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Whitney Houston


Whitney Houston
휘트니 휴스턴
[1963. 8. 9. ~ 2012. 2. 1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그 곳에서는 
행복하게 노래부를 수 있기를

The Greatest Love of All

I believe the children are our future
Teach them well and let them lead the way
Show them all the beauty they possess inside
Give them a sense of pride to make it easier
Let the children’s laughter remind us of how we used to be
어린이들은 우리의 미래,
그들을 제대로 가르쳐 스스로 앞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해,
또 그들이 소유한 내면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게 해 줘야지,
그러려면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줘야 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통해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지 기억해 내야지.

Everybody’s searching for a hero
People need someone to look up to
I never found anyone to fulfill my needs
A lonely place to be
So I learned to depend on me
모든 이가 영웅을 찾고 있어,
사람들은 존경할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난 이제껏 그런 사람을 가져보지 못했네,
그런 현실이 너무 황량해서,
나는 내 자신에게 의지하는 걸 배웠다네,

I decided long ago, never to walk in anyone’s shadow
If I fail, if I succeed
At least I live as I believe
No matter what they take from me
They can’t take away my dignity
Because the greatest love of all
Is happening to me
오래 전 난 결심했지, 절대 누군가의 그림자에 묻히지 않으리라고,
내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난 적어도 내가 믿는 대로 살아갈 거야,
그들이 내게서 무엇을 뺐어 가든지 간에,
절대 나의 존엄성 만은 가져가지 못하게 할 거야,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이,
바로 내게 있으니,

The greatest love of all
Is easy to achieve
Learning to love yourself
It is the greatest love of all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은,
찾기 쉬워,
너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게 바로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이야.

I believe the children are our future
Teach them well and let them lead the way
Show them all the beauty they possess inside
Give them a sense of pride to make it easier
Let the children’s laughter remind us how we used to be
어린이들은 우리의 미래,
그들을 제대로 가르쳐 스스로 앞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해,
또 그들이 소유한 내면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게 해 줘야지,
그러려면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줘야 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통해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지 기억해 내야지.

I decided long ago, never to walk in anyone’s shadow
If I fail, if I succeed
At least I live as I believe
No matter what they take from me
They can’t take away my dignity
Because the greatest love of all
Is happening to me
I found the greatest love of all
Inside of me
오래 전 난 결심했지, 절대 누군가의 그림자에 묻히지 않으리라고,
내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난 적어도 내가 믿는 대로 살아갈 거야,
그들이 내게서 무엇을 뺐어 가든지 간에,
절대 나의 존엄성 만은 가져가지 못하게 할 거야,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이,
바로 내게 있으니,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바로 내 안에서 찾아 냈으니,

And if by chance that special place
That you’ve been dreaming of
Leads you to a lonely place
Find your strength in love
네가 꿈꾸던,
특별한 바로 그 곳이 어쩌다,
황량하게 변해 버린다면,
사랑 속에서 너의 힘을 찾아 봐.

영진공 일동

“브로큰 플라워” (Broken Flowers), 과거의 나와 대면한다는 것


The Past is gone, I know that. Future isn’t here yet, whatever it’s going to be. So, all there is, this is the present. That’s it.

우리는 시간을 과거 , 현재 , 미래 이 세가지로 분류한다. 그러나 미래는 끊임없이 다가와서 현재가 되고 , 현재는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과거가 되어버리며 , 과거는 잊고 있던 순간에 불쑥 튀어나와 현재가 되기도 한다. 아니 , 정확히는 현재의 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사랑 , 연인 , 그런것들 말이다. 다시 되돌려놓고 싶은 과거는 껍데기만 남아 현재를 위로하며 , 무심하게도 잊고 있던 과거는 종종 어떤 계기로 인해 현재의 나를 괴롭힌다. 돈 존스턴이 어느 날 받은 분홍색 편지. 그것이 괴롭고 귀찮게도 과거의 여인들과 재회해야 하는 퀘스트의 시작이다. 당연히 흔쾌히 찾아나설리가 없다. 나라도 ! 내가 생각하는 ‘과거의 나와 대면하는 일’ 이란 쪽팔려서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일인데 하물며 과거의 연인이라니.

함께 영화를 본 이는 ‘존 돈스턴은 찾아갈 과거의 사랑들이 많아서 외로운 사람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과연 그럴까?

옛일을 돌이켜 보면 나한테 잘못한 이들도 많았지만 그에 필적할만큼 내 잘못도 많다. 편집증적 기질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이 돼가려는건진 몰라도, 그런 이들에게 찾아가 용서를 빌거나 아니면 내가 옛날에 해주지 못했던것을 해주면 어떨까하는 그런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이미 엎질러진 물 주워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나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며 좀 웃기긴 하지만 ‘내가 옛날에 너에게 맛있는거 한 번도 못 사줬으니까 다음주에 내가 밥 한번 살께.’ 라며 용서를 구한다면 이내 ‘*까.’ 라는 대답을 듣고 말 것이다. 과거를 현재에서 고칠순 없다. 다만 끊임없이 뉘우치며 살다보면 미래 어느 순간에는 과거의 잘못이 고쳐져 있는 것을 발견할수 있겠지. (… 라고 제멋대로 결론 내려본다.)

과거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이유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당신은 나를 순수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처럼 말도 안되는 오해를 다시는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결국은 나를 위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안타깝고 씁슬하긴 하지만.

영진공 담패설

“밀리언 달러 베이비”,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을 가진 사람을 알아 본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은 이런 말을 한다. “이제 나는 무슨 낙으로 살죠?”
그래, 인생에 낙이 없으면 뭐하고 살지? 각자의 대답이야 다르겠지만 극 중에서 이우진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예전의 “이산가족 상봉”이나 “꼭 한번 만나고 싶다”를 보다 보면 거기 나오는 어르신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런 건가? 더 사시면서 행복을 누리고 싶다고 하는 건 너무 욕심인 건가.

“매기(Maggie Fitzgerald)”는 서른 두 살이 되었다. 집안이 넉넉하지도 않고 그다지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살아온 그녀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꿈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손님이 남긴 고기를 몰래 집으로 싸가지고 가 허기를 때우면서라도 자기의 꿈을 위해 돈을 모았고,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자기의 꿈을 이루어주리라 믿는 이를 계속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버스 안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참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에디(Eddie “Scrap-Iron” Dupris)”는 퇴물복서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복서시절의 상처로 한쪽 눈이 먼 채 체육관 청소를 하면서 산다. 잘 곳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어서 체육관 한 켠에서 생활하면서 그렇게 산다. 그에겐 꿈이 없다, 아니 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에겐 낙이 있고 여한도 있다.

그의 낙은 꿈이 있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고, 그들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마지막 경기를 해보고 싶다는,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한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에디”는 “매기”를 알아본다. 자기에겐 없는 꿈을 가지고 있기에 그는 그녀의 존재감을 금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자 애쓴다. 그게 그의 낙이니까.

“매기”는 그저 앞을 향해 뛰어갈 뿐이다. 꿈을 좇아 뛰는 그녀에겐 그 꿈을 이루고 나면 다시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등의 고민은 없다. 꿈을 이루려면 뛰어야 하고 그렇게 뛰는 게 즐거울 따름이니까.

그렇게 “매기”는 꿈을 이룬다. 딱히 그녀가 원했던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자기의 삶에 그만큼이라도 찾아와주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 꿈은 대가를 요구했고 그녀는 그걸 치러야 했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아니 남으로 하여금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면서 그녀의 꿈보다 더 크고 탐스런 걸 얻는 이도 많지만 “매기”는 그런 건 크게 억울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꿈은 내 것이고 나는 그걸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거니까.

“에디”는 “매기”가 꿈을 이뤘다는 걸 안다.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못 이룬 그이기에 그녀가 이룬 꿈을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꿈을 이룬 대가로 더 이상은 꿈을 갖지 못하게 되었기에 “에디”는 그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낙도 없고 여한도 없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지 그는 알아채는 것이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당신은 무슨 낙으로 사는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런 답을 적지 못할 것이다. 언제쯤 그 답을 적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던 나의 등 뒤에서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재미 없다. 너무 실망이야 …”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그 분이 부럽기도 하였다. 그 분은 아마도 아직 삶 속에서 쓰라린 아픔이나 꿈의 절실함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리라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래서 이 영화가 그닥 감동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게 느껴졌으리라 내멋대로 해석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걸어 나오던 내 머리 속에는 내내 “매기”가 버스 안에서 짓던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꿈을 바라보며 아무런 꾸밈없이 해맑게 웃는 그 미소가.

영진공 이규훈

스마트 TV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CES 2012에서는 다양한 신제품이 발표되었다. TV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OLED TV 였고 그 다음은 스마트 TV였다. 특히 전세계 TV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성전자의 스마트 TV 플랫폼은 관심의 촛점이었다.


당장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국내외 평가를 종합해 보면 호의적인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상과는 달리 안드로이드 OS를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반응속도나 사용자 UI는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siri 만큼 똑똑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음성인식 기능에 동작인식까지 덤으로 갖췄고, 스마트폰과의 콘텐츠 공유 기능인 Allshare는 애플의 airplay보다 훨씬 더 쓸만해 보였다. 그리고 앵그리버드가 아무 문제 없이 휭휭 돌아가는 모습을 선보이는 장면에선 다들 감탄사를 내뱉었다, WoW!

하지만 궁금한 건 이거다. 내가 이걸 왜 사야 하는 거지? 50인치 대화면 TV에서 앵그리버드를 하려고?

아무래도 대부분의 스마트TV 기획자나 개발자들은 스마트폰(이라기보다는 아이폰)의 성공 공식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즉,

1) 뛰어난 사용자 UX,
2) 오만가지 앱이 득시글거리는 앱스토어,
3) 인터넷과의 연동

이 스마트 TV를 성공시킬 열쇠라고 믿는 모양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스마트”란 단어를 공유한다 할지라도 폰은 폰, TV는 TV다. 둘의 성공 공식이 동일할 리 없다.

핸드폰은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걸 주목적으로 하는, 그 태생부터 굉장히 능동적인 기기다. 데이터 통신망을 이용해 웹브라우징을 하고, 짧은 문자 메시지를 긴 이메일로 확장시킨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게임은 이미 피쳐폰 시대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런 기능을 제대로 쓰려면 편리한 UI를 갖춰야 하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거실 TV는 굉장히 수동적인 기기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무식한 게으름뱅이를 위한 바보상자이다. 쇼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귤을 까먹으며 아무 생각없이 드라마를 보다 말고 갑자기 TV 화면에 이메일을 띄우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거라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보는 편이 훨씬 빠를 텐데.

하지만 TV에서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기능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게 VOD(Video on Demand)다.

여기서 잠시 미국 시장으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자. 미국은 TV소유 세대수의 약 8할이 케이블TV나 위성방송, IPTV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부터 이들 대형 케이블 TV업체들은 iPAD를 비롯한 타블렛 대상의 방송 서비스에 일제히 힘을 쏟기 시작했다.

타임워너 사의 조사에 따르면 2006년 당시 정시방송의 주당 시청 시간은 31.7시간이었지만 VOD(video on demand) 시청 시간은 주당 0.4시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에는 VOD의 시청 시간이 주당 2.5시간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2.5시간이라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건 고연령층까지 포함한 평균치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만을 계산에 넣는다면 이 수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 요즘은 내 주변에서도 셋탑 박스나 IPTV에서 필요할 때마다 영화를 사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꿋꿋하게 토렌트나 웹하드를 뒤지는 인간들의 숫자가 훨씬 많긴 하지만.

MP3 플레이어의 킬러 콘텐츠가 음악이고, 스마트폰의 킬러 콘텐츠가 앱이라면, 거실 TV의 킬러 콘텐츠는 영상일 수밖에 없다. 아이팟은 음악을 유통하는 뮤직 스토어를 통해 MP3 플레이어 시장을 평정하고, 아이폰은 앱을 유통하는 앱스토어를 선보이며 핸드폰 시장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거실 TV가 스마트 TV로 진화하기 위한 열쇠는 자명하다. 그것은 영상물 유통의 혁신에 있다.

어느 나라든  TV 콘텐츠 시장에서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주파수를 독점하고 있는 공중파 방송국이다. 그 다음은 지역별로 난립한 케이블 TV 회사들이다. 이들 방송에 비하면 DVD, 블루레이, VOD 등 홈비디오 시장의 비중은 굉장히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방송 시장의 총 매출 규모는 10조를 넘어가는 반면, 홈비디오 시장 규모는 기껏해야 3, 4백억 정도에 그칠 뿐이다.

지난 수십년간 TV는 브라운관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고, HD 해상도로 바뀌고, 아예 브라운관이 사라지고 PDP와 LCD로 바뀌는 등, 재탄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바뀐 건 물리적인 부분일 따름이었다. 실질적으로 콘텐츠를 틀어쥔 게 방송국이란 사실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가전회사는 주연이 아닌 조연에 불과했고, TV는 방송국이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드라마나 뉴스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 위한 깡통에 불과했다!




그런데 … 지금 가전회사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이다. 방송국 눈치를 보지 않고, 직접 방송국에 맞먹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말이다. 그것도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를 상대로 장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전세계 TV 시장에서 탑을 달리는 삼성전자의 작년 한 해 평판 TV 판매량은 대략 4300만대, 올해 목표는 5천만대라고 한다. 만일 삼성이 자사 TV 물량을 고스란히 스마트 TV로 전환한다면, 그리고 공중파 방송국에 준하는 콘텐츠 유통 플랫폼을 개발해 탑재시킨다면, 매년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 필적하는 5천만명의 시청자를 기본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만한 숫자라면 VOD는 뒤로 미뤄놓고 광고만 팔아도 돈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둘이 아니다. 저작권자들과 지리한 협상을 통해 컨텐츠를 확보하고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국가에선 어떤 식으로 컨텐츠를 공급할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숙제는, 공중파나 케이블보다 더 쉽고 간단하고 편리하게 컨텐츠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공중파 방송은 안테나만 세우면 볼 수 있다. 케이블 TV에 전화 한 통만 넣으면 채널이 순식간에 백여 개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스마트 TV는 전원선만 꽂으면 즉각 수백 개의 채널을 저렴하게(또는 공짜로), 그리고 손쉽게 볼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내세워야 한다. 대체 어떤 식으로?

글쎄, 그걸 잘 모르겠다. 그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궁리해야 하는 건 삼성이나 LG같은 제조사들의 몫이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스마트 TV에 스마트폰의 기능을 우겨넣는데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TV를 파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국가의 방송국을 능가할 수도 있는 절대적인 방송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니 말이다. 그리고 기껏 내놓은 스마트 TV라는 건 스마트폰의 화면을 가로세로로 뻥튀기한 물건에 불과하다.

하긴 뭐, 아이패드도 처음엔 아이폰의 뻥튀기판에 불과하단 비아냥을 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패드는 들고 다닐 수도 있고, 침대에 누워서 만지작거릴 수도 있고, 후장을 자극하는 치질의 고통과 맞서 싸우기 위해 화장실에 가져갈 수도 있다.
 

반면에 거실 TV는 …… 흠, 더 이상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당신은 그 리모컨조차도 맘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건 당신 게 아니라 사모님 거니까!


영진공 DJ Han



 

“스테이션 에이전트”, 친구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주인공 핀 역을 맡은 “피터 딩클리지”, 굉장히 낯익은 배우라 생각했는데 막상 imdb.com 필모그래피에 낯선 영화들만 있습니다. 결국 저 역시 이 사람을 그냥 ‘난장이 배우’로 봤던 것일까요. 신체상의 특성이 필요한 역에 언제나 조연으로 출연하다가 드디어 주연을 맡는구나! 라면서 축하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편견이란 놈의 위력은 셉니다. 저 역시 어쩔 수 없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인 것이죠.

졸지에 뉴저지의 낡은 역사에 가게 된 핀. 정신없고 산만한 사고뭉치 아줌마 올리비아와 연일 시끄럽게 말 거는 조와 엮이게 됩니다. 핀은 난장이이고, 올리비아는 좀 정신 나간 아줌마고, 조는 이민 2세에 핫도그 파는 청년이죠. ‘성별과 연령과 장애와 상처를 넘어선 우정’이라고 혹자들은 나이브하게 말하겠지만, 그들이 친구가 되는 건, 아니 딱 그들로만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난쟁이이고 아들을 잃은 후 정신이 나가버린 아줌마이며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거 별로 없는 이민 2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들 약점이 있고 주류 사회에 결코 낄 수 없는 ‘헛점투성이’ 인간이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과, 소위 자신을 정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뭐, 이런 설정과 줄거리, 그리하여 이들이 마침내 마음을 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아름다운 우정을 갖게 된다는 영화는 세상에 넘쳐나고 흔합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영화가 제 기대 이상이었고 어필을 했던 건 배우들의 호연 탓이겠죠. 감독이 차분히 연출을 쌓아가는 솜씨도 꽤 안정적이고요.

핀과 올리비아가 서로 상처를 뱉어내며 결국 오열하는 장면에서 같이 울고 말았습니다. 역시나,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저 어떨 땐,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결국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를 할퀴어대고, 결국 그 앞에 허물어져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는 거죠.

소소한 하나 하나에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은 오히려 강력한 방어기제를 갖고 더욱 무뚝뚝하게 굽니다. 핀의 도피처는 기차였고, 올리비아의 도피처는 그림이었지요. 남의 친절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고 귀찮기만 합니다. 때론 나의 친절은, 다른 이에게 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가면의 제스처이기도 해요. 남 앞에서 적당히 빵긋빵긋 웃으면, 상대는 더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기술마저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고 때로 그 상처를 한 잔의 술이나 한 개피의 담배로 겨우 폭발 직전 상태로 진정시키며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그 상처들이 ‘낫지는’ 않아요. 다만 우리는, 누구나 그런 상처를 하나쯤은 가슴 깊이 숨겨둔 채, 그저 혼자 있을 때 혼자서만 분출하다가, 다른 이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긋 웃을 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실, 상처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상처를 가리는 기술이 늘고 방어기제의 기술이 세련되지는 것에 불과한 건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저 혼자 아프고 저 혼자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철딱써니들이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인지도 몰라요. 남들의 웃음 속에서 아픔을, 상처를, 절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 웃는 얼굴 뒤에 나보다 더 큰 상처를 꾹꾹 억누르고 있으려니, 라는 상상은 절대로 해보지 못하는 사람들.

약해빠지고 아무 대책 없고, 이를 악물고 그저 ‘오늘 하루’ 잘 버티는 게 오늘의 희망사항인 사람이 단지 남에게 폐끼치고 싶진 않다는 이유에서 상처를 숨기면, 상처가 없는 줄 알고 상처를 하나둘, 셋, 계속 안겨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 뻔뻔한 인간들은, ‘당신은 강하니까 잘 버텨낼 거예요’ 같은 말을 덧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위로를 한답시고, 실은 내가 주는 상처 버텨내라고 강요의 주문을 하고 있는 셈이죠. 상대가 얼마나 아플지는 피상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그만큼 아파봐야 알까요? 아니요, 자기가 그만큼 아프면, 이 바보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아픈 줄 알고 날뜁니다.

어찌됐건 이들은 그럭저럭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친구가 됩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를 나눠마시는 모습은 진부한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핀과 올리비아와 조에게 각자 서로 친구가 생긴 건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