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그리고 1968년


[문화일보] 발길 돌리는 수문장 (2009.6.5)

[문화일보] 대한문 앞은 아직도 ‘무법지대’ (2009.6.22)

그리고 6월 24일.
대한문 앞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보수단체의 기습을 받더니 철거됐다.


1968 년 1월 18일. 서베를린 쿠프퓌르스텐담 광장에서는 약 2만명의 시민들이 ‘불법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체게바라’와 ‘호치민’을 연호하며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판했다.  이 시위에는 독일 학생 운동 지도자 루디 두취케가 있었다.

‘ 빌트 차이퉁’을 비롯 여러 신문들을 소유한 당시 독일의 언론 귀족 악셀 슈프링거는 미국의 세계 정책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독일의 산업귀족 대부분은 독일 제 3제국의 후원자였고, 과거에 히틀러를 공격하지 않은 것처럼 패망 후에는 그들의 새로운 보호자 미국을 섬기려고 애썼다.

악셀 슈프링거의 신문들은 그래서 두취케를 ‘빨갱이’라고 공격했으며 심지어 ‘더러운 일을 경찰에게만 맡기지 마라’라는 제목까지 붙였다.

루디 두취케

뮌헨 출신으로 실직 상태에 있던 요제프 바크만은 매일 이런 신문을 읽었다. 자신의 처지에 낙담해 있던 그는, 학생들을 공격하는 ‘빌트 차이퉁’을 읽고 만족감을 얻었다.

1968년 4월 11일. 루디 두취케는 어린 아들의 약을 짓기 위해 서베를린의 약국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요제프 바크만은 두취케에게 다가가 세 발의 총을 쏘았다. 한 발은 가슴에, 한 발은 얼굴에, 한 발은 머리에.

요제프는 자신을 붙잡은 경찰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마틴 루터 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산주의자를 미워하기 시작한 뒤로 내내 두취케를 내가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분노한 학생들이 독일 전역에서 슈프링거의 사무실을 공격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어느 우익 목사가 집회하는 교회로 들어가 마지막 찬송가를 ‘인터내셔널가’로 바꾸어 버렸다.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중에서)


1968년 4월 11일, 수 천명의 학생들이 슈프링거 신문 베를린 본부 앞에서 루디 두취케 저녁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이고있다.

총격으로 인해 루디 두취케는 뇌에 심한 손상을 입어 말하기를 다시 배워야했고, 이후 영국과 덴마크를 전전하다가 1979년 12월 24일에 덴마크 거주지에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저격 사건은 독일의 학생운동을 과격일변도로 치닫게하여 바더마인호프가 만들어지는 계기를 제공하였지만, 정작 루디 두취케는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학생운동을 주창하였다.

요제프 바크만은 저격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중 1970년 2월 24일에 자살하였다.


바다에서 낙조의 화폭은 하늘 만이 아니다. 해는 자신이 잠겨가는 바다까지 색색의 노을로 물들여 놓는데 그 순간에는 바다에 금빛 찬란한 들판이 생기고 하늘에 석양 짙은 섬들이 생긴다. 바다의 포말은 추수 전 벼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황금빛이고, 하늘의 구름은 땅거미 지는 섬처럼 그림자를 내민다. 낙조의 바다는 들판과 바다와 하늘과 섬을 모두 합쳐놓은 거대한 어울림이다.

유년은 모두 바닷가에서 보냈다. 내 유년의 노을은 그렇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논이 없는 동네에서 난 해지는 바다를 통해 논을 보았고, 다도해가 아닌 동네에서 난 해지는 바다를 통해 섬을 보았다. 뭍의 노을은 그보다 훨씬 소박했다. 열기가 느껴지는 이글거림도 없었고, 모든 걸 다 섞어버리는 어울림도 없었다. 고운 주황과 고운 붉음을 입김처럼 호호 파란 하늘에 내뱉다가 산등성이로 어둠을 뿜고 조촐히 식어 버렸다. 싱거웠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고속도로. 차 왼편으로 그 싱겁고 조촐한 노을이 걸렸는데 수많은 타워크레인이 공성병기처럼 노을 앞에 서 있다. 아산 혹은 오산 근처였을 것이다. 타워크레인이 사라지면 그 자리를 대규모 고층 아파트가 대신할 테니 그 싱겁고 조촐한 노을마저 찾아보기 어려워 질 것이다. 노을이 본시 싱겁고 조촐했을까?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하는 바다에서 인간의 손이 닿는 뭍으로 옮아오면서 노을은 싱겁고 조촐해진 것 아닐까?

김훈은 일산을 가르켜 ’10만년의 수평을 30년의 수직이 대신하게 된 동네’라고 했다. 어디 일산 뿐이고, 10만년밖이랴. 이 갸날픈 ‘자연보호 정신’조차 창피할 정도로 도시의 속도는 가파르니 기껏 노을이나 보고 상념이나 찍어내는 일까지 구태의연하고 촌스럽다. ‘디자인 서울’은 그 사이에도 무럭무럭 잘 자라날 것이고.

영진공 철구

‘드래그 미 투 헬’,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공포영화

원래 <다크맨>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 님이셨던,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로만 알려지셨던 바로 그 님하께서 오랜만에 만드신 공포영화, <드래그미투헬>을 봤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IMAGE 1 =-


1. 전형적인 귀신 공포영화다.
어디서 본 듯 한 것들로 착실하게 구성되어 있다. 얼핏 전설의 고향 필도 풍긴다.
그래서 이걸 “전형적”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전형적인” 것들이 의외로 드물다. 게다가 전형적인 것들만 모아놓다보면 진부해지기 십상인데, 이 영화는 전형적이면서도 참신하고 생생하다.

2. 그리고 고전적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피가 별로 안나온다. 사지절단? 그런거 별로 없다.
폭력 조차도 거의 드물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포영화라 할 수 있느냐?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공포는 폭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추함과 더러움에서도 온다는 사실을 … 그렇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말은 사실은 자기 기만이다. 그 더러운 똥이 내게 묻을 것을 생각하면 매우 무섭지 않던가.
더러운 것은 무섭다. 이 오래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고전적인 영화다.
이 영화, 진짜, 징하게 … 드럽다 …

3. 의외로 쿨하다.
요즘 영화들은 클라이맥스 강박에 빠져있다.
더 크게, 더 놀랍게, 더 웅장한 결말을 제공하려고 절박하다.
게다가 영화 끝나고 나서도 뭔가 할 말이 남았는지 쿠키니 뭐니 숨겨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영화, 걍 쿨하게 끝낸다. 뭘 더 바래? 원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더냐? 라고 묻는 눈빛을 던지며 …
그 쿨한 결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고전적이라 하겠다.

쥐 잡아다주면 안 잡아먹쥐~

이 영화 참 짧고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지만
그래도 생각해볼 거리들은 몇가지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

의문 1. 왜 저주는 그런 집시 노파 같은 존재의 것일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게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저주를 내리는 이는 말 그대로 더럽고 추한 노파다. 생긴게 말 그대로 마녀가 따로 없다. 이 노파, 이름도 괴상한데다 추접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추접들 중에서도 테이블에 놓인 사탕까지 쓸어담는 추접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냉정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데 일익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거다. 왜 하필이면 그런 노파가 저주를 내려야 할까? 안그래도 할머니들은 어디서나 구박댕이들인데, 이런 영화가 그런 노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하나 덧씌우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실제로 저주는 바로 그런 이들의 것이었다.
집시는 소수집단이다. 그리고 집시 노파는 소수집단 중에서도 소수집단이다.
잠재적 범죄자, 도덕적 타락의 근원, 불순한 미신의 병원체로 취급받던 집시,
늙어서 아무 힘도 권한도 없고, 남편조차 없이 혼자 살아가는 노파,
이 둘이 합체했으니, 이 얼마나 열악한 존재인가.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가 합쳐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런 소수 속의 소수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피해를 입었을 때 무슨 대책이 있겠나.
아무것도 없다. 저주라도 없다면…
그들에게는 저주 말고는 다른 어떤 무기도 없기 때문에 저주를 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우를 범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는 저주 말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무엇보다 … 투표권이 있지 않은가.
그런 우리가 저주에 매달리면, 집시 노파들이 화낸다.

의문 2. 왜 하필 크리스틴이 저주의 대상일까?
이 영화 평들을 보면 롤러코스터 처럼 즐길 수 있는 영화라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더라.
왜냐면 저주에 시달리는 주인공 크리스틴(앨리슨 로만)이 참 안쓰러워보였거든.
생각해보라. 그 노파가 당한 일에 있어서 그녀는 몸통도 아니고 깃털, 그 중에서도 맨 꽁지에 해당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녀라고 그러고 싶었겠나.

그녀의 행동은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한 것이다.
그런 일은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늘 닥치는 것이다.
가슴에 손 얹고 생각해보라. 댁들은 그런 힘든 결정(Tough Decision) 한번 내려본 적 없나? 백번 양보해 그녀가 잘못을 했다고 치자, 그래도 그 잘못에 비하면 저주의 내용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녀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다. 왜냐고?

첫 번째 이유,
그녀가 어설프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냉혹한 제도에 충분히 동화되지 않았다.
시골스러운 출생 탓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녀의 그 양심 탓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저주는 양심의 토양에서나 가능한 거다.
심리학적으로는 양심의 목소리, 죄책감이 외부로 나타난 것이 저주거든.

실제로 어떤 인간말종들은 저주도 안먹힌다. 왜냐면 양심이 없거든.
그런 인간들은 실제로 지가 다 잘했다고 믿는다. 그러니 떳떳하고 당당하다.
그러면 저주가 파고들 틈이 없다.
(내가 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주가 아니라고 말한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거는 아닌게, 그들은 이미 지옥에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지들만 모를 뿐이지. 나는 솔직히 그런 애들이 죽어서 가는 곳에는
정말 같이 가고 싶지 않다. 거기가 지옥이지 어디가 지옥이겠나.

두 번째 이유,
동조자의 죄는 결코 작지 않다.
왜냐하면 동조자가 없으면 그 어떤 악도 저질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혼자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손과 발이 머리의 생각을 따라줘야 가능하다.
고대 형법은 도둑질을 한 자는 (도둑질을 생각한) 머리가 아니라
(도둑질을 실제로 행한) 손을 자르게 한다. 마찬가지 이유다.
그녀가 아무리 깃털이라도 탐욕스런 금융자본이라는 몸통에 협조한 것은 사실 아닌가. 실제로 저주는 몸과 몸을,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마주치는 자에게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잊지 말라.
“위에서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고?” 바로 그런 변명이 저주를 부른다.

검색창에 '노덕술'을 ...

그럼 몸통이나 머리는?
그들에게는 저주가 아니라 심판이, 단죄와 처벌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영화는 꽤 재미있다.

물론 트랜스포머 같은 스펙타클은 기대하지 마시라.
이 영화를 즐기는 비결은,
웬지 내가 살면서 언젠가 본 듯한 장면들,
그리고 심지어는 언젠가 나도 한번쯤 저질렀을 법한 잘못들을 보며
그게 얼마나 무서운 댓가를 불러올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영진공 짱가

이제는 홍상수스럽지 않은 영화를 보고싶다.

홍상수의 영화에 100% 동의하진 않지만,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난 주인공의 모습에서 저게 ‘인간 홍상수의 생(生)모습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안고 그의 영화에 푹 빠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항상 ‘홍상수’ 가 떠오른다.

다시 얘기하면 극의 주인공이 바로 홍상수의 실제 모습일 거라는 내 멋대로의 예감을 통해 영화를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기억 하나.

올해 초 <밤과 낮>의 씨네토크 시간에 어느 관객이 과감히 질문했다.

이 모든 게 당신 이야기가 아닙니까?


홍상수는 ‘내 모습이 은연중에 표현될 순 있겠지만 주변 인물들을 관찰한 결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대답했고,

그 관객은 ‘그렇다’라는 대답을 기필코 듣고 말겠다는 태도로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이 상황은 진행을 맡은 평론가가 홍감독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음 질문을 받는 것으로 정리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이런 관객의 의심스런 눈초리에 정면으로 응수한다. 그리고 마치 관객의 그렇고 그런 시선 따윈 조롱하듯 의미심장한 장면과 대사들을 풀어 넣었다.  


이를테면, 

제주도에서 그(구경남)의 강의를 들으러 온 한 학생이 이렇게 묻는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는 거에요?


구경남을 집으로 불러들여 한낮의 정사로 외도를 범한 고순(고현정)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근데 왜 그렇게 자꾸 본인 얘기를 영화에 넣어요? 내 얘긴 하지 말아요. 아,, 난 싫어 진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시작으로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등 홍상수는 그의 필모가 추가될 때마다 지식인의 느글거리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수작이라는 호평과 여자와 모텔에 가기 위해 안달 난 구질남의 뻔한 이야기라는 혹평이 엇갈렸다.


그리고 꼬리표처럼 ‘혹시 네 얘기 아니냐’는 눈총들에게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던 홍상수는 이번 작품을 통해 비로소 ‘의심하라지 쳇’ 하며 태연한 듯 스무스한 태도로 회전했다.


[이미지 출처: 씨네21]


그는 조금 더 유머러스해졌고 조금 더 가뿐해진 채 ‘잰체하지 않는 구질남이 어쩌면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관객들에게 장난 걸듯 ‘매번 발견하고 감상하는 것의 결과물’을 완성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음악이 멈춘 한참 후에야 흐르는 보너스 트랙처럼 비밀의 숨은 노래를 몰래 듣는 기분의 영화다. 그건 순전히 제천과 제주도를 오가는 영화감독 구경남 덕분이다. 그가 자리하는 숱한 술자리와 감독, 프로그래머, 배우들의 강약의 연결고리가 너무 진짜 같아서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더 이상 홍상수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지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에 출연한 김태우, 정유미, 공형진, 고현정, 하정우 같은 최고의 배우들이 주어진 역할에 충분히 젖지 않은 탓도 있다.


대 배우들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캐릭터는 살아있지만 배우들의 아우라를 덮진 못했다는 느낌에 목이 마르다. 다른 누가 했더라도지금 이 배우들만큼은 해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영화 속 주인공이 진짜 홍상수라고 한들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영화감독 구경남이 너무 많은 걸 보여줬기 때문이고 지나치게 솔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여지없이 쏜살같은 걸음으로 극장을 찾을테지만,

나는 홍상수의 홍상수스럽지 않은 영화를 보고싶다.


이제는 좀 ‘가짜’같은 영화말이다 …

영진공 애플


잠시 정신줄을 놓고 봐야 하는 영화, ‘뮤턴트:다크 에이지 (Mutant Chronicles)’



감독: 사이몬 헌터

출연: 토마스 제인, 론 펄만, 데본 아오키


때는 바야흐로 서기 2707년. 하지만 화면에 펼쳐지는 것은 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에서 봤음직한 참호전이다. 전투 중 포격에 맞아 땅 밑에 공구리 쳐놓은 고대봉인이 깨지고 잠들었던 뮤턴트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어지는 피와 살의 향연.


스팀펑크를 표방한 듯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비행기와 증기를 뿜어내는 기계들. 똥꼬가 움찔거릴 정도로 무서운 뮤턴트를 잠재우기 위해 어느새(!) 전 세계에서 선발된 8명의 용사들. 그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중세 영화를 촬영 중인 옆 셋트장에서 빌려 온 듯한 대검! 아아. 영화의 아스트랄함에 정신마저 혼미해져 온다.


금방이라도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들이닥칠 것 같지만

믿거나 말거나 여긴 서기 2707년!

개봉 당시 나름 화려한 배우진과 얼핏 씬시티를 연상시키는 빛바랜 듯한 비주얼로 인해 큰 기대를 갖고 영화관에 들어갔던 관객들이 피를 토하며 극장 문을 나왔다는 이 ‘괴작 B급 좀비 호러 SF 영화’는 1993년 만들어진 ‘뮤턴트 클로니클’이라는 TRPG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미 여러 스핀오프로 제작되었던 ‘뮤턴트 클로니클’은 2007년 영화화 되어 모습을 드러냈지만 제대로된 투자자를 잡지 못했는지 원작의 세계관이었던 4개의 거대 기업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설정말고는 SF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였다. 나름 스팀펑크까지는 좋았지만 좀비스런 뮤턴트들은 너무도 소박했다.


뮤턴트 클로니클은 카드 게임, 비디오 게임, 소설, 만화책 등으로도 만들어진
인기있는 소스였다.

지금은 CMG(피규어 인형으로 하는 보드게임)로도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다.

처음 존 카펜터 감독에게 제작의뢰를 하였다가 거절당했는데 만약 그가 맡았다면  좀 더 제대로 된 SF좀비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벤트 호라이즌’의 각본을 맏았던 필립 에이스너가 가세했음에도 좀비의 몰골마냥 참담한 작품성은 B급 영화의 숙명인 듯도 싶다.  하지만 사실 B급 영화의 재미는 이런 허무맹랑함이 아니겠는가!!!


“이런 영화를 감상 할 땐 잠시 정신줄을 놓으면 더욱 재밌게 볼 수 있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