의 끝을 붙잡고 세상이 영원할 줄 알았어.

그리고 사회에 버려져서는 조금 더 많은 돈, 조금 더 넓은 집, 조금 더 안락한 일, 조금 더 재밌는 삶이 희망인 거 같았어.

그렇게 30대를 보내고 나니 이제 30대가 몇일 뒤면 끝나는 나이가 되었네.

나이를, 먹으니 희망은 나에게서 자식에게로 넘어가더라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희망이 내 의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곳에서 웅크리고 있더란 거지.

아이의 학업 아이의 행복 아이의 재능 아이의 가치관 아이의 능력 그리고 미래.

문제는 미래,

공부야 팔자고, 행복이야 내가 열심히 살면 되고 배울 것이고, 재능이야 타고난 것이니 지 알아서 할 것이고, 가치관이야 부모인성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 안심되고, 능력이야 내가 뒷바라지는 할 정도는 될 것 같은데

미래는 내가 담보가 안된다.

이명박, FTA 이런 거 아니더라도 세상이 이젠 20세기만큼 기회가 안주어질 것 같아.

자본이 이념을 삼키고, 정의를 묵살하고, 주권을 통제하고, 권리를 목조르며 오직 더 큰 자본에게만 종속되는 세상.

독재의 시대만 해도, 군사정권 시절만 해도, 20세기만해도,

정권을 바꾸면, 군부를 타도하면, 21세기가 되면 바뀔줄 알았는데

이젠 희망이 없어 보인다.

나라가 아니라 세계가 자본에 종속되는 보니 희망 같은 게 보일턱이 있나.

살아남아 악착같이 기득권이 되려고 누구 못베고 살듯한데

내 애한테 잔인한 자본의 속성과 비굴함을 알려줘야 하는데

이제 40줄에 들어서면 애비 이빨빠진 늙은이 눈치 챌텐데

뭐라 희망을 말할 게 없다.



영진공 그럴껄



<행복>, “갑자기 심은하가 보고싶다.”

거의 대부분의 삶을 불효자로 사는 나는 가끔씩 남들 앞에서 효자가 되는데

그게 바로 엄마랑 영화를 볼 때다.

‘행복’을 고른 이유는 멜러를 좋아하는 내 취향에도 맞고, 엄마도 좋아할 것 같아서였는데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영화를 보면서 한 생각.

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편이다.

여자를 사귀다 헤어진다 해도 연애기간 동안 좋았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연애 안한 것보단 낫다”고 생각을 해버린다.

사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오던 둘이 만나서 영원히 함께 가는 게 가능이나 할까?

헤어지면 할 수 없지만 있는 기간 동안만이라도 잘 지내자, 이런 모토로 살면

그리 큰 상처를 받지 않는다, 고 그동안 생각해 왔다.

하지만 황정민이 떠난 뒤의 임수정을 상상해보면-영화에선 이게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간 생각해 온 것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처럼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며

후자의 사람들에게 이별은 지대한 상처를 남길 뿐 아니라

삶을 원래 있던 지표보다 더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버린다.

그러니까 “있는 동안은 잘해주겠다”는 내 연애론은 지극히 이기적일 수도 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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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생각.

임수정은 참 예뻤다.

그리고 연기도 어쩜 그렇게 잘하는지 영화보는 내내 난 임수정이 되서 그녀에게 공감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임은경이 광고 이후 찍은 영화가 다 망하고

지금은 아예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걸 보면

연기라는 게 후천적 노력만이 아닌, 타고난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번번이 망하다 영화 쪽으로 발길을 끊은 김희선이나 전지현을 보시라.

그러니까 <마지막 승부>에서 심은하 대신 다른 신인 배우가 나왔다고 해서

죄다 심은하처럼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

갑자기 심은하가 보고 싶다.

동거 사실을 폭로한, 그래서 심은하를 우리 곁에서 멀어지게 만든 찌질한 남자놈은

그래서 지금 행복할까?

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끝나는 이 감상문은 ‘감상문’ 축에는 들까?

영진공 서민

허진호,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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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가 더 어울립니다.
가진 것은 몸뚱이뿐인 인생이 바로 저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인데, 그 몸뚱이마저, 건강조차 갖지 못한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갖고 집도 갖고 행복도 갖게 되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을 텐데, 거참 그런 행복이 오래 가질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원래 간사한 거긴 하지만 또 인간 중엔 행복을 도저히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남자가 기적적으로 낫고 보니 슬슬 허파에 바람이 듭니다.


세상에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지만, 허진호 감독은 언제나 멜러를 찍으면서도 언제나 그 멜러는 대단히 드라이했습니다. 그의 신파는 눈물을 최대한 말려버리는 신파였습니다. <행복>에선,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봄날은 간다>에서 냉정한 한두 마디로 유지태를 떠나보냈던 이영애인데, 여기서의 황정민은 술먹고 주정하며 울면서 감정을 토해내고, 임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임수정은 길을 달리며 울음을 터뜨리다가 목놓아 통곡까지 합니다. 어머나. 허진호가, ‘내놓는 감정’에 조금은 덜 쪽팔려할 줄 알게 됐나 봅니다. ‘길을 달리며’ 우는 건 다른 영화에서라면 유치했겠지만, 폐가 40%밖에 안 남은 임수정이 달리는 건 마음이 아픕니다.


섹스도 할 수 있는 엄마 대용으로 여자에게 어리광 부리다가, 지가 마음이 변해 헤어지고 싶은데 ‘나쁜 놈’ 되는 건 또 싫어서 그 책임을 여자에게 미루는 그런 개찌질이 같은 남자들이, 좀 있습니다. 먼저 이별을 통고하면서 나쁜 놈 역할조차 상대에게 떠넘기려 하는 무개념 무책임 남자놈들은 연애할 자격이 없는 놈들입니다. 어디 가서 또 어떤 여자들 등쳐먹고 가슴을 찢어놓으려고요. 그래서 세상엔 ‘착한 척’하는 남자들이 제일 재수없고 나쁜 놈들인 겁니다. 남자가 갸르랑거리는 가늘고 높은 고양이 목소리를 내면서 간이고 쓸개고 내줄 것처럼 애교떨며 착한 ‘척’을 할 때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다른 여자한테 작업멘트가 담긴 이메일이나 쪽지를 보내거나 다른 여자의 머리와 손을 쓰다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헤어지는 순간에도 당신 뒷통수를 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찌질이들은 헤어지고 한참 지나서까지도 뒷통수를 치기도 한답니다. 이런 찌질이들의 단골멘트가 “너에겐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어서”입니다. 너무 부족한 사람이면 노력을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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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붙이지 않고 그냥 이미지와 컷으로만 가서 다행인 씬.


하지만요, 이건 워낙 황정민이 그런 놈이어서 그랬던 거고, 사실 그 황정민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닙니다. 저도 별로 고고하고 착한 사람이 아닌지라, 내가 상처를 받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거기엔 제가 인식하고 있는 것도, 제가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한 채 부지불식간 준 것도 있습니다. 모나게도 모질게도 못나게도 찌질하게도 굴어봤고, 지금도 종종 그러합니다. 내가 모질게 굴었던 사람, 내가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만은 아닐 겁니다. 원래 관계라는 게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이것은 연인관계에서만 통용되는 법칙도 아닙니다. 어떤 친구와, 혹은 어떤 선배와, 어떤 후배와, 우리는 날마다 새로이 관계를 갱신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그제껏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의 흔적(물론 전 연인 내지 배우자의 흔적을 포함해)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교훈삼아 더욱 열심히 사랑할 수 있게 됐을 때 우리도 한뼘쯤 다시 자라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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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예감.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납니다. 여자의 예감은 원래 무서운 겁니다(…)


만약 내가 지금 사랑을 잘 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잘했을 가능성보다 찌질하고 못났던 과거를 교훈삼은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다만 그렇게 사람 가슴 찢어놓고 갔으면 잘 살 것이지, 왜 그렇게 다시 폐인이 됐나, 싶습니다. 하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사막을 헤매는데 나 버리고 간 놈이 잘 먹고 잘 살고 연애도 잘 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약오르고 열받는 일이 되겠지요. 사람 마음이란 왜 이리 좁고 간사하고 못돼먹었을까요? 아, 저만 그런 거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진정 사랑했다면, 그가 잘 살아도, 못 살아도 한동안은 신경이 쓰일 겁니다. 이것은 꼭 그에게 마음과 미련이 남아서는 아닐 겁니다.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의 나도,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나도, 같은 사람이니까요.


허진호 감독이 말하기를, 황정민이 영수 캐릭터를 조금 더 이해갈 만하게, 결을 불어넣어 줬다고 합니다. 그렇더라고요. 저도 황정민이 무척 미우면서도, 근데 또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짠하기도 하더라고요. 마냥 미워하지만은 못 하겠더라고요. 임수정도 황정민도, 둘 다 나의 모습을,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 안의 두 개의 자아일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특별한 증오와 혐오를 품는 건, 그가 나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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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처럼 아파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여겨지는 순간들. 누구나 가슴에 삼천원 있는 겁니다아~


그냥, 사랑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사랑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현실엔 가끔 이벤트가 필요하지만, 이벤트로만 이루어진 현실은 불안하고 연속성이 없습니다. 임수정과의 시골생활은 임수정에겐 현실이었지만 도시남자 황정민에게 결국 ‘현실’, 내지 ‘새로 선택한 현실’이 아니라 ‘이벤트’였고 ‘가상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가 오래갈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결국 사랑이 진정한 행복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에 대한 답을 하나 얻은 것 같습니다. 원래 가장 상투적인 이야기가 가장 고질적인 고민과 물음에 대한 답을 품고 있는 법입니다.


ps. 그간 자꾸 “못생기지만 정감 가는 아가씨”로만 나오던 공효진이 세련되고 시크한 역으로 우정출연합니다. 최근 <M>에서도 그런 역으로 나오던데, 슬슬 그런 쪽으로 이미지를 바꾸려는 듯. 사실 공효진은 굉장히 우아하고 세련된 옷발을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몸매와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