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특집] 영진공 을유(乙酉) Best 2탄

과거사진상규명위
2006년 2월 13일

* 영진공 을유(乙酉) Best 소심: “폴 지아메티”, 『사이드웨이』


본 우언, 고백하건데 졸라 소심한 인간이다.
생각은 굴뚝같은데 겉으로 내놓지 못하는 전형적인 겁쟁이 인텔리다.
말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 보다, 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게 한 백배쯤 많다.
그래서 혹자는 본 우원을 상당히 생각이 깊고 점잖은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한다만.
정확히 말해 나는 그저 겁이 많을 뿐이다.

그런데 소심한 사람들에겐 거의 빠지지 않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건 그들이 뒷북을 매우 심하게 친다는 것이다.
소심증이란 게 원래 환자가 강렬하게 원할수록 증상도 더 강렬해져서, 환자를 더욱 더 멍청하게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원하면 원할수록 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후회와 자책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문제는 그게 버스 지나간 다음에 손 흔드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통찰했듯이, 인간의 심리적 에너지는 마치 증기와 비슷하다.
물끊는 주전자의 뚜껑을 막으면 주둥이로 김이 뿜어지고, 주둥이까지 막으면 언젠가는 터지게 되듯이, 사람의 마음도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다른 경로로, 다른 형태로 언젠가는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저지르는 사소한 말실수, 자다가 꾸는 꿈,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른 단어, 심하게는 입이나 손의 마비 같은 증상들이 전부 그렇게 억압되었다가 튀어나온 마음의 에너지라고 봤다.

아, 프로이트...

소심증 환자들의 뒷북도 마찬가지 매커니즘이다.
그 자리에서 드러내지 못한 것들을 뒤늦게 엉뚱한 곳에서 표출하는 것이다.
단, 소심증 환자들의 뒷북은 이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대부분 상당히 쪼잔하고 한심하며 치사하고 유치하다.

이 영화 『사이드웨이』를 보자.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메티”)는 소심증의 전형이다.
그는 이혼당하고 나서도 왜 그랬는지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다.
술에 취한 다음에야 이미 딴 남자와 잘 사는 전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어 횡설수설 거릴 뿐이다. 늘 다른 삶을 꿈꾸지만 실행은 못한다. 그저 끙끙거리며 쓴 소설을 여기저기 출판사에 보내는 것이 유일한 행동이다.

날라리 친구를 따라 떠난 포도주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우연히 만난 너무도 멋진데다 말도 잘 통하는 여자(“버지니아 매드슨”) 앞에서 기가 죽어 아무것도 못한다. 그저 포도주 얘기만 떠들 뿐이다. 뭐 그가 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냐고? 천만에 말씀!! 그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라기엔 너무나도 멋있고 마음에 들어서 강렬한 소심증이 발동했을 뿐이다.

소심한 새끼...

완전 얼었네...

참다못한 여자가 그 포도주 얘기로 다시 강력하게 접근해 오지만 소심증이 어디 가겠는가.
이젠 아예 넋이 나간다. 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조차 아마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절호의 기회를 놓친 남자.
그러고 그냥 지나가면 소심증 환자가 아니지.
여행을 다 마치고 돌아온 그. 몇 년 동안 아껴뒀던 포도주를 꺼내서는 레스토랑도 아니고 와인 바도 아니고 동네 간이식당에 혼자 들어가서 거기서 주는 일회용 종이컵에다가 벌컥벌컥 따라서 점원 몰래 도둑질 하듯 마신다. 그 와인을 만든 ‘피뇽’ 이라는 포도에 대한 그동안의 찬사는 어디다가 갖다 버렸는지. 집에 있는 그 좋은 와인잔들을 버려두고 왜 그렇게 한심하고 비참한 꼬라지로 마셔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소심증 환자의 뒷북들이 대개 그렇다.

자신이 이겨내지 못한 소심증, 그 때문에 날려버린 인생의 기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폐부를 찔러댄다. 내가 얼마나 겁쟁이인지, 내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그 상처가 아릴 때마다 끊임없이 깨닫게 된다. 자존심은 바닥으로 치닫고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뭐든 사고나 치자 싶어진다. 사고를 치려고 해도 뭐 쳐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대단한 걸 할 것 처럼 나서지만 결국엔 대부분 자기학대로 끝나고 만다. 후회로 인해 낮아져버린 수준보다도 더 낮은 수준으로 자신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더 한심한 존재로 만들고 나면 그제서야 후련해진다. 그래 내가 원래 그렇쟎아? 스스로 뻔뻔해 지기도 한다. 물론 죄다 지 마음속에서 혼자 지지고 볶을 뿐이지만.

해가 수평선 너머로 주황색 빛을 남기며 사라져 가던 그 순간.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 지나가는 구경을 하며 손끝을 스쳤던 그 순간.
따스하게 나를 응시하던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 순간.

그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도 그런 지랄을 하고 싶어진다.

이 징한 소심증이여…

* 영진공 을유(乙酉) Best 쌍쌍: “강혜정” + “박해일”, 『연애의 목적』

단연코 2005년 최고의 로맨스 영화! “박해일”의 개수작이든, “강혜정”의 내숭이든 중요치 않다. 성폭력이라면 성폭력이고, 인연이면 인연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연애 목적은 아마도 ‘팔베개’였을 거라는 막연성 추측을 통해 사람내음 그립고, 포근함이 그리운 청춘 남녀들의 팔베개 신드롬을 생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는 것.

* 영진공 을유(乙酉) Best 닭살: “토퍼 그레이스” + “스칼렛 요한슨”, 『인 굿 컴퍼니』


회사에서는 나름 냉혹하지만 실제로는 어리버리 인생 초보인 “토퍼 그레이스”(카터 역).
안달복달 출세만을 추구하던 그가 새 회사에 들어가서 임자를 만난 덕분에 인생의 참 맛 깨닫는다는 스또리의 본 영화. 잔잔하면서도 드라마 극장 같은 걸로 느낄 수 없는 영화만의 경쟁력도 갖춘 보기 드문 영화다.

그런데, 본 영화에서 “토퍼 그레이스”가 만난 임자는 “데니스 퀘이드”(포먼 역) 만이 아니다.
진짜 임자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스칼렛 요한슨”(알렉스 역).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났던 스칼렛을 길거리에서 다시 만난 토퍼.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 앉지만 뭘 어째야 할지 모른다. 아마 그의 마음엔 오갈 데 없는 외로움 반, 속 얘기를 털어놓았고 별로 무서워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한 반가움 반 이었을 거다. 쉽게 말해서 그에겐 뭐 어쩌자는 생각도 없었고 있다 해도 그걸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스칼렛은 이미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칠렐레 팔렐레... 졸졸 따라가는 토퍼

카페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저녁식사로 이어지고, 식사를 마치고 예의 어버버거리는 토퍼에게 그녀는 기습 키스를 한다. 그리고는 곧장 자기 숙소로 그를 인도. 동거하는 친구는 이미 외출했고(어쩌면 미리 외출시켰을지도), 조명을 준비하고 음악을 트는 그녀. 물론 보는 나는 그저 “토퍼 그레이스”가 부럽기만 한, 판타스틱한 설정이지만 잘 살펴보면 이 과정은 일반적인 연예영화에서 남자와 여자가 맡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만나서 잠자리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완전히 여자에 의해서 주도되고 남자는 끌려가는 것이다.

기습 키스!

모든 게 완벽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역전된 관계는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마음먹고 그녀에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건네는 토퍼에게 스칼렛은 움찔 한다.
속으로는 아마 “얘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이거 이럼 부담스러운데…” 같은 생각이 오간 듯 한 표정. 그렇다. 스칼렛은 그저 귀여운 이 남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남자가 엉기기 시작하니 난감할 뿐이다.

아 참... 얘 너무 순진하네...이 일을 어쩐다...

이런 과정을 모두 지켜본 관객들은 “데니스 퀘이드”에게 얻어맞는 토퍼에게 온전히 동정할 수 밖에 없다. 제일 불쌍한 게 바로 걔니까!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러니까 그게 어버버버....

여튼, 이렇게 연애과정의 역할을 뒤바꿈으로써 이 커플은 특이한 매력과 귀여움을 얻는다. 여자는 당돌하고 주도적이어서 귀엽고 (솔직히 말하면 그냥 “스칼렛 요한슨” 이어서 귀엽다. 토퍼 이 부러운 자식…) 남자는 느글거리는 남성성이 쫙 빠져서 귀엽다.

이 둘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토퍼와 스칼렛의 테니스 게임이다.
한 손에는 종이 커피컵을 들고 다른 손으로 건성건성 보내는 테니스공(이 영화에서 스칼렛은 테니스 특기생으로 나온다)에 똥개 훈련받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결국 엎어진 토퍼가 체념한 표정으로 내뱉은 한마디…

“이건… 정말… 너무 모욕적이야…. It is… so… humiliating!”

* 영진공 을유(乙酉) Best 거시기: “전성환” + “한여름”, 『활』

이거 영화 안 본 사람은 이해 못 할 텐데, 노인과 소녀의 섹스를 다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그런데도 2005년 최고의 정사 장면으로 뽑는 이유는 영화 속에 있음. 그 아무리 『뽕』씨리즈를 봐도, 『변강쇠』씨리즈를 봐도 여인네의 한복 속곳이 섹시하다 못 느꼈거늘 그 사뿐한 흰색 속곳이 얼마나 색정적이던지. 어쨌든 한번쯤 꼭 보시라~

영진공 을유(乙酉) Best 기획팀

[새해 특집] 영진공 을유(乙酉) Best 1탄

과거사진상규명위
2006년 2월 6일

병술년 새해가 밝았다. 에 … 뭐 선수들 끼리 너스레 떨 건 없고, 남들 다 하는 거 우리도 함 해보자.

을유년 개봉 영화 중에서 부문별 Best를 골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하는 바이니 부담없이 즐기시고 의견도 달고 해 주시라.

* 영진공 을유(乙酉) Best 재미: 『쿵푸 허슬』

“주성치”는 재미있다. “주성치” 영화는 당연히 재미있다. 어깨에 꼽힌 칼날을 반사경으로 쓰는 센스에 뒤집어지고, 오리처럼 늘어진 입술을 휘두름에 환장한다. 어처구니 없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패러디에 실소하고, 뜬금없는 ‘여래신장’과 펼쳐지는 ‘구양신공’, ‘일양지’에 폭소를 금치 못한다.
구차한 의리에 미학을 담고, 소수 성애자의 박대에 일침을 가하며, 사탕조각 부스러기에도 순수를 지향하는 그 너저분한 알량함은 그저 포복절도와 파안대소의 물리적 반응 외에도 뇌속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화학적 분비를 깨우치며 쉽게 넘어갈 수 없도록 만든다. 생의 비굴함도 불편하지 않으며, “양소룡”에게 ‘여래신장’을 가르쳐 주려는 태도를 통해 나눔의 이치를 통한 ‘득도’를 꾀한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로맨스던가. 그는 이 알량한 세상에 한 줄기 부처의 광명처럼 내려와 우리에게 진정한 즐거움이란 그저 조낸 웃겨대는 것일 뿐이라고 한 줄기 연꽃과 함께 말했다. 쿵푸를 가르쳐 준다는 것. ‘일’을 공유한다는 것.
소수 성애자도 쿵푸를 하고, 아줌마도 쿵푸를 하고, 이제 과거의 실력으로 더 이상 ‘쿵푸’를 할 수 없는 야수에게도 ‘쿵푸 재교육’의 복지문화를 선사하는 우리의 “주성치”.
아, 그가 그리는 세상은 너무나도 행복한 세상이라 죠낸 감동이다. 스바, 눈물나지 않을 수 없다.

* 영진공 을유(乙酉) Best 신파: 『밀리언 달러 베이비』

본 우원, 신파에 상당히 약하다.
얼마나 약하냐 하면…
사람들이 보면서 졸았다는 『태풍』을 보면서도 한 3번쯤 울었고, 『태극기 휘날리며』를 볼 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며(관련 포스트), 심지어 『실미도』 앞에서도 눈물 콧물로 마스크팩을 했던 사람이다. 영화만도 아니다. 아직도 미츠루 아다치의 [H1]에서 죽은 동생 꽃목걸이를 쓰레기 취급했던 형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 자청해서 한방 맞는 장면에서 안구에 습기가 차고,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벌떡 일어나 ‘정말로 사랑합니다!’ 하는 장면만 보면 눈물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아 참, 황미나의 <레드문>은 거의 통곡하면서 봤다…(그 이후로 다시는 그 사람 만화 안 본다. 아우… 그땐 정말 속까지 쓰리더라…)

이런 이유로 웬만하면 신파를 피하려 한다.
한번 열리기 시작한 눈물샘이 잘 닫히지 않거든.
게다가 신파 자체가 상당히 전형적인데 그런 뻔한 공식을 알면서도 번번히 당하는 나 자신을 보면 자존감이 상당히 떨어지거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피한다만, 내 신파량(주: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을 주량이라 하듯, 눈물이 터질 때까지 감당할 수 있는 신파적 상황의 수준을 신파량이라 정한다) 을 잘 모르는 터라 뜻하지 않게 신파에 당하곤 한다.

근데 말이다. 독자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신파도 여러 가지다. 특히 어떤 신파는 보면 볼수록 점점 그 타격이 약해지는 반면, 아무리 반복해서 봐도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면서 아예 그 장면이 되기 전부터 흐늘흐늘하게 만드는 신파도 있다.

물론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명백하게 후자에 속한다.

본 우원, 이 영화를 학회 참석하러 캐나다 가는 비행기에서 봤다. 안 세어봤지만 갈 때 올 때 합해서 한 6번쯤은 틀어줬을 거다. 그나마 우리나라 항공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판으로 봐야 했다. (영어도 못하면서 학회 발표는 어떻게 하냐고? 다 방법이 있다. 외우면 되지…)
여튼 그렇게 그 6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본 우원 이 영화를 끝까지 보는데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다. 보다가 재빨리 다른 채널에서 하는 『Mr.히치 :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같은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진정 시켜야 했으니까 말이다. 생각해 보라. 본 우원만 비행기 탄 거 아니다. 10년 아래 예쁜 후배도 옆에 있었다. 그 후배는 본 우원을 존경한다(고 말한다)는데 영화 보면서 질질 짜면 내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는가….

미스터 히치, 고마워~~

영화로 돌아가 보자.
글타. 이 영화는 정말 전형적인 신파다.

인생의 막장에서 외로이 늙어 가는 트레이너 앞에 나타난,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붙잡으려는 늙은 초보. 완강히 거부하던 관계가 일단 맺어진 다음,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임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하지만 결국 뜻하지 않은 이별이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아마 앞으로는 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을 그 자식보다 더 소중한 파트너에게 주인공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그 파트너를 멀리 떠나보내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만나서

공유하고

어느새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을 정도로 징한 얘기다.

사실 이렇게 노골적인 이야기는 오히려 관객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관객들 입장에서야 “앞으로 벌어질 일이 뻔히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뭐하러 봐? 재미도 없쟎아!” 하면서 스크린 앞을 떠나면 끝이란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영화. 그렇게 뻔한 신파임을 알면서도 한번 보기 시작하면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증상은 아무래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라는 배우의 존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이스트우드....

그의 연기는 정말 연기 같지가 않다. 그저 영화 속의 프랭키 그 자체다.
이 할아버지가 숨찬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대사를 내뱉을 때마다 관객들은 실제로 그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음을 느낀다. 그의 표정과 그 허한 자세에서 이미 외로움이 절절하게 배어 나오고, 그 무뚝뚝한 말투 속에서 타협하지 못하는 꼬장꼬장함이 그냥 드러난다. 그가 예배당에서 고개를 숙이고 신에게 기도인지 항의인지를 하는 뒷모습만 봐도 그 기분이 어떨지 실감이 나고 친구를 떠나보낸 뒤 쓸쓸히 병원을 나서는 뒷모습에서는 인생의 마지막 선물이 준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는 실제로 젊은 시절 화려하고 거칠게 살아온 마초 배우다. 그렇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노숙함 속에 잔잔하게 숙성된 나이 70이 넘은 노인이다. 그 원로가 나이는 좀 있지만 열의와 재능을 가진 “힐러리 스웽크”와 마주하고 대사를 교환하는 장면은 그 자체가 귀한 구경거리다. 그러니 그 둘을 멍하니 보다가 어느새 신파의 쓰나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지 않겠나. 이런 경험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지…

예전에 『용서받지 못할 자』에 대해서 쓰면서도 한 말이지만,

정말 그처럼 늙을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다.
이미 늦은 거 같다만…

추신: 본 우원은 아직도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 영진공 을유(乙酉) Best 연출: “로버트 로드리게즈”, 『Sin City』

『씬 시티』에서 보여준 그의 역량은 분명 그 어느 영화보다도 뛰어났으며, 감동에 가까웠다. “제시카 알바”의 고혹을 느끼게 만드는 몸매가 아니더라도 등장인물들의 연기와 화면구성, 소품, 색감 등은 충분히 즐거움을 선사했다. TV 코메디 시리즈로 등장한 “브루스 윌리스”가 환갑의 나이에도 화려한 액션을 구사하는가 싶더니 그저 맥없는 늙은이에 불과한 것을 만방에 퍼뜨렸고, 『헌티드』에서 칼부림 좀 하던 “베네치오 델 토로”는 총만 믿고 까불대는 양아치가 잘 어울렸다. 그 뿐이던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미키 루크”는 망가진 것 따위와는 상관없이 화려한 초 특급 울트라 캡숑 나이스 짱 멋진 마초맨으로 날아올라 적을 무찌른다. 아, “미키 루크”. 당신 이런 적 없었잖아? “클라이브 오웬”의 그 깊은 눈동자엔 여자가 아니라 남정네도 가심이 동할 게다. 마초 영화로 욕 먹어도, “데본 아오키”의 묘한 눈빛과 “제시카 알바”의 허리 돌림만 기억에 남아도. 그토록 ‘멋드러지게’ 잘 어울리는 배역들은 “엘리야 우드”의 반사된 백색 안경 모습처럼 섬뜩하지 아니하던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폭력 미학보다, 그 연출 솜씨에 기겁했다.

* 영진공 을유(乙酉) Best 연기: “리암 니슨”, 『킨제이 보고서』

사실 “리암 니슨”이라는 배우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쉰들러 리스트』 때부터 일 것이다. 그리고『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에서 그가 연기한 콰이곤 진 역할은 제다이라는 캐릭터를 한 층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품격’을 더했다고나 할까? 또한 그가 『마이클 콜린스』에서 보여준 열연을 칭송하기에는 실제 북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뭔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으며 그가 뱉어내는 적절한 톤의 대사와 표정들은 전기적 인물의 성찰을 재시각화 하는 작업이 거쳐졌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오죽하면 1997년에 나온 “해리슨 포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북아일랜드 해방군과 아이리쉬 어메리칸 이야기를 다룬 영화 『데블스 오운』을 다시 보면서 “해리슨 포드” 대신에 “리암 니슨”이 연기했더라면 하고 상상해 볼 정도니 말이다. 어쨌든 그는 ‘전기적 인물’을 소화해 내는 데는 최상의 연기력을 가지고 있나보다.
『킨제이 보고서』에서 알프레드 킨지(이미 선데이 서울 시절부터 킨지 박사님은 킨제이로 불리셨다)역할을 맡은 그는 여러 평을 통해 ‘킨제이 박사의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호평을 얻은 바 있으며, 특히 첫 부부학 강의로 들어서면서 강렬한 오프닝을 날리는 장면이나 진지한 토론의 눈빛에서는 “과연 ‘배우’라는 직업이 무엇을 소화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전율을 느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 청중에게 외면 받으면서 느끼는 아찔한 현기증에 이어 새로운 활력을 찾아나가는 그의 표정들은 우리에게 ‘킨지 박사’라는 인물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실의 나열을 넘어서 그의 있을 법한 고뇌와 시련의 시간들을 새로이 소화해낸 제 3의 시각으로, 현재의 우리를 다시금 밖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또 다른 창의 구실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만큼 “리암 니슨”의 연기는 훌륭했다.

영진공 을유(乙酉) Best 기획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