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타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오래 사랑할까요?

<어바웃 타임 (About Time)>, 개인적으로 아이가 생긴 이후 아내와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여서 데이트 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지만 <어바웃 타임>은 단순히 알콩달콩한 사랑 얘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타임 슬립물도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어바웃 타임>을 보면서 저런 과거라면 한 번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분명, 나도 우리 아버지가 그려주던 그림을 보며 즐거워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돌아가실 때는 뭔가 틀어진 채였거든요. 간을 드리긴 했지만, 그것과 감정의 골은 좀 달랐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 내내 흐르던 음악들은 말 그대로 환상궁합이었습니다. 하긴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전작들,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를 떠올려봐도 영상의 내용과 찰떡 궁합의 노래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흘러나왔었음을 기억합니다. 특히 주제가의 파워는 엄청났죠. 엘비스 코스텔로의 ‘She’가 <노팅힐>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들렸는지, “All you need is Love”가 <러브 액추얼리>의 그 많은 사연들을 어떻게 한 방에 정리했지는지 다들 잊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 … 이걸로 됐어 …”

이번에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식적인 주제가 이외에도 잊을 수 없는 노래가 너무 많습니다. Ben Folds, Paul Buchanan(The Blue Nile이라는 쫙 깔리는 분위기 만점 밴드의 보컬이시죠), The Cure, Amy Winehouse, 심지어 섹시하기 이를 데 없는 러시안 미녀 댄싱 듀오 t.A.T.u., 그리고 Nick Cave & the Bad Seeds까지. 특히 닉 케이브의 목소리로 ‘Into My Arms’가 아버지 역할의 빌 나이와 함께 흘러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따라부르고 있었죠.

대체로 잘 만들어진, 혹은 히트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에는 Harry Connick Jr.의 나는 토마토, 너는 포테오토를 외친다는 ‘Let’s Call the Whole Thin Off’가 떠오르고, <씨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에는 Celine Dion과 Clive Griffine의 ‘When I Fall in Love’처럼 영화를 떠올림과 동시에 떠오르는 주제가가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공식이 된 모양이에요. 그것도 창작곡보다는 기존의 곡, 그래서 영화의 내용과 노래를 단박에 연결시켜주면서 시너지를 뿜어내곤 하죠. <어바웃 타임>도 공식에서 많이 벗어나진 않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명곡의 고향으로 기청감, 가사의 내용과 영화의 장면을 엮어내는 것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겐 ‘Into My Arms’였지만, 영화에서 주제가로 내세운 곡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기억하시고 있을 겁니다. 바로 두 가지 버전이 등장하는 ‘How Long Will I Love You’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라고 묻는 이 노래는 영화의 내용과도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죠.

닉 케이브, Into My Arms

‘How Long Will I Love You’는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은 아닙니다. 1990년 스코틀랜드 출신 포크록 밴드 The Waterboys가 자신들의 4번째 앨범 “Room to Roam”에 수록한 바 있습니다. 이 노래의 소박하지만 귀에 남는 멜로디는 당시에도 주목을 받았죠. 그래서 앨범의 첫 싱글로 발매되었고,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등에서 히트한 바 있습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 등장하는 버전은 원곡이 아닙니다. 2012년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이기도 한 엘리 굴딩Ellie Goulding의 두 번째 앨범 [Halcyon]에 수록된 이 곡의 리메이크한 버전이 등장합니다. 차분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목소리가 돋보이는 트랙이죠. 영화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건,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무르익어가며 지하철 장면이 계속될 때 흘러나오는 길거리 악사들의 버전일 겁니다.

길거리 악사로 등장한 이는 존 보든Jon Boden으로 배우가 아니라 노래를 부른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기타, 만돌린, 피들(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세 명의 길거리 악사는 Jon Boden, Sam Sweeney, Ben Coleman입니다. 존 보든은 1977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영국 윈체스터로 이주해 영국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영국 포크 특유의 서정성이 깃들어 있죠. 미국의 포크가 우디 거스리의 음악이 그러하듯 백인 음악이라도 남부에서 자연스럽게 블루스와 엮이며 읊조리고 있음에도 어딘가 왁자지껄한 느낌이 자주 보인다면, 영국 포크는 음계나 분위기가 다소 다르죠.

여하튼 존 보든은 2010년부터 2011년까지 1년간, “A Folk Song A Day”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유명세를 얻기도 했죠. 하루에 포크 노래 한 곡씩을 녹음하여 한 달에 한 장, 일 년에 12장의 CD를 발표하는 놀라운 스케줄이었죠. 물론 영국의 전통적인 포크 넘버들이긴 했습니다만, 300곡 넘게, 그것도 전 곡을 새롭게 편곡하여 녹음했다는 것은, 시도 자체로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보유한 포크 싱어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2010년 BBC의 올해의 포크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곤 하지만, 존 보든은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는 슈퍼스타는 아닙니다. 홈페이지에 가봐도 칙칙한 분위기 팍팍 풍기는 개인 블로그 업그레이드 버전처럼 느껴지니까요.

담백하고, 만돌린과 피들이 만드는 특유의 촌스러움이 되려 멋스럽게 느껴지는 이 연주는 활활 빛나는 사랑도, 초인적인 능력으로 감동스러운 사랑도 아닌, 하루하루가 소중한 삶과 사랑에 대해 설파하는 영화의 분위기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집니다.

“하늘에 저 별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더 로드”, 지옥에 떨어져서도 삶을 선택한 사람들

원작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전에 ‘마침내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주연은 비고 모텐슨’이라는 소식을 누군가의 흥분된 글을 통해 접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영화가 마침내 국내 상영관에 걸렸고 저는 여전히 원작에 대해서는 그저 ‘성서에 비견될 작품’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홍보 문구 정도로만 접한 채 작품을 관람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이 인류의 멸망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 아이를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투라는 사전 정보도 접했습니다 – 관객에 따라서는 이런 정도의 사전 정보는 미리 접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찌되었거나 영화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거나 눈 뜨고 보기 괴롭다 하더라도 중간에 나가버리시면 마지막 엔딩에서 비춰지는 작지만 강렬한 희망의 빛을 보실 수가 없으니 부디 끝까지 인내하시길.

대재난의 원인과 사건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극중 대화와 플래쉬백을 통해 대략의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핵전쟁이나 대자연의 역습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사실 <더 로드>는 대재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 보다는 그 이후의 삶에 집중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위를 통해 세상이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경고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생지옥이 되어버려 오직 고통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할까요. 그런 지옥에서의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대다수 사람들의 심정과 선택이 납득이 갈 만큼 영화는 대재난 이후의 세상을 충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재난의 광경을 스펙타클하게 전시하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그 이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은 거의 없었죠. <더 로드> 속의 광경은 마치 <매트릭스>(1999) 이전 기계들에 의해 인류 문명이 초토화된 직후의 모습, 시온에 모여 다시 반란과 재건을 꿈꿀 수 있게 되기 이전 인류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동식물이 거의 멸종해버린 상황이니 쓰레기를 줍고 벌레를 잡아먹거나 아니면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운 좋게 숨겨진 식량 창고를 발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어리고 병약한 사람을 잡아먹어야만 생존을 할 수 있는 극악의 상황입니다.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은 배가 고파서 사람을 잡아먹느냐 먹지 않느냐로 간단히 구분될 따름이고, 그런 딜레마가 고통스럽다면 미리 죽는 것으로 이른 안식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모피어스나 네오와 같은 영웅들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오늘 하루 발버둥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처럼 매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란 그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객들의 잠재적인 낙관 의식 때문에 대체로 상징적인 이야기로 보여지게 되고, 좀 더 근원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설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더 로드>는 생지옥이나 다름 없는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아닌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나가야 할 이유에 대해 묻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인간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라 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인류 문명의 재건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일어서라고 힘주어 역설하는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에 비견된다는 코맥 맥카시 원작의 <더 로드>는 사실은 성서 보다는 인본주의 정신의 강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성서에 비교하자면 구약 보다는 신약이겠지요.

그러나 영화 <더 로드>의 관람 자체가 성서를 읽는 것 만큼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한 편의 영화로서 <더 로드>는 메시지의 전달에 집착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훌륭한 이야기를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내지는 노파심이 든다고 할까요. 사실은 영화가 다소 밋밋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뭐라 탓하기가 어려운 것이 <더 로드>의 화법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이야기는 차라리 영화 보다는 원작의 풀 텍스트를 직접 접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원작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영화는 아무래도 원작의 줄거리만을 시청각적으로 묘사했을 따름인 것 같거든요. 그 장면들 사이사이의 행간을 영화가 재미 없다는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소설의 영화화로서 <더 로드>는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만드는 비고 모텐슨의 헌신적인 연기에 기립 박수를 보냅니다.

좀 흉칙한 분장이긴 했습니다만 오랜만에 보는 가이 피어스, 너무 반가웠습니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러나 마지막에 만난 이 베테랑 아저씨는 “어서 길을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원작에선 이에 관한 뭔가 충분한 설명이 있을 것 같은데, 영화만으로 접하고 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인류 문명의 멸망 이후에 생존과 재건을 위해서는 과거 문명의 잔재를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 정도입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던 놀라운 아버지였지만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수퍼 히어로는 될 수가 없었던 거죠. 리어커를 훔쳐가던 흑인을 길 위에서 붙잡아 홀딱 벗겨버린 사건도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 없었던 일이었기에 이래저래 마음에 남습니다.

어쨌든 <더 로드>를 보며 인류 문명의 역사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몇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으며 또한 재건의 희망 역시 그 안에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끼린 이러지 맙시다’라고 하는 아주 기초적인 룰을 끝내 지키려는 자와 그런 것 쯤이야 진작에 개무시하며 사는 자, 그리고 그와 같은 딜레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들로 이뤄진 곳이 아닐까요.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