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레이서>를 결국 보다.

 

워쇼스키형제가 제작자가 아니었다면, 그 낮은 평점에 이 영화를 봤을 것 같진 않다.
그만큼 워쇼스키의 영향력은 날 지배했지만,
내 감정까지 좌우하진 못했다.

처음에 내가 어릴 적 알던 <달려라 번개호>의 주제가가 나왔을 때, 아 그때 그 노래가 번안곡이었구나,를 깨달았는데
그건 이 영화가 달려라 번개호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마하5, 6의 모양도 번개호와 판박이고,
중간에 점프하는 장치도 번개호 시절에 늘 나오던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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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워쇼스키의 문제는 번개호 세대를 겨냥했으면서도 정작 영화는 10세 내외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내가 동심을 그리 싫어하는 건 아니고, 웬만한 유치함도 참아넘길 수 있었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좀 심했다.
침팬지와 어린애가 조연으로 나오고, 경주 장면도 박진감이 없었다.
별 열 개가 만점이라면 딱 세 개 준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재미있어할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영화의 이미지와 그래픽을 좋아하는 것일텐데,
<300>에 대한 태도를 보면 이 영화가 자신에게 맞는지 알 수 있다.
서사에 목마른 난 줄거리가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훨씬 중요시하니 당연히 <300>이 재미없었고,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하기만 한 <스피드 레이서>가 재미있을 리가 없다.
내가 <아이언맨>을 보기 드물게 재미있다고 느낀 건,
그가 아이언맨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워낙 설득력 있게 잘 묘사된 탓인데,
화려한 이미지와 전투장면을 원했다면 <아이언맨>이 재미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워쇼스키는 내 마음 속의 영웅인 번개호를 저렇게 죽여버렸다.
그렇다고 그를 원망하고픈 마음이 들진 않는 것이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그가 몇번이나 날 황홀하게 만든 덕분이기도 하고,
번개호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면 <스피드 레이서> 이상가는 게 안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옛날이야 재밌게 봤지만
지금 내가 다시금 그때의 번개호를 본다면 과연 재미있다고 할까?
극장에서 나갈 때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들을 보니 슬며시 궁금해진다.
쟤들이 옛날 번개호 보면 재밌어 할까?


영진공 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