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문』(Heaven’s Gate)

과거사진상규명위
2005년 10월 15일

필름포럼에서 열린 <70년대 미국영화 특선> 중 한 편으로 보았습니다. 『스트로 독』을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는데, 벌써 끝나버렸군요.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제작사를 파산위기로 몰아간) ‘재난’영화이자, 소위 ‘저주받은 걸작’의 대표적인 예처럼 말하여지는 영화죠. 글쎄요… 그렇게 홀랑 망해버릴 만큼 엉망인 영화는 아니지만, 꼬라지를 보라죠, 안 망하게 생겼나. 게다가 이런 영화에 무관심했던 당시 대중들의 천박한 취향을 한탄할만큼 어마어마한 걸작도 아닌 거 같구요.

영화는 배경은 1890년대 와이오밍주. 적법한 절차에 따라 토지를 구매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몰려던 이민자들과 거대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거대 농장의 농장주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농장주는 자신의 가축을 훔쳤다는 등의 사소한 죄질의 이민자 150여명을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으로부터 얻어내고 50여명의 용병을 고용해 이주민 마을을 습격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네요. Ella Watson(“이자벨 위뻬르” 분)와 Nathan D. Champion(“크리스토퍼 워큰” 분)도 실존인물이라고 하구요.

“마이클 치미노”가 무엇을 노리고 이 영화를 만들었나 하는 점은 비교적 명확해 보입니다. 웨스턴이란 장르를 탈신화하면서 사유재산의 보호라는 미국식 정의의 야만성과 부도덕성 같은 것도 비판하려는 거겠지요. 이런 식의 접근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퍽 흥미롭게 읽힙니다. 자기 소를 훔쳐갔다고 사람에게 총을 쏘아대는 농장주 계급, 더 나가, 자본논리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오늘날도 변함없거니와, 이 영화에서 그러한 것처럼, 그런 비인간적인 논리가 정의라느니 법이라느니 하는 이름으로 강제되고 있잖아요. 심지어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도 말이죠.

웨스턴 장르와 미국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들려주고 있지만, 역시 문제는 이 빌어먹을 상영시간이겠지요. 219분(어제 본 건 오리지널 컷이었어요.)이라니, 다른 영화 2편의 길이는 족히 되잖아요. 제가 본 가장 긴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로 222분이었고,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도 201분이었습니다. 수십만의 병사가 칼부림하는 영화도 아니고, 고작(?) 2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총질해대는 영화인데도 3시간 40분이라니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그 3시간 40분을 뭔가로 충실히 채워놓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거든요. 가령 영화 도입부 30분 정도 계속되는 하버드대 졸업식 씬은, 고작 ‘세상은 질서를 제대로 갖추고 있으니까 급작스런 변화는 필요없다’는 반어적인 연설을 위해 할당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지요. 나름의 스펙터클함도 있지만, 마지막 전쟁씬만으로도 일반적인 영화 전체 러닝타임의 반 정도는 될 길이구요. 보고 있으면 ‘편집 좀!’이라는 말을 내뱉고 싶어 답답해질 지경이에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초지일관 자아도취에 시간낭비만 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등장하는 이주민들의 댄스 장면이라든가, 엘라와 James Averill(“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분)의 한가로운 피크닉 장면 같은 것들은 평화로운 마을, 다가오는 위험 같은 설정을 위해 필수불가결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좀 더 빠른 템포로 진행될 수도 있었겠지만, 4시간 육박 영화니까, 라는 식으로 느긋한 자세로 본다면 꽤 서정적인 장면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살육의 시간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이주민들의 절망과 절규를 잡아낸 그 긴 씨퀀스는 『천국의 문』 의 긴 상영시간 덕분에 더 정서적 파급력을 갖는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제작비가 4천만 달러 정도 들었다던데(이 영화는 198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과연 그 정도 들었겠구나, 싶은 장면들이 종종 나옵니다. 제임스가 마을에 되돌아 왔을 때 맞닥뜨리는 이주민의 행렬과 소란스런 역마을의 방대한 세트는 무척 인상적입니다.

오프닝 크레딧에서 엘라 역이 “이자벨 위뻬르”라고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나 오종의 『8 여인들』에 나온 여배우지요.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우시지만, 홀랑 벗고 깡총깡총 뛰어다니시는 27살의 위뻬르 여사는 무척 귀여우신데다가 졸라게 섹시하십니다. 지금의 삐쩍고른 체형과는 달리 상당한 글래머라 보는 내내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토퍼 워큰”의 카리스마는 80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더군요. 벽지랍시고 신문지를 발라놓고 부끄러워하는 표정은 무척 귀여웠습니다만… 주인공 중 한 명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유명한 컨트리 가수기도 하죠. 저는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Pat Garrett & Billy the Kid)나 『가르시아』(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같은 영화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최근엔 『블레이드』 시리즈에서 “웨슬리 스나입스”의 조력자 할아버지로 출연했었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연기한 제임스 역은 처음엔 “존 웨인”이 물랑에 올랐다고 하는데, 그 재수없는 마쵸가 안하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 “제프 브리지스”도 조역으로 나오구요. 그리고… “미키 루크”가 아주 작은 비중의 배역으로 출연합니다. 이 영화 찍을 당시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을 거에요. 『보디 히트』나 『럼블 피쉬』 찍기 전이었거든요. 뽀얀 피부에 촉촉한 눈망울의 24살 적 미키 루크를 보고 있자니 無常함에 가슴이 아려오는군요.

“이자벨 위뻬르”, 화는 나지만 전혀 미워할 수도 없는, 곤란하게 매력적인 캐릭터 엘라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와 챔피온 두 사람을 모두 사랑할 뿐만 아니라, 창녀로서도 열심히 일하고 계시죠. 제임스가 엘라가 챔피온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내자, I never cheated on you. I always made Nate(챔피온) pay. 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합니다. 저걸 그냥 확…

이주민 마을의 댄스 파티나 중요한 회의가 열리는 건물의 벽에 ‘Heaven’s Gate’라고 적혀있더군요. 그래서 제목이 Heaven’s Gate일까요…?

과거사진상규명위 발굴1팀장
꼭도(http://cocteau.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