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중요성

영화 <은하해방전선>에는 두고두고 되새김질할 대사가 제법 많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소통’이란 단어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얘기를 그린 이 영화엔
부산으로 짐작되는 도시에서 영화제가 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주연배우인 혁권이 앞에 나가 관객의 질문을 받아야 한다.
뭘 말할지 모르겠다는 혁권에게 감독은 “그냥 소통 얘기만 하라”고 하고,
실제로 혁권은 모든 질문에 ‘소통’을 남발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뭔가요?
=인간의 소통을 그리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만들 때 어려움은 없었나요?
=소통이 잘 안되서 힘들었습니다.

며칠 전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는데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나온다.
인터뷰이는 얼마전 활동을 끝낸 인수위 부대변인이란다.
그가 답변하는 걸 듣고 있자니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 혼자 웃었다.
-인수위가 정책발표를 하면서 너무 서둘렀던 게 아니냐, 혼선도 있었고..
=국민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소통의 문제들이 있었다.
-인수위는 말 그대로 인수를 해야 하는데, 마치 정부가 출범한 것처럼 군 게 아니냐.
=소통 과정의 문제라고 보고요…
듣고 있던 손석희가 이렇게 말한다.
“소통의 문제를 몇 번 지적하셨는데 그건 내부의 소통이냐 국민과의 소통이냐?”

정류장을 알리는 방송 때문에 여기까지밖에 듣지 못했지만
그 대변인은 <은하해방전선>을 보면서 난해한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를 배웠음이 틀림없다.
그러고보니 이명박 당선자도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다.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BBK를 설립해 펀드를 묻어두고 있는 상태다”라고 말한 게 나중에 문제가 되자
이 당선자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소통에 오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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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만 잘 되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을, 여기서 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차기 정부의 이름을 실용정부로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용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역시나 소통,
차기 정부는 소통정부라 이름붙이는 게 어떨런지.


영진공 서민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코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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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포스터 중 하나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1976년작인 <택시 드라이버>는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수입금지 영화로 분류되었다가 90년대 초반인가에 첫 극장개봉을 했던 작품인지라 이 영화의 그 전설적 명성에 비하면 극장에서 필름으로 본 사람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택시 드라이버>는 호러영화로 시작해 기이한 멜러영화로 끝나면서, 전혀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영웅이 되는 고약한(?) 영화다. 버나드 허먼의 불길한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연기 속에서 택시가 화면 전면에 등장하는 오프닝도 그렇지만, 이 택시를 모는 사람이 밤거리를 휘저으며 다니다 막판에 대학살을 벌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전형적인 호러영화의 틀거리를 가져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의 택시, 그리고 이 택시 운전사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이라는 것.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서 일단 우리의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영위하는 보통의 일반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인물로 표상이 되는데,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제대한 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일종의 ‘생존자 증후군(혹은 서바이버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회 부적응자다.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그는 택시 안에 갖가지 손님들을 태우게 되는데,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흑인들을 태우기를 마다하지 않고 할렘에 가자는 요구에도 승차거부를 하지 않는다.


영화의 전반은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가 택시운전을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의 에피소드, 그리고 그가 아름다운 여인 베씨(시빌 셰퍼드)에게 반해 그녀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줍게 웃으며 흑인들을 태우는 것도 굳이 마다하지 않는 이 남자가 오히려 도시의 가장 밑바닥층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쓰레기’라 여기며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역시 처음에는 보통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면, 혹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과장적으로 말하는 그런 멘트로 여기기 마련이다. ‘얌전했던’ 그가 전면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되는 건 베씨에게 거절을 당하고 난 후부터다. 유난히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된 베씨와 수수한 (그리고 다소 촌스러운 옷차림의)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둘러쳐져 있는데, 이것은 곧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미국의 가치 아래 숨겨진,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의 차이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베씨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의 투명한 유리창이다. 거리로 향한 벽 전면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돼있는 사무실에서 선거 캠페인을 위해 일하는 베씨는 트래비스가 얼마든지 그 모습을 훔쳐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코 베씨(혹은 팔렌타인 후보)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멋지게 차려입은 대통령 후보는 때로 트래비스의 택시를 탈 수도 있기는 하지만, 밑바닥에서 거리를 쓸며 다니는 사람과, 고상한 언어로 미국의 변화를 부르짖는 정치권 인사 및 그를 둘러싼 부르주아 혹은 엘리트 계급의 사람들 사이에는 저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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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당시 14살이었던 조디 포스터(가운데).
일부 성적인 장면들은 그녀의 언니가 대역을 해줬다고.


그렇기에 그를 실제로 움직인 동력이 되는 것이 아이리스(조디 포스터)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마도 한적한 미국 남부의 시골 어드메에서 자랐음직한 아이리스는 어린 여자이고 돈이 없는 상태로 도시에서 최하의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녀의 존재는 곧 트래비스 그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 구해야 할 어떤 목적이 된다. 아름다운 저 위의 부르주아 여성 베씨를 연모하다 좌절한 트래비스는 이번에는 도시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여성, 그러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성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여성을 향한 플라토닉 러브를 몸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평범하게 관계를 맺고 사는 평범한 생활을 향한 트래비스의 욕망은 이렇듯 굴절돼 있고, 좌절돼 있다. 가장 소중한 최소의 것은 자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기존의 남성 가치는 아이리스를 착취하는 자들을 향한 총구에서 불을 뿜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 그러니까 트래비스에게 있어 아이리스는, 자신보다도 더욱 밑바닥에 위치해 있는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로, 트래비스의 대학살(?)은 자신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이를 구원함으로서 자신이 그보다 사회 위계질서에서 더 위쪽에 있음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회에 확인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에서 남자주인공들이 자신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이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이 최하가 아니라는 확인을 시도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같은 베이스를 공유하지만 정반대의 결과로 나아간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에 대해 서슴없이 마초 감독이라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이런 근거 때문이다. (‘마초’라는 말을 비하적으로만 해석하지는 말 것.)


그런데 트래비스가 총구를 향했던 것이 처음부터 아이리스를 착취하던 남자들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애초에 암살하려던 것은 팔렌타인 후보였는데, 사전 답사차 유세장에 갔을 때 그가 경호원과 대화를 나누는 씬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비롯해 사회 하류층을 억압하는 저 상부의 정치 토대에 대한 증오와 함께 실은 동경과 열망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베씨에게 했던 구애가 거절당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열망했던 것은 상류층의 자리까지도 아니고 그 상류층 옆에 서 있는 경호원 정도의 자리였고, 말하자면 그에겐 그 정도의 자리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 거기에, 그가 암살하려던 팔렌타인 후보는 아마도 민주당 내 전당대회를 거치던 후보로 짐작되는데, 영화에선 명시되지 않으나 베트남에 다녀온 트래비스로서는 민주당의 후보에 막연한 적개심을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이 시기가 흑인 민권운동이 들끓던 시기 직후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영화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반-흑인 정서는 마틴 스코시즈의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대도시의 뒷골목에 만연하고 있던, 혹은 온화하게 웃는 사람들의 밑바닥에 숨어있던 어떤 분위기를 스코시즈가 묘사해낸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할 터이다. 마치 소심하고 건실한 모습 뒤로 도시의 뒷골목(그 자신도 속해 있는)을 향한 적대감과 증오를 숨기고 있는 트래비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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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로 오빠의 팔 선… 하악하악


영웅이 된 뒤에도 트래비스는 여전히 밤거리의 택시기사로 살아간다. 동료들과 농담을 하고 내기를 하고, 택시를 모는 그에게는, 동료가 충고했던 ‘더 나은 미래’라는 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아이리스의 부모의 편지로 맺음을 하고 있지만, 이 편지 속에서 두려움을 읽은 것은 나의 과민함 때문일까? “거리가 너무 멀어 인사드리러 가지는 못하겠다”는 편지의 구절은, 정말 거리가 멀어서 여의치가 않다기보다는, 별로 보러 오고 싶지 않은데 마침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핑계로 드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과민함이 정말 감독의 의도에 맞다면, 아이리스의 부모는 무례하거나 염치가 없는 게 아니라 현명한 것이다. 냉정하게, 그리고 조금 싸가지없게 말하자면, 우리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얼결에 주인공이 된 ‘사이코’가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진공 노바리



ps. 너무 유명한 사실이지만, 젊은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영화에 직접 카메오로 출연한다. 흑인과 바람난 아내를 미행하는 남편 역. 영화 보다가 딱 이 장면에서 베실베실 웃음이 나왔는데 주위가 너무 적막하여 머쓱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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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오로 출연한 마틴 스코시즈 감독(왼쪽)과 로버트 드니로.


ps2. 젊고 새끈한 하비 키틀 역시 하악하악이다. 다만 그놈의 배바지가…


ps3. 반드시 봐야만 하는 스코시즈의 3대 초기 걸작(<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분노의 주먹>)을 드디어 필름으로 다 봤다. 하지만 그의 초기작 중 작은 영화들, 예컨대 <코미디의 왕>이나 <특근> 같은 영화들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들도 언젠가는 모두 필름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좋은 친구들>도 반드시… 기왕이면 비디오로도 절대 구하기 힘든 <바바라 허쉬의 대공황시대(원제는 ‘복스카 버사’)>나 <앨리스는 더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도 언젠가 꼭 볼 수 있기를. 스코시즈의 꽝작이라는 <뉴욕 뉴욕>도 보고 싶다. (마티 영감님의 평작은 다른 감독의 걸작보다 낫다… 라는 게 나의 믿음.)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비틀즈 음악에 대한 기대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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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하반기에 별 다섯 개를 너무 남발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올해는 별점 만큼은 약간 까다롭게, 그리하여 왠만해선 별 다섯 개는 아껴야지 마음 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무너지고 맙니다. 간혹 객관적인 판단 기준에 못미쳐도 혼자 각별한 무언가가 있을 때 별 네 개 짜리 영화에 하나 더 얹어 다섯 개로 기록해주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별 다섯 개, 만점 영화가 맞습니다. 여전히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저로서는 어느 한 구석 아쉬운 부분을 찾을 수가 없는 영화가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옆에 앉은 쉰내 나는 아저씨가 1시간 동안 팝콘과 나초를 버석버석 씹어대고 이후로는 5분마다 핸드폰을 열어대는 극악의 상황이었음에도(그 덕분에 반대편 옆자리에서 영화 초반 두세 차례 문자 날리기까지 하던 여자분은 아주 귀여운 수준이 되어버렸죠) 영화는 여전히 좋았습니다. 물론 좀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면 더더욱 좋았겠지만 그게 제 복인걸 어쩌겠습니까. All You Need Is Love. 영화가 좋으니 다 용서가 되더군요. –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했더라면 좌석 두 개를 예매해서 박스 구석에 앉아 옆 자리를 비워두고 봤을 겁니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그럴 가치가 충분한 영화니까요.

서울에서 메가박스 코엑스와 신촌, 그리고 씨네시티, 세 군데에서만 상영하는 데다가 상영 일정도 예매 사이트에  며칠씩 밖에 올라오지 않고 있어서 영화가 기대에 못미치는 수준이거나 아주 무시를 당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종영될지도 모르는 상황인지라 <추적자> 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서둘러 코엑스로 갔죠. 그러나 왠걸. 상영관은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가장 큰 곳이었고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습니다. 꼼짝없이 개념 탑재가 덜 된 분들 사이에 낑겨서 봐야했던 겁니다. 상당히 짜증스럽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영화는 너무 훌륭했습니다. All You Need Is Love. 영화가 좋으니 다 용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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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비틀즈의 노래들로 채워넣은 뮤지컬일 뿐만 아니라 60년대의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에 관한 헌정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쥬드(짐 스터져스)와 루시(에반 레이첼 우드)의 사랑 이야기를 기본으로 베트남 전쟁과 반전 운동이 펼쳐지고 재니스 조플린과 지미 헨드릭스가 한 무대에서 노래합니다. 또 60년대 반전운동이냐고요? 너무 자주 봐왔던 장면이지만 전혀 지겹지가 않습니다. 뮤지컬 영화의 법칙 : 노래가 좋으면 다 용서되지만 노래가 싫으면 엄청나게 허술한 영화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비틀즈 매니아가 아니라 하더라도, 비틀즈의 노래들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비틀즈의 유명한 노래 몇 곡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좋아하지 않던가요. 단순한 내러티브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무대용이 아닌 뮤지컬 ‘영화’를 위해 씌여진 스토리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호흡이 아주 훌륭합니다. 그리고 배우들이 직접 부르는 비틀즈의 노래들과 줄리 태이머 감독이 선보이는 다채로운 비주얼(CG나 편집 기술만으로 만들어진 영상이 결코 아니더군요)이 내러티브의 단순함을 전혀 느낄 수 없게 만들어줍니다.

스틸컷으로만 봤을 때는 캘빈 클라인 모델처럼 보였던 주인공들이 실제 영화 속에서는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요. 리버풀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쥬드(짐 스터지스)는 폴 매카트니를 생각나게 하고 애초에 쥬드 역으로 캐스팅되었다가 스스로 루시(에반 레이첼 우드)의 오빠 맥스 역을 자청했다는 조 앤더슨은 처음엔 존 레넌을 닮은 건가 했더니 나중엔 커트 코베인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보노와 조 카커가 직접 출연해 각각 I Am The Walrus와 Come Together를 불러주시는 건 정말 감사할 지경이고요(보노는 엔딩 크리딧 올라갈 때 나오는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도 불렀습니다) 줄리 태이머 감독의 전작 <프리다>(2002)에서 프리다 칼로를 연기했던 셀라 헤이액도 잠깐 등장해 주십니다. 여러모로 필견의 영화가 될 요소가 많음에도 과연 실제 완성품이 어떠할 것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저로서는 영화를 실제로 보고 나서야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었던 그 이상의 것들을 확인했다고, 아니 누릴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영화가 어떻다고 말이나 글로써 설명을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 감흥은 직접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이런 걸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말을 아끼는 것이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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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안녕, 노무현


새 시대의 첫 대통령이기를 원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구 시대의 마지막을 이끌어내려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지금,
그대를 향해 찬사를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시절이 그러합니다.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대의 발걸음에,
조용한 박수를 보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 노무현


영진공 편집자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