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로드”, 지옥에 떨어져서도 삶을 선택한 사람들

원작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전에 ‘마침내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주연은 비고 모텐슨’이라는 소식을 누군가의 흥분된 글을 통해 접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영화가 마침내 국내 상영관에 걸렸고 저는 여전히 원작에 대해서는 그저 ‘성서에 비견될 작품’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홍보 문구 정도로만 접한 채 작품을 관람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이 인류의 멸망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 아이를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투라는 사전 정보도 접했습니다 – 관객에 따라서는 이런 정도의 사전 정보는 미리 접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찌되었거나 영화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거나 눈 뜨고 보기 괴롭다 하더라도 중간에 나가버리시면 마지막 엔딩에서 비춰지는 작지만 강렬한 희망의 빛을 보실 수가 없으니 부디 끝까지 인내하시길.

대재난의 원인과 사건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극중 대화와 플래쉬백을 통해 대략의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핵전쟁이나 대자연의 역습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사실 <더 로드>는 대재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 보다는 그 이후의 삶에 집중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위를 통해 세상이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경고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생지옥이 되어버려 오직 고통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할까요. 그런 지옥에서의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대다수 사람들의 심정과 선택이 납득이 갈 만큼 영화는 대재난 이후의 세상을 충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재난의 광경을 스펙타클하게 전시하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그 이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은 거의 없었죠. <더 로드> 속의 광경은 마치 <매트릭스>(1999) 이전 기계들에 의해 인류 문명이 초토화된 직후의 모습, 시온에 모여 다시 반란과 재건을 꿈꿀 수 있게 되기 이전 인류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동식물이 거의 멸종해버린 상황이니 쓰레기를 줍고 벌레를 잡아먹거나 아니면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운 좋게 숨겨진 식량 창고를 발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어리고 병약한 사람을 잡아먹어야만 생존을 할 수 있는 극악의 상황입니다.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은 배가 고파서 사람을 잡아먹느냐 먹지 않느냐로 간단히 구분될 따름이고, 그런 딜레마가 고통스럽다면 미리 죽는 것으로 이른 안식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모피어스나 네오와 같은 영웅들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오늘 하루 발버둥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처럼 매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란 그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객들의 잠재적인 낙관 의식 때문에 대체로 상징적인 이야기로 보여지게 되고, 좀 더 근원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설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더 로드>는 생지옥이나 다름 없는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아닌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나가야 할 이유에 대해 묻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인간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라 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인류 문명의 재건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일어서라고 힘주어 역설하는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에 비견된다는 코맥 맥카시 원작의 <더 로드>는 사실은 성서 보다는 인본주의 정신의 강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성서에 비교하자면 구약 보다는 신약이겠지요.

그러나 영화 <더 로드>의 관람 자체가 성서를 읽는 것 만큼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한 편의 영화로서 <더 로드>는 메시지의 전달에 집착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훌륭한 이야기를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내지는 노파심이 든다고 할까요. 사실은 영화가 다소 밋밋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뭐라 탓하기가 어려운 것이 <더 로드>의 화법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이야기는 차라리 영화 보다는 원작의 풀 텍스트를 직접 접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원작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영화는 아무래도 원작의 줄거리만을 시청각적으로 묘사했을 따름인 것 같거든요. 그 장면들 사이사이의 행간을 영화가 재미 없다는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소설의 영화화로서 <더 로드>는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만드는 비고 모텐슨의 헌신적인 연기에 기립 박수를 보냅니다.

좀 흉칙한 분장이긴 했습니다만 오랜만에 보는 가이 피어스, 너무 반가웠습니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러나 마지막에 만난 이 베테랑 아저씨는 “어서 길을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원작에선 이에 관한 뭔가 충분한 설명이 있을 것 같은데, 영화만으로 접하고 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인류 문명의 멸망 이후에 생존과 재건을 위해서는 과거 문명의 잔재를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 정도입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던 놀라운 아버지였지만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수퍼 히어로는 될 수가 없었던 거죠. 리어커를 훔쳐가던 흑인을 길 위에서 붙잡아 홀딱 벗겨버린 사건도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 없었던 일이었기에 이래저래 마음에 남습니다.

어쨌든 <더 로드>를 보며 인류 문명의 역사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몇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으며 또한 재건의 희망 역시 그 안에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끼린 이러지 맙시다’라고 하는 아주 기초적인 룰을 끝내 지키려는 자와 그런 것 쯤이야 진작에 개무시하며 사는 자, 그리고 그와 같은 딜레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들로 이뤄진 곳이 아닐까요.

영진공 신어지

“역사교과서를 고쳐야 애국심이 생기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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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로저스는 미국의 상담심리학자로서 인본주의적 심리학이라는 학파를 창설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로저스의 인본주의 심리학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알고보면 사람들은 전부 착하다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히 악인들이 있고 온갖 악행들이 펼쳐집니다. 이 사실에 대해 로저스는 어떻게 설명을 했을까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선의를 가지고 있는데 각자가 보는 올바른 세상, 혹은 선한 세상에 대한 정의가 다 달라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즉, 개개인의 의도는 전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결과가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심각하게 다르기도 하다는 거죠. 그 결과 어떤 이에게는 최선의 올바른 행동인 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거나 심지어는 악행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로저스의 이런 이론은 고대 그리스의 궤변론자 고르기아스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결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요. 마찬가지로 로저스도 우리들 각자의 세계가 다 다르다는 지적을 한다는 점에서 고르기아스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로저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각자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누구의 세계가 더 건강한 세계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죠. 로저스가 내놓은 건강함의 판단기준은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일치도입니다.

우리는 비록 각자의 세상에서 살고는 있지만, 남들이 나와는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즉 내가 보는 세상과 남들이 보는 세상의 차이를 인식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남들이 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배우고 그 세상에 맞춰 살거나 최소한 충돌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보는 세상이 남들이 보는 세상과 너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부적응을 경험합니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겠죠. 두 가지 결론 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정신건강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얼마나 일치하느냐는 실제로 그 사람의 적응수준을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죠. 이 둘이 너무 일치해도 좋을 것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정말 정확히 알고, 그들이 보는 내가 진짜 나라고 믿어버린다면 우리는 대부분 우울증에 걸리기 딱 좋죠(:-p). 하지만 이 둘이 너무 동떨어져 있으면 그것도 큰일입니다. 자기는 스스로 엄청 잘났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한심무인지경인 사람인 경우가 여기에 속하죠. 보통 이런 사람들은 정신병원이나 국회의사당에서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만… 로져스에 따르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이 두 ‘나’가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지만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내가 보는 나와 남들이 보는 나가 적당히 떨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둘의 차이가 너무 크거나 너무 좁아지는 것일까요? 로저스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나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이 나를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존중해주고, 그렇지 못하면 존중해주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는 그 조건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아예 자포자기해버리는 거죠.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그 어떤 경우에도 조건을 따지지 않고 존중해주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얻습니다. 이런 확신이 깔리게 되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존중해 주는 것을 로져스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spect)”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로저스에 따르면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필수 비타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우리들 개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나 문화, 그리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도 필요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불거진 역사교과서 수정 논쟁을 보며 저는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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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소위 “좌편향된” 역사교과서로 공부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 혹은 국가정체성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죠.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의 ‘광복’ 보다는 우리나라를 만들어냈다는 ‘건국’에 방점을 두고, 식민지배과정에서도 일제의 수탈과 탄압,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독립투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한 근대화의 노력도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걸 보면서 좀 의문이 생깁니다. 자기가 소속한 국가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과연 그런식으로 만들어질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절역사나 동족상잔의 비극,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진 온갖 부정적인 사건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와 있으니까요. 더구나 세계사를 보면 우리나라 정도의 고난이나 실수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과거사는 우리보다 더 긍정적이던가요? 천만에 말씀이죠. 미국의 건국사는 원주민 학살사이고 영국의 번영기는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제가 알기로 (일정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나라 사람들의 국가정체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건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 우리나라는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이니까요.

반면에 자기 나라의 과거사가 부정적이면 자부심이 낮아지고, 과거사가 좀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면 자부심이 높아진다는 그런 생각은 “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앞서 개인의 정신건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 저는 우려하게 됩니다. 과연 이렇게 자기 나라를 조건에 맞춰서만 긍정적으로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혹시 사실은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창피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열심히 과거사에 분칠을 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조건에 맞춰서 성형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일제시대를 기술하면서도 그 와중에도 꾸준히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솔직히 하나마나한 이야기(모든 제국은 자기 식민지를 어느 정도까지는 근대화시킵니다. 그래야 그 식민지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안 그런 식민지가 하나라도 있던가요?)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것이 아닐까요?

영진공 짱가

 

수구 우파의 고민, 반청복명이냐 현실주의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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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좌파나 우파에 대한 정의는 그냥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중고등학교 사회시간만 제대로 공부했어도 이런 난장판은 아닐겁니다.

심지어 “좌파는 먹고사는 문제엔 별 관심이 없고 이상이나 정의를 추구하는 집단”이란 오해도 있더군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어디서 왜 시작되었는지를 안다면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좌파의 시작은 바로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좌파가 말하는 정의란 “왜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굶어야 하느냐?” 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고요.
덧붙여 좌파는 의외로 상황형적 인간관을 가집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니까요.
사회경제시스템을 바꾸면 인간도 바뀝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시스템이죠.

그럼 우파의 핵심정신은? “불안을 먹고사는 차별주의“입니다.
극우라 할 수 있는 파시즘의 기본논리는 차별입니다.
왜 차별을 하냐면, 누군가 우리의 안위를 위협하거든요.
그들을 차별하고 몰아내고 심지어는 이 세상에서 죽여없애지 않으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우리가 위험해지거든요.
(반대로, 세상이 변하고 질서가 바뀌는 이유는 누군가의 모략과 책동 때문이고요)
그럼 누가 그 위협적인 존재인가요? 겉으로봐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이 무서운거죠. 그들의 본색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뒤지고 출생신분을 봐야 합니다. 지역을 따지고 인종을 따지고 과거를 따지고 심지어 사돈에 팔촌까지 뒤집니다. 즉, 우파가 보는 인간은 유전형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혈통이 운명을 결정하고 어떤 인간은 꼭 죽여야하죠.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이나 모택동은(그리고 김일성과 김정일도) 제가 보기엔 극우 파시스트랑 똑같은 인간입니다. 무지막지한 숙청을 정치라 착각했으니까요. 뭐 사실 매카시즘도 막상막하. 다 똑같은 넘들이죠.

그래서 저는 사람을 볼 때 그의 좌우이념(그런게 제대로 있는 인간도 드물고..)보다는
그가 저 망상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더 따집니다.
문제인간들을 싹쓸이 청소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망상…
그것이 인간을 가장 위험하게 만드는 망상이니까요.

이미 생태학자들이 이 망상이 틀렸음을 증명했습니다.
개미들 중에도 탱자탱자 노는 개미들이 있는데 그 개미들을 싹 제거하면
열심히 일하던 개미들 중에서 역시 똑같은 비율로 탱자탱자 개미들이 생겨나죠.
세상이 간단하지가 않다고요. “A이면 B다” 라는 식의 논리는 책상위에서나 가능합니다.

어쨌거나, 냉전시대에는 사실 좌파란 존재 불가능이었습니다.
동서 체제는 각자의 극우로 달려가고 있었고 거기에 반대하면 모두 각자의 좌파로 지목되어 척결대상이었죠.

이제 세상은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나
이 나라 사람들의 뇌속은 여전히 냉전이 진행중입니다.
여기저기서 광대 헛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그 이유고요.

그나저나, 이제 우리나라 자칭 우파들은 어떻게 함?
그들이 숭상하는 미국의 대빵이 된 분이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지금 상황은 마치 청나라에게 명나라가 잡아먹힌 이후의 조선 사대부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할겁니다. 중국을 숭상하며 유교를 받아들이던 이 나라의 지배계층이 지금은 미국을 숭상하며 기독교를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 갑자기 그 미국이 오랑캐!!! 에게 점령당해버린 것이죠.

지금 그들의 고민도 청나라시대 사대부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 반청복명을 외칠 것인가… 아니면 현실론을 주창할 것인가…

말도 안된다고요?

이 나라의 도성을 옮기지 못한 이유가 6백년 전의 관습헌법 때문이었음을 잊지 마시길…  (참고:  [수도이전] 그래도 변한 것은 없다. )


영진공 짱가

“멋진 하루”, 인생의 두가지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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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스위스의 아마추어 심리학자 모녀 마이어스Meyers와 브릭스Briggs가 칼 구스타프 융의 성격이론을 기초로 개발한 성격검사도구인 MBTI는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심리검사 중의 하나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중에도 이 MBTI를 해보신 분이 꽤나 많을 겁니다. 이 검사에서는 인간의 성격을 내향성(I)과 외향성(E), 감각형(S)과 직관형(N), 사고형(T)과 감정형(F), 그리고 판단형(J)과 인식형(P)으로 나눕니다. 이 검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kr.blog.yahoo.com/id_solution2006/2.html?p=1&pm=l&tc=4&tt=1222787717
http://www.mbti.co.kr/


마이어스와 브릭스여사, 그리고 융

그런데 제가 이 검사 도구에 대해서 배울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의 3가지 축의 검사결과는 쉽게 바뀌지 않지만 마지막 축인 판단형과 인식형의 점수는 꽤나 쉽게 바뀐다는 겁니다. 똑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아 여가시간이 많거나 여러 가지로 삶에 여유가 있을 때는 인식형인 P점수가 높아지는 반면에, 바쁘게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빠듯하게 시간과 돈을 쪼개어가며 살 때는 판단형인 J점수가 높아진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선생님은 이 점수는 일종의 스트레스 지수라고 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J점수가 높을수록 스트레스에 몰려있다는 뜻이란 거죠.

왜 그럴까요? 이 검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대충 답이 나옵니다.
인식형P과 판단형J 검사축은 그 자체가 생활방식 혹은 실천하는 방식을 의미하거든요.
그 중에서도 ‘인식형’의 모토는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해보자”입니다. 즉, 유연하게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모든 가능성을 다 찔러보고 그 결과를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태도죠. 인식형은 꼭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습니다. 처음에 목표가 있을지는 몰라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내 경험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유유자적 느릿느릿 제멋대로입니다. 일을 미적미적 미루다가 마감일 직전에야 불이 붙어서 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획대로 해야 하는 일은 답답해하고 오히려 아무 계획 없이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실력발휘를 하는 경향이 있죠.

반면에 ‘판단형’의 모토는 “계획대로 하자” 입니다. 판단형은 모든 것을 단계별로, 계획에 맞춰서 해나가기를 원합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상황을 정리하고 계획부터 세워야 합니다. 물론 맹목적으로 한가지 계획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1차 계획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이나 차차선책까지 치밀하게 세우니까요. 일단 계획을 세운 다음에는 모든 것이 그 계획대로 돌아가야 마음이 놓이죠. 정해진 계획이라는 뚜렷한 기준이 있으니 되는 일과 안되는 일이 분명히 나뉩니다. 이 유형에게 이것저것 찔러보는 일 따위는 낭비죠. 인식형이 막판에 몰려서 갑자기 일을 끝내는 반면에 판단형은 시간에 맞춰서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나갑니다.
어떤 성격심리학자는 이 둘의 차이가 불안감에 대한 내성의 차이라고도 합니다. 판단형인 사람들은 목표만 있고 달성이 안 된 상태가 주는 불안감에 매우 약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해감으로써 불안감을 줄여나간다는 거죠. 하지만 인식형인 사람들은 불안감에 대한 내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들은 단지 내성이 강한 정도가 아니라 불안감이 어느 게이지 이상 높아지지 않으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불안감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기 보다는 그냥 영화 <멋진하루>를 보시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병운(하정우)과 희수(전도연)이 인식형과 판단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이 화상…

병운이는 인식형의 화신입니다. 뼈 속까지 지독한 인식형이죠. 이 인간은 사업하다가 부모재산 날려먹고 집도 날리고 마누라도 떠나보낸 와중에도 여유롭게 경마장에서 남의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희수의 빌려간 돈 내놓으라는 독촉에도 느릿느릿 여유를 잃지 않네요. 영화는 병운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대충 설명을 해줍니다만, 아마 병운이는 원래부터 인식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돈을 받자!!

반면에 희수는 판단형의 화신이죠. 영화에서는 비록 희수가 갑자기 나타나 빌려간 돈을 찾아야겠다고 우기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 희수의 주장은 바로 그날 정해진 것이 아닐 겁니다. 희수 입장에서는 벌써 며칠 혹은 몇주전부터 결정된 일이겠죠. 그 동안 희수는 단계별로 차근차근 병운이의 거처를 수소문해서 최종 위치를 확인해 D-day를 정했을 것이고, 그 날이 바로 D-day였던 것이죠. 희수는 불안합니다. 주차할 때마다 네비게이션을 글로브박스에 집어넣는 희수의 행동도 바로 그 불안감의 결과죠. 희수가 병운이를 찾아온 것도 사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일단 받아낼 돈을 받아놓자는 불안감의 결과물일 겁니다. 희수의 입장에서 이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곳이거든요. 희수가 결혼을 하지 못한 것도 결국은 그 불안감 때문이었죠.

처음에 희수의 눈에 보이는 병운이는 한심무인지경의 인간입니다.(아, 대부분의 관객들이 보기에도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서서히 의외의 모습들이 나타나며 영화는 흥미로워집니다. 어쨌든 이 영화 <멋진하루>는 인식형과 판단형의 화신이 만나 한쪽은 으르렁대고 한쪽은 능청맞게 얼러대며 벌이는 화학작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던 희수가


이러더니…


이렇게 변해가는…

왜 이 둘의 만남이 ‘끔찍한 하루’가 아니라 ‘멋진 하루’일 수 있냐면, 우리는 인식형의 태도로만 세상을 살 수도 없고(만약 그렇다면 병운이처럼 빵꾸 인생이 되겠죠), 그렇다고 판단형의 태도로만 세상을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식형은 판단형을, 판단형은 인식형을 필요로 하지요. 그래서 인생이 오묘하고 멋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는 스포일러..(읽고 싶으시면 긁어내리삼)

결론을 살짝 말씀드리자면, 시간이 흐르면서 희수는 병운이의 여유를 조금 얻습니다.
아마 희수가 마지막에 남긴 돈 20만원은 그 여유의 댓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여, 혹시 이 영화에 관해서 Film2.0에 쓴 글과 전혀 분위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질책하신다면,
이번에는 병운이 입장으로 모드를 바꿔서 써봤다고 변명을 해보렵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