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수입에 관한 잡담 하나” <영진공 71호>

공연윤리위원회
2007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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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의 모델의 정체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킬리언 머피. 많은 분들의 표현을 빌어 ‘미치고 예쁜
애’. 김혜리 기자의 표현을 빌면 ‘얼려놓은 파란 칵테일 같은 눈을 가진 애.’ 아아 너무 예쁜 거 아니냐고요… (이
포스터는 결코 메인은 되지 못하겠지만 서브 포스터로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다.) 원래 도전적으로 필모그래피를 꾸려나가는
배우들을 매우 사랑한다. 킬리언 머피도 그런 배우 중 하나다.

국내에서 <플루토에서 아침을>이 개봉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예쁘게 한국어 제목을 달고!!) 2년 전엔가
사장님이 검토해보라고 던져준 파일 뭉치 속에 이 영화가 있었지만 장사가 될 거 같진 않아서 눈물을 머금고 패스를 했었다. 지금도
그 판단은 변함이 없다. (사실 킬리언 머피보다 ‘닐 조던’이라는 이름과 그의 페르소나인 스테판 리아의 이름에 가장 먼저 눈이
갔고 그 다음 ‘리엄 니슨’에 눈이 갔는데, 당시 Asking Price가 내가 생각한 적정가보다 아주 높은 편이었다.) 다만
가끔씩은 내 취향의 영화를 돈 걱정 많이 않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작은 돈에 사서, 큰 이익 기대
않고 작게 푸는 걸 계속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시스템 말이다. 사실은 그 때문에, 모두들 한국영화로 우우 몰려가는데도 나는
꿋꿋이 “외화하고 싶어! 아무리 남들이 영화인이 아니라 그냥 업자 취급을 한다 해도 외화하고 싶어!”를 외치며 이제껏
남아있었다만.

최근 그런 모델로 스폰지가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고들 하며 다들 ‘조성규 모델’을 외치고 있는데, 그런 조성규 대표도 사실
요 1, 2년 새에 눈부신 성과를 이뤄서 그렇지 모르긴 몰라도 오랫동안 여기저기 깔아둔 빚이 장난이 아닐 것이다. 계속해서
라이브러리를 확보하면서 발빠르게 스폰지하우스를 치고 나간 것이 주효했다고 본다. 조성규 모델이 바로 내가 7, 8년 전부터
꿈꿔왔던 것과 굉장히 비슷한데, 내 사회성은 참으로 형편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실현 가망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그래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이다.

소규모 외화수입사들이 회사의 브랜드를 살려가며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외화들을 수입하려는 노력들, 그리고 소극장에서
단관개봉이라도 하려는 노력이 그래도 계속되고 있고, 이런 노력들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해서 되도록이면 극장에서 한번씩 꼭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스폰지하우스, 미로스페이스, 씨네큐브광화문, 하이퍼텍나다가 그런 노력을 하는 소극장들이고, 유레카픽쳐스,
스폰지, 백두대간, 코랄픽쳐스 등이 그런 소중한 노력을 해주고 있는 수입사들이고(특히 유레카픽쳐스의 영화보는 안목은 놀랍다.
아직은 성장이 더딘 듯하지만 발전을 기원해본다.), 이런 영화들을 역시 유레카픽쳐스, 백두대간, 프라임엔터테인먼트, 영화사
진진, 프리비젼엔터테인먼트 등이 배급의 영역에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 배급사들이다. 사실 유레카, 백두대간, 진진 등은 전문
배급사라기보다는 자사 수입작들을 직접 배급하는 회사들이다. 또한 프라임은 시네마서비스 / 롯데급으로 급성장을 꾀하고 있는
자본력이 매우 큰 회사로 돈많은 건설회사를 모기업으로 두고 있다. (즉 2, 3년 내에 대규모 배급사가 될 회사. 테크노마트
시공한 건설회사가 바로 프라임. 그때 가면 대자본 배급사 특유의 ‘횡포’를 부릴 회사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마블이 나름 회사
브랜드를 갖고 꾸준히 좋은 영화를 수입해 배급하는 회사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째 남 얘기하듯…)

한국의 영화산업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홱홱 변하고 있어서 빈약하나마 영진위의 통계자료를 들여다보는 게 나름 꽤 재미를
선사한다. 작은 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는 스크린 수가 좀더 많아져야 재미있을텐데, 최근 상정된 스크린 수 제한 법안이 과연
향방이 어떻게 될지, 효과가 어떨지 매우 관심이 가는 대목.

공연윤리위원회 고문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하얀 거탑>, “봉건적인 배려” <영진공 71호>

상벌위원회
2007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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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이 막판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장준혁은 암에 걸리고, 모두가 그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중이다.

권력과 술수의 규칙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순수하게
한 사람의 생명을 걱정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나름대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환자인 장준혁 본인에게는 아무도
병세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병에 대해서는 이제 병원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그의 장인도 알고 친구인 최도영도 안다.
오로지 장준혁 본인만 자기 병을 모른다.

세상에.. 이런 일이… 뭐 드라마에서는 장준혁의 성격을 생각했을때
병을 알게 되면 오히려 병이 더 나빠질 것 같아서 라는 변명을 대기는 한다.
그래도 자기 병에 대해서 자기만 몰라도 되는 것일까?
(덕분에 장준혁은 심각한 병중에도 혼자 차를 몰고 다니는데
그러다가 수술하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을 것 같아 아슬아슬하다.)

적어도 예전에 이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곤 했다.
내 외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위암에 걸리셔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는데 결국 죽을 때까지
본인은 위염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공동체의 속성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할이나 위치, 자신이 할 일,
간단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지
아니면 그가 속한 공동체가 더 잘 알고 있는지에 따라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할 일을 나 자신보다 먼저 주변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 보다 주변에서 알고 있는 것이 더 정확한 사회의 예는
봉건적인 사회를 들 수 있다.

그 사회에서는
내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내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할 일은 농사일로 정해진다.
내가 사는 지역의 영주, 집안의 가장이 믿는 종교에 따라서 내가 믿어야 할 종교도 결정된다.
내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내가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판단한다.

이런 사회라면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에 대해서도
그에게 가장 옳은 대응책이 무엇인지는 그가 결정할 것이 아니라
그 병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신 이 과정에서 환자 본인의 권리는 아무도 고려하지 않는다.
어차피 개인의 의지나 판단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준혁이 속한 사회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그가 과장이 된 것도 그의 판단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가 과장이 됨으로써 자기 권한이 늘어난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늘어났지만, 그가 신경써야 하는 윗사람들도 늘어났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빚을 지고 자유는 더 줄어든다.
결국 그는 여전히 조직의 부속품이었다. 단지 부속품으로써의 지위가 올라갔을 뿐..
부속품이 자기 생사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부속이 속한 조직이 판단할 일이지.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살을 할 때 애꿎은 자식까지 살해하는 것도 같은 논리의 결과다. 그 아이들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봉건사회에서 자식의 생사여탈권은 어차피 부모에게 있으니까…)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사회도 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답이고
부모의 종교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내 종교나 이념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바로 나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사회 말이다.

여기서는 어떤 병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제1의 권한 역시 환자 본인에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환자는 자기 병에 대한 모든 것을 가장 먼저, 가장 정확히 알아야 한다.
환자가 내리는 판단이 어떻든, 그 선택과 판단은 그의 권한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이런 사회의 기준에서 그 권리를 박탈하는 모든 행위는 범죄가 된다.
(정확히 말해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금 저 병원 구성원들은 집단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장준혁이 피고로 걸렸던 이전 소송 보다 이 건이 아마 더 클지도 모른다)

물론 실제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자기 병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고도 한다. 의사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런 환자들 마저도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 불쌍한 장준혁은 여전히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는 부속품으로 시작해서 결국 부속품으로 끝나고 마는가.

상벌위원회 상임 간사
짱가(jjanga@yonsei.ac.kr)

<한니발 라이징>, “이유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매력과 공포로 점철된 캐릭터 하나를 잃어버린 듯하다.” <영진공 71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007년 3월 29일

토마스 해리스는 많은 책을 내는 작가는 아니다. 존 그리샴이 거의 매년 새 책을
들고 독자를 만나는 데 반해 해리스는 몇 년에 한번씩 책을 낸다. 근 20년간 낸 책이 다섯권이 전부. 하지만 내는 책마다
판매량이 엄청나고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하니, 자기만의 섬을 소유하고 화려한 생활을 즐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 그가 갑자기 <한니발 라이징>이라는, 한니발 렉터가 왜 살인마가 되었는지를 밝히는 소설을 들고 나왔다.
영화로 보기 전에 소설로 먼저 읽자는 생각에 샀는데, 읽고 나니 아쉬움이 남는다. 워낙 스릴러를 잘 쓰는 작가인지라 재미는
있었지만, 한니발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 같아서였다. 한니발이 무서운 건 그가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먹는 엽기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가 그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게 더 큰 이유다. 예측이 불가능할 때 공포감은 배가된다.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언제 화를 낼지 모르니 늘 조심해야지 않을까? 그런데 이 책에는 한니발이 아주 어려운 일을 겪었기 때문에 저런
살인마가 되었다,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어린 시절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그토록 사랑하는 여동생이 잡아먹히는 걸 목격한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이거다. 그의 처지에 동정이 가는 동시에, 한니발은 내게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가 특별해서 그리 된 게 아니라 저런 일을 겪으면 누구든 저렇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책장을 덮고 나서 토마스 해리스가 왜 이 책을 썼는지 생각해 봤다. 돈이 떨어져서,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재미있는 <양들의 침묵>은 나온 지 벌써 15년이 지났고, 그 후에 나온 <한니발>은 그만큼
팔리지 않았으니까. 두 번째, 필경 그는 <배트맨 비긴스>를 보고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걸 보고 “한니발의 기원도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음직하다. 세 번째 이유. 전작 <한니발>에서 스탈링은 렉터와 더불어 사람의
뇌를 먹고, 한니발의 실질적 부인이 된다 (영화는 이 결말을 바꿨다). 말 그래도 해피엔딩. 뒤에 더 할 얘기가 없으니 앞으로
돌아가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매력과 공포로 점철된 캐릭터 하나를 잃어버린 듯하다.

국립과학연구부소장
서민(bbbenji@freechal.com)

“묻혀버린 DSLR의 꿈. 요단강 건너 버린 D200” <영진공 71호>

재외공관소식
2007년 3월 28일

얼마전까지 잘 가지고 놀던 PSP를 니콘 S3와 교환하기로 했다.

잘 알고 지내는 지인과 교환하는 것이라 지인은 친절하게도

“형, 이거 조낸 흔들려”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고 링크를 보내주었는데…

http://shopping.naver.com/detail/detail.nhn?cat_id=00040104&nv_mid=1000163032&ani=0&tc=4

a. 던져버리구 싶은 디카,
b. … 하지만 별로 쓸데가없다는거-_-.,
c. 조금만 흔들려도 바로 티가 나니…, 

등등의 무수한 악플을 다수.

악플들을 보면서 번개같은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머릿속에 만들어지는 시나리오는….

마누라 曰
“여보, 디카가 조금만 어두워도 사진이 흔들려”

“응 그건 말이야, 컴팩트 디카의 숙명 같은거라고나 할까? 사람들이 왜 큰 카메라를 사는지, 또 렌즈를 탈착 가능한걸 번거로워도 사는지 이제 조금 알겠지? 해맑게 자라는 우리 붕붕이를 위해서라면 D200 정도는 사야되는거야”

“그게 뭔데?”

(인터넷 뒤져서 보여주며)

“봐봐, 이 악플들, 대부분의 필카는 어쩔 수 없다니까, 그에 반해 D200은 어쩌구 저쩌구 해서 사진을 발꾸락으로 찍어도 브레송이 된다니까!”

“브레송은 누군데?”

“응, 프랑스 사람인데 지독한 수전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에셀알 카메라를 산 뒤로 예술처럼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

(브레송 사진을 인터넷으로 보여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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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봐봐. 얘가 옛날에는 라이카라는 컴팩트 카메라로 조낸 흔들리게 찍었거던, 핀트도 나가고 돼지가 나르는 것도 아니고 어둡고 침침하고 구리지만 얘가 렌즈 교환식 에쎄랄을 쓰면서는 봐봐. 발꾸락으로 찍었는데 간지작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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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어머, 정말 그렇네. 그럼 우리도 카메라 바꿔야 붕붕이 이쁘게 사진 찍히겠네? 얼른 알아봐. 얼만지…”

이상이 내 머릿속에 구축된 시나리오였다.

버뜨, 비유띠, but, 그러나.

렌즈 어둡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쿨픽스 4500을 6년간 사용하면서 신의 호흡멈춤 자세와 동물적 상황판단 능력으로 1초 셔터렉을 커버하는 우리 마눌신에게 S3은 촛점 너무 잘맞고 흔들림 없는

좋은 디카 였다.

S3가 손에 쥐어쥔 뒤부터 마눌신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급 손놀림으로 사물을 잡아냈다.

실내에서 씬모드 인물로 돌려놓고 연사를 해도 흔들림없는 사진을 토해내는 마누라가 밉다.

내사랑스런 D200이 요단강을 건너는 순간.
 

PS : 브레송 형, 형아 이름 팔아서 미안.

(짤방은 마눌신의 쿨픽스4500 내공, 1초 셔터렉 및 어두운 렌즈에 씬모드 인물 및 야경 모드임을 감안해서 감상해주시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꼼수는 저 하늘 멀리
그럴껄(titop@naver.com)

<300>, “용사여 네 무덤에 경의를 표하지만 …” <영진공 71호>

상벌위원회
2007년 3월 27일

짧고 굵게 사는게 인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이
굵지도 못하고 길게 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죽기 살기로 싸우면 길이보인다
배수의 진을 치고 앞만 보고 간다
우리는 명예를 위해 살아간다.

글쎄요 정말 그게 진리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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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데이에 300을 보았습니다.
지난주 금주 미국 박스 오피스 일위의 영화이지만 평일의 저녁은 그다지 관객으로 붐비지 않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600명 정도의 객석은 3분의 1정도만 차있습니다.

프랭크 밀러의 신시티에 감동받고 300의 예고편 및 반지의 제왕을 능가할거라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리고 미국만화 별로여서 원작은 보지 않고 영화만 보았습니다.

박스 오피스 일위를 하였지만 화려한 CG와 수많은 대군의 모습들 실감나는 전투신들 몸과 창검으로만 싸우는 장면 장면들은 감탄 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반지의 제왕을 능가하는 스토리 라인이니
구성이니 이런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긴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대군들의 전투가 아님 300대 몇십만의 전투를 그리자니 접근전 위주의 격투신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또한 오히려 슬로우 모션의 남발이나 팍팍 잘려져 나가는 몸통등의 구성등, 어떻게 보면 글라디에이터의 전투신을 확장해서 70년대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 그리고 80년대 오우삼 감독등의 홍콩느와르의 기법을 차용한거에 불과한 느낌이 팍팍팍 들기도 합니다.
헐리우드가 변방이라고 무시했던 제삼국들의 옛 영화기법들이 차용되고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기법에 자극받는
돌고도는 그런 느낌이였습니다.

게다가 복장들도 오히려 닌자들이라고 하면 맞을것 같은 마지막 전투신들의 선봉대들 그리고 그리고 페르시아의 군대에 스트리트 오브
파이트의 게임에서 나온 듯한 특수 캐릭터들을 보면 이거 만든 사람 일본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본 영화가 사실적으로 만화의 캐릭터를 재현 했다고 하니 프랭크 밀러의 만화가 일본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밖에
없겠네요.

볼만 한 영화는 영화 입니다만. 반지의 제왕과도 글라디에이터에도 심지어는 작년에 나온 킹덤오브 헤븐과 비교해도 좀 떨어지는
영화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임에도 미국에서는 현재 대박을 터트리고 있으니 역시 동양인과
서양인의 정서는 좀 다른가 싶습니다. 아님 제 취향이 미국인들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지요.

하여간 제게는 짜집기의 느낌이 강한 이미지로 다가 왔습니다. 300을 보다가 생각난 영화들로는
글라디 에이터, 반지의 제왕, 영웅본색, 7인의 사무라이, 동방불패, 이오지마에서의 편지, 황후화, 아기를 업은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 그리고 킬빌. 별영화를 다 같다가 붙인다고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잘 만든 장편 패러디 대하 서사극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막없이 보는 영화라 많은 대사들을 놓치고 있었지만 보면 볼 수록 불편해 지기 시작 했습니다. 작년에 리들리 스콧의 킹덤 오브 헤븐이 생각나면서는 점점 더 불쾌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서양인들의 동양인들에 대한 무시가 기분 나빠졌습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가 붙었던 그시기에 사실 모든 선진 문명은
아시아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중동 아시아를 아시아라고 해야 하지만 그리고 우리가 배운 스파르타의 민주주의도 사실은 귀족주의라고
할 수 있고 하여간 스파르타는 선진국이고 페르시아는 쪽수만 믿고 문명을 부수어 버리려는 야만인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온 대군들과 괴물들도 꼭 몇십년전 서부영화의 문명인 백인과 야만괴물 인디안의 구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영화에서 적들의 시체로 방어벽을 쌓거나 하는 등등에서 피차 잔인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노예보다는 죽음을 등등의 대사들에서 감동을 먹을 수 있겠지만 많은 대사의 말투가 너희같은 미개인들이
우리같은 문명국을 넘보다니 라는 투의 선민의식은 좀 그렇습니다. 스파르타의 용맹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였지만 만화라는
장르에서 그리고 프랭크 밀러의 원작들이 그러니 할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스파르타는 선이고 페르시아는 악인이고 미개
야만이라는 설정들은 영화 곧곧에 산재하고 그러함이 서양인이 아닌 저에게는 불편함을 발산 합니다.

액션영화야 그냥 액션으로 재미있게 보면 어떠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불과 몇년전 많은 분들이 불쾌하다고 했던 007의 북한처럼 중동 사람들이 보면 참 기분 나쁠법도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300은 볼거리와 CG로 흥행에야 성공하겠지만 서양에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참 불편지도 모르는 그런 영화입니다.

20자평:너무 장엄하고 자기들은 너무 존귀하다, 별 세개반

시와 함께 느껴보는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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