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환영합니다.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Our sincere congratulations, Mr. President.



후안무치한 일방주의와 무한이기주의로 점철되었던 지난 8년 간의 미국을,
이제 미래에 대한 비전을 통해 공존을 도모하고 공생을 실행하는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영화진흥공화국

   

2008 미 대선 맞이 추천영화, 『천사의 투쟁』(Iron Jawed Angels)

오바마의 예상된 승리냐? 아니면 매케인의 역전극이냐?
2008년 미국 대선의 결과가 곧 나올 예정이다.
심각한 금융위기가 터져나오긴 했어도, 전 세계의 촉각이 그 쪽의 대선결과에 쏠려있는 걸 보면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긴 한 모양이다.

이번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기회를 제공하기를 그리고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천사의 투쟁 (Iron jawed angels, 2004년도 작)』.
『 Band of Brothers』와 『Rome』으로 국내에 유명해진 HBO에서 2004년도에 만든 120분짜리 TV 역사물이다. 밴드와 로마가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줬듯, HBO의 역사물은 상당히 재미있다.

포스터가 말해주듯, 이 영화는 미국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세계 1차 세계대전 직전부터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윌슨과 남부에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던 ‘민주당’ – 당시에 ‘민주’의 의미는 ‘여성의 참정권’ 조차도 보장하지 못한 민주였다. 지금의 미국에 있는 ‘민주당’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당시의 공화당도 말 뿐이고 공약을 잘 지킨 건 아니다 – 이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 그리고 그 발버둥을 이겨내면서 ‘참정권’조차 가지지 못한 여성들이 의회를 상대로 어떻게 승리를 쟁취하는지를 흥미로운 전개와 뛰어난 선곡으로 몰입감을 만들어간다.

‘아이언 조드’, 쇠턱이란 얘기. ‘단호한’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어떤 정치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분명 타협과 거래가 필요하다. 허나 그건 양자가 ‘동등한 위치’에 놓여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저 양자의 작은 권익을 거래하며 하는 정치란 현대 정치에서나 가능한 법. 그리고 그건 여론을 이용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실세’도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실세’가 없는 사람들. 예컨데 노동자라던가, 흔한 얘기로 선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한 ‘투쟁’의 시작은 명확한 피아구분부터 시작한다. 자신과 연대해서 싸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설득시켜 나가거나 맞서 싸워 나가야 한다.

‘투쟁’은 단호해야 한다. 더욱이 그 권력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단호함의 유지는 중요하다. 외곬수로 보이든, 똥고집으로 보이든. 자신들이 믿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을 넘어서서 차별과 핍박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덤벼드는 ‘투쟁’은 전쟁과 다름없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는 적이 타협을 위해 던져주는 ‘조금만 참고 기다려보라’는 ‘역지사지’ 따위를 강조한다면 그런 건 개나 줘버리라고 엿먹인 후에 싸워야 한다.





주인공이 감옥에서 단식을 하다가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 하는 경찰들에게 끌려가면서 감옥에 수감된 모든 여성이 함께 부르는 곡이다.  제목은 “Will the circle be unbroken”.



Will the circle be unbroken?
By and by lord, by and by,
There’s a better home a-waitin’
In the sky lord, in the sky.
바퀴가 부서지진 않겠죠?
얼마 못 가서, 주여! 얼마 못 가서 말입니다
더 좋은 곳이 기다리겠죠?
하늘에 말입니다, 주여! 당신이 있는 곳

I was standing by my window
On a cold and cloudy day
When I saw the hearse come rollin’
For to take my mother away.
난 창가에 서 있었지
춥고 흐린 날이었어
내 어머니를 데려갈
장의용 마차가 오고 있었지


Will the circle be unbroken?
By and by lord, by and by,
There’s a better home a-waitin’
In the sky lord, in the sky.
바퀴가 부서지진 않겠죠?
얼마 못 가서, 주여! 얼마 못 가서 말입니다
더 좋은 곳이 기다리겠죠?
하늘에 말입니다, 주여! 당신이 있는 곳


I told the undertaker:
Undertaker, please drive slow,
For this body you are haulin’
Lord, I hate to see her go.
장의사에게 얘기했지
이봐요, 천천히 가 주세요
당신이 데려갈 이를 위해서요
주여! 이 모습을 봐야 하나요


Will the circle be unbroken?
By and by lord, by and by,
There’s a better home a-waitin’
In the sky lord, in the sky.
바퀴가 부서지진 않겠죠?
얼마 못 가서, 주여! 얼마 못 가서 말입니다
더 좋은 곳이 기다리겠죠?
하늘에 말입니다, 주여! 당신이 있는 곳


Well I followed close behind her,
Tried to hold up and be brave,
But I could not hide my sorrow
When they laid her in the grave
당신의 뒤를 따르면서
꾹 참고 용기를 내 보지만
슬픔을 감출 수는 없죠
무덤 속으로 사라지잖아요


Will the circle be unbroken?
By and by lord, by and by,
There’s a better home a-waitin’
In the sky lord, in the sky.
바퀴가 부서지진 않겠죠?
얼마 못 가서, 주여! 얼마 못 가서 말입니다
더 좋은 곳이 기다리겠죠?
하늘에 말입니다, 주여! 당신이 있는 곳



영진공 함장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꿈을 가지려면 먼저 세상을 보아야한다.”



어릴 적엔 떠나고 싶었고, 세상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달랑 배낭 하나 짊어지고 혼자서, 아님 친구 몇과 함께 여행을 했던 기억들.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보며 배웠던 이 땅, 그리고 사람들.

외국에도 많이 다녀보았다.
미국, 캐나다, 이태리, 스위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멕시코, 태국, 싱가폴, 일본 …
그렇게 돌아 다니면서 다른 풍광과 다른 언어, 그리고 다른 생활과 다른 관습들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건 세상 어디를 가나 똑 같다는 걸 알았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이 영화 속엔 혁명가, 게릴라 전사가 없다.
그저 순진하고 착한 그리고 세상을 눈으로 보고 배우고 싶어하는 평범한 청년이 나올 뿐.

채 세상 물정을 알 나이가 안 된 두 청년은 너무도 무모하게,
낡은 오토바이에 배낭 몇 개만 싣고 남미 대륙 여행에 나선다.
그나마 그 오토바이도 중간에 망가져버리고.

그런 그의 모습이 책으로 읽던, 이야기로 전해듣던 모습보다 훨씬 더 따뜻했고 더 많이 친근하였다.

착하고 순수해서 그래서 나중엔 혁명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청년.
여행 속에서 보고 접하고 느낀 세상과 사람들,
그 과정에서 차곡차곡 쌓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리고 모두 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하고 단순한 소망.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종내에는 변혁운동과 혁명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그 젊은이.



“본명은 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 6. 14 아르헨티나 로사리오~1967. 10 볼리비아.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귀족의 후손인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르네스토가 두 살 때 천식에 걸려 고생을 한 이후 그의 가족은 모두 코르도바(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갔다.
천식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 에르네스토는 이 경험 때문에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같은 의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와 둘이서 10개월에 걸쳐 모터사이클로 여행을 했다. 칠레에서 바이크가 고장이 나자 페루의 마츄피츄까지 도보로 여행하였다. 한동안은 상 파울로의 나환자촌에서 환자들과 생활하기도 했다. 그후 아마존강을 횡단하여 콜롬비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친구는 카리카스에 남고, 에르네스토는 비행기로 마이애미까지 갔다. 특히 상 파울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진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어 마이애미에서 1개월간 더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8월에 귀국한 후,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과테말라와 볼리비아를 거쳐 1955년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F.카스트로[피델 카스트로]와 사귀어 쿠바혁명에 참가하였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 시민이 되어 라카바니아요새 사령관,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여 ‘쿠바의 두뇌’라 불렀다.
그러나 1965년 3월부터 소식이 끊겨 사망설이 파다하였으나, 카스트로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새로운 전쟁터로 달려갔다는 사실이 그해 10월 밝혀졌다. 그는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중에서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부상을 당하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하였다.”


천식을 앓던, 그래서 군대도 안 갔던 순둥이 의대생이,
어찌하여 그리도 열정적으로 혁명의 꿈을 품에 안을 수 있었는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그냥 의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그 젊은이가,
어떻게 온 세상을 변혁하자며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영화 속의 그는 잔잔한 눈빛으로 어떤 책 어떤 평전보다 더 편안하고 더 절실하게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건 다 같다는 걸,
사람은 모두 차별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걸,
하지만 그런 삶이 거저 얻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쯤에서는 영화를 보시라는 말 말고는 더 이상 덧붙일 게 없다.

대신 그를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그가 1964년 12월 11일 UN에서 한 연설 중 일부를 첨부해 본다.
영어 번역문을 실으려 했으나 그건 링크로 처리하고 그에 관한 평전 중 하나에서 관련 내용을 아래에 인용하니 참고하시라.

* 영어 번역문을 보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그 말의 뜻은 결국 소련의 공산주의는 더 이상 순수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후 모든 아메리카 혁명 노선은 체게바라의 주장대로 소련식 공산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주의가 되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의 냉전대립에서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사회주의 국가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의 자본주의 열강들이 그러하듯이 소련 역시 자국의 이해 관례를 위해서 불평등한 교환을 통해서 착취를 행하고 있었다. 체게바라가 보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은 소련의 보호 우산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당시 공산주의 혹은 공산당은 소련의 전류물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운동은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민중 해방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체 게바라의 머릿속에서 확고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소련의 속국이 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제3세계 국가의 블록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체게바라의 이런 신념은 1964년 12월 11일, 뉴욕의 유엔 회의에서 쿠바 대표의 자격으로 행한 한 연설에서 표출되었다. 연설의 대부분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침략행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소련의 불순함을 꼬집거나 소련식 공산주의와는 다른 사회주의의 건설이 라틴 아메리카 해방 운동의 목표라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은근히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게 하였다.”

[“아름다운 혁명가 체 게바라 청소년 평전 05” (박영욱 지음, 이룸 펴냄) 에서 인용]


영진공 이규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어른스럽고 예쁜 … 사랑의 여러 면들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영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대해서 쓰자면, 가슴이 일단 아프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주 여러번 이 영화를 본 나는, 볼 때마다 매번 같은 장면에서 울곤 하는데 조제가 츠네오에게 울면서 “가, 가란다고 진짜 갈 놈이면 가버려…”라고, 영화 내내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과, 맨 마지막, 츠네오가 오열하는 장면이다. 아, 츠네오가 조제를 낮에 처음으로 외출시켜주는 장면도. 아파트촌 거리를 “자전거에게 질 순 없다!”며 마구 달리는 장면.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장면인데, 영화의 결말을 알고 나서부턴 이 장면에선 울게 된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스탭 모두가 울면서 찍은 장면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밥 먹고 가란 소리에 불편한 표정으로 뻘쭘하게 앉아있다가 미역된장국 국물을 맛보곤 ‘오옷~’ 하면서 츠네오의 표정이 변하며 정말 맛있게 밥을 푹푹 먹는 장면에선 항상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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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관객들 / 블로거들의 지적대로, 이 영화는 실패한 사랑, 서투른 사랑의 기억이 있는 모두에게 감독이 바치는 따뜻한 위로의 선물이다. 그저 좋아서 연애는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그녀를 더 배려하지 못 하고, 잘해주지 못하고, 화난다고 신경질에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안 좋은 일 있었다고 짜증을 내고, 한참 눈에 콩깍지가 씌워졌을 때만 해도 오히려 그/그녀의 매력으로만 보였던 어떤 모습들에 어느 순간 짜증을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에게 깜짝깜짝 놀라고 죄책감을 느껴봤던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는. 살벌한 조폭처럼 말하는 그녀의 특이한 말투에 호기심을 느꼈으면서도, 휴관인 수족관 앞에서 업혀있던 조제가 그를 때렸을 때 얼굴을 구겼던 츠네오처럼. 처음엔 그냥 그녀의 특징인 것처럼 느껴졌던 그녀의 장애가, 결국은 부모한테 보이기 힘든 어떤 결점처럼 느낀 츠네오처럼. 또, 그가 있으니까 바깥 외출도 필요없고, 필요한 건 다 그가 해주리라 믿고, 천년만년 그의 등에 업히면 된다고 생각했던 조제처럼.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포지션에 있든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들이지만 나름 이기적이고, 약하고, 어느 순간 무배려하고, 때로 공격적이다. 감독은 그런 인물들의 약하고 부족한, 이기적인 면마저 따뜻하게 응시한다. 그리고 격려한다. 네가 그것을 뉘우치는 한 너는 좋은 사람이라고. “감히 장애인 주제에 내 애인을 뺏었다”고 조제를 후려친 카나에도, 조제한테 자신이 한번은 뺨을 대주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조제는, 자신이 그녀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원작소설에선, 츠네오와 조제가 ‘여전히’ 함께 사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에선, 츠네오가 결국 조제를 떠난다. 츠네오는 내레이션을 통해 단 한 마디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은 단 한 가지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절대로, 친구로도 그녀를 다시 보지 않을 것이라는 츠네오의 다짐은, 조제를 향한 자기 식의 마지막 배려다.

배우들의 연기가 참 빛난다. 코멘터리에서 감독도 지적하지만, 둘이 섹스하기 직전 츠네오가 하는 “이런… 눈물이 날 것 같아” 같은 대사는, 처리하기 대단히 힘든 대사다. 물고기의 성 호텔에서 하는 조제의 독백도. 무엇보다도, 츠마부키 사토시는 적당히 여자 좋아하고 밝고 단순하게 살고 그렇게 착하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은 평범 그 자체인 대학생 츠네오를, 정말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적당히 재미있는 남자애로 연기하고 있다. (나는 그가 한국에 왔을 때 찍힌 사진을 나중에 보고서야 그가 ‘엄청난 꽃미남’이란 걸 느꼈다.) 이케와키 치즈루의 조제 역시, 너무나 매력적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고히 가지고 있고, 험한 세상에 대한 방어본능으로 때때로 내세우는 날선 공격성 역시 충분히 수긍갈 뿐 아니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바다를 처음 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그 표정을 보라. 물고기의 성 호텔방에서 불이 꺼졌을 때 나타나던 파란 바닷속 조명의 물고기를 보며 놀라하던 그 표정도. 무엇보다도 둘은,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처럼 찾아왔을 때 조제의 가란 소리에 삐져서 가던 츠네오, 그런 츠네오를 향해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조제, 조제와 헤어지고 나오던 길, 결국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해 정말 서럽게 앉아 오열하는 츠네오. 이들은 진짜 츠네오고 진짜 조제다.

소박하고, 리얼리스틱하면서도 사랑의 여러 면들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영화. 그리고 기어코 사람 감정선을, 오바하지 않고, 매만져주는 영화. 나에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런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오랫동안, 오바하지 않고 사람 감정을 막 쥐어짜지 않으면서도 사랑에 대해 담담하게, 그 아름다움과 찬란함과 고통을, 제대로 보여주는 연애영화를 기다려왔다. 사랑을 통해 서로 상대에 대한 환상만을, 혹은 악다구니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스스로 성장하는 그런 어른스럽고 예쁜 사랑영화를 기다려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나의 오랜 기다림에 대한 답 중 하나이기도 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vs. 오아시스

많은 이들이 장르와 분위기가 완전히 다름에도 이 영화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자주 비교한다. 장애인 여성과 비장애인 남성의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솔직히 내 경우도, 『조제..』를 한 세 번째 보면서, 『오아시스』 생각을 했다. 이전에 나는 『오아시스』 옹호자에 속했는데, 재미있게도 『조제…』를 보면서 『오아시스』가 참 나쁜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현실의 비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용기있게 보여주는 건 좋은데, 말하자면, 할 수 있는 한 최악의 상황을 하면서 관객에게 감동을 ‘협박’의 방식으로 억지로 끌어내는 영화란, 급수가 낮은 이들이 하는 짓이자 나쁜 영화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영화가 해피엔딩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조제…』의 엔딩은 통상의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에서는 언해피 엔딩이다. 그러나 조제가 그토록 싫어하던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딱 잘라 언해피 엔딩이라 말하기도 힘들어진다. 『오아시스』에서도 이창동 감독이 하려고 했던 것은, 문소리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사람된 설경구의 모습과, 설경구를 보내놓고 비로소 자기 힘으로 방 청소 – 노동 – 를 하는 문소리를 보여줌으로써,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비루하더라도 사랑이 이들의 삶을 어떻게 주체적이고 용기있게 바꾸어놨는지 보여주는 것이었을 게다.

하지만 『오아시스』가 끌어낸 감동이란 결국, 보는 사람들을 공포에 질려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만듦으로서 끌어낸 것이 아니었을까나. 이전에 이런 생각을 전혀 해보질 않았다가, 『조제…』를 보고서야 비로소 하게 된 것인데, 그건 그만큼 『조제…』가 일견 환상적이고 예쁜, 팬시한 영화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해도 – 러브호텔 씬! – 더없이 리얼리스틱한, 그리고 아무리 악한 사람들이라도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약하고, 깨지기 쉽고, 이기적이고, 아프고, 잘해보고 싶고, 착하게 굴고 싶은 부분을 최대한 끌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엔딩, 유모차도 내다버리려고 했던 그녀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드디어 도로를 질주하며 삶을 영위하고, 자기 몫의 삼치를 구워 혼자만의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이 영화의 구성상 사족처럼 느껴진다 해도 굳이 영화의 가장 맨 마지막 장면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것은, 이 영화가 조제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창동이 하고 싶어했던 것, 즉 문소리가 비로소 방 청소를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에 서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문소리의 방 청소 장면과 똑닮은 휠체어 질주 장면 – 그녀는 장을 봐오고 있다. (이전엔 복지과 사람들이 해주던 것) – 은, 환상의 자기 세계를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세계에 용감히 발을 내딛고, 자기 삶을 시작한 조제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문소리의 장면이 이창동 감독의 희망사항을 담았음에도 억지처럼, 감독 자신도 별로 믿지 못하는 듯 느껴졌던 것과 달리, 조제의 휠체어 장면은 충분히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간의 악”에 대한 직시만으론 힘들다. “그럼에도 변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어야 한다. 『오아시스』에선, 감독 자신이 그런 믿음과 희망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믿어야 한다고, 희망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억지로 설득시키려는 느낌, 그리고 봉합하려는 느낌말이다.


Quruli, “Highway”


영진공 노바리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 2004), “잘 만들어진 에로틱 스릴러”


변혁 감독의 두번째 장편 <주홍글씨>는 웰메이드 에로틱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고 실제로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이미 주어진 장르의 밑그림 위를 따라가는데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탄탄한 기술적 완성도를 기본으로 장르의 컨벤션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말하고자 했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과감히 일탈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수준작이다. 먼저 개봉한 <범죄의 재구성>과 <아는 여자>가 끝내 달성하지 못했던 마지막 2%에 해당하는 지점에 성큼 올라선 영화가 <주홍글씨>다. 비평가들과 관객들이 <주홍글씨>를 놓고 뭐라고 혹평을 하고 있는지 열심히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한석규의 컴백 등 영화에 쏠렸던 대중들의 관심에 비례하는 흔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원래 큰 잔치에는 멀리 사는 거지들까지 죄다 몰리곤 하지 않던가.

물론 몇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띄기는 한다. 주인공들이 영위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생활 환경(트랜디 정장만 입어주는 강력반 형사들이나 재즈바에서의 현악 합주, 독신 재즈가수 집의 초호화판 인테리어)이나 몇 군데에서 발견되는 문어체를 벗어나지 못한 대사의 어색함 등은 잘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왠지 아이 캔디를 우선 지향하는 에로틱 스릴러의 전형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뻔한 내용의 불륜 영화를 패턴을 밟아가던 <주홍글씨>는 일순간에 지금까지 쌓아온 럭셔리 맨션 전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모험을 감행한다. 허영의 불꽃을 뒤따르는 인과응보식의 전복적인 내러티브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주홍글씨>는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전복을 제시하고 강조하고자 했던 주제를 뒤늦게 드러낸다. <주홍글씨>는 어느 누구도 절대 악인으로 내몰지 않으면서도 이제껏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장면들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이 재해석된 영화의 요점을 관객들은 별로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듯 하다.

개인적인 아쉬움은, <주홍글씨>에서의 ‘형벌의 공간’을 좀 더 지옥 같은 현장으로 남겨두었으면 좋지 않았겠나 하는 점이다. ‘장난 처럼 시작된’ 유혹과 그것에 응답한 인간이 어떤 형벌의 현장으로 인도받게 되는지를 부각시키려고 작정했었다면 두 남여 주인공의 애틋한(?) 과거지사를 밝힘으로써 면죄부를 부여하는 수순은 밟지 말았어야 했을텐데 <주홍글씨>는 마지막에 밝혀지는 감춰졌던 사연을 통해 완전한 희생자로만 보였던 인물 역시 같은 ‘죄와 벌’의 굴레 속의 동일한 존재로 끌어들이는 대신, 순수한 욕망의 화신들로 보였던 인물들에게는 동정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주제의 부각을 약간 희석시켜버린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다. 피칠갑 보다 더욱 잔인한 지옥의 구현이 못내 아쉽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