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길이 아니면 가지 말자

공화국 교시
2004년 11월 05일

1.
한국영화 최전성기인 60년대를 무색케하는 한국영화의 중흥기. 각종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매주 박스오피스는 한국영화가 도배를 한다. 타이밍만 그럴싸하게 맞추면 그 어떤 졸작 무비도 쉽사리 대박을 차는 황금의 시대. 전세계를 아우르는 허리우드 초 대형 블럭버스터마저도 극장잡는데 눈치를 봐야 하는 전설의 나라. 졸라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렇게 활기차게 타오르는 한국영화의 불꽃은 과연 언제까지일까? 적어도 이쯤에서는 이런 거 걱정도 좀 해야 하는 것 아닐까싶다. 뭐 정 안 궁금하면 말구지만…

우리영화라…? 이 기준은 사실 무척이나 애매한 거다. 우리나라 감독이 만든 영화 ? 우리나라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우리말로 대사치는 영화? 도대체 그 기준이 무어냐. 본 우원은 관습헌법으로 굳어지고 헌재의 막가파판사들이 확정판결 내리더라도 각자가 지 꼴린대로 생각하는 게 옳다고 본다.

근래의 추세로보아, 굳이 따지면 우리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우리영화’라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네가 통상으로 이해하는 우리영화는, 우리배우가 우리말로 하는 영화가 아닌가 한다. 비록 막대한 규모와 화려한 스킬로 무장한 외화에 주눅들어도, 우리네 정서를 우리말로 이야기하는 곳에서 얻는 감상과는 결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런 주체적 감성이 꾸준한 우리영화꾼들의 노력과 맞물려 이자리에 온 것 아닌가 한다.

외래 팝송을 들어야 폼이 나고, 유럽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허리우드영화는 꿰어야 자세가 잡히던 시대는 어느듯 아스라이 기억도 가물하다.

공화국민의 한사람으로 좋은 ‘우리영화’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은… 외래에 대한 근거없는 과장,왜곡과 그들 꼴린대로의 자의적 해석에 매달리지않고, 주체적으로 자국의 올바른 문화을 세상에 투사시키며, 거기에 소모된 투자금이 재환수되고 투명하게 재투자되는 시스템을 구축하므로 세상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드는 모범적 문화활동으로 확대증대,폭발,발전시키는 일이거늘…에고 숨차다… 어찌 부듯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영화판이, 어찌 되었건 간에 자랑스럽다. 그 어느 나라 영화판이 이 정도 성과나마 얻어 내었던가 말이다. 따라서, 지난 10여년간의 줄기찬 애정와 투자로 이제 이 정도라도 결실을 맺고 있는 건 고무적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 사료된다.

하지만 꼼꼼히 근래의 한국영화를 늘어놓고 보면, 여전히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그저 그런 작품,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연기자가, 거기서 거기인 연기이니 식상함 절정이다. 내용상으론 표절과 무단 차용도 적지 않다. 언론과 짝짝궁으로 관객을 기만하는 건 기본이고, 그렇게 얻어진 수익도 어디서 새어들어가는지 흉한 뒷이야기만 무성하다.

딴지영화진흥공화국의 건국이념에도 나와있지만, 우리영화의 중흥이 종내에는 ‘좋은 영화’가 양산되는 촘촘한 시스템으로 결정되고, 이를 통해 자연스레 모든 작품이 기본적인 품질은 자동으로 갖추어는 수준에는 다다라야 할 것인데, 현재까지는 그러지 못하다. 또 그런 중에도 결코 주눅들지 않는 투철한 비판정신이 살아숨셔서, 그런 고품격의 시스템이 녹 슬지 않게 기름칠 해주어야 하는데 역시 아직까진 그러지 못하다.

잘나가는 한국영화판에 대한 이런저런 구질구질한 비판이, 또 다른 앞으로의 10년을 담보해 주는 초석이라 믿고, 이후로도 주욱~ 영진공의 공화국민은 똥꼬털과 머리털사이의 차이도 쉽게 분별해 내는 예리한 눈초리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그간에 고생을 생각해서라도 한두해 더 해먹고 우리영화판이 망가지는 거 참을 수 없다. 앞으로 모든 영화애호인의 사명이 그럴진 데, 말이 나온김에 대략 몇가지만 언급하자.

우선 가장 흔하디 흔한 문제점으로 걸고 자빠지자면, 소재다양성 내지 무제한성이 첫째이겠다. 이점은 한국영화를 내용적으로 짚어낼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지만, 솔직히 영화판만의 문제는 아니다. 몇몇 할배들이 내뺏는 관습헌법에, 법률이고 대통령이고 몽조리 비몽사몽을 몽유병증세를 껶어야 하는 저급한 사회, 그런 희한한 판결에 법치주의 만세라고 부르짓는 황당한 구케의원들을 모시는 사회,당장 3년뒤의 입시제도조차 제대로 확신하지 못하는 참담한 근시안의 사회, 이런 사회에서 본 우원 좋은 영화 많이 기대못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논하기는 커녕, 졸라 생기초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소재의 무제한성은 아직 요원한 것이다. 그런 ‘자유로움’이 가져오는 창조적인 재능과 기발한 문화발명의 힘을 영화인에게만 우겨대는 건 억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상호충돌, 교환하며 발전진보하는 것이니, 영화인들이라고 전체 사회에 대한 책무와 책임을 도외시 할 수 없는 것, 영화라도 선도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수 방향과 힘에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것이 노력사항이다. 또 그런 기발함과 독창성이 죽어자빠지지 않도록 영화판 내외에서 애써야 한다. 투자자나 투자자대로, 제작자는 제작자대로, 스탶은 스탶대로, 배우는 배우대로, 영화평자들은 평자들대로…무엇보다 뻬끼기, 그거 안된다. 허락없는 무단도용…역시 안된다.

둘째는 경제적,재정적 투명성 되겠다. 어차피 자본사회에서, 영화가 적지않은 자본이 투자되어야하는 장르임을 인정할때, 영화판의 경제적 투명성은 영화자체의 궐러티만큼 중요한 것이다. ‘금전적 불투명성’은 영화제작 스탬들의 열의와 노력를 낭비적으로 소모시켜, 새로운 창조적 제작욕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비열한 메카니즘으로 귀착된다.

활자로 박혀 매체들이 발표하는 박스오피스마저 주먹구구에 난장판, 도대체 얼마나 흥행하고 얼마나 벌어들였고 어디에 돈을 쓴 건지 경리부장하고 대표이사외에는 알길이 없다면, 그런 사업이 앞으로 잘 턱이 없다. 수익금이 조폭으로 흘러들어갔느니 어쩌니하며 루머가 떠돌아도, 영화사대표나 감독이 검찰에 불려다녀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영화판이라면…심각한 거다.

이 부분에 대한 관리감독을 순전히 산업적인 측면으로만 인식하고, 정부관료들의 행정법률적 잣대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선 안된다. 영화문화사업을 무슨 기획부동산업이나 경로당 피라미드 이불장사인냥 순간순간 관객을 기망하여 이익을 보는 건, 한마디로 ‘극악한 사기범죄’다. 이런 돈독영화사나 제작자들을 속아내고 밝혀내는 것 또한 우리영화판과 영화애호인들 스스로가 이루어내야 할 업무되겠다.

더불어 몇푼돈에 영화인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그냥, 막, 함부로, 헌신하는 거. 그것이 단지 돈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한솥밥을 먹는 동지동료들에 대한 범죄라는 점, 젊은 영화인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세째는 마케팅부분의 다양성과 독창성이다. 첫째부분에서의 문제와 유사하지만 전혀 작품으로서의 영화내적인 부문의 다양성과, 상품으로서 영화외적인 다양성은 문제인식부터 그 해결방식까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다양화된 작품구성이 골고루 영화소비자들에게 소비되는 구조에 안착되지 못하는 걸, 단순히 영화 작가나 제작진에게 귀책되어선 안된다는 거다. 영화마케팅까지 작가와 제작진이 책임지는 원맨밴드식 작업스타일은, 영화판 전체로 볼때는 일부이여야 하지 모든 작가들이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생산해 낼 수 는 없는 것이다.

어느 작품이든, 기본적 품질을 지닌 작품이라면, 그 품질에 어울리는 마케팅과 수익창출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영화판의 모든 딴따라와 투자자들이 몽조리 대박만 바라는 로또식 난장이라면, ‘시스템’이나 ‘구조’라고 어려운 이름 붙힐 이유도 없다.

예로 소규모 영화나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활개 펼 수 있게 만드는 작은 마케팅회사, 기획사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그들의 정열을 기대하며, 앞으로 공화국민들은 그런 회사들을 열렬히 응원해야 한다.

네째, 가장 언급하기 지저분한 부분이 될 것인데… 근간( 하루이틀 된 이야긴 아니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한국짜라시 크리티크들의 과도한 빨아줌에, 그 야리꾸리한 냄새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영화홍보짜리시로 전락하거나 대중과 괴리된 아카데미하우스식의 교양적후까시는 한국영화판에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

솔직히 그런 매체습성이 심히 불편부당하더라도, 그 파급력이 다수 영화관객들의 혼돈으로 작용되지 않는다면 본 우원도 신경 끄겠지만, 이거이 한국 영화 크리티크 전부의 습성이라면 감히 심각한 오염이라 하겠다.

한국영화판정도라면, 적어도 당 공화국맹키로 한국영화판에 대한 진지하고 솔직한 화설을 물어낼 수 있는 대중적이면서도(아니 진짜 학문적인 탐구만을 목적으로하는 독특한 매체도 좋겠다. 상업적 아카데믹이 아니라…) 독립적인 매체들이 열손가락이 모자라는 숫자로는 존재해야 한다. 이런 소규모내지 독립매체들이 우후죽순, 백가쟁명으로 번창할 시기를 고대해 본다.

앞으로 이런 문제점들 골고루 샅샅이 디벼보자. 그게 누군가 할 일이고 우리공화국도 할것이다. 이상으로 이번 썰을 마치겠다. 앞으로의 전투를 졸라 기다려라. 끝.

영진공 청와대 정무수석
버디(yibuddy@hanmail.net)

영화제 메달이 그리도 좋은가?

2004년 11월 02일
공화국 교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놓고 난리다. 『태극기 휘날리며』, 『빈 집』이 티격태격이더니 『올드보이』도 이에 합세.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지 않더라도 최종 출품 대상에 오를 경우, 미국 내 영화 시장에 진출할 교도부를 마련하는 것이니 제작사나 배급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군침을 삼킬만 하겠다. 거기다 수상이라도 하게 되면 더욱 더 금상첨화겠지.


영화 감독 입장에서도 공인된 영화제가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주는 것이니 의당 기분이 나쁠 리는 없을 것이고, 명예로 생각할 만도 할 게다.

헌데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가 아무래도 꼴사납다. 꼭 부동산 투기로 돈을 모은 한국 졸부들의 키취적 취향을 닮아 있는 꼬라지다. 어느 감독은 앉으나 서나 감독상 트로피 자랑 하느라 자기 영화는 두 번 봐야 진국 맛을 볼 수 있다는 퇴행성 발언을 남발하고 자빠져 있다. 지가 무슨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온몸으로 구현하는 나르시시즘의 향연은 악취를 풍긴다. 어느 평론가는 아예 목에 매단 매달수가 작품성을 보증한다는 투의 어이없는 찬송가를 부르기도 한다. 참 주책들이다.

한국 영화 잡지들도 박찬호 삼진 성공률에 오르가즘의 희열과 저주를 오르내리며 발작을 하는 삼류 스포츠 찌라시처럼, 무슨 영화제만 열리면 점쟁이들처럼 죄다 평론가 별점 앞에 모여서 누가 수상을 하게 될지 수선을 떨고 있다. 딱, 올림픽이다. 어느 선수가 금메달 따면, 장엄한 음악과 함께 선수의 고난했던 이력을 읊어대는 것처럼, 어느 영화 작품이 수상을 하게 될 때 영화잡지에서 읊어대는 저 유치찬란한 신파들을 보라. 지금 그들은 영화제에 주머니를 털어가며 자신이 고대하고 기다렸던 감독들의 신작을 향해 발품을 파는, 과연 어떤 영화가 나를 울려줄 것인가 열렬히 기대하는 영화 관객들의 수준에도 못 따라가고 있다. 영화제는 축제다. 관객이 주인이다. 축제를 메달 경쟁 각축장으로 변질시키는 건 언론과 골룸의 딱부리 눈을 치켜든 영화관계자들이다.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명예, 좋다. 하지만 수상을 하더라도 입을 닥쳐라. 영화제 수상 무대 위에 터지는 카메라 프레쉬가 그렇게 좋은가? 겸손이 부재한 명예는 악취이며, 영화의 진정성을 해치는 치명적 독일 뿐이다. 소위 예술을 한다는 인간들이 영화제 올림픽의 메달을 향해 자아내는 골룸의 제스추어, 역겹고 추하다. 차라리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에 항거하는 의미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더라도 과감히 취소할 정도의 양심은 있어야 되지 않나?

국제영화제도 아니고 팍스아메리카나의 또다른 응결체인 아카데미 영화제에 옵션처럼 달라붙어 있는 ‘외국어영화상’에 골룸거리며 줄 서 있는 제3세계 영화 난민들의 보트 피플이라니… 악몽이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구워진 떡고물들, 그렇게 좋은가?

공화국 문화관광부 장관
아도니스(gondola21@gondol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