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아메리칸 갱스터> – 미국식 자본주의의 단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스터부터 간지 폭발.
(우리나라의 조폭영화들을 포함해) 갱스터 영화들은 그들이 속하고 있는 사회가 어떤 폭력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장르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많은 ‘걸작’들이 갱스터 영화라는 틀을 이용해 그 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폭로했으며, 나아가 그 사회가 기반하고 있는 물적 토대의 원리(즉 자본주의)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한 어떻게 인간을 비인간화하는지 고발하며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곤 했다. 특히 미국의 갱스터 영화들은 종종 미국이라는 거대 근대국가의 탄생부터가 철저히 폭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또한 지금의 ‘거대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얼마나 폭력적인 자본주의를 운용하는가를 고발하는 영화들이기도 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최근작 <아메리칸 갱스터> 역시 그러한 갱스터 영화의 미덕을 충실히 수행한다. 다만 이 영화가 새로워 보이는 것은 기존의 영화와 정반대의 전략을 취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갱스터 영화들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부와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이면에 놓인 자본주의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자본주의적 실천의 화신이라 할 만한 인물을 통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이것의 폭력성을 은유적으로 제시한다.


이른바 ‘기업 CEO 같은’ 갱을 보여주는 <아메리칸 갱스터>는 마약 시장이라는 일종의 불완전 경쟁 시장에 후발주자로 뛰어든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가 기존 갱들처럼 총과 칼에 의한 협박과 살인과 갈취가 아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기업활동’으로서 마약의 제국을 건설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생산자 직거래와 대량 구매로 원가를 절감하고 운송비를 절약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고, 이로써 자신의 경쟁자들보다 훨씬 좋은 상품을 훨씬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이른바 ‘공급 경쟁’의 원칙을 구현해낸다. 이미 거대 기업의 체인망 확대와 대형화 등 후기 자본주의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던 60년대 후반의 뉴욕에서 루카스의 사업적(!) 스승인 범피 존슨(클레어런스 윌리엄스 3세, 이 캐릭터는 <코튼 클럽>과 <후드럼> 두 영화 모두에서 로렌스 피시번이 연기한 바 있다)은 이 후기 자본주의적 현상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지만, 루카스는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기업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결국 이런 대량 유통을 통해 시장의 절대 지배력을 장악하고 독점 공급자의 위치에 오른다.


애초에 지역 판매에 만족하고자 했던 그가 일종의 ‘전국 유통 대행’에 해당하는 계약을 맺고 판매처를 전국으로 확장한 것은 꼭 그의 사업적 야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시장 독점을 형성하게 된 것에 대해 기존의 마약 도매상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고(여기에 그의 피부색은 더욱 반발감을 가져왔다), 그는 이것을 돈 카타노가 이끄는 이탈리아 갱과의 제휴를 통해 어느 정도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굳이 마르크스의 탁월한 예견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후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독과점, 혹은 대형화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브랜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상표권 분쟁’도 겪는다. 애초 이 영화의 모태가 된 마크 제이콥슨의 기사 ‘거물의 귀환(The Return of Superfly)’를 읽어보면, 당시 헤로인은 루카스가 팔았던 블루매직 뿐만 아니라 다종다양한 ‘브랜드’를 달고 거리에서 팔리고 있었다고 하며, 마크 제이콥슨이 열거하는 브랜드만 해도 얼추 열 개가 넘는다. 다만 자신의 상표를 도용한 니키 반즈(큐바 구딩 주니어)를 찾아가 항의하는 프랭크 루카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다소 ‘나이브’한 인식을 갖고 있던 당시의 다른 이들과 달리 그가 현대적인 의미의 브랜드 마케팅에 있어서도 매우 선구적인 안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는데, 사실 그가 10년이 훨씬 넘게 뉴욕의 뒷골목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본주의의 원칙, 특히나 미국에서 1960년대에 발흥한 신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을 충분히 인식하고 충실하게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 추종자들이 ‘자본주의의 승리’라며 칭송할 만도 했던 이 모범적이고 능력있는 사업가 프랭크 루카스에게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가 취급한 상품이 ‘마약’이었다는 사실뿐이다. 만약 그가 마약이 아닌 다른 합법적인 상품을 취급했더라면 흑인 최초의 거대기업의 CEO가 될 수 도 있었겠지만, 그가 범죄의 세계에서 마약왕이 된 것은 시대가 그의 인식을 뒤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업가형 갱스터 - 현대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

한편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대가 60년대에서 70년대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 시기가 미국의 격동기였다는 사실은 프랭크 루카스를 좀더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어준다. 이 시기는 베트남전과 이에 대한 반대의 시위가 들끓으며 히피 정신이 널리 퍼지는 한편 격렬한 시민권 투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베트남전의 진짜 목적은 ‘석유, 고무, 주석’이었으며, 미국의 경제는 베트남전이 뜻밖에 장기화를 겪으면서 전쟁 전에 회복했던 경기와 전쟁 초기에 누렸던 유례없는 호황이 장기적인 침체로 이어지게 되는데, 당시 미국의 경제수치가 바닥을 치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피부에 느껴지는 경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면 이것은 프랭크 루카스를 위시해 갱들이 이끄는 지하 세계의 경제가 그만큼 활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랭크 루카스가 이끌던 암흑 경제는 베트남 종전 후에 불어닥칠 급격한 경기침체를 어느 정도 완만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한마디로 표현해 ‘언제나 전쟁으로 먹고 살았던’ 미국의 경제는 베트남 전에 있어서도 꼭 석유, 고무, 주석을 위한 군수물자 뿐 아니라 (비록 미국 정부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헤로인에 의한 경제가 되는 셈이기도 한데,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미국식 자본주의’, 나아가 ‘미국식 제국주의’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랭크 루카스가 그토록 오랫동안 미국의 암흑경제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마틴 루터 킹과 말콤엑스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시민권 투쟁은 한편으로 흑인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을 폐지하고 흑인 자신의 주체성과 자의식을 일깨우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편견과 차별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일시적으로는 반감에 의한 편견이 오히려 더 강화될 수 있다. 루카스의 경우 물론 그가 범피 존슨의 사업철학을 따라 워낙 할렘가를 잘 챙겼고 또 한편으로 불필요한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옷차림과 행동거지에 있어 워낙 수수한 검소함을 이어나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의식을 찾기 시작한 흑인들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이러한 시민권 투쟁의 일련의 혜택을 입었을 뿐 아니라, 그가 흑인이기에 여전히 차별받는 바로 그 상황에서도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마약왕으로 암흑경제의 주축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흑인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 편견 덕이기도 했다. 그 역사적인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지어의 경기장에 그가 화려한 옷차림으로 가장 좋은 좌석에 앉아 비로소 리치 로버츠의 주목을 끌었을 때조차도, 리치 로버츠는 그가 암흑경제의 바로 그 ‘거물’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표적이 된 것은 리치 로버츠가 비로소 편견을 버리고 사건에 접근했을 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들리 스콧의 그림 뽑아내는 솜씨는 과연 예술.

아이리쉬 갱부터 이탈리아 갱(이른바 ‘마피아’), 그리고 흑인 할렘가의 마약왕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지하세계를 주름잡았던 갱의 계보에 수많은 전설적인 갱들이 있었음에도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를 하면서 비로소 ‘미국의 갱스터’라는 보편 명사를 쓴 이유는, 아마도 프랭크 루카스가 보여준 행적이야말로 지극히 현대적인 미국의 후기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취급하는 상품의 윤리성을 따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지금 미국이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영토는 프랭크 루카스 시절의 뉴욕 할렘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서 한미 FTA를 들먹이는 건 분명 ‘오바’이지만, 영화의 제목에서 American의 n을 떼고 그 자리에 쉼표(,)를 붙여보는 장난을 쳤을 때 도출되는 새로운 의미에 새삼 한기를 느끼는 것은 그리 ‘오바’인 것 같지 않다.


영진공 노바리



ps1. ‘화목한 가정의 범죄자’와 ‘가정이 파탄난 형사’의 구도는 누아르 영화에서 꽤 오래된 농담(!)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한발 더 나간다. 추수감사절, 루카스네가 온 가족이 모여 풍성한 추수감사절 파티를 벌이는 장면 바로 뒤에, 콘플레이크를 뿌려 혼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리치 로버츠의 모습이 붙는다. 그런데 더 가관인 건, 이 바로 뒤에 붙는 트루포 형사의 모습. 리치보다도 더 초라하게 혼자 밥을 먹던 그는 산 칠면조와 폭탄 선물까지 받는다.


ps2. 단순한 대화장면마저 박진감 넘치는 리들리 스콧씩 화면 짜기. 주인공 클로즈업만 잡았다 하면 화면이 썰렁해지는 한국영화들을 보다가 이 영화를 보니 눈이 다 맑게 씻기는 듯한 느낌이다. 두 사람의 대화 씬에서 액션-리액션-액션 씬으로 끊어지는 컷들을 잘 만들기 위해 한국 감독들과 배우들은 제발 이 영화의 대화 씬들을 면밀히 연구해 보시기 바란다.


ps3. 덴젤 워싱턴, 아주 신이 났더라. 하긴 그가 이제껏 지나치게 모범적인 이미지로만 나온 것도, 뒤늦게야 비로소 악당 역으로 선회하면서도 퍽 조심스러웠던 것도 그에게 ‘흑인 이미지 전체’에 대한 막중한 부담과 책임감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야심이 있는 이라면 지독한 악당 역을 해보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인데, 그간 덴젤 워싱턴이 그토록 모범적이고 반듯한 역할만 해오면서 ‘너무 모범생 이미지’ 소리 들었던 것도 결국은 흑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 때문이고, 배우 본인은 정작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겠나 싶다. 이 영화에서 너무 신나서 완전 날아다니는 덴젤 워싱턴을 보노라니, 이 배우가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새삼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가사 검열] “Are You Going With Me?”, Pat Metheny

오늘 준비한 곡은 Pat Metheny Group의 연주곡 “Are You Going With Me?”이다.

재즈 기타리스트로 워낙 유명한 Pat Metheny인지라 별다른 소개는 필요 없을 테고, 감상하실 곡은 Pat Metheny Group의 네 번째 앨범 <Offramp> (1982)에 있는 곡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인적으로 이 곡을 들을때마다 생각나는 건,
몇 년 전 미국 서부를 여행할 때 컨버터블 차를 하나 빌려서,
아리조나에서 유타로 넘어가는 도로를 달릴 때 이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갔던 기억이다.

한 없이 곧게 직선으로만 뻗어있는 도로를 따라 사막의 아지랭이 속을 달릴 때,
말 그대로 몽환적으로 울려퍼지는 이 음악의 기억이란 …

암튼 각설하고 …

첫 동영상은 뮤직 비디오이고 두 번째 동영상은 Anna Maria Jopek과의 공연 실황이다.

그럼 모두들 즐감~ ^.^

Are You Going With Me?
By Pat Metheny Group (1982)


“Music Video”


“Live With Anna Maria Jopek”

동사서독, 醉生夢死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메뉴는
당신의 기억을 깨끗이 비워드리는
醉生夢死입니다.

이별의 아픈 기억으로 당신이 지금까지
드셨던 천일취(天日醉)보다야 훨씬 고급술입니다.
단 너무 많이 마셔버리면
앞으로 영원히 사랑을 잊어 버리실지도 모릅니다.”



무협로맨스를 지향하는 영화 동사서독은 앙리의 와호장룡보다 훨씬 난해하게 사랑에 대해 그린
영화라고 봅니다. 몇 년전 미국에서 와호장룡이 대 히트를 칠 때 앙리의 이 작품이 결국 왕가위
에게 큰 빛을 지고 있지 않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중경삼림을 더 좋아하지만 사실 동사서독이 중경삼림보다 못한, 와호장룡보다
조금 못한 이유는 딱 한가지인 듯 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동사서독의 완결판을 본적이 없으니까요.

영화를 보다 보면 시대의 상황이나 극장 주들의 상영시간 단축 요청 등 제작사의 흥행의 이유로
이유 없이 잘려나가 반 쪽짜리 영화로 밖에 볼 수 없는 영화들이 생깁니다. 그 중 대표적인 편집
잘못으로 관객들에게 어필이 안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데 이러한 예의 영화들을 찾아보면
4시간의 원작을 자랑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2시간 이상 잘려 개봉되어 줄거리의 혼돈을
가져 왔던 Once upon a time in America나 제작사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되어버렸던 블래이드 러너 그리고 상영시간의 문제로 30분 이상 잘렸던 오우삼 최고의 명작
첩혈쌍웅, 시네마천국 등등이 아쉬움을 가져 왔던 영화라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다시 꺼내는 동사서독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왕가위 감독의 정통 서정무협 동사서독은
지루한 제작 기간으로 인해 오히려 중간에 취미 삼아 찍었던 중경삼림이 더 세계적으로 히트하는
바람에 맥빠지게 개봉되었고 상영시간은 달랑 100분 남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원작이 약 4시간
이라고 하는 낭설만 있지 도대체 기승전결을 알 수 없는 형이상학의 영화가 되버린것 같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4시간짜리의 원작을 찾아보지만 중화권에 살고 있지 않고 설사 있더라도
중국말이 맹탕인 나에게는 어불성설에 불과 할 뿐이다. 미국에서 구한 DVD역시 100남짓의 한국
개봉 시 편집과 대동 소이 할 뿐입니다. 그래서 중경삼림보다 타락천사보다 동사서독은 난해한
영화이고 어려운 영화로 보입니다. 그 당시 중화권의 최고 배우들 장국영, 장만옥, 양가위,
임청하, 양조휘까지 각기 한 홍콩 영화의 대가들이 모인 종합 백과 사전적인 영화임에도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이미지는 쓸쓸하게 우울하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마치 소설이 아닌 한편의 서정시를 보듯이.




동사서독은 왕가위 철학의 집대성으로 보입니다. 그의 사랑 3부작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에서의 화두들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사랑은 이루어질 때 아름다운 것이 아니나 떠나 보낼때에
오히려 지고 무상한 아름다움으로 꽃이 핀다고 강변하는 듯 합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이루어져 결혼으로 끝을 맺고나면 그 후에는 지루한 현실만이 남아버려 우리가 언제
사랑을 했었나란 의문 부호에 빠질때가 많습니다.

거기까지 전개하지 않더라도 누구던 가슴한구석에 모셔 놓고있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애틋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늘 다가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요.

영화에서 동사건 서독이건 그 둘과 이루어지지 못했던 임청하건, 장만옥이건 모두 다 쓸쓸한
일상을 보냅니다. 그리고 후회를 하면서도 그 인연들을 바로 잡지 못합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영화는 화두를 던집니다. 이루어지 못한 사랑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고… ….

블레이드러너도 결국 완결편이 나오고, 원스어폰어타임인 아메리카도 10여년전 4시간짜리
완결편을 보았습니다. 동사서독의 완결판을 볼 기회는 없을까요. 아님 떠나간 사랑은 그저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놓고 그냥 일상을 살아도 별 지장은 없어 보이니 그렇게 진달래꽃 한 그루를
키우면 될까요?

거의 10년 만에 다시 본 동사서독에서는 장국영도, 왕가위도, 장만옥도, 임청하도
그리고 양조위도 우울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칩니다.

인생 뭐 있니, 그냥 그렇게 살면 되지.


영진공 클린트

죽다 살아난 김경재氏 第4話

“인공혈관을 달아야겠어.”
회진시간에 들어온 보건소장이 느닷없이 말을 던지자 경재씨는 어리둥절하여 쳐다보았다.


“예? … 인공혈관이요?”
“응, 인공혈관. 핏줄이 꽉 막힌 사람들에게는 정말 훌륭한 대안이지. 그렇지 않겠나?”
“그럴 수도 있겠죠 …”
“역시 동의하는 군.”
“예?”

어리둥절해하는 경재씨와 잠깐 눈을 마주치는 듯 하던 보건소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게 꼭 필요해.”
“저한테요?”
“우리 몸의 혈류 속도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키고 혈전을 감소시킬 유일한 대안이지.”
“왜요?”
“이건 단군 이래 가장 큰 사업이 될 거야.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야.”
“저기, 지금 그게 저한테 왜 필요하다는 건가요?”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된다고들 난린지, 원.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경재씨의 물음에는 아랑곳없이 보건소장은 계속 인공혈관이 얼마나 좋은 건지를 반복해서 말할 따름이었다. 그런 얘기들을 한참 듣고 있던 경재씨는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왜 제 질문에는 대답 않으시고 계속 엉뚱한 말씀만 하시는 거죠?”

“이런, 자네, 태도가 왜 그 모양인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내 놓고 반박을 해야지,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면 곤란해.”
“소장님이 먼저 일방적으로 얘기를 하신 거잖아요.”
“자네가 동의했잖아!”
“제가 언제요? … 아까 물어 보시길래 그냥 좋을 수도 있겠다고 그랬던 거지, 제가 그걸 하자고 한 적은 없잖아요.”
“쯧쯧쯧, 사람이 이리 말을 자꾸 바꿔서야, 원 …”

경재씨는 보건소장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인공혈관을 정말로 몸에 달고 다닌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섬뜩하였던 것이다.
“제 혈관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미래를 생각해야지.”
“담배 끊고 술 줄이면 되잖아요?”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나? 첨단 현대 공학이 눈 앞에 실현되는 걸 상상해 봐.”
“운동도 열심히 하고요.”
“가만있어도 인공혈관용 모터가 정화작용을 일으켜서 피가 깨끗해진다는 말일세.”
“음식도 가려 먹고요.”
“게다가 그걸 보러 오는 사람들한테 관람료를 받으면 …”

그 대목에서 경재씨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공혈관을 달고 있는 자신을 구경시키고 관람료를 받겠다는 보건소장의 말에 경재씨는 눈을 크게 뜨고 따져 물었다.
“지금 뭐라 하신 거죠? 관람료라뇨. 그럼 지금 저를 구경거리로 만들겠다는 겁니까!”

경재씨의 반발에 보건소장은 아차 싶었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도 잠깐, 소장은 다시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단호하게 쏘아 붙였다.
“자네는 역시 좌측신체과다발달증이 심각해. 왜 자꾸만 삐딱하게 생각하는 건가. 자네 깨끗한 혈관이 싫은가? 돈 벌기 싫은가?”
“누가 깨끗한 혈관이 싫다고, 돈 벌기 싫다고 그랬나요. 자꾸 말 돌리지 마세요!”
“인공 심장을 생각해 봐. 줄기 세포를 생각해 봐. 모두 다 안 된다고 할 때 신념과 믿음으로 밀어붙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엄청난 부가가치를 누리는 거야. 그들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혜택을 보고 있는데, 지금 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면 안 돼!”
“그거랑 이거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들먹이시는 겁니까? 도대체 제 몸 어디가 잘못됐는지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셔야죠. 인공혈관이 왜 필요한지도요. 그리고 인공혈관에 엄청난 돈이 들 텐데 그건 누가 내나요!”
“그러니까 관람료를 받아야 한단 말일세! 먼저 의료업체에서 선시술하면 그 비용을 관람료로 나누어 납부하면 된단 말이야! 이렇게 좋은 조건의 시술에 왜 딴지를 거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고함에 가까운 보건소장의 대꾸에 흠칫 놀란 경재씨의 눈에 그제서야 소장의 뒤에 서있는 간호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손에 암부백과 기도삽관장치를 들고 여차하면 달려들 태세로 서있었는데 그 옆에는 심장충격기의 모습도 보였다.

눈을 부릅뜬 채 버티고 서있는 보건소장과 그의 뒤에 도열해있는 간호사들의 모습을 번갈아 살피던 김경재씨는 서서히 기가 꺾였고, 얼마간을 주저하다가 겨우 한마디 하였다.
“저기, 그래도 제 몸인데 제 의견도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

경재씨의 풀 죽은 모습을 확인한 소장은 만면에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답하였다.
“오, 의견, 좋지. 그래, 그럼 의견을 한 번 말해봐요.”
“저기, 저는 말이죠, 이런 일일수록 최대한 모든 상황을 검토하여 … 될 수 있으면 더 좋은 쪽으로 … 그러니까 굳이 해야 한다면 말이죠 … 안 해도 될 걸 할 필요는 …”
“오, 그래. 알았어, 자네의 의견을 충분히 알아들었네.”
“아, 예, 제 의견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럼. 자, 이제 의견 수렴한 걸 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보건소장은 친히 김경재씨의 어깨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기까지 한 후 바로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간호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의견 수렴도 끝났으니 어서 인공혈관 회사에 연락을 하자고. 그리고 기술팀들 회의도 소집하고 시술준비도 미리 해야지. 어서들 움직여.”
“아 참, 그리고 김 간호사님은 우리 경재씨한테 좋은 영양제 하나 놔드리고. 지금 빨리요.”

보건소장의 지시에 따라 미리 준비해 놓은 주사기를 들고 간호사가 경재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경재씨는 간호사의 손에 들려있는 게 영양제 주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사를 맞으면 통증을 잊을 수 있고 편히 잠들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가만히 있었고, 바늘이 팔뚝에 꽂히는 걸 느끼면서 경재씨는 간호사에게 힘없이 한마디 하였다.

“저기요, 간호사님. 나가실 때 TV 좀 틀어주실래요 …”
.
.
.
.
.

(계속)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진공 이규훈

<헤어스프레이>, 춤과 노래에 묻혀버린 사회사적 가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62년의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풍자 정신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 춤 좋고 노래 좋고, 유머 감각도 훌륭해서 보는 동안 낄낄거리며 잘 봤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별로 할 말이 없다는게 고민입니다. 뮤지컬 영화와 나는 왜 이토록 궁합이 잘 맞지를 않는 건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88년 존 워터스 감독의 영화가 2002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것을 다시 영화화한 것이 지금의 <헤어스프레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단순히 20년만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시카고>(2002)의 성공 사례와 같이 기존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흥행성이 이미 입증된 좋은 뮤지컬을 보다 많은 관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복제 생산과 동시 감상 매체’로의 전환 작업의 결과물이란 거죠.

지금은 거의 못가보고 있습니다만 한때는 연극도 보러 많이 다녔습니다. 특히 소극장 연극은 지척거리에 있는 배우들의 숨소리와 미세한 표정들까지 놓치지 않고 관람할 수 있는 꽤 특별한 자리죠. 지금 한창 자기 역할에 몰두하고 있는 내 앞의 저 배우가 진행 중이던 극 중의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와 평범한 목소리로 말을 건내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러나 그런 가능의 영역을 옆에 두고 계속 극 중의 상황과 자기 배역 안에 머물기로 약속하면서 형성되는 묘한 긴장 같은 것이 연극 무대의 매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도 실제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면 그런 현장감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을텐데, 이상하게도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뭔가 맥이 빠지고 시시하다는 생각부터 앞서곤 하니 이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물랑 루즈>(2001)는 뮤지컬 영화이면서도 왠만한 멜러 드라마 이상의 감흥을 얻을 수 있었던, 저에게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물론 노래와 춤도 많이 좋아했었죠. 뮤지컬 영화 중에 좋았던 또 다른 예는 존 카메론 미첼의 <헤드윅>(2001)이 있습니다. <헤드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먼저 선을 보이고 영화로 다시 찍은 작품이었잖습니까. 하지만 <시카고>나 <드림걸즈>(2006)는 노래 참 잘하네 하는 것 이상의 감흥은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 차이는 결국 뮤지컬이냐 아니냐 하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러티브가 충분하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춤과 노래를 강조하느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버린 내러티브의 많은 뮤지컬 영화를 통해 ‘뮤지컬 영화는 그저 그렇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는 거죠. 물론 대사를 하다말고 갑자기 춤 추고 노래하는 뮤지컬 장르 본래의 특성 자체가 드라마에 몰입하기 힘들게 만드는 부분도 있을테고요.

<헤어스프레이>는 뮤지컬 영화인 동시에 코미디물입니다. 인종 차별, 외모 지상주의, 상업화된 대중 매체 등 시대적으로 상당한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영화는 그런 문제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백인들은 록앤롤과 빅밴드 풍의 노래를 부르며 스윙 댄스를 추고 흑인들은 펑키한 리듬 앤 블루스와 소울 풍의 춤과 노래로 재능을 뽐냅니다. 젊은 출연진들 뿐만 아니라 엽기적인 특수 분장을 한 존 트라볼타를 비롯해 미셸 파이퍼, 크리스토퍼 워큰, 퀸 라이파, 제임스 마스덴(아니, 이 친구는 원래 이렇게 노래를 잘 했던 건가요? 깜짝 놀랐습니다) 등 잘 알려진 배우들도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고 멋진 노래와 웃음을 선사합니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낙관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며 시종일관 잘 달리는 것이지만 그런 만큼 쉽게 잊혀지고 마는 단순한 내러티브의 단점은 명백합니다. 악인은 망하고 새로운 희망의 물결은 승리한다는 거죠. 하지만 세상이 어디 뮤지컬 무대처럼 술술 굴러가 주던가요. 기술적으로는 흠 잡을 데가 없는 완벽하지만 “그리하여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식으로 끝나는 디즈니 명작만화 같은 판타지의 허전한 뒷맛을 저는 <헤어스프레이>에서 경험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원작 뮤지컬에서 그대로 가져온 훌륭한 곡들이 참 많은 영화인데요, 특히 여주인공이 ‘사회적 편견을 내재화하고 있는’ 자기 엄마에게 들려주는 Welcome to 60’s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곡입니다. 헤어 스프레이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인 62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에 의해 냉전 체제가 자리를 잡고 50년대의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이라는 극보수주의의 광풍이 한 차례 몰아닥친 시기 이후의 미국 중산층 사회를 지칭합니다. 인종 차별 철폐 등의 인권 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시기이면 60년대 후반의 히피 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이어지는 사회사적 맥락을 끌어안고 있는 작품이 <헤어스프레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포레스트 검프>(1994)가 어린 시절을 너무 깡시골에서 보내느라 놓쳤던 부분을 <헤어스프레이>는 볼티모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상당히 잘 다뤄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