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FF 2009] 밀면은 역시 남포동 할매 가야밀면

개인적으로 부산에 오면 빠지지 않고 먹고야 마는 것이 바로 밀면이다. 보통 면 종류는 국물맛이라고 하나 개인적으로 면만으로도 충분히 맛난 것을 즐길 수 있는 밀면이야말로 언제든 군침을 돌게 만드는 것 중 하나다.
남포동 뒤쪽 맛집 골목을 돌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할매 가야밀면은 면에 다른 것을 섞지 않고 100% 밀가루를 쓰게 된 첫 효시(?)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물론 거기 계신 분에게 직접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다들 알다시피 밀면에 대한 설은 3가지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6.25때 피난 온 함흥 분들이 메밀을 구하기 힘들어서 미군 구호품인 ‘밀가루’로 만들었다는 데 가장 신빙성을 두고 있다. 여름에 부산이 덥고 습하니 시원한 냉면은 땡기고, 음식은 모자라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은가?

시원한 비빔밀면 하나 먹으면 정말 모든 걱정 사라지듯 즐거움으로 가득해진다. 하루종일 PIFF의 운영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도 이 즐거운 맛 거리 하나에 싹 가셨다. PIFF 때문에 부산을 찾았지만 PIFF로 인해 상처를 받고 부산 특유의 밀면으로 치유받는다고나 할까?
부산의 인심이 밀면에서 느껴진다면 너무 과장될 수도 있겠지만 얌체같은 – 이라고 써놓고 이문만 밝히는이라고 읽어보자 – 서울사람들과 참으로 다른 면이 바로 ‘곱배기’일 것이다. 그저 500원만 더 주면 먹을 수 있는 밀면 곱배기인데도 양은 정말 ‘두 배’다. 말 그대로 ‘곱배기’인 것이다.
먹을 걸로 장난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시대. 양부터 정직하게 ‘곱’으로 주는 밀면집. 정말 감동이 두 배다. 쫄깃한 맛까지 감동이 세 배다.
배터지도록 면을 후루룩 먹고 걸어나와 남포동 시장 골목 골목을 누비면서 부산의 정취를 느끼니 어느새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PIFF 따윈 다 잊어버리고 사람사는 모습들에 치유되어 서울로 돌아가는 KTX를 탔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부산’이라서 즐거웠던 기억이 PIFF 2009에서 건진 유일한 행복인 듯 하다.
내년 PIFF에서는 제발 스타와 스폰서들의 ‘제품’이 아닌 ‘영화와 영화인, 영화팬’으로 가득한 PIFF이길 기대해본다.

영진공 함장


[PIFF 2009] PIFF 빌리지 풍경

예매한 영화가 상영 취소 되었으니 야외 이벤트만 둘러볼 수 밖에 없었다.


광안대교의 아침은 밤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밋밋한 맛이 있었다.


오늘 하루 날씨가 무척 좋으리라는 기대도 할 수 있는 해운대의 아침이란 부산 사람들이 정말 살기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부러움도 느끼게 했다. 물론 이는 해운대에 쉴 새 없이 올라가고 있는 고층 아파트의 주인들 뿐이겠지만 말이다.

PIFF PAVILION 앞에 만들어둔 모래 미술은 상당히 귀여운 작품이었다. 작년에는 여기서 ‘아주담담’이 이루어졌는데 올해는 이 작품으로 인해서 PAVILION이 조금 덜 붐비는 느낌을 받았다.

따가운 햇살을 피할 길 없는 booth 들 사이로 즐거운 사람들이 보였다. 영화제의 열기도 열기지만 항상 PAVILION 옆의 이 하얀 천막들은 참으로 어색한 분위기로 느껴진다. 뭔가 PAVILION과 비교되는, 뜬금없는 booth 들이랄까?
booth들 끝에 자동차 전시가 이루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홍보시스템과 더불어 또 그 옆에서 기무라 타쿠야와 이병헌, 조쉬 하트넷이 등장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이 안 어울리는 해운대 백사장의 아쉬움은 아마 PIFF 2009가 개인적으로 역대 최악의 영화제라고 손꼽고 싶게 만들 정도로 통일성도, 영화제 느낌도, 그 어떤 흥분을 느낄 수 없는 어색함으로 가득한 자리였다.
예산을 줄인 건가? 아니면 담당 PIFF 마케터가 협상에 실패한 건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중요한 부분을 위해 돈을 더 들여서 ‘거화취실’이라도 한 건가? 2009년 PIFF는 방문객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가?
PIFF 빌리지를 걸어다니면서 그 어떤 질문에도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영진공 함장


[PIFF 2009] 여전히 아름다운 부산의 밤 … 작년만 못한 Piff …

2009년 PIFF를 맞이하여 무슨 대학 수강신청도 아닌, 1분만에 매진되는 영화제 예매를 겨우겨우 통과하여 단 ‘한 편’의 영화표를 얻는 데 성공했다.

영화제에 내려와 하루 기본 3편의 영화를 봐주어야함에도, 주말이라는 일정상의 이유로 인해 사람들이 몰려서 그런지 도무지 표를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제가 꼭 영화만 보라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저 영화제의 정취를 느끼려 부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차창밖으로 흘러가는 밤풍광을 뒤로하고, 손에 그러잡은 캔맥주의 모금 모금은 도시 속에 지쳐가는 영화팬의 아련한 향수를 찾아가는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다.
부산역 광장은 여전히 영화제 특수를 노리려는 호객행위가 끊이질 않았다. 일반 택시를 타고 해운대까지 8~9천원이면 충분하련만 단체 고객을 상대로 봉고차를 태워주겠다며 3만원을 요구하는 그 어처구니 없음이란. 그런 차량 이용했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란 말인가.
금요일 밤의 부산은 언제나 그렇듯이 터널마다 차가 조금씩 정체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수영만부터 시작되는 ‘PIFF’정체는 영화제의 열기를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간단히 콘도에 짐을 풀고, 부산의 밤바다를 구경하러 다시금 걸어 나왔다.
광안대교의 야경은 언제봐도 아름다웠다. 물론 서울에도 넘치는 다리의 아름다움이지만, 부산의 정취와 맞물려 알게 모르게 설레게 만드는 그것이 있다. 부산역에 내려 해운대로 오는 택시 안에서 바라보던 부산의 부둣가와 달리, 영화제가 있는 해운대에 도착했다는 기분은 오히려 이 광안대교가 느끼게 해준달까?
어쨌거나 그토록 유명하다던 청사포의 ‘수민이네’로 맛기행을 떠나기로 했다. 부산의 명물인 달맞이고개를 넘어 청사포로 내려가면서 밝게 만을 내리 쬐는 달무리를 바라보자 영무 이름을 ‘Moon-tan’으로 지은 달맞이 고개가 다시금 감각있게 느껴졌다. – 공교롭게도 한글날이었기에, 그런 ‘달맞이’라는 표현을 외국에 알릴 수 있는 묘한 단어라고 생각되었다 –
‘수민이네’는 조개구이로 입맛을 다신 후 ‘장어구이’로 그 백미를 느끼고, 거기에 하나 더 하여 우럭을 통째로 구워 먹으면 정말 맛난 ‘구이’를 느낄 수 있다. 따로 양념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밤 조명에 불판을 다 태워가며 정신없이 먹어대도 전혀 다음 날이 부담 없는. 그렇게 맛있는 곳이다.
내가 이곳에서 먹은 후 수영만에서 공연을 진행한 연예인들이 다시금 몰려와 새벽을 불살랐다는 소문을 다음 날에서야 들었다. 조금만 더 청사포의 풍광을 즐기며 노닐었으면 꽤 많은 연예인을 볼 수 있었으련만. 아쉽다.
청사포에서 다시금 해운대로 돌아와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영화제의 밤은 포장마차 사이로 동녘이 틀때까지 계속되건만, 하루밖에 일정을 잡지 못한 직장인 영화팬의 스케쥴은 새벽을 술로 보내기에 너무 위험하기에 이 정도 선에서만 끝내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날 들려온 이야기지만 역시나 새벽녘에 PIFF 빌리지 옆의 포장마차 사이로는 수많은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얼큰하게 취해가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고 한다. 역시나 영화제의 꽃은 행사도 영화도 아닌 그런 영화인들 사이에 꼽사리로 끼어서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닐까 아쉬워해본다.


이번 영화제를 위해 주말 부산 방문을 계획하고 영화 예매를 시도하여 어렵사리 표를 확보한 영화는 전계수 감독의 ‘뭘 또그렇게까지’. 오전부터 시작해서 오후까지 전 상영관의 영화들이 매진이 되자 더 이상 영화에 대한 욕심을 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작년과 달리 프레스 뱃지가 주어지지 않고 게스트 뱃지가 주어졌지만. 그래도 게스트를 위한 표가 일정부분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도 어느 정도 하고 있던 상황이라 크게 개의치 않고 부산으로 과감히 내려왔다.
인터넷 예매 사이트 이용자의 습관마다 다르지만 내 경우에는 예매 후 예매번호만 기록하고 더 이상 예매 사이트를 방문하지 않는다.출력하면 종이 낭비이고, 예매 번호는 각 예매자에게만 부여되는 고유 번호이므로 중복되지 않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PIFF운영측은 예매 사이트와 PIFF 공식 사이트의 도메인도 분리해 접속 경로를 다르게 구성해뒀다. 예매 외에 예매 사이트를 들어갈일은 없다. 이미 스케쥴도 다 작성한 상황에서 느리게 돌아가는 PIFF 공식 사이트를 다시 접속할 이유도, 명분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발목이 잡혔다.
예매한 영화표를 찾기 위해 발권장을 찾자 들려오는 말 –
“배급사가 일방적으로 영화 상영을 취소했습니다”
– 그래서 어쩌라구요?

영화 상영이 어제 새벽에 취소 되었다 한다. 아마 8일 새벽으로 사료된다. 7일 이후에 예매를 취소할 경우 ‘수수료’가 부여된다. 그러나 영화의 상영이 취소되면?
1. 영화 상영이 취소될 경우 예매 고객에게 일일이 공지를 해야 하지 않는가? 달랑 홈페이지에 공지 팝업 창 하나 띄우면 그만인가? 그마저도 상영시간표에서는 삭제하지 않고 팝업만 올려두면 혼란을 일으키는 관객은 어찌할 것인가?
2. 일일이 공지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상영취소에 대한 환불이라도 즉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영화제 시작 직전에 일어난상황이라 하더라도 상영 취소 영화의 경우 무려 이틀이라는 여유시간이 있었다. 단 하나의 영화를 보기 위해 부산을 내려온 관객이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는가? 이 사람들의 스케쥴을 어떻게 보상하려고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저질러버리는가?
3. 환불 자체도 인터넷 상에서 불가능하고 – 프로세스를 아예 개발하지 않은 듯 하다 – 직접 찾아온 관객에게 환불을 해주려고,함흥차사처럼 연락없는 담당자를 직접 찾아가 현금 뭉치를 들고와서 환불을 준비하는 자원봉사자 분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들었다.영화에 대한 열정만으로 자원봉사를 선택한 이 분들이 왜 이런 막장 운영으로 고생을 해야하는지…
4. 영화 상영이 취소되었으면 예매 발권 창구에 홍보 시트 한 장 붙여두면 무슨 문제가 되나? 발권을 위해 장장 40분을 줄 서서 기다리고 창구에서서 들리는 한 마디가 ‘상영이 취소되었는데요…’면 정말 맥이 빠진다.
5. 이 모든 프로세스를 2시간 동안 멍하니 기다리고 자원봉사자 분에게 합리적인 대화를 건네고 ‘기다리고’ 받아낸 결과다. 그리고 달랑 날아오는 ‘카드결제취소’문자 뿐.
고작 1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그것도 그 단 하나의 영화를 보기 위해 내려온 내 부산 여행이 한 방에 목적을 상실한 영화제 야외 죽돌이로 전락시켜버렸다. 영화보러 내려왔는데 영화관엔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일 4회, 1편당 1장의 영화를 예매할 수 있는 게스트 뱃지도 무용지물이었다. 도무지 매진이 되지 않은 영화가 없었다.게스트를 위해 영화를 보기 좀 불편한 좌석들(맨 앞 줄이라던가)을 남겨두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참으로 잔혹했다. 나 뿐만이아니다. 나와 함께 줄 서 있던 대부분의 게스트가 예매를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예매한 영화의 시작 시간 1시간 반 전까지도 아무런 환불 준비 조차 되어 있지 않은 영화제 운영을 보면서 참으로 ‘빛 좋은 개살구’라는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미투데이’를 비롯해서 온갖 홍보로 떡칠을 해두었음에도 예매, 발권, 게스트 서비스 등이 작년보다 훨씬 뒤쳐졌다. 그나마작년에는 자원봉사자에게 어느 정도 융통성 발휘도 가능하게 끔 운영된 모양인데 올해는 더욱 더 제한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일이터질때마다 담당자에게 물어야하는 바쁜 휴대폰을 보면서 든 의아함은 저 자원봉사자들의 ‘휴대전화 요금’은 누가 내줄까였다.
실질적 운영자들은 콧배기도 볼 수 없이 자원봉사자들만을 대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 아무런 잘못 없는 그들에게 웃는 얼굴로 대하던 그 두 시간은 참으로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영진공 함장

“S러버”, 섹스로 가질 수 있는 것 …


당당히 밝히기 뭐한 나이가 되니까 신기하게도 인간관계가 자동으로 정리가 된다. 원래 친구가 많지 않기도 했지만, 가끔은 외롭도록
혼자인 시간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동행하지 않는 관계를 힘들어하는 성격상 이건 잘된 일이다.

참, 멋스런 영화 <S러버> 를 보고 왜 이렇게 글 문을 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사랑도 우정도 돈 앞에 무너지는 영화 속 관계도에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이들이 종횡무진 등장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S러버 줄거리바로 가기 


제아무리 섹시 절정의 애쉬튼 커쳐라 해도 난 그가 (제작자로써) 창조해난 인물 ‘헤더’ (마가리타 레비에바) 와, 그녀의
마지막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원한 사랑이나 조건 없는 사랑 같은 구닥다리 이야길 하자는 건 아니다. 그저, 섹스와
사랑이 크게 혼동되는 요즘 시대에 섹스로 돈과 관계(relationship)를 동시에 얻는 삶의, 사랑의 방식은 고민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분명한 건. 여러 고민거리를 안겨준 영화 <S러버>는
고 얄팍한 사랑방식을 통찰력 있게 반영한 매력적인 핫트렌드 할리우드영화라는 점이다. 영화는 꽤나 흥미로운데 그 중 ‘니키’와
연상녀 ‘사만다’의 관계는 특히 그렇다. 둘의 다양한 체위의 숨 가쁜 섹스신엔 두 눈을 깜빡이기조차 아깝다.

물론 영화 속 ‘니키’와 현실 속 애쉬튼 커처가 겹쳐 보인 까닭도 있다. (애쉬튼 커처와 16살 연상의 부인 데미무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나와 같은 관음증 적 상상을 펼치는 관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잼잼 거리는 커쳐의 재치와 용기에
감탄하고 말았다.

또 하나, 마치 <영화는 영화다>의 소지섭 간지처럼, 쉼 없이 뿜어져 나오는 애쉬튼 커처 의 매력은, 특히 완벽하게 어울리는 멜빵 패션은 극장 문을 나와서도 보고 싶고 자꾸만 기억이 난다.

영화 속 ‘니키’가 참 사랑을 진심으로 맛보았을지, 지독한 현실을 아프게 읽어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니키’도
애쉬튼 커처도 그리고 나도, 동시대 청춘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나름의 고민으로 사랑과 미래를 충실히 준비하고 있을 뿐…

영진공 애플

[조두순 사건] 문제는 형량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최근 한 아동성폭행 사건으로 온갖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의미있는 결과로 이어지려면 깊이 생각해볼 것들이 몇가지 있다. 지금부터 그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보자.


1. 형량은 인권하고는 관계가 없다.

이거 하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형량은 인권하고 상관이 없다.

이번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이 혼동하는 게 형량의 크고 작음, 특히 작은 형량이 “범죄자의 인권을 존중한 탓”이라고 착각하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인권은 그런 거 아니다.

예를 들어, 범죄 수사과정에서 용의자의 권리가 얼마나 존중되었는지, 혹은 사형제를 폐지할지의 여부 같은 것은 인권하고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일단 유죄로 확정된 이후에 내려지는 형량은 죄질에 대한 법적 판단의 결과일 뿐, 인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내가 봐도 그 형량은 좀 문제있다. 12년 징역. 수감 중 감형이 전혀 없다 해도 나이 69세에 사회로 나온다. 그러나 그 인간, 이번에 저지른 짓을 보면 69세가 되어도 안전하다 볼 수 없는 상태일 거다. 전자발찌? 그건 일이 벌어진 다음에 수사할 때나 편하지 범죄 자체를 막는 수단은 아니다.

그럼 왜 그 따위 형량이 나왔나? 다른 범죄에 비교해서, 그리고 현재 수형시설의 여력으로 봐서… 여러 가지 법적, 행정적인 이유로 그 형량이 내려진 거다. 아동성범죄의 형량을 늘리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범죄들의 형량도 늘려야 한다. 이것들을 위해서는 수형시설의 규모를 늘려야 하고, 세금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 물론 교정직 공무원들도 더 많이 뽑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정부는 그런데 쓸 돈이 없다. 예전에도 별로 없었다. 지금은 더 없고.

나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형법의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번 같이 주목을 받는 사건 범인의 형량을 크게 때리는 것보다, 죄형법정주의의 취지에 따라 같은 죄에는 같은 형벌이 매겨지는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게 사실 인권 문제다.

누구는 수십억 배임에, 수천억 조세포탈을 해도 그냥 추징금만 물면 되는데, 누구는 수백만원 배임으로 일자리 잃고 징역까지 산다. 누구는 위장전입하고 “죄송합니다” 라고만 하면 총리도 되는데, 누구는 그 위장전입으로 검찰에 기소된다. 2007년에만 위장전입 혐의로 1504명이 입건돼 733명이 기소됐다. 이게 진짜 조까튼거 아닌가?

생각해보라. 이 위장전입자와 배임, 탈세범들에게 그렇게 가벼운(혹은 아예 없는) 형벌만 내려진 이유가 ‘인권 존중’ 때문일까? 아니지. 그들의 인권이 아니라 그들의 재력과 권력 때문이다. 반면에 인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본권이다. 누구든 상관없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인권정신에 더 가깝단 말이다.

2. 인권을 존중한 덕분에 가능했던 것

오히려 이번 사건의 범인을 확정한 증거 중에 피해자의 증언을 고려한 것은 인권 신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어린아이의 증언은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많이 그렇다) 물론 아이들의 증언은 암시나 유도질문에 의해서 왜곡되기 쉽다. (그런데 어른들의 증언도 사실 많이 그렇다) 하지만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아이들의 증언도 믿을 수 있으며, 아이의 증언 밖에는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사건은 그렇지 않다. 여러가지 다른 물증들도 있었기에 신속하게 기소할 수 있었다)

인권은 사법처리를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보다 정확한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까 말했던, 수사과정에서 용의자의 인권이 지켜지면 보다 정확한 사법처리에도 도움이 된다. 용의자를 제대로 대우하면서 수사를 해야 진실이 제대로 밝혀질 것이고, 그래야 진범을 잡고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 아닌가.

어제 (이름도 언급하기 싫은) 한 신문을 보니 기자가 칼럼이랍시고 인권단체들이 이 사건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다고 드립 치던데…
그런 애들보고 오바마가 한 마디 했단다 … Jackass …


인권단체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특별히 할 말 없어서 안하는 거다.
앞서 말했듯이 형량을 낮춘다고 범죄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고, 형량을 높인다고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피해자와 가족의 인적사항이 노출되는 것 같은 것이 진정한 인권침해가 될 수 있다. 나는 비록 그 이름이 가명일지라도 이 사건을 피해자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그 가족은 지금 무슨 느낌을 받고 있을까?

3. 정의라는 것

이번 사건을 보며 분노하고 범죄자를 욕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정의를 실현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의미와 결실도 있을게다.
문제는 범죄자를 욕하고, 죽이고 찢어버려도 이 세상이 더 정의로워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더 이상 이런 사건을 봐도 화를 내지 않게 된다면 세상은 이미 망쪼겠지만, 이 세상을 정의롭게 하려면 조금 더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렇게 열받아 하는 와중에 정운찬씨는 총리가 되었다.

요즘 연예인을 동네 북으로 삼는 분위기가 더 커진 듯 하던데,
이게 과연 정의감의 발로인지, 아니면 단순히 전위(남대문에서 뺨맞고 종로에서 분풀이하는)의 결과인지는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모순이 많은 동네일수록 도덕을 더 내세운다.
하지만 언제나 그 ‘도덕’의 대상은 권력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다.
만만한 애들을 밟으라고 던져주고, 대중은 그 만만한 애들을 밟아주고는 뿌듯해하며 돌아간다. 그들이 내세우는 도덕은 대중의 관심을 진짜 중요한 곳으로부터 돌리고
스스로 정의를 실현했다고 자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떡밥이란 거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정치가들이 여론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여론이 정치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니까.
하지만 여론이 누군가의 떡밥을 물고 흔들리면,
정치가가 여론을 좌지우지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과연 이 아동성폭행 사건이 한 연예인을 성매매 대상으로 삼아 자살로 내몬 사건보다 더 추악할까?
하나는 뇌부터 잘못된 또라이의 참혹한 범죄이지만, 다른 하나는 겉보기엔 멀쩡한 작자들이 권력을 이용해서 체계적으로 약자들을 착취한 추잡한 범죄다. 분노로 정의를 판가름한다면 적어도 두 범죄에 대한 분노는 같아야 하지 않을까?

이번 아동성폭행 사건에 인권단체까지 끌어들여 욕하는 설레발을 떨던 앞서의 그 신문은 연예인을 죽음으로 내몬 사건에 대해서는 (즉, 자기들에 관련된 것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뭘까?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정의는?

어느 아동성범죄자의 컴퓨터에서 나온 이미지를 인터폴이 해독하여 추적하였다.
이 사내의 정체는 당시 32세의 캐나다인이자 전직 교사인 크리스토퍼 폴 닐.
그는 태국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13세의 남자아이를 강간한 죄값으로 3년 3개월의 형을 받았다.

4. 악성댓글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라디오에서 “당신이 남긴 악성댓글 …” 운운하며
“대한민국을 갉아먹는 흉기” 드립 광고가 나오더라.

악성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자기나 남의 인생을, 심지어 자그마치 대한민국을 갉아먹기 위해서?
아니지. 그들 나름으로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은 자기들이 욕할만 하니까 욕을 한다고 생각하는거다.
욕먹어도 싼 것들에게 욕하고, 자살해야 하는 것들에게 자살청원을 하고, 사형해야 할 것에게 사형 댓글을 주고 찢어죽이고, 어쩌고 저쩌고… 다 그럴만 하니까 하는 거 아니던가.

이번 아동성폭행 사건 범인에 대해서도 온갖 악플들이 난무했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도 분명 악플 하나쯤 날린 이도 있을 거다. 그런데 당신은 그 글을 쓸 때 그게 악플이라고 생각했나? 아닐걸, 정의의 응징이라고 생각했겠지.
이게 악플 날릴 때의 기본 자세다.
그러니 그 악플을 쓰는 동안은 대부분 떳떳하다.
악플러들은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심 때문에 악플을 날리는 거다.

그런데 이런 ‘욕먹을 만하니까 욕을 준다’는 사고방식은 무엇하고 비슷하냐하면…
“그들은 보상금 좀 더 받겠다고 철거에 저항하고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으니까 불 타 죽었어도 어쩔 수 없다(혹은 그래도 싸다)” 라는 식의 사고와 똑 닮았다.
더 나가면 “그들은 유태인이니까 죽어도 싸다.” “그들은 대지진의 혼란속에서 약탈을 한 조센징이니까 죽여도 된다” 는 식의 사고로 이어진다. 인권개념이 사라지고 오로지 도덕과 정의만 남았을 때, 세상은 그렇게 무시무시해진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 난무하는 악성댓글이 과연 용산참사를 다루는 신문기사보다 더 악한지 의문이다. 진짜 악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것은 용산참사에 대한 경찰관계자와 여당정치인들의 강아지소리들, 그걸 더 키워서 보도하면서 정작 중요한 사실들은 쏙 빼는 신문들이 아닐까? 나는 최근에야 그 사건이 삼성하고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여당 의원 누구가 총리 청문회에서 말씀해주시더군. 삼성이 보상금을 왜 준대? 그나마 합의한 것도 아니더만 …

악플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도 많다.
악플을 줄이고 싶다면 인권에 대한 의식부터 키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대할 수 있는 어떤 대우가 있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의심받고 있든, 일단은 모두 사람이니까.
우리가 다른 인간을을 그렇게 대우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진정 사람이 되는 거다.
인권은 남을 존중하는 것이고 동시에 나를 존중하는 것이니까.

영화 <래리플린트>의 원제, ‘국민 대 래리플린트’ 사건에서 저질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플린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쓰레기 맞다. 그런데 나 같은 쓰레기마저도 존중받을 수 있다면,
그건 이 나라의 모두가 존중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거다.”


이런 꼬라지가 그리도 싫다고?
그냥 어떤 짓을 했느냐, 아니 어떤 사상을 가지느냐, 혹은 어떤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그 대우가 생과 사를 가를 만큼 달라져야 된다고 믿는다고?
그래서 사형제 폐지하라는 인권위가 그렇게 밉다고?

그러면 최소한 악플가지고 뭐라 하지 말자.
그런 무시무시한 믿음에 의해 발휘된 행동들 중에서
악플은 그나마 가장 덜 추악하고 가장 덜 위험한 행동이다.

“대한민국을 갉아먹는 흉기“
악플에 붙여주기엔 너무 거창한 이름이다.
근데 악플에 이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뭘까?

5. 민주주의

민주주의. 말로는 쉽기 때문인지 개나 소나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히틀러의 나치독일도 자칭 민주주의국가 였다. 물론 북한도 자칭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왜 민주주의냐고? 걔네들도 투표 하거든.
북한에서도 투표를 한다. 근데 그 결과가 보통 99.9% 찬성이다.
만약 “다수결의 원칙”만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면, 북한도 민주주의 맞다.
하지만 대다수는 북한이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할 거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가 빠졌기 때문이지.

북한은 싫어도 싫다고 말할 수 없는 나라,
반대의사를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밝힐 수 없는 나라다.
그러니까 투표를 하면 99.9%가 나오는 것 아니겠나.
국론통일? 좋다. 근데 자유로운 언론을 지워버린 상태에서의 국론통일은 바로 전체주의다.
다시 말해서,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빠진 채로 다수결의 원칙만 따르면 그대로 북한 같은 전체주의 국가 되는 거다.

분명히 북한에는 악플이 없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악플없는 북한보다는 악플 넘치는 이 나라가 더 좋다.
여기에 안 그런 사람 있나? 왜냐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늘 시끄럽기 마련이거든.

그럼 이제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지금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는 과연 얼마나 존중되고 있나?
혹시 그것을 저해하려는 법안이나 시도는 없던가?
작금의 소위 불법시위에 대한 온갖 처벌과 손해배상 소송은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고,
전체주의 국가로 이행할 가능성을 높이지 않나?

원칙적으로는 악플도 개인의 의사 표현이므로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거짓말을 유포시키는 것은 나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여서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기회만 준다면 그리 심각하게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고 최진실씨가 과연 악플때문에 죽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원래 악플에 대한 최선의 대처법은 ‘개무시’ 다. 악플러들이 원하는 거는 관심이거든 … 그걸 안주면 걔네들 딴데간다.
하지만 연예인은 악플을 개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면, 개념없는 찌라시들이 그걸 받아적어서 기사화 하니까.


최근에 소위 악플 혹은 인터넷에서 이슈화된 사건들을 돌이켜보라.
사실 그거 기성 언론이 받아쓰기하거나 뻥튀기 시킨 바람에 더 커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악플이 아니다. 인터넷 서핑을 취재로 착각하는 개념없는 찌라시들이 문제지. 기자라면 기사를 쓰기 전에 진위여부부터 파악하고 볼 일 아닌가? 그냥 인터넷 뒤져서 기사 쓰는거면 그게 기자냐, 그게 언론이냐고 …

난 악플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악플을 보면 나도 기분 나쁘다.
기왕이면 더 점잖고 고상한 표현으로 통쾌상쾌하게 표현하면 좋지 않나.
근데 어쩌랴. 걔네들은 표현법이라곤 고작 그따위 밖에 배우지 못했는 걸 …

악플은 결국 지 얼굴에 똥칠하는 건데, 정말 그걸 모르는 경우도 있고

하도 열받아서 잠시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고(나도 가끔 그런다), 혹은 나는 이미 망가졌으니 같이 망가지자는 심정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좋지 않지만, 악플은 그런 모든 좋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는 거다.

근데 악플만 쏙 빼버리자고? 그게 되겠나 …

미국이나 일본의 언론사이트나 포털에 달린 댓글들은 (우리가 보기엔) 매우 점잖다.
사실 인터넷 댓글이 제일 지저분한 동네로 우리나라는 분명 3위 안에 들거다.
그럼 외국애들은 왜 대체로 공공 공간에서 욕을하기 꺼려하는 걸까?

욕을 하는 순간 내 수준이 떨어진다는 걸 교육과 경험으로 알고 있고,

욕설 말고도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어휘를 써야 제대로 욕을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걔네들도 진짜 열받으면 욕설을 한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그러고 나서는 자기가 진 거라고 쪽팔려 한다는 것 뿐이다.

어쨌든, 인권, 표현의 자유..
이런 것들은 성범죄자 처벌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가 전체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거다.


현재 인터폴에 의해 공개수배 중인 아동성범죄 용의자. 2006년부터 수사를 하였으나 여전히 신원과 거주국가 등이 밝혀지지 않았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