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초콜렛 공장”, 어디 착한 것만 갖구 신분상승 하겠어?


영화보면서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자꾸 서브 텍스트를 읽으려고 하는 것 참 나쁜 버릇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타고난 criticism이 타고난 creativity보다 많은 걸 …… 범재의 한계지.

“황금 티켓”이라는 건 나에게 “신분 상승을 위한 기회”의 메타포로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서고금, 애어른을 막론하고 겨우 초코렛 공장 한번 견학해 보자고 그 생난리를 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버루카 솔트의 공장에서 일하다가 황금티켓을 찾은 종업원이 스윽 그 티켓을 감추려다가 감독관에게 빼앗기는 장면은, 더욱 더 “황금 티켓”은 “신분상승”의 티켓이라는 혐의를 확실시 하게 한다.

영화는 신분상승의 황금티켓을 잡는 방법에 대해서 한가지 한가지 친절하게 예를 들어준다.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는 방법이란, 자본사회에 철저히 순응하며, 악착같이 재화를 소비하거나 (독일 뚱보 아우구스투스 사례), 자본력을 동원하거나 (땅콩공장 딸 버루카), 지독한 승부의식에 불타올라 끊임 없이 노력하거나 (챔피언쉽을 수십개 가진 바이올렛), 아니면 대단한 I.Q와 권모술수의 대가가 되는 일이다 (해킹으로 티켓을 얻은 마이크 티비).

이에 비하면 우리의 주인공 찰리 버켓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 티켓을 얻게된다. 근데, 이게 정당한 건가?

초콜렛 공장의 경우도 산업사회 역사를 압축한 혐의가 짙다. 윌리 웡카는 성공한 자본가이고 (물론 자본만 가지고 성공한 것은 아니고, 본인의 아이디어가 있으며, 사업가로써의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의 Enterpreneurship은 존경할 만하다), 찰리의 할아버지는 1차 Sabotage 세대, 찰리의 아버지는 2차 Sabotage세대다. 움파룸파족은 제 3세계의 노동자이며, 자본가인 윌리 웡카는 단순히 코코아빈을 움파룸파족에게 제공하는 저렴한 임금을 지불하면서도 심지어 자신이 불쌍한 움파룸파족을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움파룸파 족은 공장에 갖혀서 지내고 있다!)

자그맣고 충성스러운 움파룸파 족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제 3세계 노동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심지어 지하 수로에서의 노젓는 장면에서 윌리 웡카는 ‘저들은 앞을 볼 수 없지, 그저 명령하는 대로 저을 뿐’이라는 말까지 한다.) ‘후계자를 찾기 위해 아이들을 초콜렛 공장으로 초대했다’는 윌리 웡카는 왜!! 움파룸파 족에게는 공장을 물려주지 않는 걸까.

결국, 시키는 대로만 잘 하고, 매뉴얼대로만 살아가는 FM guy 찰리는 윌리 웡카에게 ‘초콜렛 공장 공동 경영권 및 상속권’을 손에 넣음으로써 신분상승에 성공한다. 자신을 해고한 자본가에게 끝까지 존경심과 경외심을 잃지 않았던 그의 할아버지는 건강을 다시 되찾고, 그의 착한 아버지는 자동화 설비와 함께 해고되었다가, 그 기계를 유지/보수하는 일로 재 취업됨으로써 ‘신기술로 인한 노동 소외는 다시 다른 노동의 필요로 채워진다’는 요지의 보수적 경제관념을 철저하게 증명까지 시켜준다.

정말? 정말 착하기만 하고, Creativity만 온 몸에 충만하면 신분 상승 할까? 정말?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라도, 어차피 우리는 끝없는 승부의식으로 자신을 세상에 던지는 바이올렛이기도 했다가 , 때로는 자신의 보잘것 없는 지력(知力)을 이용해 보려고 하는 마이크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하릴없이 자본이 쏟아 놓은 소비재들만을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해내며 자괴감에 빠져버리는 아우구스투수였다가 하지 않는가? (버루카 솔트는 예외니까 그냥 두자) 왜 이 아이들이 비난을 받아야하는가?

아이들을 벌 주는 방법자체도 상당히 아동학대적이기도 하지만, 왜 신분상승을 위해 악을 악을 쓰는 불쌍한 우리 중생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이 영화의 전체적 태도도 참 학대적이다. 난 내가 바이올렛이라는 것이, 마이크라는 것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다.

영진공 라이

[영진공 64호]Hunter S. Thompson,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재외공관소식
2006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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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ter S. Thompson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영화의 한 장면을 표지로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될 거란 광고를 분명 어디선가 몇 년 전에 본 것같은데, 아무리 온라인 서점들을
뒤져도 책의 존재는 없다. 영화 개봉이 무산되면서 책도 결국 엎어진 건가. 하여간, 새삼 Thompson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원서로 이 책을 사서 읽었고,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약에 취해 취재를 하고는 나중에 편집자와 방에 틀어박혀 녹음기를 재생시켜
녹취하는 게 커다란 일이었다는 톰슨답게, 이 책은 라스 베가스로 오토바이 경주 취재를 가서는 정작 취재는 뒷전인 채 각종 약에
신나게 취해서 벌이는 소동과 모험을 담고 있다.  (사실 이 일행의 관심이란 새끈한 차 – 빨간 컨버터블 -, 약, 그리고
여자이다.)

미국의 드럭컬처를 모른다면 이 책을 이해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 M.군은
이 책의 가장 인상깊은 장면으로 주인공의 ‘사모아인 변호사’ – 영화에선 일부러 18킬로를 찌운 베네치오 델 토로가 맡아
열연했다고 하는 – 가 약에 취해 욕조에 누워서 카세트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White Rabbit”을 반복해서 듣는 장면을
꼽았는데, 그러니까 이 노래란… 약으로 high한 상태에서 들어야 제맛인 그런 노래라는 것이다. 내가 해본 중독성
약물이래봐야 알콜과 담배가 고작인데, 이 노래가 확실히 좀 싸이키델릭하고, 몽롱하긴 하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 설명을 듣는다고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기도 힘들다. 욕조에 뜨거운 물 받아놓고는 맥주를 두 병 원샷하고 들어앉아
곡을 들으면 좀 감이 오려나.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영어의 장벽보다, 드럭컬처에 대한 몰이해의 장벽이 훨씬 더 높았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과 음악과 영화로 접한 ‘상상의 정서’에 불과하니. (그런데 나는 왜 미국의 6,
70년대에 그토록 매혹되어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이 책이 주는 재미에 대해 언급을 해보자면, 그러니까 라울 듀크(이 책의 화자)와 그의 변호사가 라스베가스를
횡단하면서 벌이는 모험이란 게 결국, 당시 풍요와 문화적 절정이라 사람들이 얘기했던 미국의 풍경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자들의
날카롭게 해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굉장히 신랄하고 흥미진진한 톰슨의 문체로 그려지는 라스베가스의 모습은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의
극단적 면을 한눈에 보는 축약도이며, 물질적 풍요 앞에서 정신적 공황을 겪는 미국인들이 ‘아메리카 드림’을 자축하며 애써 그
정신적 공황을 잊고자 하는 필사의 몸부림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그가 벌이는 소동을 킬킬거리며 읽으면서도, 그 가운데에
드러나는 톰슨의 날카로운 견해와 이에 대한 매우 절제된 – 그러나 강력한 – 표현들은 서늘한 쾌감을 준다. 또한 어느 순간
찾아오는, 길 잃은 자 특유의 먹먹하고 막막한 무력감까지도.

한국에 출판되기에 분명 애로점이 많은 책임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톰슨이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이 사람이
주는 그 삐딱한 매력은 꽤 강력한 편. 국내엔 톰슨의 책이 소개된 게 거의 없으니, 관심이 있으나 영어원서를 읽는 데에 장벽을
느끼시는 분들은 케이블에서 가끔 방영해 준다는 영화 버전 <라스베가스에서의 공포와 혐오>(조니 뎁이 톰슨과 장기간
생활을 같이 하며 그의 행동과 말투를 거의 완벽하게 모사해 낸다고 한다)를 보거나 현재 영화화 소식이 있는 <럼 다이어리>(역시 조니 뎁이 제작총지휘에 나섰고 출연도 할 예정)를 기대해 보시는 게 좋을 듯하다.

재외공관 독서권장위원회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