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를 내쳐야 하나, 끌어 안아야 하나 …

 

 


 


 


그러니까 7년 전.


반쯤 취한 나를 태운 택시기사는 넌지시 누굴 찍을 건지 물어봤다.


“뭐, 또 비판적 지지로 정동영으로 가던지, 권영길로 가겠죠.”


 


택시기사는 반문했다.


“아니, 젊은 사람이 왜 여당을 찍어요?”


그렇다. 그 때 한나라당은 야당이었다.


10년. 우리가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10년.


 


우골탑.


우리의 형님세대. 386이라 불리던 그 세대만 하더라도 소 한마리 팔면 아들놈 대학은 보낼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 학번만 하더라도 두달 아르바이트 하면 한학기 등록금을 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 번정도의 과외면 얼마간의 생활비도 보탤 수 있었고 학교내 도서관 사서, 구내 식당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맞추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투쟁은 ‘촌스러운’ 행위가 되었다.


사학법은 유명무실해졌고 등록금은 치솟았다. 학비 천만원, 생활비 천만원, 한 가정에서 한 아이에게만 매년 2천만원이 드는 세상이 되었다. 국가는 지켜주지 못했다. 10%대 고리로 학비를 융자해주고 졸업과 동시에 빚쟁이가 되는 세상, 취업마저 안되면 바로 신불자가 되는 세상.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에 벌어진 일이다. 애비는 7~80년대 대학에서 투쟁해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로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돌아오는 건 내 노후를 자식의 미래에 담보로기는 현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민주화’는 지금의 20대에게 전혀 민주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독재가 어땠고, 민주화운동이 어땠고, 5.18이, 이한열이, 박종철이, 김진숙이 어땠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에게는 졸업후 빚진 등록금 고리빚 4천만원이, 취업도 안되는 이 현실이 지옥이다.


 


 


 




 



일베: “일베저장소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 저장소의 약자로, 유머 중심의 인터넷 포럼이다. 줄여서 일베라고 칭하기도 한다 … (중략) … 일베저장소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은 일베 유저들을 ‘일베충’이라 낮춰 부른다 … (하략)”


[인용: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B%B2%A0%EC%A0%80%EC%9E%A5%EC%86%8C) ]



 


 


 


기득권이었던 적도 없던 그들에게 기득권이라고 외치는 여가부가 밉고, 4대강이, 디도스가, 민자계획이 아무리 나빠도 자신들 통장에 10% 고리의 대출보다 미울 수는 없다. 세상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그들이 본 정권은 여수 엑스포, 광양F1, 시골 시외버스 대합실만도 못한 무안공항 같은 지역편향의 대규모 공사와 이해찬 세대의 줏대없는 입시변화, 나 먹을 것도 없는 데 북한퍼주는 햇볕정책이었을 것이다. 뿐이랴, 집값은 왜 또 그리 뛰게 만드는지. 결혼해 살 집마저 요원해졌다.


 


적의 적은 내편.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저사람은 집값 올려주겠지, 저 사람은 그래도 좀 살게 해주겠지, 사기도 잘치니 재주도 좋고, 그럼 나 살기 좀 편해지겠지.


 


그러다보니 일베충, 우꼴, 버러지, 쓰레기, 고인능욕하고 강간이나 모의하는 X새끼들로 정의하기에는 우리가 한 잘못이 너무 많다.


 


사람 희화화를 진보가 안했나? 장원 팔베개 우리는 안했나? 전직 대통령 쥐그림 안그렸나? 수첩공주, 그네, 목사불륜, 독재자의 딸, 우리는 그렇게 안불렀나?


일베 까기전에 먼저 해야할 것은 반성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집권시켰던 정권의 폐해를 반성하고, 최소한 사과는 하고 시작해야 20대에게 면목이 생긴다. 팩트, 팩트를 외치며 80년대 국가 선전자료 들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지키는 노력만큼도 안하는 우리, 반성해야 한다.


 


친노, 반노, 비노 이런게 왜 생기나? 결국 다음 총선 지자리 챙겨먹는 놈들의 이기심 때문에 생기지. 그런 이기심이 또다른 일베를 만든다.


 


일베를 벌레취급하는 순간, 쓰레기 취급하는 순간. 우리는 반성과 설득의 기회를 모두 놓친다. 그들도 사람이다. 내 옆 동료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동생이거나 통장님일 수도 있다. 이승만 독재가 4.19를 박정희 폭압이 부마항쟁과 10.26을 전두환이 5.18과 87년을 만들었듯이 김대중과 노무현 10년이 일베를 만들었다.


 


그들은 계몽과 선도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품고 이해해야 하는 상처다.


누가 싼 똥이 아니라 우리가 싼 똥이다.


 


 


 


영진공 그럴껄


 


 


 


 


 


 


 


 


 


 


 


 


 


 


 


 


 


 


 


 


 


 


 


 


 


 


 


 


 


 


 


 


 


 

발레리(Valerie)의 편지

 


 


 



1980년대의 DC Comics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V for Vendetta”(2006).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Evey는 우연히(?) 발견한 “발레리”라는 여인의 편지를 통해 “공포”를 이겨내게 된다.

만화 원작에 나오는 이 편지의 원문을 옮겨 보았다.



 



 



I don’t know who you are. Please believe. There is no way I can convince you that this is not one of their tricks. But I don’t care. I am me, and I don’t know who you are, but I love you.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이 편지가 저들의 더러운 술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요. 나는 나예요. 그리고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I have a pencil. A little one they did not find. I am a women. I hid it inside me. Perhaps I won’t be able to write again, so this is a long letter about my life. It is the only autobiography I have ever written and oh God I’m writing it on toilet paper.

내겐 연필이 있어요. 아주 작아서 저들이 찾아내지 못했죠. 난 여자라서 몸 안에 감출 수 있었답니다. 더 이상은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여기에 나의 인생에 대해 긴 편지를 쓴답니다. 이건 하나 밖에 없는 내 자서전 인데, 그걸 화장실 휴지에다 쓰게 될 줄이야.

I was born in Nottingham in 1957, and it rained a lot. I passed my eleven plus and went to girl’s Grammar. I wanted to be an actress.

난 1957년 노팅엄에서 태어났어요. 비가 무척 많이 내렸죠. 열 한 살이 넘어서 여학교에 가게 되었죠. 난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I met my first girlfriend at school. Her name was Sara. She was fourteen and I was fifteen but we were both in Miss. Watson’s class. Her wrists. Her wrists were beautiful. I sat in biology class, staring at the picket rabbit foetus in its jar, listening while Mr. Hird said it was an adolescent phase that people outgrew. Sara did. I didn’t.

첫 여자친구, 사라를 그 학교에서 만났어요. 그때 사라는 열 네 살이었고 난 열 다섯 살이었지만 둘 다 왓슨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죠. 그녀의 손목. 그녀의 손목은 아름다왔어요. 생물시간에 유리병에 담긴 토끼의 태아를 바라보면서 허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죠. 청소년기에 겪는 혼란일 뿐이라고. 사라는 그랬지만 난 아니었어요.

In 1976 I stopped pretending and took a girl called Christine home to meet my parents. A week later I enrolled at drama college. My mother said I broke her heart.

1976년에 더 이상은 숨기지 않고 크리스틴을 부모님께 인사드렸죠. 일주일 후에 연기자 학교에 등록했고요. 어머님이 그러시대요. 내가 당신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고.

But it was my integrity that was important. Is that so selfish? It sells for so little, but it’s all we have left in this place. It is the very last inch of us. But within that inch we are free.

하지만 나는 나와 내 삶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내가 이기적인가요? 비록 아주 하찮을 지 몰라도 나와 내 삶에 충실하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이잖아요. 우리에게 허락된 아주 작은 것.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죠.

London. I was happy in London. In 1981 I played Dandini in Cinderella. My first rep work. The world was strange and rustling and busy, with invisible crowds behind the hot lights and all that breathless glamour. It was exciting and it was lonely. At nights I’d go to the Crew-Ins or one of the other clubs. But I was stand-offish and didn’t mix easily. I saw a lot of the scene, but I never felt comfortable there. So many of them just wanted to be gay. It was their life, their ambition. And I wanted more than that.

런던. 그 곳에서 난 행복했어요. 1981년에 난 신데렐라에서 단디니 역할을 했죠. 최초로 내 이름을 알린 작품이죠. 그때 세상은 기묘하고 소란스럽고 북적거렸죠. 밝은 조명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 관객들과 그 숨막히는 화려함. 재밌고 좋았지만 언제나 외로웠죠. 밤에는 크류-인같은 클럽에 놀러갔었죠. 하지만 난 항상 혼자 있었고 잘 어울리지 못했죠. 거기에서 많은 걸 보았지만 난 불편하기만 했어요. 그런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냥 게이가 되려고 했답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요. 하지만 난 그런 걸 원하진 않았어요.

Work improved. I got small film roles, then bigger ones. In 1986 I starred in “The Salt Flats.” It pulled in the awards but not the crowds. I met Ruth while working on that. We loved each other. We lived together and on Valentine’s Day she sent me roses and oh God, we had so much. Those were the best three years of my life.

일은 잘 풀려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죠. 처음엔 단역이었지만 차츰 큰 역할을 맡았죠. 1986년에는 “소금 평야”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답니다. 상은 많이 받았지만 관객 동원은 별로였죠. 그 영화를 찍을 때 루쓰를 만났답니다. 우린 서로를 사랑했어요. 우린 함께 살았고 발렌타이 데이에 그녀는 내게 장미를 보내주었죠. 아, 우린 행복했어요. 그 때가 내 생애 최고의 삼 년 간이었어요.

In 1988 there was the war, and after that there were no more roses. Not for anybody.

1988년에 전쟁이 발발했죠. 그 이후 장미는 자취를 감췄답니다. 그 누구에게서도요.


 


 




 



In 1992 they started rounding up the gays. They took Ruth while she was out looking for food. Why are they so frightened of us? They burned her with cigarette ends and made her give them my name. She signed a statement saying I’d seduced her. I didn’t blame her. God, I loved her. I didn’t blame her.

1992년에 그들은 게이를 잡아들이기 시작했죠. 먹을 걸 구하러 나갔던 루쓰를 그들이 잡아갔죠. 그들은 왜 우리를 그토록 무서워하는 걸까요? 그들은 루쓰를 담뱃불로 지지면서 내 이름을 불라고 했어요. 그녀는 내가 그녀를 유혹했다는 진술서에 서명을 했죠.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요. 하느님, 난 그녀를 사랑했어요.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요.

But she did. She killed herself in her cell. She couldn’t live with betraying me, with giving up that last inch. Oh Ruth. . . .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를 원망했답니다. 그녀는 감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녀는 나를 배신하고는 살아갈 수 없었나 봐요. 자신에게 허락 된 최소한의 것을 포기한 채로 살아갈 수 없었나 봐요. 아, 루쓰 …

They came for me. They told me that all of my films would be burned. They shaved off my hair and held my head down a toilet bowl and told jokes about lesbians. They brought me here and gave me drugs. I can’t feel my tongue anymore. I can’t speak.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죠. 그들은 내가 출연한 영화를 다 불 태워버렸다고 말하더군요. 그들은 내 머리를 깎고 내 얼굴을 변기 속에 박아넣었죠. 그러면서 레즈비언에 대한 농담을 주고 받더군요. 그들은 나를 여기에 데리고 와서는 약을 먹였어요. 난 이제 혀에 감각이 없어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The other gay women here, Rita, died two weeks ago. I imagine I’ll die quite soon. It’s strange that my life should end in such a terrible place, but for three years I had roses and I apologized to nobody.

이 곳에 있는 다른 게이 여자 리타는 이 주일 전에 죽었어요. 나도 곧 죽게 되겠죠. 내 삶이 이런 처참한 곳에서 끝난다는 게 너무 기막히지만 그래도 내겐 장미와 함께 한 삼 년의 세월이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아요.

I shall die here. Every last inch of me shall perish. Except one.

난 여기서 죽는답니다. 나의 것은 모두 다 썩어서 없어지겠죠. 단 하나만 남기고.

An inch. It’s small and it’s fragile and it’s the only thing in the world worth having. We must never lose it, or sell it, or give it away. We must never let them take it from us.

내게 허락된 최소한의 것. 작고 연약하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하나 가질 가치가 있는 그것. 우리는 절대 그걸 잃어서는 안되요. 팔아치워서도 안되고 남에게 내 던져 버려도 안되죠. 절대로 그들이 우리에게서 그걸 뺏어가게 해선 안된답니다.

I don’t know who you are. Or whether you’re a man or a woman. I may never see you or cry with you or get drunk with you. But I love you. I hope that you escape this place. I hope that the world turns and that things get better, and that one day people have roses again. I wish I could kiss you.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당신이 여잔지 남잔지도 모르죠. 난 당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당신과 함께 눈물 흘릴 수 없을지도 모르고 당신과 함께 술에 취할 수도 없을테지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부디 당신이 이 곳을 탈출 할 수 있기를 바래요. 세상이 변해서 사정이 나아지길 희망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장미를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대에게 입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Valerie

발레리가.


영진공 이규훈


 


 


 


 


 


 


 


 


 


 


 


 


 


 


 


 


 


 


 


 


 


 


 


 


 


 


 


 


 

군인정신과 철들기



내가 아는 어느 교수가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누군가 불합리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넌 군대도 갔다 온 녀석이….’ 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군대’에서 뭘 가르친다고 생각하길래 그런 ‘불합리한 생각’에 수긍할거라고 믿는지 의아스럽다.

더불어 가끔 어떤 분들이 ‘애가 군대를 갔다 와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표현을 쓸때, 그 표현에 담긴 내용이 ‘게으른 것을 타파키 위한 의도’라면 이해해 줄 법도 하지만 부당한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는 떼쟁이의 모습에 대고 내지른 일갈이라면 되려 반문하고 싶다. 그래, 그렇게 적응하는 것이 좋은가?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자. ‘아나폴리스’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별칭이다. 아나폴리스라는 지역에 위치해서 ‘아나폴리스’다. 마찬가지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웨스트 포인트에 위치해서 ‘웨스트 포인트’라 불린다. 물론 공군사관학교도 있지만 생긴지 얼마 안 되었거니와 해군비행단이 훨씬 우수하므로 전통에서 좀 밀린다.

어쨌든, 이 두 사관학교가 1년에 한 번 미식축구로 승부를 보는데, 미국의 최고 경기가 ‘슈퍼볼’이듯, 얘네의 이 아마추어 게임도 상당한 인기를 끈다. 생도 때, 웨스트 포이너(west pointer)인 생도(cadet)와 아나폴리스의 생도(midshipmen)의 격전을 비디오로 본 적이 있는데, 흥미 있던 부분은 게임이 아니라 관중석이었다.


웨스트 포인트 애들은 오와 열을 맞추어 정갈하게 정렬해서 스탠딩 관람을 하고 있었지만, 아나폴리스 애들은 완전 개판이었다. 복장도 동정복(冬正服)을 양쪽이 입었으나, 해군은 단추 풀어헤친 사람부터 시작해서 스카프 풀어 휘휘 돌리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이건 문화적 충격이었다. ‘오와 열’을 중시하는 ‘군대 문화’에서 이런 해군의 ‘개날라리’ 모습은 새로운 것이었고, 그런 모습이 ‘당연하다’고 인식하는 장교들이 생도들을 가르친다는 것도 놀라움이었다. 흔히 얘기하는 ‘할 땐 하고, 놀 땐 놀자’라는 정신이리라.

물론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테잎을 보여준 사람은 해사를 나와 연세대에서 심리학 석사과정을 위탁교육으로 졸업하고 우리를 가르치던 나름의 ‘지식인’이었기에 군 내부의 전반적인 보수성향보다는 진보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육군이든 해군이든 우리나라는 군복에 주름 하나 잘못 잡혀도 꼭 한 소리 하거나 심하면 완전군장 돌리는 돌아이도 많았으니까 말이다.

제복은 옷이다. 옷은 입는 사람의 ‘사고’를 제한한다. 그런 격식과 규칙이 사고를 제한하고 지배하는 단체는 쉽게 통일성을 갖추고 지휘하에 놓일 경우,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런 곳에서는 ‘튀는 것’이 용납되지 않으며, 체제에 불응하는 것도 허용되지 아니한다. 더불어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것이 당연한 곳이기에. 불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 바로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무비판적인 사고로 수긍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대이고, 맨 처음 언급했던 사람들이 얘기하는 ‘체제에 대한 순응’을 투영시키기에 좋은 군대일 거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 큰 오산이다.
‘군인 정신’이란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과거 김종학 PD가 만든 ‘백야 3.98’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병헌이 공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였다가 불명예 전역을 하고 안전기획부(지금의 국정원)로 들어가서 북한군 장교인 최민수의 공작을 와해시킨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병헌이 불명예 전역을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율곡 사업의 비리. 당시에 불거졌던 F-16의 기체 결함 이슈에 겹쳐서 김종학 PD가 머리 굴려 만들어 낸 작은 에피소드지만 참 멋진 대사를 만들어 냈다.

기체 결함으로 추락하는 와일드 캣에서 탈출한 이병헌이 전투기 수입과 관련된 정부와 군의 비리를 캐내다가 공군 심리에서 결국 비리를 입증한 후 불명예로 전역한다. 이 때 심리장면에 군 수뇌부 역할로 출연한 정동환 씨에게 이병헌이 왜 이런 ‘불합리한 전투기 수입’을 벌였는지 이의를 제기하자, 분노하며 일갈하기를,

‘그게 바로 군인정신이야’

라고 하였다. 군인이라면 정치인의 꼼수와 이런 저런 알력에서 겨우 건져낸 ‘불량품’을 갖고도 열심히 ‘싸워야 하는’것. 그게 바로 군인이라는 주장이었다. 아, 이 얼마나 엿 같은 소리던가. 물론 상당히 ‘애국심’에 가득 찬 일갈이었으며, 어느 면으로 보면 ‘그래 그게 군인정신이지’라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군인정신이 아니다. 군인은 ‘불합리한 침략’에 맞대응하며, 그런 ‘불합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존재이지, 그걸 그대로 ‘순응’하면 그건 군인으로서의 면모를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는 존재의 배반이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군대가, 내부에서 자정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그때부터 그 군대는 비리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이제 사회를 병영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군대의 시스템을 적용시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논리를 고스란히 돌려주자. 이 사회에서 시끄럽기 그지 없을지라도, 지속적으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 사회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아니다.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에 대해 일갈하는 사람들은 사회 내부에 있는,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자정능력에 대해 일말의 기대감을 걸고 현실 개혁의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저 혼자 잘난 양 독야 청정하는 선비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이 덜 들어서’ 바른 소리를 해대는 것은 더욱 아니다.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고,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권위와 권력의 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허황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리 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가면 늦다. 나는 계속 깨어 있고 싶어도, 지친 삶의 무게에 눈꺼풀이 내려 앉을 것이며, 아무리 청년이고 싶어도 세월의 고집은 보수를 지향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 불합리를 불합리라고 인지하고 그에 반항할 수 있을 때,
이 때가 바로 내가 남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때다.

당신들이 배운 ‘군인정신’이 권위에 짓눌려, 권력에 신음하는 맹목적 복종이라면,
내가 배운 ‘군인정신’은 불의에 항거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지켜주는 일이며, 인습에 순응하지 말아야 하는, 뼛속 깊숙이 전사의 기질을 가진 그것이다.

시원스레 뻗은 평탄한 길에서 모난 돌은 잘 구르지 못하지만, 울퉁불통하고 중간중간 끊어진 길, 음습한 이끼들이 잔뜩 끼어있는 곳에서는 모난 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진공 함장

곽노현 교육감이 사퇴하면 안되는 이유




이번 곽노현 교육감 금품제공 건의 사실관계는 단순합니다.

당선자가 당시 경쟁후보자였던 이에게 선거 이후에 금품을 제공했다는 것.

이게 답니다.

여기서 문제는 “왜” 주었는냐인데 이 또한 단순합니다.

1. 지인의 곤란한 사정이 딱해서 “선의”로 지원한 건지,

2. 사전에 어떤 약속이 있어서 후보포기의 대가로 준 건지,

이것만 규명하면 됩니다.

1.의 경우라면 미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닥 문제삼을만한 일이 아닙니다.
2.의 경우는 범법이므로, 사실로 밝혀진다면 당연 자격박탈이고 처벌이 뛰따릅니다.

이러한 사실관계와 실체규명에 있어서 “사퇴”라는 방식은 별 연관성도 없고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왜 이슈가 되고 있는지 좀 아리송합니다.



⊙ 지금 시점에서의 사
퇴는 범법 인정을 의미한다.

곽 교육감은 이미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했으며, 이는 선의에 의한 행동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퇴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떳떳하기에 사퇴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사퇴를 한다? 그 사퇴의 변이 얼마나 진정성이 담긴 고뇌의 토로가 될지 몰라도 이는 곧 선의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으며 떳떳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사퇴하면 안될 일이며, 떳떳하지 못하다면 사퇴가 아니라 자백을 해야겠지요.

그리고 실체규명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과 자기 정파의 이익을 계산하여 사퇴를 압박하는 이들은 그에게 사퇴를 종용할 게 아니라 죄를 인정하라고 윽박질러야 맞는 표현이 될 겁니다.

사퇴의 시기는 지났다.

도덕적 견지라는 면에서라도 사퇴를 선택할 수 있는 시점은 지났습니다. 최초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하던 당시에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여 사퇴를 선택하였다면 모를까, 이미 그런 명분을 취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젠 길고 힘든 과정이 되겠지만, 검찰 수사와 이어 있을지 모를 재판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선의”의 진정성을 밝히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대가성이 밝혀지든가 하는 것이 오히려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사퇴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교육정책이 표류하니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글쎄요,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한 시점부터 정책수행의 표류는 시작된 겁니다. 이 표류가 사퇴로 인해 되돌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퇴로 인해 그 정책의 당위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평가가 더해지거나 덜해지지도 않습니다.

조직은 최고 책임자가 있어야 돌아갑니다. 정책은 그 책임자가 얼마나 성의있게 챙기느냐에 따라 진도가 결정됩니다. 그나마 책임자가 없으면 정책은 표류가 아니라 정지가 되고, 다른 성향의 책임자로 대체되면 아예 폐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정책을 반대하는 측은 책임자가 빨리 사라져서 정책이 정지되고 속히 자신들의 정책으로 대체할 사람을 넣고 싶어할 것이며, 찬성하는 측은 그나마 책임자가 남아서 그 정책이 적어도 정지되는 것은 막고 싶어할 겁니다.

결국 상황이 변하는 건 없고 다만 손익계산서만 남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번 건에 있어서 사퇴라는 방식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혼란만 더 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선의”를 주장하고 있고 상대방이 “대가”를 주장하는 상황에서는, 서울시 교육행정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를 가릴 수 있는 공권력에게 판단을 맡기는 게 가장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정파들은 이 건에 대해 지레 판단을 내리는 것을  자제하여 조속한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하여야 하고, 검찰은 늘상 하시던대로 공정한 수사를 진행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영진공 이규훈

 

세상은 부조리


1.
지금도 마찬가지다.

스무 살,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을 때 번역이 개판인 문제도 있었지만 정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두달 반 걸려서 두 번 완독했는데도 이건 내가 책을 읽는건지 활자를 훑는 건지 분간이 안갔지. 근데 미팅 나가서는 “순수이성비판은 2판본은 개악이라고 말했던 헤겔 말이 진리예요”라고 개 허세를 떨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창피하지.

도구의 인간이라고 육욕의 도구로 철학을, 그것도 칸트를 들이미는 내 수준은 생각하면 지금도 낮짝이 화끈거린다.

근데 이게 또 은근히 먹혔어요. 형이상학을 무기로 허리하학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나도 가관이었지만 그거에 또 홀딱 넘어가는 세상도 부조리하긴 마찬가지였던 거라. 돈으로 치자면 한 2천원짜리 수준의 논쟁이었지.

대신, 돌베게에서 나온 책들은 눈에 쏙쏙 들어와. 간결해. 명쾌해. 자본론은 의외로 머리에 콕콕 박히더라 이거지. 때는 92년. 87년 봄의 끝물같은 세상에 아직도 먹히는 아이템이었기에 나는 맑스도 읽고 레닌도 읽고 막 그랬을거야. 아니 그랬어. 도구의 인간.

내 정치적 지향점이 된 순간은 창피하지만 육욕의 도구로 시작된 철학적 욕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권력의 종이 되어버린 칸트의 철학은 자본론 앞에 무참히 깨어져 버린 셈이지”라고 맺고 낮게 투쟁가 한소절 부르면 ‘동지적 결합’이라는 탈을 쓴 욕망의 달콤한 선물이 툭, 떨어졌다.

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2.
부조리.

안전벨트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선 더 잔인한 장면을 찾아야 하고, 불쌍하게 죽은 경찰을 위해선 그 가족의 비통한 오열을 잔인하게 담아야 하고, 한 노동자의 분신을 이야기 하기 위해선 굳이 필요없는 고용자 가족의 개인사도 헤집어야 한다. 희망을 주기 위해선 처한 환경보다 더 못한 누군가의 비루함을 꺼내야 하고, 꿈을 주기 위해서는 성공한 사람이 다시 되돌아 보기 싫은 지옥같은 경험을 토하도록 해야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끔찍하게 죽어가는 암환자와 그 가족의 비통한 눈물에 뷰파인더를 집어 넣어야 한다.

3.
이번 정권을 보고 있자니, 스무 살 때 내 치기를 보는 것 같아. 다를게 하나 없는거야. 친서민을 외치면서 뉴욕에 쳐바를 돈 50억 빼느라 없는 자의 몫을 빼는 거. 그거 진짜 육욕에 미치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거거든. 그리고 그들이 내놓는 말들, 칸트 번역했던 그 개똥같은 책 만큼이나 뭔 말인지를 모르겠어. 와나. 이거 뭐 국격의 수준이 내 스무 살 욕망의 수준이랑 차이가 없으니 누구한테 이야기하기도 쪽팔린거야. 누구 말대로 복지는 혜택이 아니고 권리야. 이거 고등학생 정도 수준의 애들 교과서만 봐도 나오는 이야기 아니야?

그나마 사회 나가서 사람과 부대끼고, 힘든 사람들 눈물을 보고, 그들 눈물과 별 차이없는 내 통장의 잔고를 보고, 58원이 빈다고 새벽 2시에 가계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내 아내를 보고, 커가는 자식 놈 키우면서 아둥바둥 사니까 난, 반성이라도 했다.

바르게 살자고. 바르게. 남 피해는 안주게.

어렵지. 그래 어려워.

그래도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사람들이 이정도 어려움은 좀 뼈져리게 느끼고 살면 안되는 거야? 나 같은 놈도 반성하는데 말이야. 씨**들아.

4.
부조리.
혁명을 위해서는 부패가 있어야 하고, 민중이 일어서려면 죽음이 있어야 하고, 세상을 바꾸려면 꼭 피를 봐야하는 거. 슬프다. 겁나는 건 그거다.

누군가 안한다면 그게 내가 해야 할 몫일 수도 있는 거.

그래서 우린 전태일에게 박종철에게, 이한열에게, 그리고 지금의 김진숙에게 빚을 지고 살아야 하는 거다.

제기랄.

누가 좀 멈춰줘요. 아니 내가 멈춰야 하는 데 그거 한 발이 무섭고 떨리고 겁난다. 내 한 발 떼서 나가야 하는 용기가, 내 마누라, 자식, 엄마, 여동생, 친구, 2층집 할머니, 아들놈 유치원 동창이랑 그 녀석 아빠가 막 생각나.

제발, 이번 정권에서 우리가 상처입고 반성만 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한다. 그게 부처님이건, 알라건, 예수건 암튼 제정신 박힌 신이라면 듣겠지 하고 말이다.

부조리. 세상은.

영진공 그럴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