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재판소의 도돌이표

1.
어느 지인의 블로그에 최근 올려진 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다.
“논리적인척하는 글을 논리로 맞서주면 논리적인척을 논리로 대꾸해주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그렇다.  논리의 외피를 씌운 억지나 일방적 주장에는 따박따박 논리로 대꾸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말이나 글에 논리로 맞서다가는 정작 논의되어야 할 내용은 사라지고, 누구의 논리가 더 그럴듯하다느니 그래서 누구 말이 더 신뢰가 간다느니 나아가 둘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등의 하등 쓸모없는 말싸움만 켜켜이 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언론법 권한쟁의 청구 사건에 대한 판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언론법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접어놓고 보아도 도무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내용을 이 나라 최고의 사법기관인 헌재가 무려 104쪽이나 되는 길다란 결정문에 적어 발표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럴 땐 논리적으로 반박하는게 무의미할테고, 그저 비아냥거릴밖에 없을 터이다.
이렇게 말이다.


음주운전은 했지만 사고는 안냈으니까 대단한 카레이서.

사기는 쳤지만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다 니꺼.
병역비리를 저질렀지만 면제가 된 만큼 군대는 니들이나 가라.
영어연수를 가려던 여대생을 미국매춘업소로 팔아넘겼지만 어쨌든 이건 워킹홀리데이.
취업시켜주겠다며 정신지체장애자를 평생 노예처럼 부려먹었지만 어쨌든 취업률 100%.
폭력교사지만 어쨌든 애들 대학은 보냈으니 그 선생님은 킹왕짱.
왕따와 폭력으로 니가 운동을 시작했으니 학교일진은 대단한 트레이너.
노동자를 개처럼 부려먹어도 경제성장만 하면 선진국.
강이 썩어 문들어져도 건설경기와 부동산 호황이면 할렐루야.
노동 탄압의 대마왕 삼성이지만 기부 많이 하니 니들은 자선봉사단체.
독재정권이라도 나만 잘살게 해준다면 에브리씽 오케이.
방법이 개 뭐시기같아도 결과만 좋으면 쥐새끼도 인간.
.
.
.
.
.
아마 우리는 역사에 길이남을 개막장의 시대에 서 있는 것 같다. 
p.s 
사실 이런 소재의 기원은 이거였다.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

출처: 명랑문화공작소 블로그

2.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헌재가 어떤 곳인가, 그들이 누군가.
최상위 사법기관이고 최고, 최양질의 논리를 생산 및 규정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래서 이들의 법리와 논리는 적어도 이 나라 안에서는 기준이자 레퍼런스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결정이 아무리 비논리라고 해도 마냥 비아냥 거리기만 할 수는 없어보인다.

하여 다시 살펴보았다.
이번 헌재의 결정이 나오게 된 논리의 흐름은 이렇다.

1) 법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효다.
2) 법을 어겼다.           그러나 결과를 부정할 만큼은 아니다.
3) 법을 어겼다.           그러나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라.
4) 법을 어겼다.           그러므로 무효다.

이 네 가지 견해를 종합하니,
[법을 어겼다 –> 그래도 유효다]
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단서를 붙이기까지 했다.
요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봐주지 않겠다는.

여기에서 헌재관계자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정치적 물 타기를 하려고 했다면 속된 말로 이렇게 지저분한 결정을 했겠나. 헌재가 권한침해는 확인해놓고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했으니 결과적으로 양쪽에게 어중간한 판결을 내린 게 아니냐는 것은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다. 만일 헌재가 정치적으로 판결할 요량이었다면 아예 문턱에서 차버렸을 것이고, 재판관들이 방송사 테이프까지 증거조사한 마당에 정치적 판결 비판은 어렵지 않나 싶다.”


이런 “지저분한 결정”이 나오게 된 것이 애써 “정치적”이지 않으려다보니까 그렇다는 말인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

보자. 위 네 가지 견해 중에 “지저분”한 고려가 없는 것은 몇 번인가.
1)번과 4)번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이지 않게 “문턱에서 차버”리든가, 무효로 판결하든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2)번과 3)번의 견해에서 보듯 법리 이외에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한 “지저분”한 결정이 내려져서 오히려 판결이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닌가.

헌재관계자의 말을 또 인용해보자.

헌법재판소의 한 관계자는 “국회 자율권이 필요한 영역까지 헌법재판소가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 무효확인을 선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통과과정의 적절성에서 권한침해를 했다고 확인했다면 그 다음은 국회의장이 헌재 결정 취지에 따라 여러 정치의견을 형성하라는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여야는 헌법재판소가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타협해 다시 발의하는 등 정치적 노력을 하라는 뜻이라는 게다. 실제 헌법재판관별로 온도차는 있지만 피청구인측에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는 것은 당연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는 뜻도 된다고 덧붙였다.

만일 이 같은 일이 국회에서 되풀이 된다면 헌법재판소는 향후 헌법소원에서 준엄히 꾸짖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헌재가 “정치적”이지 않은 판결을 내린 거라면 어째서 단서조항이 붙었는지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단서조항의 의미는 결국 ‘이번에는 봐줄테니까 니들끼리 쫌 잘해봐라. 그런데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국물도 엄따!’라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법리와 논리를 넘어서는 일종의 고려가 개입된 것이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건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른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헌재가 아무리 애써 자율을 권고하는 이행 명령의 성격이라고 강변한다 해도 말이다.

3.
애써 헌재의 입장을 이해하자고 들면, 일단 삼권분립의 같은 축인 국회의 일을 헌재가 처분하려니 어색하기도 했을 터이다.  그리고 같아보이는 사안이라도 정황에 따라 정상을 참작하는 경우가 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벌어진 낯 뜨거운 일에 대해 굳이 법으로 일도양단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었음직도 하다.

말하자면, 음주운전자의 난폭운전에 의해 차량이 파손된 운전자가 가해자를 처벌해 주십사 하자 판사라는 분이 ‘범퍼가 살짝 긁혔을뿐이고 …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 가해자가 이후 추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고 … 피해자가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니 … 자꾸 법원에 찾아오지말고 서로 좋게 합의봐서 끝냅시다’라고 권고한 격이라고나 할까.

이 대목에서 실제 있었던 판결이 하나 떠오른다. 근친 성폭행 피해자에게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해당 가해자를 풀어준 그 판결 말이다.

헌재는 이번 판결을 통해 국회와 그 대표자인 국회의장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 것이라고, 그러니 국회와 국회의장은 위법한 행위를 거쳐 통과된 법률에 대해 마땅히 자율적으로 추가조치를 취해야만 할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국회가 이번 건에 대해 자율적으로 어떤 합당한 조치를 할 수 있다거나 또는 깊은 성찰을 통해 상호 양보를 통한 타협을 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권한쟁의를 신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판결 이후에 보듯이 권한을 침해한 측에서는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과정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측도 공식적인 사과 하나 없으며, 권한을 침해당한 측은 위법으로 인해 빼앗긴 우리의 권한은 어떻게 된 거냐며 억울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헌재는 이번 건에 대해 진정 “정치적”이지 않고 법리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기각/각하 아니면 무효 판결을 내렸어야 옳았다.  이런 고려 저런 사정을 따지다보니 말마따나 “어중간”하고 “지저분한” 판결이 내려졌고, 그로 인해 상황이 일단락되고 자율적인 개선이 진행되기는 커녕 오히려 심판 청구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지는듯 하다.

헌재가 국회에 대해 ‘그대들의 일을 자꾸 우리에게 떠넘기려 하지 말아라’라고 도돌이표를 달고 싶었다면 차라리 그리 했어야 했고, 그도 여의찮았으면 논란의 여지가 없이 수미일관한 판결을 주었어야 했다.

지금 헌재나 권한침해자 측에서는 ‘… 했지만 … 은 아니다’라는 댓글놀이를 하는 이들을 보며 법도 논리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떠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오히려 정말 몰법리 몰논리한 쪽이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나저나 이 놈의 도돌이표는 도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가려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영진공 이규훈

<브라이트 스타>와 존 키츠에 대한 잡담


부산에 초청된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실화를 토대로 한다. 25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그는 생전에 딱히 그 위대한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지는 못했다. 어릴 적 천애고아가 되고 생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어찌어찌 의대를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3년만에 땄다는데, 그가 의학엔 별 관심이 없고 시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 특히 시인이거나 시인 지망생 친구들은 그가 3 년만에 의사자격증을 딴 것에 대단한 질투와 허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키츠는 패니 브론과의 절절한 연애로도 유명한데, 패니가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으로 쳤을 때 미스터 다아시 같은 남자 하나 낚으려고 사교계에서 좀 나대는, 엘리자베스 베넷 정도 가문의 여자였던 모양이다. 리즈 베넷이야 지성미와 유머가 풍부한 여인이었지만 패니는 또 그런 타입은 아니었던 듯, 영화 <브라이트 스타>에서도 키츠를 후원하는 그의 작가 친구 찰스 브라운은 패니를 너무나 못마땅해 해서, 그녀를 “남자나 꼬시려고 사교계에서 꼬리 흔들고 다니는 무식하고 허영심만 센 여자” 취급을 한다.

하지만 패니를 그리는 제인 캠피온의 시선은 그닥 삐뚜름하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 키츠를 처음 사교파티에서 만난 뒤 패니가 키츠의 시를 그 앞에서 읊으면서 작업 한번 들어간 뒤, 그녀는 “시를 공부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며 다시 키츠를 찾아간다. 물론 이 역시 삐뚜름하게 보자면 ‘작업의 2차 작전’으로 보일 수 있고 제인 캠피온 역시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찰스에게 패니의 얄팍함이 폭로당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패니의 이런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패니의 진정성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시켜 버린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되는 것도 그녀가 찰스에게 봉변을 당하며 그 얄팍한 허영심이 폭로당한 것보다는, 키츠에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갔을 때 그 반짝이던 눈빛, 그 눈 안에 담겼던 동경과 열망이다.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에겐 그 장면이 더욱 크게 남는다. 나 역시 영화가 끝난 뒤 “키츠의 시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었으니까. 하여간 <브라이트 스타>에 대한 리뷰는 이미 여기에 쓴 바 있고.

Bright Star

존 키츠, 혹은 존 키츠로 분장한 벤 위쇼의 고혹적인 눈. (<브라이트 스타>)

며칠 전 모 극장을 갔다가 바로 옆 서점에서 민음사에서 출간한 김우창 번역의 키츠의 시선집 [가을에 부쳐] 를 샀다. 이후 웹 검색을 해보니 그 외에 키츠에 대한 다른 책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오래 전에 대학출판부 같은 데에서 나왔다가 절판, 절판, 품절.) 이 기회에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 대해 눈동냥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낭만주의 문학’같은 키워드로 돌려봤지만 역시 헛수고다.

사실 또 다른 방식의 치열한 시대정신이었던 낭만주의가 국내에서는 현실도피용으로 포장되고, 그에 따라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를 신봉한 이들에겐 또 다시 부당하게 폄하되는, 그런 식의 분위기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결국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형식의 외피와 감정적 나르시시즘에만 집착하고 과장한 것 정도로 오해된 분위기가 있달까. 아니 근데 센티멘털리즘과 로맨티시즘이 동의어는 아니잖아, 그게 문학이든, 회화든. 영화쪽으로만 보자면,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조금씩 낭만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근 허진호가 내놓은 <호우시절>이야말로, 제대로 된 낭만주의의 본격적인 부활의 바람의 서두에 놓아야 할 것같다. “허진호가 변했다”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외서 쪽을 돌려보니,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문고판으로 그의 주요 시와 편지 일부를 편집해놓은 책이 보인다. 랜덤하우스에서는 그의 시 전체를 모아놓은 책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오디오북으로는, 새뮤얼 웨스트와 마이클 쉰이 낭송한 CD도 보이고. 마이클 쉰이, 그러니까 <더 퀸>의 토니 블레어와 <프로스트 vs. 닉슨>의 프로스트로 나왔던 배우인 그 마이클 쉰이 맞나 싶어 찾아보니 … 허허, 맞네!

새뮤얼 웨스트는 좀 낯선 이름이라 찾아봤더니 <반 헬싱>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출연했다는데 필모그래피가 어째 다 단역 및 조연. 그 … 근데, 잘 생겼다? 허걱, <하워즈 엔드>에 조연으로 출연해 BAFTA상 남우조연 부문 후보로 올랐었어? 뭐, 옥스포드 출신? 런던드라마평론가협회 세익스피어상 수상… 엄훠 나 이거 사야 하는 거 맞는 거? 뭣보다 잘생긴 것에 침 주르릅… 아니, 잘생기기도 잘생겼지만 딱 목소리 멋있게 생겼단 말이야! 예컨대 케네스 브래너의 목소리로 세익스피어 낭독을 듣는다고 쳐봐, 그게 그냥 목소리인가? 주르르 몸이 녹아내려 황홀경에 빠뜨릴 천상의 음악이지!

<브라이트 스타>의 말미에도, 그러니까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에서 키츠로 출연한 벤 위쇼가 나지막하게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낭송한다. 정확히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나오기 시작해, 마지막 카피라이트 표시와 제작사 로고가 끝날 때 낭송도 끝이 난다. 벤 위쇼의 나직하면서도 팬시하고 발음 좋은 목소리와 키츠의 시가 어우러져, 비록 눈은 자막을 뒤쫓느라 정신없었긴 해도, 도저히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게 나만 그런 건 아닌 게, 대체로 아무리 영화제라고 해도 엔딩타이틀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대면서 일어날 듯 말 듯하며 짐을 챙기지만 이 영화의 자막 땐 아무도 그러지 않더라. 만약 영화가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개봉한다면, 그 시의 낭송을 꼭 즐기시기 바란다.

John Keats

[부록] John Keats,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영진공 노바리

ps1. 온라인에서 이런 페이지도 발견. 참고하시라.

ps2. 듣자하니 벤 위쇼는 영화 찍기 전엔 키츠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잘 몰랐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의 벤 위쇼 칭찬은 정말 … 으하하하! 처음 만나자마자 느낀 것이 “세상에, 당신 정말 아름다운 피조물이잖아!”였다니, 난 캠피온 언니의 취향이 듬직한 돌쇠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출처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

어느 오후의 감상

회사에 청소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가 계신다.
가끔 아주머니가 일하시는 뒷모습을 볼 때면 눈시울이 붉어지곤한다.

죽을 때까지 죽지 못해 따라오는 노동의 굴레. 더군다나 생산수단에서 철저히 소외된 도시인의 노동 굴레.

현재 나는 내 수입의 25%를 부모님께 드리고, 15%는 내 서울에서의 필수 생활비(식사와 교통 정도), 10% 정도는 문화생활비(지인을 만나는 일부터 시작해서 모든 소셜 생활비)로 쓰며 25%정도가 집세와 보험료, 인터넷 공과금 등으로 나간다.

25% 정도가 저축 가능한 금액이나 이 또한 빚 이자에 몇 달마다 한 번씩 터지는 예상치 못한 지출에 써버리면 돈을 모으기가 여간 쉽지 않다.

언론에서 4년제 대졸 – 그것도 in 서울 – 정규직이 받는 ‘평균 연봉’에 대해서 씨부릴 때마다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내 어머니에게 한 달에 몇 만원을 더 보낸다고 내 부모님의 삶이 나아질까?

회사에서 청소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의 뒷 모습에서 내 어머니를 느낀다.

과연 내 어머니는 내가 보내드리는 그 얼토당토 안 되는. 내 서울 거주 및 생활비의 절반을 가지고 부모님 두 분이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문화생활을 포기하고 10%를 더 드릴까? 그만큼 이 복잡하고 괴물 같은 도시에서 뒤쳐지면 결국 더 수입이 줄어들어 나 뿐만 아니라 다시 부모님까지 옥죄지는 않을까?

돈이 행복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지만.

나는 이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시기를 지나 매월 조금씩 모을 수 있는 시기에 들어왔지만,

아직도 우리 부모님의 생활 걱정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런 비극은 내 세대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회사 아주머니의 뒷모습에 내 어머니를 투영하는 것이고, 내 노년을 투영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슬픈 것이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살지도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세상에 당하지도 말아야겠다.

영진공 함장

“가십 걸”, 꼬마 J가 피임약을???


<가십 걸> 주인공들의 또다른 가십- 첫번째 이야기  
꼬마 J가 피임약을?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이 글은 <가십 걸> 실제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 이 글에서 묘사된 산부인과 병원 및 처방에 관한 내용은, 드라마의 배경인 미국의 상황이 아닌한국의 상황임을 알립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안녕? 난 가십 걸이야. 오늘도 너희에게 어퍼 이스트 사이더들의 소식을 전하러 왔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 오늘도 꽤 시끄러울 것 같은데?


꼬마 J(제니)의 핸드백에서 수상한 약이 발견됐거든. 그게 뭔지 알면 다들 놀랄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주인공들이 다니는 사립 고등학교 앞뜰. 한쪽에선 블레어와 그녀의 심복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그때 한꺼번에 울리는 학생들의 핸드폰. 모두들 동시에 문자를 확인하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 가운데 ‘이게 웬 월척이냐?’ 란 표정의 블레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학교 복도.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댄. 누굴 찾고 있는 듯 열심히 두리번거리고 있다.)


세레나: (댄의 앞을 가로막으며) 댄, 어디 가?


댄: 제니를 찾고 있어. (가던 길을 계속 가며 무심한 듯 시니컬하게) 아 참, 너도 이 학교 학생이지? 당연히 가십 걸 메시지도 받았을 거고. 그러니까 내가 제니를 왜 찾고 있는지도 잘 알겠네.


세레나: (댄을 따라가며 급하게) 제니는 지금 학교에 없어.


댄: (우뚝)  뭐?


세레나: (별 수 없다는 듯) 오늘 저녁 자선행사 특별순서로 블레어네 엄마 패션쇼가 열려. ……제니는 거기에서 준비하는 걸 돕고 있을 거야.


댄: 맙소사.


세레나: 저기 있잖아, 댄.  나도 이 학교 학생이라 그런지, 오늘 가십 걸 문자란 걸 받았는데 말야.


댄: (피식)


세레나: 너무 신경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댄: 세레나. 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 여동생이 핸드백에 피임약을 넣어 갖고 다닌다는 소문이 쫙 돌았는데 오빠인 내가 가만 있을 순 없어.


세레나: 댄. 제니가 어차피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거라면, 피임을 하면서 만나고 있는 걸 기특하게 생각해야 해.


댄: (한숨) 제니는 이제 겨우 열 여섯이야. 물론 걔가 가끔은 나보다 철든 행동을 할 때도 있지만,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아직 어린애라고.


(지나가던 척, 어느 틈에 갑자기 끼어들며)


척: 여동생은 오빠가 허락해야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건가?


(닫기)


세레나: 척, 그냥 지나가 줘.

척: 세레나가 몇 살부터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더라? 아하, 오빠가  없어서 허락 받을 사람도 없었을테니 일찍 만나기 시작한 건 이해해 주지.
댄: 척, 넌 끼어들지 않으면 좋겠다.


척: 원래부터 한심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는군.  오빠나 되어 가지고 한심하기 짝이 없어.


댄: (발끈) 뭐야?


척: 이 봐. 잘 생각해 봐. 지금 제니가 섹스를 시작했냐 아니냐를 가지고 흥분해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친오빠라면, 여동생이 만나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가장 먼저 그게 궁금할 것 같은데? 제니가 웬 양아치 같은 놈이랑 눈 맞은 건 아닌지, 늙은 여우한테 넘어간 건 아닌지, 그런 건 걱정도 안 되는 모양이지?


댄, 세레나: (사라지는 척을 바라보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방과 후. 단골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척에게 블레어가 다가온다.)


블레어: (척의 옆에 앉으며)  솔직히 말해.


척: 뭘?


블레어: 너지? 넌 그런 짓을 좋아하잖아.


척: ???


블레어: 모르는 척 잡아떼는군.


척: 무슨 소리지?


블레어: (버럭) 제니가 피임약을 갖고 다니는 거! 그거 너 때문 아니냐고!


척: (콧방귀를 뀌며)  내가? 제니를?


블레어: 그래. 순진한 여자애들 꼬시는 게 네 취미가 아니라곤 못하겠지. 게다가 넌 댄을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일부러 제니를 꼬드겨서 같이 잤을 가능성이 남고도 철철 넘치지!


척: 휴…….


블레어: (핸드폰을 꺼내며) 가십 걸에 제보할 거야.


척: (블레어의 핸드폰을 뺏으며)  진짜 그렇게 믿는 거야?


블레어:  아니야?


척: (단호하게) 내가 댄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증오라기보단 무시에 가깝지.  그런 지푸라기 같은 녀석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여동생을 건드리는 수고를 한다는 게, 나 척 배스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I’m, Chuck, Bess.


블레어: (찌푸리며) 그럼 대체 누구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길을 혼자 걷고 있는 네이트. 어딘지 시무룩한 표정이다. 네이트 옆으로 리무진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온다. 차창이 열리면, 고개를 내미는 척.)


척:  너도 아닌 거로군.


네이트: ?? 뭐가?


척: 제니의 상대가 너였다면, 이 시각에 혼자 방황하고 있진 않겠지. 한창 자선행사를 하는 중이니까, 지금쯤 패션쇼를 보러 갔을 거야.


네이트: (고개를 돌림)


척: 제니에게 관심이 있었지?


네이트: …….


척: (비아냥) 가난한 브룩클린 소녀에게 차인 네이트 아치볼트라……. 이런 사건은 아치볼트 가문에선 처음 있는 일이겠지?


네이트: (노려봄.)


척: 차에 타.


네이트: ??


척: 행사장에 가서 확인해야지. 제니가 누구랑 눈이 맞았는지.


(네이트, 머뭇거리다가 척의 리무진에 탄다. 행사장을 향해 달리는 리무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자선행사가 열리고 있는 넓은 행사장. 제니는 무대 뒤에서 곧 있을 패션쇼 준비에 한창이다. 여러 벌의 옷을 들고, 모델과 스태프들 사이를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제니. 이윽고 댄과 세레나가 나타난다.)


댄: (제니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제니!


제니:  (깜 짝) 여긴 웬일이야? (댄과 세레나를 번갈아 보며 재빠르게)  있잖아, 오빠, 학교를 안 간 건 오늘 이 패션쇼가 나한텐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야.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원하고 열심히 할 수 있는지 월더프 아줌마한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거든. 현장학습 정도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아빠한테는 오늘 내가 결석한 걸……


댄: (말을 자르며) 그 얘길 하려고 온 게 아냐.


제니: 아냐? 그럼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댄: 하지만 네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오늘 결석한 걸 아빠한테 말할 수도 있어.


제니: 오빠, 제발. 뭘 말하라는 거야?


댄: (의아한 듯) 너 핸드폰도 안 보고 사니?


제니: 응? 아, 가방 안에 있어. 정신 없어서 꺼내볼 생각도 안 했는데. 왜?


세레나:  제니, 오늘 가십 걸 소식은 네 얘기야.


제니: ……제가요?!!


댄:  어쩐지 반기는 표정이다?


제니: 당연하지! 가십 걸 대상이 된다는 건 주목 받는다는 뜻이니까!


댄: 무슨 내용인지 알고도 그렇게 좋아하려나.


제니:  (당황하며) 무슨 내용인데?


댄: (도리도리. 차마 직접 말을 못 꺼낸다.)


세레나:  제니, 네가 핸드백에 피임약을 넣고 다닌다는 소식이었어.


제니: (아무렇지 않은 듯) 아, 네.


댄: 아, 네??


제니:  ……그게 끝이야?


댄: 뭐야, 그 반응은?  너처럼 어린애가 피임약을 들고 다니는 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야?


제니: 아, 그게 피임약인 건 맞지만, (웃음을 터뜨리며) 설마 내가 남자를 만나고 다니느라 피임약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거야? 맞지? 맞지?


댄: (당황하며)  그럼… 그러지 않고 그게 왜 필요해?


제니: (세레나를 보며) 언니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세레나: (당황하며) 그게… 음… 그래.


제니: 풉. 못 말리겠네. 난 또 뭐라고. 그런 거 아니거든? 일단 지금은 너무 바쁘니까 쇼가 끝나면 얘기하자. (종종 걸음으로 사라짐)


댄, 세레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행사장. 드디어 오늘 자선행사의 클라이맥스인 패션쇼의 막이 오르고 있다. 행사장 한쪽에서 무대를 보고 있는 척. 어느새 블레어가 다가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린다.)


블레어:  이것도 변명해 보시지.


척: (돌아보며) ?


블레어: 관심도 없는 행사장에 굳이 온 이유가 있을 텐데? 심심해서 왔을 리는 없고. 행사랑 관련된 누군가를 보러 왔겠지. 그게 누굴까?


척: (피식) 심심해서 왔을 리가 없지. (고개를 돌리자 네이트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오고 있다.)


블레어: (깜짝 놀라며) 네이트?? 네가??


네이트: 뭘?


블레어: 네가? 설마?? 제니랑??
네이트:   …….


척: 네이트도 아니야. 제니한테 관심은 있었지만 차였달까 그런 셈이지. 우린 누가 제니의 남자인지 알아보러 온 거야.


블레어: 대체 누구지?


(척과 네이트, 블레어: 행사장을 둘러보지만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행사 후. 행사장 밖에서 제니를 기다리는 댄과 세레나. 잠시 후 달려오는 제니.)


제니:  오빠! 언니!


댄: 다 끝났어?


제니: 응. 오래 기다렸지? 나 너무 배고파. 오빠, 나 오늘 완전히 성공했어! (잔뜩 들떠서)  월도프 아줌마가 날 눈 여겨 봤다고! 쇼가 끝나고 수고했다면서 웃어주기까지 했어! 나를 계속 써 줄 가능성이 높다고!!


댄: (떨떠름) 그래, 잘 됐다. 하지만 우린 그것 말고 할 얘기가 더 있을 텐데.


제니: 응? 무슨 얘기?


댄: (기막혀서) 가십 걸은 완전히 신경 쓰지 않고 있구나.


제니: 아~ 난 또. 또 까먹고 있었네. 어디 한 번 보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곤) 푸훗. 이게 뭐야. (다시 들떠서) 오늘 이 뉴스로 시끄러웠어? 다들 뭐래?


댄: 제니, 웃을 일이 아니야. 좋아할 일은 더더욱 아니고. 넌 아직 어린애야. 게다가 네가 대체 누굴 만나고 있는지도 알아야겠어.


제니: (한숨을 쉬며) 일단 밥을 먹으러 가자. 먹고 얘기해 줄게. 세레나 언니, 우리집에 가서 같이 식사해요.


댄: 그 얘길 집에서 하자구? 아빠도 계시는데?


제니: 그러니까 집에서 하자는 거야.


(댄, 세레나: 팔짱을 낀 제니에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끌려간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댄과 제니의 집. 아빠인 루퍼스를 비롯해 모두들 후식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


제니: 아빠. 오늘 오빠가 내 피임약에 대해 물었어요.


댄: (깜짝 놀라서)  뭐야. 아빠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가만 있었어요?
루퍼스: (딴청 부리며) 세레나, 차는 입맛에 맞니?


세레나: (당황하며) 네? 네….


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고작 열 여섯인 애가 피임약을 들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당사자는 별일 아니라고 하고, 심지어 아빠까지 알고 있었다면서 상관도 안하고 있었다니. 우리 집이 이런 집안이었어?


제니:  오빠, 내가 그 약을 먹는 건 PMDD 때문이야.


댄: PMDD?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구지? (세레나를 보며) 누군지 알아?


세레나: (댄과 달리 빙긋 웃으며) 으흠, 알지.


댄: 그게 누군데? 왜 갑자기 안심이란 표정이 됐지? 그렇게 괜찮은 녀석이야?


제니:  오빠, PMDD는 ‘Premenstrual Dysphoric Disorder’의 약자야. ‘월경전 불쾌 장애’라고.


댄: …월경… 뭐?


제니:  생리하기 일주일쯤 전부터 신체적, 정신적으로 괴로운 상태를 PMS(월경전 증후군)라고 해. 그건 들어봤지? 배에 가스가 꽉 찬 것 같이 답답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경련이 일기도 해. 머리도 너무 아프고 온몸이 아프기도 하지. 온몸의 근육이 잘근잘근 씹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어. 유난히 피곤해지기도 하고. 그래도 육체적으로 아픈 건 참을만 한데, 정신적인 고통도 꽤 심하거든. 짜증도 심해지고, 기분이 널뛰기도 해. 걱정, 긴장, 슬픔, 절망, 우울함, 무력감이 막 한꺼번에 밀려오기도 한다구. (세레나를 보며) 언니는 내 맘 알죠?


세레나: 난 심한 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있어서 공감은 해.


제니: 전 너무 심해요. (한숨) 아무튼 PMDD는, PMS보다 더 심각한 상태를 말해. 신체적, 정신적인 증상들 때문에 일상 생활이 방해 받을 정도로 심한 상태를 PMDD라 부르는 거지.


댄: 그랬구나. 난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 …그런데 피임약을 먹는 게 그것 때문이라구?


제니: 응. 내가 먹는 피임약은 PMDD 증상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거든.


댄: 그런 게 있어?


세레나: 나도 그것까진 몰랐어.


제니: 나도 병원에 가서 상담하다 알게 됐어. 모든 피임약이 다 그런 건 아니고, 일부가 그래. 붓기나 두통 같은 신체적인 증상에도 효과가 있지만, 신경과민이나 우울증, 불안감 같은 정신적인 증상도 완화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 그래서 먹기 시작한 거고, 아빠한텐 벌써 말했어.


루퍼스: (댄을 보며 어깨를 으쓱)


댄:   왜 나한테만 말하지 않은 건데?


제니: (비꼬듯)오빠가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지.


루퍼스: (뭐라고 말하려는 댄을 가로막으며) 너희 엄마도 그맘때만 되면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모른단다. 엄마도 힘들어했고 덩달아 나도 힘들었지. 그래서 제니가 약을 처방 받는다기에 그러라고 했어. 그냥 참는 것보단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


댄: 하지만 꼭 약을 먹었어야 했어? 그냥 해결할 방법은 없었어?
제니:  나름대로 여러 궁리를 해봤다구. 카페인과 소금 섭취를 줄이면 긴장과 짜증을 완화할 수 있대서 그렇게 해 봤지. 과일이랑 채소처럼 비타민과 섬유소가 풍부한 음식을 섭취하고, 식사 때마다 단백질을 챙기는 게 좋대서 그렇게도 해 봤어. 설탕과 지방 섭취를 줄이면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기에 그 좋아하는 도너츠도 끊었는데. 오빠가 몰라서 그렇지, 그동안 내가 식단에 얼마나 신경 써왔는지 알아? 규칙적인 운동도 좋다고 해서 이것저것 해 봤다구. 내가 요가학원에 괜히 등록했는지 알아?


댄:  잘생긴 스페니쉬 강사 때문인 줄 알았지. -_-;;


제니: 에효.  아무튼, 민간요법이라 알려진 방법을 이것저것 해봐도 난 효과가 크게 없었어. 내 친구들은 저런 방법들로 효과를 꽤 본 애도 제법 있는데, 난 여간해선 소용이 없더라고. 그래서 이번엔 약을 먹어보는 거야.


세레나:  그래서,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제니: 글쎄요. 저는 이제 막 복용하기 시작한 참이라서요. 일단 PMDD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니, 계속 먹어보면서 체크해 봐야겠죠.


댄:  그래도 피임약을 먹기엔 너무 어린 나이인 거 아냐? 이른 나이부터 먹기 시작하면 약 성분이 몸에 쌓이는 거 아냐?


제니: 염려 마. 먹는 피임약은 몸에 축적되지 않아. 복용하는 걸 멈추면 더 이상 체내에 약 성분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구. 무엇보다 난 의사의 처방을 받아 적절한 복용을 하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
댄: 나쁜 짓이라고 한 적은 없어. 다만 난… 그러니까…….
세레나: 아무리 생각해도 못마땅한 거구나?
댄: 솔직히 그래. 복용 이유가 어찌됐든 간에 나는 좀……. (루퍼스를 바라본다.)
루퍼스:  (어깨를 으쓱하며) 제니의 경우엔 일단 PMDD 완화 목적으로 복용하고 있는 거지만, 솔직히 제니가 피임을 목적으로 복용하는 거래도 내가 뭐라 하진 않았을 거다. 물론 제니가 아직 어린 나이긴 하지만, 요즘 아이들 성문화가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단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거든. ……아니냐??
댄, 세레나, 제니:    …….

루퍼스:
그러니 성관계를 장려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어떤 피임 방법이 있고, 각각의 장단점이 뭔지 알고 있는 게 필요하다고 봐. 그래야 만약의 경우에 제대로 조치를 취할 수 있지 않겠니.


댄: 그래. 아빠 말도 맞고 오해도 풀렸어. 하지만 가십 걸이 퍼뜨린 소문은 어쩔 건데?


제니: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꺼낸다.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는 제니.)


댄: 뭐 하는 거야?


제니:  가십 걸에 제보하는 거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시 동시에 가십 걸의 문자를 확인하는 아이들. 의기소침한 기색으로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시던 네이트는 환한 표정이 되고, 자기 집 침실에서 잔뜩 찌푸리고 있던 블레어는 핸드폰을 보곤 의미심장한 표정이 된다.)


블레어: (혼잣말로) ……가십 걸이 정말 여자란 말이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역시 제니야. 소문은 소문으로 잠재워야 한다는 걸 아는군. 어쨌든 제니는 남자 때문에 피임약을 먹는 게 아니었어. PMDD 때문이었군. 그 고통을 아는 같은 여자 입장에서, 이번 뉴스는 특별히 자세히 공개해 줬어.

그나저나,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그것만은 비밀로 해 둘게. 어쨌든 모두들 날 좋아하잖아? 그럼 다음에 또 만나. 잘들 지내고 있으라구.


 …XOXO, Gossip girl.

영진공 도대체


영화가 내게 꺼내 든 옐로우카드


하늘이 뚫린 듯 비가 퍼붓던 날, 퀵 아저씨가 장판같이 두꺼운 우비를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땅이 꺼질듯 거친 한숨을 내뱉고는 그가 말했다. “오늘 또 한명 갔어. 젠장.  아 진짜 조심히 좀 다니라니까. ”

누군가 빗길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긴가 보다.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빗길인데 조심하세요.” 라고 겨우 소리 내었다.


비보호 좌회전

단편영화 <비보호 좌회전>에는 길가에 서서 우유와 빵조각을 입 안에 쑤셔 넣는 걸로 끼니를 대신하고 급하게 다음 배달
장소로 떠나는 퀵 기사가 등장한다. 여기저기서 ‘빨리빨리’를 외치는데 하필 이때 오토바이가 멈춰 선다.

다른 방도가 없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죽을힘을 다해 달리다가 급한 대로 택시를 잡아탄다. 하지만 이미 늦을 대로 늦은
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줄 아냐며 코앞에 서류 봉투를 거칠게 흔들며 으르렁대던 여자는 앞으로 거래하지 않겠다는 쉬운 결정을
내리고는 휙 떠난다.


그간 얼마나 많은 필름, 테잎, DVD 들을 영화제, 상영회, 개봉관으로 서울, 대구, 부산, 분당을 마다치 않고 퀵서비스를 통해
전달했을까. . 전국 각지로 가장 빠른 서비스를 ‘빨리빨리’ 부르고 보채고 따지고 깎으며 이용한 고객인 나는 그들에게 진심의
인사를, 절실한 안부를 건네보긴 했을까.

 


친구사이

파주

부산에서 본 많은 영화들은 택배 아저씨부터 스무 살 게이커플까지 내가 아닌 남의 사연을 조곤조곤 얘기한다. 왜 이제야 다른 사람들의 사연이 들리는 걸까…..

 

얼마나 긴 시간동안 나 혼자밖에 모르고 살았냐하면 말로 꺼내놓기 부끄러워 어딘가로 숨어야 할 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고민은 간결한
조언 한마디로 끝냈고 남의 단점을 쉽게도 꼬집었다. 남의 걱정은 내 것이 아니었고 똑같지 않은 것엔 공감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방적이고 내 중심적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이상한 나를 PIFF 영화들이 거울이 돼 비췄다.



여행자

산책가

<친구 사이>의 밀리터리 게이 커플도, <파주>의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나눈 형부와 처제도,
<피시탱크>의 방황하는 15살 소녀도, <산책가>의 앞 못 보는 꼬마도, <여행자>의 고아원서
아빠를 기다리는 진희도. 모두 나보다 몇 겹은 두터운 이야기를 품고 산다.

그러면서도 <닿을 수 없는 곳>의 어린 가장은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 그리고 집 나간 아빠까지 모두 제 품안에 끌어안는다.
들 모두는 짊어진 무게가 벅차도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혼자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세상의 편견에 당당하게 맞서고
심지어 행복한 노래로 마땅히 아픔을 삼킨다. 땅 속에 제 몸을 묻어버릴 만큼 모든 걸 놓고 싶던 어린 소녀조차도 결국 세상 속
자기만의 오솔길을 찾아 천천히 걷는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임을 작품으로 일깨운 감독들의 깊은 혜안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PIFF 방문에서 더 늦기 전에 타인의 손을 잡을 것을 경고 받은 셈이다. 영화가 들이민 옐로 카드다.

영진공 애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