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검열] Highway Patrolman

오늘의 가사 검열은 Bruce Springsteen의 “Highway Patrolman”이다.

1982년 앨범 <Nebraska>에 수록되어있는 이 노래는 한 영화의 원작이 되기도 했는데, 그 영화는 Sean Penn의 감독 데뷰작인 <Indian Runner> (199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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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동영상은 노래와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축약해 보여주고 있다.

그럼 모두들 즐감~ ^.^

Highway Patrolman
By Bruce Springsteen (1982)

My name is Joe Roberts I work for the state
I’m a sergeant out of Perrineville barracks number 8
I always done an honest job as honest as I could
I got a brother named Frankie and Frankie ain’t no good

내 이름은 조 로버츠, 주(州) 공무원이지,
페린필 지역 8번 구역에서 경사로 일하고 있다네,
난 항상 정직하게 일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내 동생 프랭키는 말썽만 일으키곤 한다네,

Now ever since we was young kids it’s been the same come down
I get a call over the radio Frankie’s in trouble downtown
Well if it was any other man, I’d put him straight away
But when it’s your brother sometimes you look the other way

나와 그 녀석은 어릴 때도 그랬었지,
프랭키가 시내에서 싸움이 났다는 무전을 받을 때면,
다른 놈들 같으면 그냥 잡아 넣으면 되지만,
아무래도 동생이다 보니 봐주군 한다네,

Yeah me and Frankie laughin’ and drinkin’
Nothin’ feels better than blood on blood
Takin’ turns dancin’ with Maria as the band
Played “Night of the Johnstown Flood”

프랭키와 난 함께 술 마시며 즐기곤 했지,
피를 나눈 형제보다 편한 건 없었다네,
“존스타운에 홍수오던 밤” 음악에 맞춰,
마리아와 번갈아 춤도 추었지,

I catch him when he’s strayin’ like any brother would
Man turns his back on his family well he just ain’t no good

다른 집안 동생들 처럼 그 녀석이 방황할 때 내가 바로 잡곤 했지,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으니 …

Well Frankie went in the army back in 1965
I got a farm deferment, settled down, took Maria for my wife
But them wheat prices kept on droppin’ till it was like we were gettin’ robbed
Frankie came home in `68, and me, I took this job

프랭키는 1965년에 군대에 갔지,
난 징병연기를 받고, 정착하여, 마리아와 결혼을 하였지,
하지만 밀 가격은 계속 하락하여 마치 강도를 만난 것 같았어,
1968년에 프랭키는 집으로 돌아왔고 난 지금의 일을 얻었지,

Yeah we’re laughin’ and drinkin’
Nothin’ feels better than blood on blood
Takin’ turns dancin’ with Maria as the band
Played “Night of the Johnstown Flood”

프랭키와 난 함께 술 마시며 즐기곤 했지,
피를 나눈 형제보다 편한 건 없었다네,
“존스타운에 홍수오던 밤” 음악에 맞춰,
마리아와 번갈아 춤도 추었지,

I catch him when he’s strayin’ teach him how to walk that line
Man turns his back on his family he ain’t no friend of mine

그 녀석이 방황할 때 난 어떡하면 법을 지키며 살 수 있는지 알려주곤 했어,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잖아 …

Well the night was like any other, I got a call `bout quarter to nine
There was trouble in a roadhouse out on the Michigan line
There was a kid lyin’ on the floor lookin’ bad bleedin’ hard from his head
There was a girl cry’n’ at a table and it was Frank, they said

그러던 어느날 밤, 8시 45분에 무전을 받았지,
미시간 국도변에 있는 선술집에서 싸움이 났다더군,
한 청년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 바닥에 쓰러져 있고,
어느 여자가 테이블에 앉아 울면서 프랭키가 그랬다고, 하더래 …

Well I went out and I jumped in my car and I hit the lights
Well I musta done one hundred and ten through Michigan county that night
It was out at the crossroads, down `round Willow bank
Seen a Buick with Ohio plates. Behind the wheel was Frank

난 집에서 뛰쳐나와 차를 타고 헤드라이트를 켰지,
그 밤에 난 미시간 카운티를 170킬로가 넘게 차로 달렸어,
윌로우 뱅크에 있는 교차로에서 난,
오하이오 번호판의 뷰익을 보았고, 프랭키가 운전대를 잡고 있더군,

Well I chased him through them county roads
Till a sign said “Canadian border five miles from here”
I pulled over the side of the highway and watched his tail-lights disappear

그를 쫓아서 시골길을 달렸지,
한참 가다 보니 “캐나다 국경 5마일”이라고 쓰인 번호판이 보였어,
난 고속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프랭키가 탄 차의 미등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였네,

Me and Frankie laughin’ and drinkin’
Nothin’ feels better than blood on blood
Takin’ turns dancin’ with Maria as the band
Played “Night of the Johnstown Flood”

프랭키와 난 함께 술 마시며 즐기곤 했지,
피를 나눈 형제보다 편한 건 없었다네,
“존스타운에 홍수오던 밤” 음악에 맞춰,
마리아와 번갈아 춤도 추었지,


영진공 이규훈

임순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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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제목, 그러나 어울리는.


작년 초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시나리오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시나리오 상의 영화는 지금 완성된 영화와는 아주 약간 뉘앙스가 달랐습니다. 내용도 거의 다르지 않고 현재 홍보 역시 ‘아줌마’를 키워드로 잡고 있긴 하지만, 뭐랄까, 시나리오로 읽었던 영화는 좀더 ‘막장 인생의 마지막 비상의 화려함’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승부와 상관없이, 나도 가치있는 인간이며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였달까요. 완성된 영화 역시 이것을 강조합니다만, 그보다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승부차기 골에 실패하고 승부가 결정된 순간 아쉬워하며 주저앉고 울음을 터뜨리는 선수들의 모습 때문인지, 죽도록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하는 비장미 쪽이 더 느껴지는 듯합니다. 사실 시나리오 상으로는, 미숙(문소리)이 승부차기를 막 던지고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은 채 막바로 무지화면에 “이 날 핸드볼 팀은 결국 은메달을 땄다”는 자막이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 돼 있었습니다. 그 시나리오에 그토록 흥분하며 눈물을 쏟았던 것도 바로 그 엔딩 때문이었는데, 전 지금도 이 엔딩이 지금의 엔딩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반 대중영화로서 그리 친절한 엔딩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델마와 루이스> 같은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에서도 영화사에 길이 남는 특별한 엔딩을 본 적이 있는걸요. 이 영화가 그 앞에서 계속 고양시켜 왔던 흥분은 이기느냐 지느냐, 전세계 최고가 되느냐, 금메달을 따느냐를 이미 초월한 것이었고, 안승필(엄태웅)도 힘주어 말하듯 이기든 지든 그 순간은 그들에게 ‘최고의 순간’이라 붙여도 될 만큼 가장 아름다운 투혼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전 정말로 이 영화가, 우석훈 박사의 논의를 빌면 누릴 기회가 아직 남아있었던 X세대에 속하면서도 ‘여성’이기에 혹은 대졸이 아니기에 이미 88만원 세대보다 일찍부터 88만원 세대로 살 수밖에 없었던 지금의 30대 초중반 여성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또 그들을 위한 영화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술자리에서 뵌 심재명 대표에게 흥분해서 ‘이 영화의 존재가 너무 고맙다’고까지 말을 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오히려 패배감을 더 부채질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게 현실이지 않냐고요? 하지만 같은 패배라도 장엄하고 숭고한 패배가 있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패배가 있는 법입니다. 패배의 역사를 오히려 승리로 전화시켰던 <판의 미로>의 결말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노동계급을 위한 판타지’라는 건 그저 우울하고 절망적인 패배도, 손쉽고 ‘우기기’에 불과한 승리도 아닌, 이렇게 당당하게 근거를 가진 아름다운 패배의 승리로 수놓아져야 마땅합니다. 가장 모범적인 예가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저 하늘 높이 비상하고, 형과 아버지가 객석에서 눈물어린 박수를 치는 마지막 장면이며, 위에서도 언급했듯 <델마와 루이스>의 아름다운 우정의 승리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뭐, 시나리오 상의 설정은 실제 영화를 찍으면서 바뀌기 마련인 거고, ‘책’ 상태를 가지고 지금의 영화가 어때야 했다 저때야 했다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명확한 캐릭터들의 대립과 갈등과 화합입니다. 우리는 크게 미숙(문소리)과 혜경(김정은)의 갈등, 혜경과 승필의 갈등, 그리고 노땅그룹과 신진그룹의 갈등을 목격하며, 비인기 종목이다가 올림픽 때만 되면 당연히 메달 따와야 하는 종목인 핸드볼을 하는 이들과 이들을 둘러싼 환경의 갈등을 봅니다. 미숙과 혜경, 혜경과 승필을 잡는 카메라는 매우 고집스럽게도 각 인물들을 각각의 프레임에 가둡니다. 바닥을 닦고 있던 혜경과, 승필로부터 혜경이 돈을 마련해준 것이란 사실을 듣고 혜경에게 온 미숙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데 두 사람을 한 프레임으로 잡는 컷이 없습니다. 한 컷에 한 인물씩 장면을 반복할 뿐입니다. 이들이 비로소 한 프레임 안에 함께 잡히는 건, ‘가출했던’ 미숙이 다시 선수촌에 돌아와 혜경과 훈련을 같이 하는 장면부터입니다. 혜경과 승필의 경우도 마찬가지. 선수촌을 나가는 혜경을 잡기 위해 왔으면서도 잡는 말을 못 하는 승필과 혜경을 차 안에서 함께 잡는 씬이, 비로소 처음으로 두 인물을 한 화면에 잡는 장면입니다. 이런 식의 구성 방식은 분명 각 인물의 고립감과 고독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만, 컷과 컷이 매우 단조롭다는 느낌, 그리고 화면 안이 상당히 비어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문소리와 김정은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런 단독 컷들을 다 채울 만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각자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이런 프레임이 과연 좋은 프레임인지, 의심이 듭니다. 사실 이 씬 구성에 굉장히 놀랐어요. 너무 어설퍼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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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분투하고,

임순례 감독은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추락하는 인물들을 통해 더없이 절망적이고 어두운 이야기들을 풀어냈지만, 그가 정말로 재능이 있는 분야는 코미디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애초 그를 주목받게 해주었던 단편 <우중산책>에서도,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만든 단편 <그녀의 무게>(인권영화인 <여섯 개의 시선>에 수록돼 있습니다)에서도 드러납니다.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이 남자였고, <우중산책>과 <그녀의 무게>의 주인공들이 여자라는 건 단순히 성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성별이 가지는 섬세함과 디테일함의 표현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애초 장르 자체가 코미디인 건 아니지만 영화 내내 굉장히 자연스럽고도 솔직한 웃음을 안겨주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그가 그리는 캐릭터들의 그 생동감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화합의 드라마에 대한 낙천적인 시선의 디테일 묘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임순례 감독은, 여성을 묘사하는 데에 더 생생한 캐릭터를 부여한다는 얘기지요. 사실 같은 영화 안에서도 승필에 대한 묘사는 좀 상투적인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신진그룹 선수 중 하나가 “지들끼리 다 해먹으라 그래”라는 대사를 하는데, 저는 이게 무척 마음에 걸렸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미숙과 혜경이니 만큼, 우리는 ‘노장의 나이에도 열심히 뛰며 심지어 젊은 선수들을 압도해버리는’ 그녀들에게 손쉽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지만, 미숙과 혜경의 존재는 한편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야 할 선수들의 앞길을 막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미숙과 혜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생활을, 경력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암울한 현실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체적인 능력은 물론이고 노련함과 연륜으로 젊은 선수들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신진 선수들을 휘어잡는 것을 무턱대고 응원만 하기엔 마음 한 구석이 어두운 것도 사실이네요. 저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미숙과 혜경의 사정 역시 매우 절박합니다만, 이것이 젊은 선수들의 앞길을 막고 뺏으면서까지 해결돼야 하고 응원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88만원 세대]를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를 화두로 잡게 된 저로서는, 특히 감독대행에서 곧장 선수로 다시 위치를 바꾸는 혜경의 선택이 탐탁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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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손이 맞닿은’ 게 진짜 뽀인트. 핸드볼은 단체경기라니깐요.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건 아무래도 마지막 결승전이네요. 전 당황스러웠던 게, 이 영화가 본경기가 끝났고, 동점 상태에서 첫 번째 연장전, 또다시 동점 상태에서 두 번째 연장전, 그리고 또다시 동점 상태에서 승부차기로 가는 그 긴박감과 박진감이 완전히 지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이 전반전인지 후반전인지, 첫 번째 연장전인지 두 번째 연장전인지, 아나운서의 해설 멘트를 통해 정보를 주는 건 매우 진부한 수법이긴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긴장감을 계속 고조시켜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영화는 코트 안에서 선수들을 따라잡는 데에 바빠서 그런 식의 정보를 그리 명확히 주고 있지 못하고, 응당 필요한 긴박감 조성에도 실패합니다. 아무리 결과가 예정돼 있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경기라 해도 마찬가지예요. 설마 영화를 보러 온 모든 사람들이 그 경기를 모두 TV로 보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승패와 화려한 경기보다 각 캐릭터들의 감정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그 감정의 스펙터클 역시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응원을 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역시 장면 구성에 있어 실패한 씬이 아닌가,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제발 ‘흥행감독 임감독’ 되셨으면 좋겠다”라고 빌었는데, 그 소원은 이루어진 듯합니다만, 뭐랄까, 임순례 감독의 굉장한 강점과 매력을, 한계와 함께 봐버린 듯해서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근간에 나온 한국영화들 중 가장 응원과 지지를 받아야 할 영화라는 사실은 여전합니다. 이 영화가 시도한 새로운 도전들과 그 도전들을 감내한 용기들(여러 모로 ‘장사 안 될’ 소재들을 갖고 보편적인 감동이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낸 것)은 분명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영화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이 영화는 선취해 내고 있습니다.


영진공 노바리

<더 재킷>, 이게 웬 걸프전 천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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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포스터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실제 영화 내용과 달라 작품이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관객이 예상하고 찾아왔던 그 내용을 보여주지 않아 억울한 죄 값을 치르는 거죠. 영화가 너무 형편없이 만들어져서 혹평을 듣는 경우는 변명할 건덕지조차 없습니다만, 관객이 예상했던 내용과 실제 내용 간에 불일치가 있어서 실망을 안겨주는 일은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대중들에게 영화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왜곡 때문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있는 내용을 그대로 알리자니 관객들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좀 더 일반적인 대중 영화로 보이게끔 재포장을 하는 거죠. 덕분에 첫 주말 개봉에서 꽤 많은 스크린 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지만 그 대신 일반적인 화법과 내용을 기대하는 다수 관객들과의 충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시하다, 이상하다는 평을 들으며 어느새 사라지게 됩니다.1)

애드리안 브로디와 키이라 나이틀리를 내세운 <더 재킷>의 국내용 포스터는 그런대로 무난한 편입니다만 이 영화의 오리니널 포스터는 완전히 하드코어 호러물입니다. 애드리안 브로디의 얼굴을 잔뜩 왜곡시켜놓고 두 눈을 뻘겋게 칠해놓으니 좀비 영화 포스터가 따로 없습니다. 이상한 재킷을 입으면 사람이 괴물로 변하는 내용인가,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호러 영화의 이미지를 버리고 어지간한 스릴러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진 국내용 포스터는 SF 스릴러 쪽에 가깝습니다. 여기에 영화 잡지의 프리뷰 제목은 “걸프전 증후군을 다룬 스릴러”였습니다. 갑자기 걸프전이라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드리안 라인 감독, 팀 로빈스 주연의 <야곱의 사다리>(1990) 생각이 나면서 지금도 이라크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을 호되게 꾸짖는 내용인가보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재킷>의 실제 내용은 호러도 아니요 SF 스릴러도 아니요 전쟁 비판도 아닌, 삶과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아주 착한 영화였습니다.

브래드 앤더슨 감독의 <머시니스트>(2004) 도 너무 착한 결말 때문에 호불호가 상당히 엇갈렸던 작품이었습니다.2) <머시니스트>와 <더 재킷>은 제니퍼 제이슨 리가 두 작품에 모두 출연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유사점이 꽤 많습니다. <머시니스트>와 같이 결말을 알고 나면 이제껏 긴장하고 궁금했던 모든 것이 다 해결되어 버리는, 그리하여 허탈하기까지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더 재킷>도 약간 지나치게 건전한 결말을 유도하고 그와 같은 메시지를 관객 호주머니 속에 푹 찔러 넣어주기까지 하는 강박증을 보입니다. 어쩌면 스티븐 소더버그와 조지 클루니에 의해 영화 제작이 주도되고 여기에 연출자가 섭외된 형태로 만들어지다 보니 최종 편집 과정에서 감독의 의도 보다는 제작자의 현실적인 판단이 더 앞세워졌던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더 재킷>이 <머시니스트> 보다 좀 더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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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재킷>은 내용 면에서 호러도 스릴러도 전쟁 비판도 아닌, 차라리 <베를린 천사의 시>(1987)를 연상시킵니다. 주인공 잭(애드리안 브로디)은 91년 걸프전 참전 하사관인데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1년 후 귀국하자마자 경찰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됩니다. 중증 환자 치료용 압박 재킷을 입고 약물이 투여된 다음 시체 보관함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통해 가까운 미래, 2007년으로의 시간 여행을 하게 됩니다. 와우. 이 정도 설정이라면 영화는 어디로든 마음먹은 대로 뻗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더 재킷>은 스펙타클이나 정치적 메타포의 제시 보다는 지극히 개인화된 삶의 소중함 일깨우기로 마무리됩니다. 그런 메시지가 결코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더 재킷>을 보러온 관객들의 기대와는 다소 어긋나는 내용일 수 있겠다는 얘기입니다. 이와 반대로 생각지도 않게 마음이 크게 움직여서 영화가 정말 좋더라는 반응도 나올 수가 있겠습니다.(이런 얘기는 보통 극장 상영이 끝난 후 케이블 TV를 통해 우연히 보다가, 이렇게 시작되죠)

애드리안 브로디는 어떤 작품에서건 크게 실망할 일이 없는 좋은 배우이긴 하지만 그간 보아왔던 작품들 가운데 ‘제대로 주연작’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에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이번 <더 재킷>이 그런 아쉬움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줍니다. <더 재킷>이 애드리안 브로디를 확인하는 작품이라면 키이라 나이틀리는 배우로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할만 합니다. 주인공이 바꿔놓은 미래 때문에 같은 인물이지만 판이한 두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을텐데 덕분에 키이라 나이틀리가 가진 배우로서의 역량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중년이 된 제니퍼 제이슨 리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면서도 역시 좋은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이제는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자리를 굳히신 다니엘 크레이그 역시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인상적인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전반적인 배우들의 캐스팅이나 연기에 있어서 만큼은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스티븐 소더버그에 조지 클루니까지 제작에 참여한 작품인데다가 걸프전이 배경이 된다고 해서 실제 영화 내용과 다른 예상을 하고 봤더니 어쩔 수 없는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되었네요. 반복되는 말입니다만 <더 재킷>은 엄청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호러나 액션 스릴러가 전혀 아니고 비교적 잔잔한 흐름의 판타지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체 보관함에 갖혀서 괴로워하는 애드리안 브로디와 함께 폐소공포증을 경험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잠시일 뿐, 그곳에 들어가야만 수수께기를 풀고 미래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주인공과 함께 기꺼이 자청해서 함께 들어가고자 하게 됩니다. 시나리오 자체가 그랬던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연출은 흠잡을 데 없이 참 잘된 영화입니다. 존 메이버리의 전작 <러브 이즈 더 데블>(Love Is the Devil: Study for a Portrait of Francis Bacon, 1998)도 보고 싶고 2008년 말 개봉 예정인 차기작 <The Edge of Love>도 기대가 되네요. 차기작에는 키이라 나이틀리, 시에나 밀러, 킬리언 머피 등이 출연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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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 재킷>은 2005년작으로 좀 늦었지만 워너 브라더스의 배급 덕분에 국내에서도 정식 개봉을 하게된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배급사와 극장들 간의 불평등 조약 덕분에 극장이 걸고 싶지 않은 영화라 하더라도 약속된 수의 영화는 일정 기간 틀어줘야 한다더군요. 이런 점은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 쪽도 마찬가지이고요. 한국영화의 경우 제작사가 배급도 하는 경우가 많아 형편없는 영화들이 대다수 스크린을 독식하는 일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수입은 오히려 그 반대로 화제작은 아니지만 꽤 볼만한 영화들을 종종 멀티플렉스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2) 시종일관 엄청난 긴장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결말을 알고 나면 ‘그게 전부 그거 때문이었어?’하는 식이 됩니다. 저 역시 썩 마음에 드는 결말은 아니었지만 <머시니스트>는 크리스챤 베일의 살신성인하는 연기 때문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서 문제라고?

몇년 전에 우리나라에 온 하버드대 교육학과 교수인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의 영어 열풍은 미국의 다이어트 열풍이랑 비슷하다.
미국에서 다이어트 산업은 갈수록 커지고 다이어트에 쏟아붓는 비용도 갈수록 늘어남에도
오히려 비만인구 숫자는 더 늘어나는 것 처럼, 한국에서 영어교육에 열광하는데도 정작 영어 실력은 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간단히 말해서 영어를 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제 주변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몇년 지내면 서서히 영어 듣기 말하기가 약해진다고 말하더군요.
왜? 이유는 뻔하죠. 평소에 영어를 쓸 일이 없으니까요.

영어를 쓸 일이 생기려면 자꾸 외국인들을 만나야 하고 같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원치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외국 사람들과 같이 일하려면 지금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은 폐쇄적인 학연 시스템입니다.
서울대학교의 세계 랭킹은 좋게 봐줘서 1백위 내외지만,
외국에서 훨씬 랭킹이 높은 대학에서 그만큼 더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
국내에서는 서울대 출신에게 밀릴 수 있습니다. 실력만 있고 학연이 없다면 말입니다.

서울대의 저력은 대학 자체의 우수함이 아니라 서울대 졸업생들이 만들어놓은 네트워크의 힘에서 나옵니다.
이런 네트워크는 원래 폐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들끼리의 기준을 사용하기에 기본적으로 외부와의 교류를 하면 그 내부기준들이 흔들립니다. 혼란이 생길 뿐이죠.

외국엔 이런 네트워크가 없냐고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만큼 심하진 않습니다.
일단 외국의 학계는 단 하나의 우수한 대학과 그 이하 대학으로 줄세우기가 쉽지 않죠.
그러니까 네트워크가 있어도 그 네트워크 자체가 다원적이라 폐쇄성이 어느 정도 상쇄됩니다.
물론 미국도 유럽도 어디쯤 부터는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지만, 우리나라는 그 리그가 거의 대부분을 점유한다는게 문제죠.
이런 시스템에서는 네트워크에 편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편입한 이후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합니다.
서울대 망국론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도 그겁니다.
네트워크에 의존하다보면 결국 우물안 개구리 그 자체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폐쇄 네트워크 안에서만 최고인 인간들” 이 바로 그 우물 안 개구리죠.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 영어에 목을 맬까요?
어차피 그 영어 잘하는 직원들 뽑아놓고 1년에 한 두번 외국과 전화통화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왜?

지금 우리나라에서 영어는 국제화 시대에 외국과 교류하기 위한 언어로서의 가치 보다는 일종의 거름망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토플이나 토익은 21세기의 과거시험이 아닙니까.  그걸 가지고 사람들을 줄세우는 거죠.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교육 열풍, 조기유학 열풍은
국내 학교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면(물론 잘 가르친다는 보장도 없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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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무슨 용가리 통뼈가 있어서 국내 공립학교에서 영어교육을 100% 확실하게 실시했다고 치죠.
그러면 정말 큰일나버립니다. 모두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영어를 하고 비슷비슷한 수준의 토익 토플 점수를 받으면
차별성 지표로서 영어의 가치가 사라지거든요.
그럼 사교육과 학부모는 합심해서 다른 차별성 지표를 찾아나서야 됩니다.

수능을 갈수록 쉽게 내서 수능 상위권 점수자들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질수록 과외 열풍이 부는 이유랑 똑같습니다.  수능으로 차별을 못하니까 다른 차별 지표를 억지로 찾아내려다 보니 사교육이 커진거죠.

그럼 왜 차별을 해야 하나고요?
왜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너무 비슷비슷한데, 그 원하는 것은 얼마 없거든요.
그것은 바로 괜찮은 직업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괜찮은 직업을 놓고 벌이는 제로섬 게임장입니다.

백명의 사람이 열개의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경쟁을 하면 결국 그 백명중 열명을 골라낼 방법이 필요해집니다.
지금 영어가 바로 그 기능을 하고 있죠. 영어가 아니라면 뭐든 상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괜찮은 직업이 열개로 고정되어 있는 한 계속 될 겁니다.

결국 미친 조기교육, 비대해진 사교육, 무너져내리는 공교육, 영어 열풍의 원인은
모두가 원하는 괜찮은 직업이 너무 적다는 절대적인 상황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업이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 고용을 늘리고,
하청에 재하청에 재재하청을 줘가면서
정작 일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 보다는 중간에서 떼어먹는 몫이 더 큰 상황을 개선하고
대학이나 영어로 취득할 수 있는 괜찮은 직업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로 괜찮은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길들이 열리면
미쳤다고 누가 영어 열풍에 동참하겠습니까.

근데, 새 정부는 이 문제를 아주 순진하고 아마추어 스럽게 접근하는군요.
(물론 사실은 사교육업체와의 결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악의적 해석은 한동안 참겠습니다.
아무나 지들 맘에 안들면 빨갱이라 주절대며 온갖 곡해를 일삼던 인간들과는 달라지고 싶거든요)

지금 인수위가 내놓은 아이디어의 골자는 우리나라 공교육 환경을 미국 학교처럼 바꾸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유학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거죠.

일단 우리나라 교사들이 영어 수업을 제대로 한다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듯 혹시 만에 하나 성공한다고 해도 그게 문제 해결은 아닙니다.
다른 사교육의 탄생을 가져올 뿐이겠죠.


영진공 짱가

<영화야 미안해> – “혜리씨, 고마워”

소위 ‘디 워 사태’가 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영화 평론가의 존재 이유가 뭐가 있냐고 성토를 했었다. 니들이 뭔데 우리가 재밌다는 영화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거였다.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져 그네들이 쓰는 영화평이 전문가 뺨치는 시대가 된 건 분명하지만, 여전히 난 영화 평론가들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을 영화를 보면서 “건졌다”고 즐거워한 게 여러번이며, 내가 본 영화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적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그 고마운 평론가 중 하나가 바로 김혜리다. “스물 무렵, 영화보다 영화에 관한 글에 먼저 이끌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김혜리를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평론가로 꼽는 이유는 시네21에 연재되는 메신저 토크를 감탄하며 읽어서이기도 하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외국 감독과 인터뷰를 할 때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들에 혀를 내두른 기억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부수적인 이유로 김혜리는 여자다! 그리고 왠지 미녀일 것 같다!). 그가 <영화야 미안해>라는 책을 냈다.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책에서 소개된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30%에 불과하다. 책과 달리 영화라는 건 한번 지나가면 다시 보기 힘든 장르인지라 내가 나머지 영화들을 볼 확률은 지극히 낮다. 하지만 꼭 그 영화를 찾아보지 않는다 해도 김혜리의 글은 그 영화들의 엑기스와 더불어 풍부한 상식을 내게 전달해 줘,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예컨대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연기에 대한 영국배우와 할리우드 배우의 차이점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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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인 측면을 제외하더라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표현할 줄 아는 단어가 ‘너무’ 뿐이어서 ‘너무 맛있어’나 ‘너무너무 맛있어’란 말밖에 못하는 사람들만 질리게 봐온 터라 김혜리의 책에 나온 표현들에 가슴이 시려오기 때문이다. 그가 다코타 패닝에 대해 “이 아이는 눈물 한 방울로 세상에서 제일 큰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때 난 영화에서 본 패닝을 떠올리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고 그가 “알츠하이머병의 가장 깊은 슬픔은 오랫동안 알고 사랑해온 사람이 곁에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 슬픔은 망각의 강을 건너는 자가 아니라 이 편 기슭에 남는 사람의 몫이다”라고 말할 때 난 집에 계시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한다.
 
김혜리는 “영화의 밀도와 미덕에 합당한 대접을 하지 못하는 비례를 범하기도 했”다면서 그 영화들에 사과의 마음을 담아서 <영화야 미안해>를 부친다고 했다. 평소 영화를 좋아했다면, 그리고 영화에 빠져서 열시간 정도를 허우적대고픈 마음이 든다면 <영화야 미안해>를 골라보길 권한다. 김혜리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다 읽고 나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혜리씨, 고마워.


영진공 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