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희망이 없어, 멋있던 기억.,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영진공 66호>

과거사진상규명위
2006년 12월 31일

제 젊은 친구분의 블로그에 답글로만 달았다가 , 또 다른 친구분의 핀잔 듣고 본방에 올립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세대가 가진 새로운 영감은 …. 언제나 어제 그것의 반성이다.

제가 영화 ‘비트’에 늘 아쉬운 건, 진짜 원작 ‘비트’가 가진 얄팍하나만 진실한 시대정신입니다. 우리시대가 먹고사는 그 사실을 그렸던 데 반해, 영화는, 훨씬 단세포적이고 말초적이고 찰나적이고 개인적이고 우짜고 저짜고입니다.

제가 가장 좋은 영화평자게서는 김성수에 대해 늘 상당한 호감을 보여주셔서 그점 무시할 수 없고, 제가 제일 아끼는 동료 한분도
영화 비트에 대해 늘 끝없는 찬사를 주시지만, 원작이 가진, 얄박하나만 계속 지켜온 삶과 존재의 정서를 영화가 한 줌의
청춘광고물로 전락 시킨 건 늘 답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영화를 만들어 볼 기회가 온다면, 그리고 그게 오리지날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그 대상은 언제나 ‘비트’였습니다.

김성수의 비트보다 잘 포장할 자신은 없지만, 그 보다 원작이 보여주고 싶었던 그 정서는 더 잘 살려낼 자신이 있습니다.(물론 김감독도 못해서 못한게 아니라 안해서 그런 거겠죠.)

로미와 민의 차이는 현실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대로입니다.(그 현실감이 허화백을 당대 최고의 환쟁이로 남겨줍니다.) 로미가 겪는
고통은 민의 고통과는 차이가 있고, 그걸 쉽게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고, 차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존재의 시작을 늘
고통스러워하고 반성하고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계급에서 그런 천부적 능력을 남름대로 주어 받았지만, 결국에 그들
스스로 그들의 존재 방식에 적응하고, 이 시대의 사람처럼 살아가는 그 천부적 능력 때문은 아니였습니다.

그들이
꿈이 없었다는 건 그들의 각자의 환경을 이겨내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얼마나 행복합니까.
세상은 성공이니 뭐니 하면 각고의 노력을 각각의 개인에게 요구하지만…사실 그건 침략이고 공격이고 약탈입니다. 그들은 꿈을
꾸지 않을 수 있는 재주가 있었기에 나름 멋있고, 또 주인공이였습니다.
그들 주위의 사람들은? 환규는? 태수는? 로미의 주위사람들은? 그들은 꿈궜죠. 우리가 그이들 처럼 삽니다. 주인공들은 그래도 행복합니다. 꿈꾸지 않아서 그들을 허화백은 주인공으로 낙점했죠.

엔딩은? 모두 꿈꾸지 않았습니다만. 처음부터 약탈의 꿈을 꾸지 않은 민은 담담하게 행복합니다.

그들이 개인적 영달을 위한 꿈을 꾸지 않았기에, 즉흥적이고 즉각적인 세대임에도 (잘못된 것에 대해 심사숙고 하지 않고 바로 반대하고 반박하는 진실한 세대) 결국 성실한 삶을 가지게 됩니다.

홍콩 삼류 느와르처럼 싸움박질 하다 죽어가는 정우성(그가 민이라는 건 어불성설)에 비해 길거리의 노점에서 b자 데이프를 파는
민이에게 전 공감하고 자기애같은 사랑을 느낍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루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삶을 찬찬히 챙겨가는 불세출의
파이터에게 전 존경심을 보냅니다.

꿈을 꿀 필요가 없는 세상은 행복합니다. 그 다음은 꿈이라도 꿀 수있는 세상이
행복하겠죠. 실현 불가한 꿈만 꾸거나 꿈조차 꿀 수 없는 세상은 참담합니다. 비록 시작에는, 꾸어 볼 꿈조차 없던 젊은이들이,
선선히 비루한 기성의 삶이나만 꾸려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이 인간들이 가진, 거의 유일한 이유이자 가치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그 다음 ‘비트’세대에게 더 커다란 반항과 행복의 자리을 넓혀 주었습니다.

…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원작에 장면하나, 이사짐 센터 직원으로 나간 민을 깔보던 어떤 이에게, 민이 보여준 그 ‘침착함’과 ‘당당함’….제가 가진 완벽한 환타지. 제가 그렇게 멋지게 보일 시간이, 남은 평생에 있을런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장
버디(yibuddy@hanmail.net)

이제 중앙에게도 상 하나쯤 주자. 응?, <언론중재위원회>, <영진공 66호>

언론중재위원회
2006년 12월 30일

원체가 사돈의 팔촌… 이건 너무 흔하고 넓은 범위다. 사촌범위 내의 가족친지가 9시 뉴스에 나온다거나 꼭 한번쯤 다시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틀어준다거나 누가뭐래도 졸라 섹시한 나만의 천… 어흥.. 흠흠. 암턴지간에 섹시한 이횰이 새 배경곡을 깔고 새 의상을 입고 춤을 춘(그러니까, 3집 앨범을 발표한다거나)다거나 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TV를 잘 켜지 않는 나는, 각종 연말 시상식에는 특히나 더더욱 완전히 관심이 없어진다. 물론, 그 시상식에서 이횰이 새 배경곡을 깔고 새 의상을… 하기 전에는 말이다.

거의 열흘을 인터넷조차 잘 하지 않고 방구석에서 칩거(뭘 했냐고는 묻지 마시라.. 원래 관심 없다고? 그건 좀 섭하잖아)했던 나는 그 소식을 얼마전에 들었다.
사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내 뒤통수에 돌을 던지려거든 뭐 그러등가 해라.

동방신기가 가요대상을 받았다.

윤은혜는 최우수연기자상을 받았다.

… 이쯤되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수상”과 “연기자상”의 잣대에 아무래도 혼란이 오지 않을수가 없다. 그러니까, 흔히들 생각하는 기준으로 가수와 연기자에게 상을 줘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혹시 틀린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볼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유구찬연한 역사와 전통과 고집과 아집을 자랑하며 온나라 국민의 정신계몽에 선봉장으로 존나 힘쓰는 우리 방송/언론사 아찌들이 행한 일이라면, “그게 뭐냐”식의 탓부터 하기 전에 일단 거기에 맞춰서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노력도 한번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기도 하다. 내 말은.

내가 미친게 아니다. “팝콘 심리학”에서 짱가 박사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인간은, 자신의 상식을 넘어서는 어떤 일이 발생하면 일단은 어떻게든 그 사실을 억지로 끼워맞춰 이해를 해 보려고 노력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엉성한 발췌, 송구스럽습니다. 용서해 주세요-_-;;)

그래서, 나 거의없다는 어떻게든 이 현상을 이해하려고 삼일밤낮을 먹고자고싸고딸치고놀고공부하고친구만나며운동하는 시간만 빼놓고 고민의 고민을 거듭, 저 수상자들의 공통점을 키어코 찾아내고야 말았건 것이다.

대단하지 않냐? 아니라고? 끝까정 들어봐라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자, 연기자상을 수상한 “연기자” 윤응혜양의 사진들을 잠시 보시자. 이 사진들속에 그뇨가 당연무쌍하게도 상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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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는가? 어렵다고?  그렇다면 좀더 많은 힌트를 보여주게따. 이것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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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으셨는가? 연기력, 외모 같은 해묵은 잣대로 재지 말고, 그뇨가 진정 대한민국 톱클래스 그 중에서도 탑 오브더 탑으로 꼽힐 수 있는 잣대를 억지로 찾아보란 말이다.

고것은 바로 일관성이다.

보라. 무슨역을 연기하던, 광고를 찍던, 심지어는 지가 찍는 셀카에서조차 사정없이 흡사(아마도 가장 자신있는)한 표정과 각도와 앵글을 유지하는 저 노력을 보란 말이다. 

이에 비하면,
” 담배를 아주 맛있게 피우는”장면에서조차 겉으로만 슬쩍 빨았다가 다시 뱉어내는, 소위 ‘겉담배’를 철통같이 고수하며 정말로 담배를 맛있게 피움으로서 자신의 이미지에 가해질지도 모르는 이미지 손상과 팬들의 실망/악성 댓글을 사전에 완벽하게 차단하는 이영애의 이미지 고수 신공정도는 독고구검 앞에서 사과깎는 과도의 수준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거기서 멈추랴? 부자연스러움이 뭔지에 대한 사전적 해석을 온몸으로 설파하는 그뇨의 몸놀림과 “어색”을 정확하게 형상화시킨 한결같은 표정연기와 시청자들의 한국어듣기 능력을 무한대로 끌어올리는 그뇨만의 발성과 발음 역시 시종일관 유지되고 있어버리니, 이 절대무적 한결같음 앞에 그 누가 무릎꿇지 않을 것이냔 말이다.
일관성만을(오로지!오로지!) 잣대로 놓고 본다면 그뇨는 메릴 스트립 못지 않다.
한국의 보물급 여배우인 것이다. 어찌 상을 안 주리오.

자, 그렇다면 새로운 잣대로 가요대상을 지켜보자. 이해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당연하다.

무슨 노래를 부르건, 어떤 안무를 하건, 머리모양이 제패니즈 비주얼 록 그룹 부럽지 않은 온사방천지 삐죽머리(수만씨가 사랑하는 “전사이미지”다)에서 당장 담날 웨이브탱탱 윤기좔좔 찰랑찰랑 생머리로 바뀌건간에 한결같은 화음한결같은 음질로 들려주는 우리의 동방신기 역시 그 변치않음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카펠라’그룹이 아니냔 말이다.
세상 어느 아카펠라 그룹이 이와같은 한결같음을 유지할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화음은 SM에서 제작한 방송용 CD가 빡나기 전엔 영원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행여 팬들이 지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까 봐 개나소나 한번씩 다 불렀던 노래를 재활용(빨간풍선..인가?)해 부르며, 같은 기획사 선배들인 HOT의 의상을 재활용해서 입어주는 한결같음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이 흐르는 황하강과도 같은 한결같음의 물결 속에 어찌 무릎꿇지 않으리요. 상 줘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잘해따. 아주.
(윤응혜 사진은 갖다 붙이면서, 왜 동방신기 노래 mp3은 없냐고? ….미안하지만 나 그렇게 인내심 넘치는 사람이 못 된다. 실수로 플레이라도 누르면 어쩌란 말인가.)

자, 보시라. 한큐에 이해가 가지 않는가?
절 때 그들은 “가창력”이나 “연기력” 심지어는 “안무능력”이나 “외모”따위로 수상자를 결정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레미나 아카데미처럼 남들 다 하는대로 심사해야한다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상 이름은 좀…따라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민족은 변치않음을 커다란 미덕으로 삼고 있다.우리에겐 우리만의 기준이 있는 것이다.
한점이라도 의혹에 찬 눈으로 시상대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반성해라.

이 얼마나 공정무쌍한 수상이란 말인가.

그런데 나는 이쯤에서 건의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기왕 수상하는 거, 예술분야만 할 것이 아니라 타 분야에서도 괄약할 만한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숨은 공로자들을 찾아 그들에게도 수상의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 어떨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만약 언론 부분 수상자를 뽑아보라고 한다면, 난 주저없이 중앙일보를 뽑고 싶다.

이 생각은, 저번 주말 찜질방에서 무심코 집어든 중앙일보 논설란을 보고 더욱 구체화되었다.
모모 대학의 논술담당 교수라는 그 분은, 매우 심각한 어조로 요즘 젊은이들의 문장력과 어휘구사력에 문제가 있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주술 불일치 문장,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치 않은 문장 등등…
그 분은 이 모든 현상의 원인으로서 “확실한 말을 주변에서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 “주변에서 확실한 문장을 구사해주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는데..
과연 그 다음에 나온 말은 무엇이었을까.

물어 뭐하나.
“대통령이 앞뒤가 맞는말을 못해주니, 나라 청소년들이 보고 배운다.”

한줄 요약하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라는 말씀이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자주 들락거리는 곳의 주인장이 열혈(사실은 따라온 경품 덕에) 중앙일보 독자인 덕분에, 그곳에 갈 때마다 나는 심심찮게 중앙일보를 넘겨 보곤 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중앙일보의 논설란은 단 한번의 변화도 없이 위의 논조를 쭈~욱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온갖 변화무쌍한 테크닉을 구사하며 대통령을 까던 좃선 대단한거야 이제 뭐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놀라운 변신술또한 대적할 자 없다.
하지만 좃선과 똥아의 뒤를 이어 근근히, 한결같이 태도로 ‘깐 데만 죽어라고 까는’ 중앙의 숨은 공로가 있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거 한번쯤은 상 줘야 한다.
아마 중앙의 일관성에 대적할 자는 고1때부터 대학진학, 해외유학, 전신성형의 어마어마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그 뇌만은 한결같은 진공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귀여니 정도나 되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씨바.

언론중재위 산하 공정 노출 2팀
거의 없다(1000j100j@hanmail.net)

마틴 스코시즈: “디파티드”, <산업인력관리공단>, <영진공 66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6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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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된 사람들
같은 줄거리를 공유하고 있지만 스타일도 주제도 다른 <무간도>와 <디파티드>를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디파티드>가 굳이 <무간도>의 존재를 의식하며 줄거리의 과감한 생략과 압축을 할 이유도 없다.
<디파티드>의 1차 타겟 관객은 유덕화와 양조위를 여전히 사랑하며 절절한 연정을 바치는 아시아 관객이 아니라
<무간도>의 존재조차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미국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무간도>를 보고 좋아했던
관객이, <무간도>를 애써 잊고 <디파티드>를 처음 보는 스토리의 영화인 양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것이, <디파티드>가 누려야 할 정당한 평가의 몫을 깎아먹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단적인
예로, 마치 <무간도>는 존재하지도 않는 듯 써내려간 [씨네21] 허문영의 <디파티드> 평을 보고 있노라면, 상당히 공감이 감에도 불구하고 불공평을 공평으로 가장하는 편향과 가식의 시선이 느껴진다. 차라리 <무간도>와 직접 비교를 해버렸다면, 편향은 느낄지언정 가식과 위선의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허문영은 “<디파티드>는 거장의 가장 나쁜 영화”라고 평했지만,  난 꼭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꼼꼼이
지적한 대로 윌리엄 모나한의 각본에 구멍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디파티드>가 그려내는 주제에 있어 그 부분이
심각하게 문제가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경찰과 갱조직이 서로 스파이를 침투시키고는 아슬아슬한 조직 간 대결을 펼친다는 기본
전제 하에, <무간도>가 캐릭터를 중점에 둔 영화로 나아가며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 윤리적 고찰을
시도한다면(이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디파티드>는 같은 이야기로 지금, 여기의 미국사회에서 목적을 위해 수단화되는
인간의 파멸을 통해, 조직과 세계를 가까스로 떠받쳐주던 규칙과 룰에 대한 전면 부정을 선언하며 사회학적 지도를 펼쳐보인다. 이
차이는 같은 스토리의 두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좀더 풍요로운 인식과 사고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관객에 따라 선호의 차이를 낳을
수 있겠지만, 방향 자체의 우월성을 따질 문제는 아니다. (나도 <무간도>식 접근이 좀더 취향에 맞긴 하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접근의 차이를 영화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이고 효과적으로 성취하고 있는지를 따짐으로써 영화에 대해 좀더 합리적인
평가를 내려야 한다. 허문영의 평과 달리 나는 <디파티드>가 마틴 스코시즈의 세계에 충실하며, 한편으로는 나이든
거장의 한 발 더 나아간 인식의 전환을 그려낸다고 생각한다.

암흑의 세계에는 저 오버그라운드의 법과 제도의 규칙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만의 질서가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처럼 애초에 그 암흑의 세계의 건설 역사가 곧바로 미국의 건국 역사의 커다란 일부를 차지하는 경우, 오버그라운드와 암흑의
세계는 상호 견제하면서도 위험한 공생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공식 역사가 아무리 자기들의 탄생을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근대적 ‘혁명'(‘미국 독립전쟁’의 공식 영어 표기는 ‘American Revolution’이다)을 통해
건설된 나라”라고 거창하게 미화한들, 스코시즈가 <갱즈 오브 뉴욕>에서 적절하게 그려냈듯, 실제 미국 건국의 역사는
“선주민은 제거하고 후-이주민은 견제하려는 단결된 커뮤니티, 즉 갱조직들 간의 학살전쟁과 휴전의 반복을 통한 세력다툼으로 형성된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갱들간 전쟁 이후 가까스로 암묵적 합의 하에 성립된 상호 불편한 공존 상황에서, 아무리
오버그라운드의 법이 암흑의 세계를 겨냥해 범죄 소탕 작전을 벌인다 한들 두 세계가 전면전을 벌이는 경우는 극히 적다.
오버그라운드의 법과 제도가 암흑의 세계에 개입하는 때에는, 암흑의 세계가 오버그라운드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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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 영감님의 포오스... "장풍을 받아랏!"

마틴 스코시즈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러한 존재적 특성을 아주 잘 꿰뚫고 있다. 스코시즈의 전작들 중 많은 숫자는 대체로
이러한 전제 위에서, 암흑의 세계에 속해있는 조직이 어떻게 형성-유지-붕괴되는가를 묘사해왔다. 때로는 환경적 특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혹은 철모르고 암흑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오버그라운드로 발돋움하는 캐릭터를 그리기도 한다. 대체로 그의 영화들은 암흑의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에 대해 의심을 던지면서도 전면적 부정은 하지 않으며, 오버그라운드의 법과 제도의 불완전성을 응시할지언정 그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아왔다. 그런데, <디파티드>는 이제껏 마틴 스코시즈가 그려왔던 그 익숙한 세계를 그리면서도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말하자면, 갑자기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가 돼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그가 야심차게 연출했으나 부분적 실패를 보여주기도 한 <갱즈 오브 뉴욕>에서 일정 부분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갱즈 오브 뉴욕>을 통하여 이제까지 그가 그려온 도시의 뒷골목, 특히 이태리
이주민 공동체의 풍경 묘사가 미국 사회를 미시적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사회학적 연구였음을 선언하고, 그 미시적 관점들로 묘사된
부분과 부분을 통합해 거시적인 관점으로 미국의 역사를 재구성한 영화가 <갱즈 오브 뉴욕>임을 보여준 것이다. 위에서
말햇듯, <갱즈 오브 뉴욕>을 통해 드러난 마틴 스코시지의 역사관은, 결국 숭고한 근대적 혁명의 인공국가 건설이
아니라, 인종과 혈통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와 커뮤니티 간에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거해 벌이는 살벌한 생존 전쟁과 배타의 역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미국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오버그라운드고 암흑세계고 할것없이 이제는 ‘쥐새끼’들을 풀어놓는다.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탐욕스러운 개인들을 끌어들여서. 공존의 시대는 끝났다. 다이다이로 혹은 도끼를
들고 정면에서 집단 패싸움을 벌이던 시대도 끝났다. 물론 공식적인 사법적 절차를 거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이고
집단이고, 이제 윤리니 룰이니, 최소한의 명분이니 하는 것도 없다. 무조건 상대를 밟아죽인다 – 그러기 위해 정보원을 심는다.
달콤한 출세의 보상을 약속하면서. 때로는 무시무시한 피의 보복으로 협박하면서. 그러한 집단은 숭고한 혈맹으로 맺어졌든(개뿔!)
합법적 테두리 안에 있는 공적인 권력이든(그래봤자 깡패랑 다를바 없는!), 이미 자신의 존재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부> 시절의 마피아는 지역 커뮤니티의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이라도 했지.) 한 집단 내에 불신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이젠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믿을 것은 나 자신뿐,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사-아버지건 뭐건 죽일 수 있을 때
죽인다. 쥐새끼가 퍼뜨리는 것은 불신이다. 그간 마틴 스코시즈의 인물들을 붙잡아주었던 최소한의 바운더리, 즉 (카톨릭) 신앙은
<디파티드>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부정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건, 이 불신이 판치는 세계에선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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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를 제일 이뻐해!"

그러므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뿐이다. 대대적인 쥐새끼 사냥이 벌어진다. 호랑이를 가장한 쥐(퀴넌
– 마틴 쉰), 사자를 가장한 쥐(프랭크 코스텔로 – 잭 니콜슨), 자신이 쥐새끼라는 사실이 못내 괴로운 쥐(빌리 코스티건 –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모두가 죽는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인 줄 알았던, 자신이 쥐새끼임을 너무 잘 알고 쥐새끼로서 가장
충실했던 쥐(콜린 설리반 – 맷 데이먼)는, 고양이를 가장한 또다른 쥐(딕넴 – 마크 월버그)에게 죽는다. 이들의 죽음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정서가 끼어들 틈도 순간도 없다. 모두 순식간에 죽어 나자빠진다. 포악한 절대악의 화신이건 외견상으로는 온화하고
마음약한 법의 집행자이건, 이들은 모두 아들에게 쥐새끼가 될 것을 강요하며 아들의 뒷골을 빼먹는 폭군 아버지이며, 이것이 바로
미국 사회의 두 얼굴이다. 이들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사적으로 정의를 집행해 버림으로써, 딕넴은 경찰, 소위 공권력 – 이자
오버그러운드의 법과 제도의 상징 – 의 명분을 스스로 부정한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메사추세츠주 의사당 안에는 여전히 쥐새끼들이
득실거리고, 시스템의 최소한의 윤리와 정의를 믿었던 자(매돌린 – 베라 파미가)는, (딕넴을 제외하고)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회의와 상처를 안은 채 표표히 길을 떠난다. 이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이 <디파티드>의 엔딩이고, 이것이 마틴
스코시즈가 바라보는 미국의 현재이다. 마지막 딕넴의 사적 정의 집행을 통해 마틴 스코시즈는 이 세상을,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를
적극적인 부정하며 공식적인 사망 선고를 내린다. 모두가 죽은 곳에 남은 것은 핏자국과 그 수를 모를 쥐새끼들뿐. 이 사회가
움직이는 방식, 이 사회가 유지되는 방식, 이것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더이상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아니라, 비열한 거짓말과
불신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지옥, 모두가 강제로 추방될(Departed) 수밖에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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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월버그 다시 봤다니까... 딕넴 최고!

ps 1. 배우들에 관한 짧은 감상 :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웃기는 헤어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가장 놀라운
도약을 보여준 마크 월버그의 딕넴. 지 할 몫은 다 한 맷 데이먼. 우아한 마틴 쉰, 여전한 잭 니콜슨. 닳고닳은 속물 연기가
더없이 잘 어울렸던 알렉 볼드윈(내가 알렉 볼드윈에게 감탄할 때가 다 있다니!). 그리고 놀랍게도, 이번에는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거슬리지 않았다, 모기의 단언대로. 제발 딴데가서 삽질해서 영화 망치지 마라.

ps 2. 영화 제작사 중 한 곳인 Plan B Entertainment는 브래드 피트와 제니퍼 애니스톤이 같이 만든
제작사다. Executive Producer로 브래드 피트의 이름이 뜨는 것은 그 때문. 괜찮은 제작자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는 듯.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사이드 무나: “21세기”, <산업인력관리공단>, <영진공 66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6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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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무나 감독
동지이자 친구였던 ‘이주노동자 자히드’가 ‘다큐멘터리 감독 사이드 무나’가 되어 돌아왔다. 이주노동영화제에서 상도 탔다는
그의 영화 <21세기>를, 나는 어제 후원의 밤에 가서야 봤다. 현재 방글라데시에 큰 이익을 안겨주고 있다는
의류산업의 장에서, 전체의 약 80%인 여성노동자들은 한달 겨우 1,000 ~ 1,500 다카(약 2만원)를 받고 일한다.
1인당 최저생활비가 3,000다카는 필요한 상황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2시, 어떨 땐 새벽 2, 3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
새벽 4시부터 화장실에 줄을 서서 물을 받아 식사준비를 하거나 씻고서 출근하고, 시간 외 수당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하는 동안 문을 밖에서 잠그기도 하고,  중간 관리직인 남성 노동자들과 고용주에게 일상적으로 성폭력에 노출돼 있는 아주
열악한 상황. 그 안에서 방글라데시의 의류노동자들은, 스스로 모여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섰다. <21세기>는
감독의 개입이 전혀 없이(그 흔한 내레이션이 한 줄도 없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쌩으로’ 그대로 전하며 이들의 상황을,
그리고 고조되는 투쟁에의 의지를 ‘스스로 카메라에 대고 고발 / 고백’하게 하는 데에 그 진짜 미덕이 있다. 비록 짧은
러닝타임과 조금은 서툰 구성일지라도, 그 구체적인 지리적 장소가 방글라데시의 의류산업 공장이었을 뿐, 한 나라의 중추적 산업에
있어 정부-자본의 합동작전 하에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여성 노동자가 처하게 되는 상황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건 어느 나라, 어느
산업에서도 같다. 우리나라에선 바로 6, 70년대 청계천으로 대변되는 의류산업이 그랬고, 이젠 서비스산업으로 옮겨갔을 뿐,
그리고 민주화 투쟁을 통해 착취/억압의 방식이 조금 더 세련돼졌을 뿐.

[#M_ 접은 부분은, 영화상영 후 감독-관객 간 대화|less..|

Q. 방글라데시에서 실제 노동자들의 경제적 사정이 어떤가?

A. 1971년부터 2001년까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은 960다카였다. 한국 돈으로 1만원 가량 된다. 한국에서 현재 한
끼를 밖에서 먹을 때 드는 밥값이 4~5,000원 정도라 할 때, 그 상당의 식사를 하려면 70다카가 든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60다카 정도 하는 도시락을 먹곤 한다. 이 노동자들의 집을 가 보면, 가구가 밥통, 물통, 그리고 그 사이에
매달아놓은 끈이 전부다. 그 끈에다 옷을 건다. 바닥도 거의 맨바닥. 서울역 등에서 노숙자들이 박스를 깔고 덮고 자곤 하는데,
거의 그렇게 생활한다고 보면 된다.

영화에서 인터뷰에 응한 노동자는 1,500다카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 정도면 아주 잘 받는 축에 속한다. 의류공장의
노동자는 80%가 여성이며, 이들은 주로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왔고 집이 없으므로 당연히 밀집지역에 방을 구할 수밖에
없는데, 미혼 여성들은 방을 얻기가 힘들다. 지역 깡패들이 여성들을 괴롭히고, 방주인들은 이런 복잡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미혼
여성들에게 방을 내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여성들은 회사에서 20%를 차지하고 있는 중간관리직 남성 노동자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중간 관리 노동자들이 여성들에게 성 상납 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공장 내에서도 협박과 성폭력은
아주 일상화되어 있다. 중간관리직 남성 노동자는 물론이고, 고용주가 심지어 자기 친구들까지 동원해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성희롱을
일삼는다. 고용된 여성 노동자가 예쁠 경우 야간 작업조로만 돌리고는 밤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식이다. 귀가 길에서도 문제다.
지역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경찰한테도 고초를 당하게 되는데,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여성들에게 이들은 자신이 성매매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출퇴근 카드에는 실제로 밤늦게까지 일을 했음에도 7시에 퇴근한 것으로 돼 있어 괴로움이
많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어렵다. 잠깐 미싱 앞을 떠나 있는 게 관리직 눈에 띄면 200다카를 벌금조로 월급에서 제해버리곤
한다. 일하는 동안 감금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일년에 몇 차례씩 의류공장에서 대형화재가 나곤 하는데, 이렇게
감금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명피해도 그만큼 높다. 공장 내엔 비상계단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좁고 위험해서, 화재가 나면
대피하는 와중에 부상을 당하는 일도 많다. 심지어는, 화재가 나면 혼란 와중에 회사 재산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오히려
문을 닫아버려 인명피해가 더 증가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치타칸이라는 지역에서 실제로 화재가 났는데, 정부와 언론에서는
사망자의 숫자가 약 400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과 노동자들이 파악한 숫자는 무려 1,400명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 그날 공장으로 배달된 도시락인 1,400개였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서 노동자가 다 죽었고 그 숫자는 1,400명이었다.
이런 일이 1년에 몇번씩 발생한다.

영화 속의 투쟁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의류노동자들이 30년을 그렇게 살다가, 인터뷰에서도 말을 했던 분이 가먼트
포럼(Garment Forum)을 조직을 했다.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을 하는 단체다. 가지푸르에서 5개 공장을
중심으로 파업을 주도했는데, 가지푸르 사거리에서 경찰 폭력 때문에 2명이 사망했다. 그 다음날, 50여 개의 공장에서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했고, 이 날도 2명이 죽었다. 그러자 그 다음엔 전국에서 300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조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때 거의 1주일 동안 전쟁 분위기였다. 공장에 불을 지르기도 하면서 투쟁이 계속되자 정부가 나서서 사장들의 단체와
함께 협상을 중재했다. 노동자들의 8개 요구안을 수용하기로 약속하고 투쟁이 멈추었는데, 2달 후 정부는 1인당 최소 생활비가
3,000다카는 필요한데 최저임금을 1,100다카로 올렸고, (노조는 아니라도) 노동자 단체를 만들어도 된다는 허가를 내줬다.
그래서 지금 노조를 만들려는 작업이 한참 진행중이다.

재미있는 게, 물론 방글라데시에서도 정부, 사장들의 편을 드는 나쁜 지식인들이 있다. 그 중 아주 보수적인 지식인이 책을
하나 썼는데, 거기에 “노조는 필요하다, 지난 번 그 전국적인 파업은 노조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썼다. 정부와
사장들의 단체가 이것을 받아들여 노조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기 전에 사장 단체가 자기들
말을 잘 듣는 노조, 일명 어용노조를 결성을 하려고 하고 있다. 복수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1개 회사에 1개의 노조를 허락하는
조항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저 투쟁을 이끌었던 가먼트 포럼이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제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찾아와 스스로를 조직화하려 애쓰고 있으며, 가먼트 포럼의 지부를 신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미
만들어진 노조들은 대부분이 아직 어용노조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조직화하자 경찰이 지도부를 연행해
갔다. 다음 날 또 조직을 만들자 이번에는 조직의 새 리더들이 실종되었다. 이들은 공장에도 집에도 안 돌아왔고 간 곳을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는 납치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음 날 또 조직을 만들자 결국 사장 단체가 방글라데시 내에 이름이 좀 알려진
다른 조직의 노동자 리더 8명을 데려와 협상에 임했다. 그런데 협상에도 불구하고 그곳 노동자들은 더욱 투쟁을 했고, 이에 대한
이유를 묻자 투쟁하던 노동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8명은 우리 조직의 리더도 지도부도 아니다. 그 8명은 오히려 우리를,
노동자들을 팔아먹었다. 일을 조금 시키는 대신 보너스를 25%에서 15%로 삭감하는 협상에 서명했다.”

Q. 언론의 반응은 어떤가?

언론도 사업체일 뿐이다. 다들 커머설(Commercial – 상업적) 미디어들인 것이다.

Q. 정부는 이 상황을 모두 알고도 묵인하는 것인가?

A. 그렇다. 사장들의 단체가 정부를 움직인다. 방글라데시에서 의류산업은 아주 크고 중요한 산업이다. 사장들의 단체는
여당이고 야당이고 할 것없이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어도 노동자들의 편을 드는 정치가는 없다.모두 사장들의 편을
든다.

Q. 내가 아는 사이드 무나는 이주노동자 조합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미디어 감독이 되어 나타나서 개인적으로 참 놀랐다. 어떻게 미디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가?

A. 내 20대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내며 이주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배웠다. 방글라데시에 돌아간 후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입만 열면 한국 얘기라고 친구들이 구박할 정도였다. 그런데 방글라데시에서 보니, 한국에서의 내 생활은 너무 편한
거였다. 생활은 (방글라데시의 노동자보다) 훨씬 편한데 투쟁은 훨씬 더 치열하게, 무섭게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노동자들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하다. 그런데 나는 사실 학교에 다닐 적 학생운동을 했다. 인터뷰에도 나온, 가먼트 포럼을 만든 분이 내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선배였다. 그 선배를 찾아가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물었더니 당장 자기 단쳉 들어와 일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난 그게 좀 아닌 것같았다. 내가 의류노동자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연대할 다른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노동자들을 만나보면, 사람들이 너무 착하다. 한국에는 방글라데시가 못사는 데도 행복지수가 높다는 말이 떠돌고
있는데, 그건 결국 바보라서 그런다. 그렇게 착취당하고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밤새 남편에게 맞아도 다음날 아침에 행복하다고
말하다. 바보라서 착한 거다. 가먼트 포럼 사무실에 나가 그냥 이일 저일 조금씩 도와주면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그분들
집에 찾아가 그 열악한 상황을 보면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치가들을 만나거나 하면, 처음에 혼자라고 무시를 많이 당했다. 거의 쟨 뭐냐, 분위기. 후배 학생들을 만나러
가면, 얘네들은 “우리도 다 알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우린 안 돼”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거다. 그때, 카메라를
떠올렸다. 한국에서 명동성당 천막농성을 할 당시, 사실 카메라가 천막 안에 들어오거나 인터뷰를 하자고 하거나 하면 솔직히
귀찮기도 하고 신경질도 나기도 했는데, 그 카메라가 떠오른 거다. 카메라로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려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ETV에 들어갔다. 여기는 그나마 약간은 진보적인 방송국이었고, 결국은 정부의 탄압을 받고 문을 닫아야 한 이후 지역
미디어 교육 등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만난 친구들, 여자 넷, 다른 남자 동지 둘과 팀을 꾸렸다.

한국에서 투쟁하면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가사가 있는 노동가도 부르고 했는데, 방글라데시에서는 정말,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많다. 인간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을 직접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디어 운동도 굉장히
중요하다. 학생단체들은 자기네들도 다 안다고 하지만 실제론 잘 모른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게 됐다.

Q. 노동운동과 미디어운동이 마치 양립할 수 없는, 분리된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데, 그것도 반-자본주의라는 하나의 큰 틀로 같이 볼 수 있지 않을까? 방글라데시에서 지금의 투쟁이, 나에게는
반독재투쟁과 반자본주의 투쟁이 섞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상황이
어떤가?

A. 노동운동과 미디어운동이 양립할 수 없다거나 분리돼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제까지 내가 받은 질문들 중엔,
노동운동을 해야지 왜 미디어를 하고 있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을 한 거다. 반자본주의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단결과 연대가 필수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미디어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방글라데시에서는 ‘연대’라는 말 자체가, ‘단결’이란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단결과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동운동을 직접 하는 것보다도 미디어운동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Q. <21세기>는 한국에서만 상영된 것인가?

A. 그렇지 않다. 일단 국내에서 상영을 했고, 내가 개인적으로 한국에 추억이 많기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 꼭 상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국에서 상영을 한 거다. 현재 21세기는 터키의 노동영화제와 캐나다의 토론토인권영화제에 가 있다.

Q. 많은 사람들이 21세기를 봤으면 좋겠는데, 유투브와 같은 온라인 상영도 했으면 좋겠다. 계획이 있는가?

A. 생각은 하고 있는데, 우리 그룹 멤버들 중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뿐이다. 우린 편집을 할 수 있는 컴퓨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방글라데시에서 인터넷 속도는 매우, 매우 느리다. 사실 미디어 운동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얼마
전에도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는 문성준 감독을 가리키며) 잡혀갔다 풀려났는데, 방글라데시에서는 잡혀가고 풀려나고, 이런 거
없다. 그냥 죽을 거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경찰이나 군인 등이 갖고 있는 합법적인 총의 4배가 넘는 불법 총이 풀려있고, 이것은
깡패들이나 정치인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거나 암살할 때 쓰인다. 우리도 이런 미디어를 찍는 게 그냥 잡혀가고 풀려가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길가다가 그냥 죽을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사람을 참 쉽게 죽일 수 있다. 20만원만 준다고 하면
누구나 청부살인을 해달라는 요청에 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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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자히드 씨가 긴급히 16일 귀국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와의 만남은 어제가 당분간 마지막이 되었다.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그가 눈물을 흘렸다. 그가 한국에서 추방되었을 때와 달리 나는 울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의 그는 언제나 어딘가
불안하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미디어 활동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지금의 사이드 무나는 자신감 있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것으로
좋다. Take yourself, comrade.

ps 2. 사이나 무나가 속한 미디어 집단 “Break Through”는 현재 편집 컴퓨터는커녕 카메라도 없어 활동이 힘든
상황이다. 이 상황에 연대하기 위해(까놓고 말하면 카메라를 비롯한 영상장비 조달을 위해) 팀이 꾸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브레이크 쓰루 블로그를 참조하시라.(후원금 내시란 얘기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빨간 책 읽어주는 여자” 2탄 – All that ass, <송년특집 2탄>, <영진공 66호>

문예창작위
2006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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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책 읽어주는 여자 최초 제목은 올댓*스였습니다.

미드*잇 요청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사실, 제목이 좀 마음에 안들었죠.

뭐, 이것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좀 더 노골적이어서 방송 제목으로는 더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던데….  댓글이 무려 6개(그중 3개가 ㅡㅡ;;;)로 2편마저 올립니다.

뉴스 앵커하다가 잠시 딴 거 하는
그럴껄(tito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