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e-book) 리더기의 미래는 과연 밝기만 한 것일까?

이북(e-book).
물 건너 바다 건너 아마존에서 대박 친 이후로 왕창 떴다. 그리고 요즘 IT 제조업 분야에선 이북 리더기가
최대의 화두다. 제조업뿐만이 아니다. 인터파크 같은 대형 서점에서도 이북 리더기를 만들겠다고 두 팔 걷어부치고 나선 상태다.

하지만 이 바닥의 사람들조차 정말 궁금해 하는 건 이거다. 정말 이북 리더기에 밝은 미래가 약속된 걸까?
분명히 이북 전용 리더기에는 장점이 있다.  아마존 킨들의 서비스를 보면,
1) 수백 권의 서적을 단 하나의 단말기로 통합시킬 수
있고
,
2) 이동통신망을 이용해 미국 어디서나 즉시 이북을 구입할 수도 있다.
얼핏 보기엔 상당히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아마존은 이미 아이폰용 킨들 앱도 내놓은 상태다. 요컨대 현재 시점에서조차 꼭 킨들 하드웨어를 구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킨들 하드웨어의 판매 대수도 MP3나 휴대폰 등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아마존이 킨들을 팔아서 올리는 수익이 스티븐 킹 인세
수익보다 적다는 얘기가 있는데, 아주 허튼 소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아마존은 유통업체이니만큼 킨들 하드웨어로 수익을 올리지
못해도 일반 서적이나 온라인 서적 판매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하드웨어 업체엔 불가능한 얘기다.
이북 리더기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살아남으려면 특징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걸 꼭 사야만 할 이유가. 그래서 그 매력 포인트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게 바로 전자종이다.오늘날, 아마존 킨들을 비롯한 많은 이북 리더기는 디스플레이 패널로 e-ink의 전자 종이를 탑재하고 있다. e-ink는 크기에 비해 전력 소모가 적고, 종이와 흡사한 느낌 때문에 이북에 적합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전력 소모량이 적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장점이 없다는 거다.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단 전자종이는,
1) 컬러도 안 되고
2) 동영상도 안 돌아가고
3) 화면을 갱신하려면 2초 가까이 걸리는 데다가
4) 백라이트도
없어서 어두운 곳에선 보이지도 않는다.

당연히 전자종이를 탑재한 이북 리더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 거지 발싸개 같은 건 대체 뭐에 쓰는 거야?”
그리고, 이 거지 발싸개 같은 게 대략 30만원 정도 한다는 얘길 들려주면,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한 수준을 넘어서 냉소적인 수준으로 가버린다.
“이런 걸 돈 주고 사라고? 너 미쳤냐?”
평범한 소비자들에게는 기술적인 장점을 입이 닳도록 설명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
30만원대를 넘는 이북 리더기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흑백으로 된 책을 읽는 게 전부라는 걸 말하는 순간, 이미 장사는 볼장 다 본 셈이다.

그 돈 주고 이북 리더기를 살
바에야 1)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거나 2) 도서대여점에 가거나 3) 아니면 넷북을 한 대 사서 거기서 디지털 북을 보는 편이
낫다.
특히 요즘처럼 컴퓨터 하드웨어 가격이 떨어진 때라면 3)번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넷북 배터리도 어쨌든 2시간 정도는
버티는 데다가, 요즘은 왠만한 카페에서도 노트북 충전용 콘센트를 비치해 놓고 있으니까.

이북 리더기의 가격이 떨어지려면 원가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전자종이 부품의 가격이 떨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현재 e-ink 패널을 제조하는 업체는 e-ink 본사를 인수해 원천기술을 확보한 대만 PVI와 한국의 LG
디스플레이 둘뿐이다. 그나마 LG 조차 대만 PVI에서 핵심 모듈을 받아다가 조립하고 있을 뿐, 사실상 시장은 PVI가
독점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돌 빠따, PVI는 지금의 이북 리더기 열풍을 타고 한 몫 챙기는 데 여념이 없다. 경쟁?
기술 개발? 가격 인하? 그런 거 다 뒷전이다. 어떻게든 한푼이라도 더 긁어가려고 혈안이 됐다. 그래도 뭐가 어쨌든 기술은 발전하고 부품 단가는 떨어질 게 분명하다. 언젠가는 전자종이에서 1) 컬러도 되고 2) 동영상을 보여줄 정도로 화면 갱신 속도도 빨라지고 3) 백라이트 같은 것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 그렇게 되면 – 전력 소모도 비약적으로 늘어날 거다. 반면에 LCD는 AMOLED 등이 발전하면서 전력 소모량이 점진적으로 줄어들 것이다.그리고 그 시점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대체 왜 전자종이를 써야 하는 거지? 그 다음에 이어질 질문은 뻔하다. 이북 전용 리더기가 정말 필요한 걸까?
글쎄, 정말 모르겠다. 나도 알고 싶다.
불행히도 애서가를 자처하는 나조차도 이북 리더기 구입은 주저하는 편이다. 젠장, 기술적인 한계는 나도 이 바닥 사람이라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잖아?

하지만 한창 루머가 무성한 애플제 타블렛엔 주저하지 않고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그건 이북도 볼 수 있고, 컬러 동영상도 씽씽 돌릴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누가 뭐래도 역시 –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니까!
영진공 DJ Han

“노팅힐”, 10년 전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Anna: Rita Hayworth used to say, ‘They go to bed with Gilda, they wake up with me.’ 리타 헤이워스가 말하곤 했어요. ‘그들은 길다와 함께 침대에 가고, 나와 함께 잠에서 깬다’고.
 
William: Who wa was Gilda?
길다가 누구죠?
(* 리타 헤이워스는 90년대 초반 유명 여배우. 그녀가 맡은 여 주인공 이름이 ‘길다’ )

Anna:
Her most famous part. Men went to bed with the dream and they didn’t
like it when they woke up with the reality. Do you feel that way?
그녀의 가장 유명한 부분이요. 남자들은 꿈과 함께 침대로 갔고, 현실과 함께 잠에서 깼을 땐 싫어했어요. 당신도 그렇게 느껴요?

William: You’re lovelier this morning than you have ever been. 당신은 그 어떤 때보다 이 아침 더 사랑스러워요.

안나와 윌리엄의 첫 섹스, 그 다음 날 아침 안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윌리엄, 당신의 환상이 깨지진 않았나요. 혹시 지금 이 현실이 싫진 않나요.  

‘지금 당신이 더욱 사랑스럽다’고 고백하는 윌리엄은 리타 헤이워스의 남자들이 그랬듯 ‘월드스타’ 와 ‘안나’ 사이의
현실을 언제쯤 바로 느낄까. 어쩌면 윌리엄도 안나의 벗은 몸을 두 눈으로 확인 수 있는 게 꼭 꿈만 같아서 잠시 혼동하는 게
아닐까.

William: It dose strike me as , well, surreal, that I’m allowed to see you naked.

영국의 포토벨로 마켓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고 로맨틱하게 담긴 영화 ‘노팅힐(1999)’.
하지만  다시 읽은 영화 는 백
년해로 할 것 같았던 둘의 해피엔드가 어색하게 느껴져 마음에 잘 닿지 않았다.  스타와 일반인의 사랑이라는 영화적 상상력때문은
아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사랑이란게 깨지거나 혹은 다시 만들어져야하는 반복의 연속이란 걸 알아 버려서일 가능성이 크다.

안나와 윌리엄처럼 한눈에 반한 사랑은 단숨에 식을 수 있다는 걸. 헤어진 그들은 또 각자 다른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날
거라는 걸. 어쩌면 오랜 연인이 됐대도 자꾸만 닳아 없어지는 감정의 불씨를 잡아 두려고 애쓰며 살아갈 거라는 걸 이젠 조금 알
것 같아서 말이다.

영원히 평범치 못할 안나와 지극히 일상에 묻혀 사는 영국의 ‘허당’ 윌리엄의 저 찰나는 그저 인생의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감정의 절정쯤이 아닐까 싶다. 하긴 어떤 최고조의 순간을 경험했다는 자체만으로 인생은 아름답기 충분하다.

나에게도 찬란한 찰나의
순간이 올까. 혹시 지금은 아닐까. 

영진공 애플

헌법 재판소의 도돌이표

1.
어느 지인의 블로그에 최근 올려진 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다.
“논리적인척하는 글을 논리로 맞서주면 논리적인척을 논리로 대꾸해주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그렇다.  논리의 외피를 씌운 억지나 일방적 주장에는 따박따박 논리로 대꾸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말이나 글에 논리로 맞서다가는 정작 논의되어야 할 내용은 사라지고, 누구의 논리가 더 그럴듯하다느니 그래서 누구 말이 더 신뢰가 간다느니 나아가 둘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등의 하등 쓸모없는 말싸움만 켜켜이 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언론법 권한쟁의 청구 사건에 대한 판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언론법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접어놓고 보아도 도무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내용을 이 나라 최고의 사법기관인 헌재가 무려 104쪽이나 되는 길다란 결정문에 적어 발표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럴 땐 논리적으로 반박하는게 무의미할테고, 그저 비아냥거릴밖에 없을 터이다.
이렇게 말이다.


음주운전은 했지만 사고는 안냈으니까 대단한 카레이서.

사기는 쳤지만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다 니꺼.
병역비리를 저질렀지만 면제가 된 만큼 군대는 니들이나 가라.
영어연수를 가려던 여대생을 미국매춘업소로 팔아넘겼지만 어쨌든 이건 워킹홀리데이.
취업시켜주겠다며 정신지체장애자를 평생 노예처럼 부려먹었지만 어쨌든 취업률 100%.
폭력교사지만 어쨌든 애들 대학은 보냈으니 그 선생님은 킹왕짱.
왕따와 폭력으로 니가 운동을 시작했으니 학교일진은 대단한 트레이너.
노동자를 개처럼 부려먹어도 경제성장만 하면 선진국.
강이 썩어 문들어져도 건설경기와 부동산 호황이면 할렐루야.
노동 탄압의 대마왕 삼성이지만 기부 많이 하니 니들은 자선봉사단체.
독재정권이라도 나만 잘살게 해준다면 에브리씽 오케이.
방법이 개 뭐시기같아도 결과만 좋으면 쥐새끼도 인간.
.
.
.
.
.
아마 우리는 역사에 길이남을 개막장의 시대에 서 있는 것 같다. 
p.s 
사실 이런 소재의 기원은 이거였다.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

출처: 명랑문화공작소 블로그

2.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헌재가 어떤 곳인가, 그들이 누군가.
최상위 사법기관이고 최고, 최양질의 논리를 생산 및 규정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래서 이들의 법리와 논리는 적어도 이 나라 안에서는 기준이자 레퍼런스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결정이 아무리 비논리라고 해도 마냥 비아냥 거리기만 할 수는 없어보인다.

하여 다시 살펴보았다.
이번 헌재의 결정이 나오게 된 논리의 흐름은 이렇다.

1) 법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효다.
2) 법을 어겼다.           그러나 결과를 부정할 만큼은 아니다.
3) 법을 어겼다.           그러나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라.
4) 법을 어겼다.           그러므로 무효다.

이 네 가지 견해를 종합하니,
[법을 어겼다 –> 그래도 유효다]
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단서를 붙이기까지 했다.
요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봐주지 않겠다는.

여기에서 헌재관계자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정치적 물 타기를 하려고 했다면 속된 말로 이렇게 지저분한 결정을 했겠나. 헌재가 권한침해는 확인해놓고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했으니 결과적으로 양쪽에게 어중간한 판결을 내린 게 아니냐는 것은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다. 만일 헌재가 정치적으로 판결할 요량이었다면 아예 문턱에서 차버렸을 것이고, 재판관들이 방송사 테이프까지 증거조사한 마당에 정치적 판결 비판은 어렵지 않나 싶다.”


이런 “지저분한 결정”이 나오게 된 것이 애써 “정치적”이지 않으려다보니까 그렇다는 말인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

보자. 위 네 가지 견해 중에 “지저분”한 고려가 없는 것은 몇 번인가.
1)번과 4)번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이지 않게 “문턱에서 차버”리든가, 무효로 판결하든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2)번과 3)번의 견해에서 보듯 법리 이외에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한 “지저분”한 결정이 내려져서 오히려 판결이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닌가.

헌재관계자의 말을 또 인용해보자.

헌법재판소의 한 관계자는 “국회 자율권이 필요한 영역까지 헌법재판소가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 무효확인을 선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통과과정의 적절성에서 권한침해를 했다고 확인했다면 그 다음은 국회의장이 헌재 결정 취지에 따라 여러 정치의견을 형성하라는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여야는 헌법재판소가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타협해 다시 발의하는 등 정치적 노력을 하라는 뜻이라는 게다. 실제 헌법재판관별로 온도차는 있지만 피청구인측에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는 것은 당연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는 뜻도 된다고 덧붙였다.

만일 이 같은 일이 국회에서 되풀이 된다면 헌법재판소는 향후 헌법소원에서 준엄히 꾸짖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헌재가 “정치적”이지 않은 판결을 내린 거라면 어째서 단서조항이 붙었는지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단서조항의 의미는 결국 ‘이번에는 봐줄테니까 니들끼리 쫌 잘해봐라. 그런데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국물도 엄따!’라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법리와 논리를 넘어서는 일종의 고려가 개입된 것이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건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른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헌재가 아무리 애써 자율을 권고하는 이행 명령의 성격이라고 강변한다 해도 말이다.

3.
애써 헌재의 입장을 이해하자고 들면, 일단 삼권분립의 같은 축인 국회의 일을 헌재가 처분하려니 어색하기도 했을 터이다.  그리고 같아보이는 사안이라도 정황에 따라 정상을 참작하는 경우가 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벌어진 낯 뜨거운 일에 대해 굳이 법으로 일도양단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었음직도 하다.

말하자면, 음주운전자의 난폭운전에 의해 차량이 파손된 운전자가 가해자를 처벌해 주십사 하자 판사라는 분이 ‘범퍼가 살짝 긁혔을뿐이고 …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 가해자가 이후 추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고 … 피해자가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니 … 자꾸 법원에 찾아오지말고 서로 좋게 합의봐서 끝냅시다’라고 권고한 격이라고나 할까.

이 대목에서 실제 있었던 판결이 하나 떠오른다. 근친 성폭행 피해자에게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해당 가해자를 풀어준 그 판결 말이다.

헌재는 이번 판결을 통해 국회와 그 대표자인 국회의장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 것이라고, 그러니 국회와 국회의장은 위법한 행위를 거쳐 통과된 법률에 대해 마땅히 자율적으로 추가조치를 취해야만 할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국회가 이번 건에 대해 자율적으로 어떤 합당한 조치를 할 수 있다거나 또는 깊은 성찰을 통해 상호 양보를 통한 타협을 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권한쟁의를 신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판결 이후에 보듯이 권한을 침해한 측에서는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과정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측도 공식적인 사과 하나 없으며, 권한을 침해당한 측은 위법으로 인해 빼앗긴 우리의 권한은 어떻게 된 거냐며 억울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헌재는 이번 건에 대해 진정 “정치적”이지 않고 법리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기각/각하 아니면 무효 판결을 내렸어야 옳았다.  이런 고려 저런 사정을 따지다보니 말마따나 “어중간”하고 “지저분한” 판결이 내려졌고, 그로 인해 상황이 일단락되고 자율적인 개선이 진행되기는 커녕 오히려 심판 청구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지는듯 하다.

헌재가 국회에 대해 ‘그대들의 일을 자꾸 우리에게 떠넘기려 하지 말아라’라고 도돌이표를 달고 싶었다면 차라리 그리 했어야 했고, 그도 여의찮았으면 논란의 여지가 없이 수미일관한 판결을 주었어야 했다.

지금 헌재나 권한침해자 측에서는 ‘… 했지만 … 은 아니다’라는 댓글놀이를 하는 이들을 보며 법도 논리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떠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오히려 정말 몰법리 몰논리한 쪽이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나저나 이 놈의 도돌이표는 도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가려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영진공 이규훈

<브라이트 스타>와 존 키츠에 대한 잡담


부산에 초청된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실화를 토대로 한다. 25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그는 생전에 딱히 그 위대한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지는 못했다. 어릴 적 천애고아가 되고 생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어찌어찌 의대를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3년만에 땄다는데, 그가 의학엔 별 관심이 없고 시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 특히 시인이거나 시인 지망생 친구들은 그가 3 년만에 의사자격증을 딴 것에 대단한 질투와 허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키츠는 패니 브론과의 절절한 연애로도 유명한데, 패니가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으로 쳤을 때 미스터 다아시 같은 남자 하나 낚으려고 사교계에서 좀 나대는, 엘리자베스 베넷 정도 가문의 여자였던 모양이다. 리즈 베넷이야 지성미와 유머가 풍부한 여인이었지만 패니는 또 그런 타입은 아니었던 듯, 영화 <브라이트 스타>에서도 키츠를 후원하는 그의 작가 친구 찰스 브라운은 패니를 너무나 못마땅해 해서, 그녀를 “남자나 꼬시려고 사교계에서 꼬리 흔들고 다니는 무식하고 허영심만 센 여자” 취급을 한다.

하지만 패니를 그리는 제인 캠피온의 시선은 그닥 삐뚜름하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 키츠를 처음 사교파티에서 만난 뒤 패니가 키츠의 시를 그 앞에서 읊으면서 작업 한번 들어간 뒤, 그녀는 “시를 공부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며 다시 키츠를 찾아간다. 물론 이 역시 삐뚜름하게 보자면 ‘작업의 2차 작전’으로 보일 수 있고 제인 캠피온 역시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찰스에게 패니의 얄팍함이 폭로당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패니의 이런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패니의 진정성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시켜 버린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되는 것도 그녀가 찰스에게 봉변을 당하며 그 얄팍한 허영심이 폭로당한 것보다는, 키츠에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갔을 때 그 반짝이던 눈빛, 그 눈 안에 담겼던 동경과 열망이다.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에겐 그 장면이 더욱 크게 남는다. 나 역시 영화가 끝난 뒤 “키츠의 시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었으니까. 하여간 <브라이트 스타>에 대한 리뷰는 이미 여기에 쓴 바 있고.

Bright Star

존 키츠, 혹은 존 키츠로 분장한 벤 위쇼의 고혹적인 눈. (<브라이트 스타>)

며칠 전 모 극장을 갔다가 바로 옆 서점에서 민음사에서 출간한 김우창 번역의 키츠의 시선집 [가을에 부쳐] 를 샀다. 이후 웹 검색을 해보니 그 외에 키츠에 대한 다른 책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오래 전에 대학출판부 같은 데에서 나왔다가 절판, 절판, 품절.) 이 기회에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 대해 눈동냥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낭만주의 문학’같은 키워드로 돌려봤지만 역시 헛수고다.

사실 또 다른 방식의 치열한 시대정신이었던 낭만주의가 국내에서는 현실도피용으로 포장되고, 그에 따라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를 신봉한 이들에겐 또 다시 부당하게 폄하되는, 그런 식의 분위기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결국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형식의 외피와 감정적 나르시시즘에만 집착하고 과장한 것 정도로 오해된 분위기가 있달까. 아니 근데 센티멘털리즘과 로맨티시즘이 동의어는 아니잖아, 그게 문학이든, 회화든. 영화쪽으로만 보자면,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조금씩 낭만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근 허진호가 내놓은 <호우시절>이야말로, 제대로 된 낭만주의의 본격적인 부활의 바람의 서두에 놓아야 할 것같다. “허진호가 변했다”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외서 쪽을 돌려보니,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문고판으로 그의 주요 시와 편지 일부를 편집해놓은 책이 보인다. 랜덤하우스에서는 그의 시 전체를 모아놓은 책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오디오북으로는, 새뮤얼 웨스트와 마이클 쉰이 낭송한 CD도 보이고. 마이클 쉰이, 그러니까 <더 퀸>의 토니 블레어와 <프로스트 vs. 닉슨>의 프로스트로 나왔던 배우인 그 마이클 쉰이 맞나 싶어 찾아보니 … 허허, 맞네!

새뮤얼 웨스트는 좀 낯선 이름이라 찾아봤더니 <반 헬싱>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출연했다는데 필모그래피가 어째 다 단역 및 조연. 그 … 근데, 잘 생겼다? 허걱, <하워즈 엔드>에 조연으로 출연해 BAFTA상 남우조연 부문 후보로 올랐었어? 뭐, 옥스포드 출신? 런던드라마평론가협회 세익스피어상 수상… 엄훠 나 이거 사야 하는 거 맞는 거? 뭣보다 잘생긴 것에 침 주르릅… 아니, 잘생기기도 잘생겼지만 딱 목소리 멋있게 생겼단 말이야! 예컨대 케네스 브래너의 목소리로 세익스피어 낭독을 듣는다고 쳐봐, 그게 그냥 목소리인가? 주르르 몸이 녹아내려 황홀경에 빠뜨릴 천상의 음악이지!

<브라이트 스타>의 말미에도, 그러니까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에서 키츠로 출연한 벤 위쇼가 나지막하게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낭송한다. 정확히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나오기 시작해, 마지막 카피라이트 표시와 제작사 로고가 끝날 때 낭송도 끝이 난다. 벤 위쇼의 나직하면서도 팬시하고 발음 좋은 목소리와 키츠의 시가 어우러져, 비록 눈은 자막을 뒤쫓느라 정신없었긴 해도, 도저히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게 나만 그런 건 아닌 게, 대체로 아무리 영화제라고 해도 엔딩타이틀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대면서 일어날 듯 말 듯하며 짐을 챙기지만 이 영화의 자막 땐 아무도 그러지 않더라. 만약 영화가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개봉한다면, 그 시의 낭송을 꼭 즐기시기 바란다.

John Keats

[부록] John Keats,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영진공 노바리

ps1. 온라인에서 이런 페이지도 발견. 참고하시라.

ps2. 듣자하니 벤 위쇼는 영화 찍기 전엔 키츠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잘 몰랐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의 벤 위쇼 칭찬은 정말 … 으하하하! 처음 만나자마자 느낀 것이 “세상에, 당신 정말 아름다운 피조물이잖아!”였다니, 난 캠피온 언니의 취향이 듬직한 돌쇠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출처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

어느 오후의 감상

회사에 청소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가 계신다.
가끔 아주머니가 일하시는 뒷모습을 볼 때면 눈시울이 붉어지곤한다.

죽을 때까지 죽지 못해 따라오는 노동의 굴레. 더군다나 생산수단에서 철저히 소외된 도시인의 노동 굴레.

현재 나는 내 수입의 25%를 부모님께 드리고, 15%는 내 서울에서의 필수 생활비(식사와 교통 정도), 10% 정도는 문화생활비(지인을 만나는 일부터 시작해서 모든 소셜 생활비)로 쓰며 25%정도가 집세와 보험료, 인터넷 공과금 등으로 나간다.

25% 정도가 저축 가능한 금액이나 이 또한 빚 이자에 몇 달마다 한 번씩 터지는 예상치 못한 지출에 써버리면 돈을 모으기가 여간 쉽지 않다.

언론에서 4년제 대졸 – 그것도 in 서울 – 정규직이 받는 ‘평균 연봉’에 대해서 씨부릴 때마다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내 어머니에게 한 달에 몇 만원을 더 보낸다고 내 부모님의 삶이 나아질까?

회사에서 청소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의 뒷 모습에서 내 어머니를 느낀다.

과연 내 어머니는 내가 보내드리는 그 얼토당토 안 되는. 내 서울 거주 및 생활비의 절반을 가지고 부모님 두 분이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문화생활을 포기하고 10%를 더 드릴까? 그만큼 이 복잡하고 괴물 같은 도시에서 뒤쳐지면 결국 더 수입이 줄어들어 나 뿐만 아니라 다시 부모님까지 옥죄지는 않을까?

돈이 행복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지만.

나는 이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시기를 지나 매월 조금씩 모을 수 있는 시기에 들어왔지만,

아직도 우리 부모님의 생활 걱정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런 비극은 내 세대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회사 아주머니의 뒷모습에 내 어머니를 투영하는 것이고, 내 노년을 투영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슬픈 것이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살지도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세상에 당하지도 말아야겠다.

영진공 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