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니 ?

 사실 섹스, 즉 ‘떡’ 이라는건 그 목적이 ‘어디까지나 종족번식을 위한 것’ 이라는데 있었다. 허나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를 넘어오고 문명에 의해 모든 것이 재해석되면서 섹스의 당초 목적이었던 임신과 출산을 위한 섹스는 이제 아마존에서나 찾을수 있으려나.

 현대인들은 ‘섹스’ 하면 ‘쾌락’ 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문명병인가? 그러나 이걸 병으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 언어에도 사회성이 있는데 하물며 섹스라고! 섹스 본래의 의미가 약간 바뀐건지 아니면 섹스할때 쾌락과 임신의 중요도가 바뀐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가 바뀌었건간에 섹스는 쾌락뿐 아니라 임신 및 출산의 기능도 자의든 타의든 충분히 해내고 있으니 이쯤되면 변질이 됐네 어쩌네 떠들지 않아도 될성 싶다.

 하지만 섹스의 목적을 쾌락으로 봤을때, 그 쾌락을 만끽할수 있는 권리는 남녀 모두에게 있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술마시고 정육점에 가야 집에 돌아가는 길이 허전하지 않고 야동, 야설은 세계명작소설 100선보다 더 피가되고 살이 되며 딸딸이를 하다 걸리면 민망하지만 웃긴, 두고두고 회자되는 추억이며 비지니스 클럽에서 접대를 받아야 계약서 쓸 만년필에 잉크라도 채울 맘이 생기며 터키탕이 웰빙스파의 정석이라고 역설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자기 클리토리스가 어딘지를 몰라서 오르가즘이 뭔지도 모르고, 자신이 자위를 한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절대 먼저 섹스를 요구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애인이 요구했을때는 무조건 순응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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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권이 신장됐다는 소리는 어느 남자가 퍼뜨린 유언비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뭐 유언비어 덕택인지는 몰라도 사방에서 ‘여성’ 섹스 칼럼니스트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오는데 정작 칼럼의 소비자는 여성이 아닌 남성. 아 물론, ‘우리 여자들은 이래요. 그러니까 잘 들어요.’ 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겠지만, 암만 소리쳐봐라 그걸 걔들이 듣나, 말하는 ‘여자’ 를 구경하고 있지.

 섹스에 관해 남자는 이미 차고 넘칠만큼 능동적이다. 뭣모르는 여자들은 아직도 조선시대 사대부집안 딸내미 마냥 굴고, 그게 자신의 최대 메리트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있기 때문에 여성 칼럼니스트들이 지면에다 토한 열변의 흔적은 냄비받침밖에 안되는거다. 이쯤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것 같다. 그렇다. 꼬셔야 할 대상은 능동적인 ‘남자’ 가 아니라 수동적인 ‘여자’ 다.

 전희가 존나 길었다.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자.

 앞에서 섹스의 또 다른 목적이 이른바 ‘쾌락’ 이라고 역설한바 있다. 그래서 성적욕망의 표현, 분출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에게 잔소리 좀 해볼까 한다.

‘저기… 그거 꼭 즐겨야 되는거에요?’ 라고 질문할 여자가 있을거 같다. 존나 좋은 질문이다. 그건 너 꼴리는대로 해라. 꼴리는대로 하는건 좋은데 네 자신의 기쁨도 없이 상대방에게 이른바 ‘대주기’ 라는 자원봉사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면 당장 집어치우기 바란다.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거냐. 그이가 좋다면 난 다 좋아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구나.

 쾌락의 필요성에 대해 자꾸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암만 필요에 의해 음식을 섭취하고 있다고는 하나 혀의 즐거움을 위해 간을 하는것이 당연하거늘, 맛없으면 먹냐? 안 먹지.

‘쾌락을 표현해야 한다.’ 는 주장은 이미 수많은 여성들이 역설한바 있다. 이 글을 보는 당신도 ‘쾌락은 표현하는 것’ 이라는 그 사실을 알고는 있다. 알고만 있으랴, 귀에 딱지가 앉았겠지. 그러나 막상 때가 되면 표현을 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예를 몇가지 들어주도록 하겠다.

 먼저 당신이 남자친구와 모텔에 가고 싶은 경우를 한번 들어보자. 당신은 가고 싶다. 섹스도 하고 싶거니와 한 차례의 격정이 지나간 후에는 같이 살맞대고 끌어안고 있고도 싶고, 함께 씻고 싶기도 하고. 헌데 이 남자 눈치는 어디 갔는지 내가 몸이 달아있다는걸 모른다.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겠다. 일단 신호가 왔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꼴리기 시작한다. 일단 기다린다. 그러다보면 늘상 하는 것처럼 남자친구가 당신의 손을 잡거나 뽀뽀를 하려 할 것이다. 기회는 찬스! 바로 이때다. 손을 잡으려 하거든 그 손을 자연스럽게 당신의 몸으로 유도하고 뽀뽀를 하려하면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농도짙은 키스로 이어간다. 일단 당신의 몸에 얹힌 손은 절대 물러서거나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한발 앞서갔으니 이제 뒤로 물러설 차례. 갑자기 그의 손을 당신의 몸에서 거둔다(혹은 그의 몸을 살짝 밀쳐 키스를 중단한다). 남자친구는 의아해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달뜬 입을 천천히 떼면서 물어볼 것이다(그 대답이 바로 이 작전의 열쇠다).

“왜?”

 그래. 바로 ‘왜’ ! 여기서 ‘왜’ 라는 질문은 정말 그 이유가 궁금해서 저런 질문을 한다기보다도 ‘아니 한참 재밌는데 왜 판을 깨느냐.’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좋다. 사실 왜인지가 궁금할 턱이 없잖은가. 이제 당신에게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가르쳐주겠다.

“흥분된단 말야….”

 최대한 에로틱하게 말하는거 잊지 말자. 사실 저 표현은 미풍양속에도 어긋나지 않거니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쾌락과 욕망을 표현하자는 주장에도 한치 어긋남이 없다. ‘흥분된단 말야.’ 라는 말은 일단 그 겉모양을 해석하자면 ‘흥분이 되니까 그만해라.’ 라는 뜻인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게다가 그냥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흥분이 되니까 하지 말라는거 아닌가. 그리고 말의 껍데기를 벗겨서 보면, ‘계속하면 점점 더 흥분할것이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으므로, 당신이 흥분하는걸 보고 싶어서라도 그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부작용으로는 정말 그만하는 결과 등이 초래되므로 말할때의 말투와 표정에 유의하자).

 우리가 우려하는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남자친구와 모텔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열심히 전희중이겠지? 근데 이상하다. 분명 아까는 뽀뽀만 해두 막 꼴렸던거 같은데, 게다가 지금 그가 열심히 입과 혀를 놀리고 있는데도 뭔가 2% 부족하다. 문제는 그가  당신의 성감대를 자꾸 겉도는데 있다. 군대 얘기만 나오면 자기 부대에서 알아주는 명사수였네 어쩌네 하더니만 자꾸만 표적을 빗나가는 그(이런 상황에서 종종 ‘거기 말고 거기’ 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때 ‘말고’ 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어떻게 할것인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말해야지!

 상황설명 들어간다. 아무리 야메 스나이퍼라도 소 뒷걸음질쳐 쥐 잡는다고 한두번은 당신의 성감대를 스칠것이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그의 입과 혀가 당신의 주요 성감대를 스치는 순간 소리친다.

“거긴 안돼!”

 이러면 또 다시 열에 달뜬 남자가 당황하며 물어본다. ‘왜?’ 그렇다. 우리는 이 ‘왜’ 라는 말에 대답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잖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듯 말한다(늘 그렇지만 표정 중요하다).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야….”

‘옳다구나’ 하는 그의 표정과 함께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희가 끝나면 본격적인 섹스로 들어갈 것이다. 열심히 허리를 놀리던 그에게 갑자기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눈이 뒤집히면서 허리놀림이 점점 빨라지고 표정이 컨트롤이 안된다. 사정을 하려나보다. 근데 아직 당신은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급박한 사태를 어찌 할것인가.

 두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한가지 방법은 그의 허리를 꼭 안고 ‘잠시만 쉬었다 하자.’ 라고 도닥이듯 말해주자. 자존심때문에라도 일찍 사정하는거 좋아하는 남자 없다. 흥분이 좀 가라앉았다싶으면 다시 시작하자. 말로 하기가 부끄럽다면 몸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몸을 움직여서 체위를 바꾸려다 보면 자연스럽게 허리놀림이 둔화 될 수 밖에 없다. 더 좋은건 아예 빼고 다시 시작하는 것, 원래 남자는 여자보다 빨리 식고 빨리 데워진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방법은 사정하게 내버려둔다. 내버려두고 당신은 2회전을 노리면 된다. 여유있게 생각하자. 사정 좀 일찍 했다고 해서 ‘개새끼야 너 토끼지?’ 라는 둥 촌철살인의 말을 내뱉는다면 진짜로 개가 토끼가 되는 놀라운 현상을  경험할수 있을지도 모르니 함부로 뱉어서는 안된다. 한번 주저앉은 사기는 사정직후의 꼬추마냥 암만 북돋아줘도 웬만해선 잘 서질 않는 것이므로 조심하도록 하자.

 보노보노 같은 원숭이 들은 쾌락을 위해서 성교를 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동물 중  “오르가즘”을 느끼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고 한다. 남자의 오르가즘이 어디 오르가즘이랴, 전 지구에 절정같은 절정은 여자가 느끼는 오름가즘 밖에 없다. 그런 소중한 것을 말한마디 못해서 놓쳐버린다면 그보다 아쉬운 일이 또 있을까, 그리고 부끄러워 하시는 분들께 말씀 드리자면, 그런 표현을 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남자들 요즘 없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 좋아들 한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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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 전에 페미니스트 잡지 if 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왔을때 써 준 글이다 . 근데 이게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른 걸 요구하길래 그냥 예전 글을 주었더니 이건 별 탈없이 실렸다 . 그냥 , 메일함 정리를 하다보니 예전 글들이 막 나오길래 그냥 올려본거 . 참고로 2년이 좀 넘은 글이다 . 2년 … 반 전인가 .

영진공 담패설

[영진공 64호]”오빠 못 믿니?” 상황에 대한 종합적 분석

명랑성과학연구회
2006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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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본문과 상관 없습니다.

어느 깊은 밤. 남녀가 모텔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다.
여자는 그곳을 떠나려 하고, 남자는 붙잡으려 한다.
“사랑한다면, 오늘 밤 나를 지켜줘요.”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가 말한다. 그녀의 눈가에 옅게 어린 눈물이 애처롭다.
여자의 눈을 한참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 천천히 입을 연다.
“오빠. 못 믿니?”

“오
빠. 못 믿니?” 라는 문장은 사실 대단히 함축적인 말이다. “오빠를 믿어라.” 라는 회유의 의미가 있을뿐더러, “오빠를 그렇게
못 믿었었니? 실망이구나.”와 같은 감정 자극의 전략도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나를 믿어다오”와 같은 현재
시점에서의 믿음을 요구하는 말일뿐더러 “오늘 이후로, 내가 너를 책임질테니 앞으로는 나를 믿어다오.”와 같은 미래 시점에서의
믿음을 강요하는 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나를 믿고, 너를 맡겨라.” 정도이며, “사랑한다면, 오늘 밤 나를
지켜줘요.”라는 말과 붙여서 해석하자면 “그건 싫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입에서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줘요.”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라면 이미 여자의 마음은 결정이 된 상태다.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줘요.”라고 말을 하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남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자신의 뜻을 세우며,
여기에 다음날의 어색함까지 커버하려는 전략적인 멘트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졸리니까 이제 그만 집에 갑시다.” 정도일 것이며,
모텔 앞에 서있는 그 장면과 붙여서 해석하자면 “오빠 마음은 알겠지만, 싫어.”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상황이라면,
남자가 대단히 불리하다. 여자의 마음은 집에 있고, 남자의 마음은 모텔에 있는 동상이몽의 순간에,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붙잡아
모텔 동시 입장을 성공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오랜 기간의 고된 작업이 막바지에 치달아 남녀가 모텔 앞에 같이 서
있는 장면까지 갔다면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에 판단력이 흐려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제 한 골만 넣으면 경기는 끝나는
상황인데, 종료시간은 다 되어오고, 더 이상 날릴 뻐꾸기도 없는 체력적 한계 상황이 도달한 상태에서 남자는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기에 “오빠. 못 믿니?”라는 문장은 사실 “일단 모텔에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라는
의미에 “제발. 부탁이다.”라는 사정을 섞은 마지막 공격인 것이다. 그러나 불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날린 슛은 언제나 과녁에서
벗어나는 법. 경기를 결정짓는 쇄기 골이라고 쏜 문장이지만, 사실 그 문장은 자살골이다. 여자도 알고 있다. “오빠. 못
믿니?”의 의미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60년대 감성으로 살아가는 백치미의 여인이 아닌 다음에야, “오빠. 못 믿니?”가
“오빠를 믿지 마라.”의 우회적 표현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기에 대부분의 상황은 모텔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잠시간
왈가왈부하다 결국 여자는 집에 가고, 남자는 집에 가다 우울한 마음에 소주 한 잔 하는 것으로 종료되고 만다.

따라서
현명한 남자라면 “오빠. 못 믿니?”와 같은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먼저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줘요.”라는 말이
나오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는다. 이 말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복잡하게 전개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명한 남자가 여자와 함께 모텔 앞에 같이 섰을 때는 모든 작업이 물밑에서 마무리 된 상태인 것이며, 더 이상의 돌발변수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마무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된다면, 오늘은 이쯤에서
작업을 마무리하고 바이바이 하는 것이, 오늘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내일 먹을 사과나무를 심는 작업인의 마인드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모텔 앞에까지 같이 갔던 일은 다음을 위한 복선으로 남겨두고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작업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면, 내일 정말 지구가 멸망해버리기에 오늘 결과를 봐야 한다면, 현명한 남자는 여자의 말을 꼼꼼히
되짚어 생각하게 된다. 애절한 표정으로 긴 한숨마냥 내 뱉은 여자의 말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 줘요.” 이 말.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해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차근차근 짚어 보면, 비비고 들어갈 구석이 충분히 있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깡패 국가가 아니다. 대로변에 있는 모텔 앞에서 강제로 여자를 어쩌구, 저쩌구 할 만큼 대한민국의 치안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다시 말해, 남자가 지켜주고 말고를 떠나, 마음에 안 들면 여자가 그냥 집에 가면 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랑하건 안 하건 간에, “집에 가요.”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가면 되는 것을 가지고 “사랑하면, 나를 지켜 줘요.”라고 말을
했을 때는, 여자는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밤늦게, 모텔 앞까지 남자와 같이 온 상황이라면, 여자에게도
무언가를 바라는 기대치가 있거나, 무언가 남자에게 실망한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게 무얼까? 여자가 기다리는
것이? 남자에게 실망한 것이? 이것은 쉽게 말하기 어렵다. 남자와 여자의 성격과  그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순간의 분위기와 느낌을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전체적인 상황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순간적인
상황해석과 순간적인 상황대처가 동시에 가능한 훌륭한 남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기에 많은 남자들이 모텔 앞에서 쓴 고배의
잔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홀로 야동을 틀어 놓고 눈물을 흘리며 잠을 청하는 것이리라.

이런 경우, 여자의 마음을
해석할 길이 없다면, 여자가 요구하는 기대치가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면, “오빠. 못 믿니?”와 같은 후기 산업
사회에서나 통할 것 같은 멘트를 날리기 보다는, 차라리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낫다. 여자가 자리를 떠도
그렇게 20분간 서 있다면, 여자가 다시 되돌아올 가능성이라도 높아지니까. 말빨에 자신이 있다면 보다 세련된 화술을 구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사랑해. 그래서 너의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같은 말은 그 특유의 느끼함 때문에 안 통할 것
같지만, 의외로 분위기가 확보된다면 먹히는 말이다.

여자의 “사랑하면, 나를 지켜줘요.”라는 말은 그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남자에게 떠넘기는 대사다. 이걸 역이용해, 책임을
다시 여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와 같은 대사는 여자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된다. 이렇게 되면 여자 입장에서는 선택권이 자신에게 넘어 왔음을 인지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반전상황에 당황하게 된다. 보통은
이 경우 “사랑하지만, 그것과는 달라요.”라는 여자의 멘트가 뒤 따라 오지만, 이 경우 남자의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체념이 섞인 듯한 동문서답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이 정도까지 되면 상황은 난감해지고, 해결방법은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지만
“오빠. 못 믿니?”와 같은 멘트가 발생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종료로는 이어지지 않으며,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가질수
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춥다. 들어가자.” 와 같이 모든 상황이 마치 끝난 것처럼 말하는 멘트를 날리거나, 아무 말 없이 어깨에
손을 얹고 천천히 움직이게 된다면 보다 쉽게 모텔 동시 입장이 가능해진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린답시고 “잠깐
쉬었다 가는 거야.” 라던가, “맥주나 한 잔 하자.”와 같은 말은 금물이다. 이런 말들은 “오빠. 못 믿니?”와 동급의
말들이다.


깐 공상과학 소설을 썼다. 앞서의 방법들은 그저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예시일 뿐이다. 상황은 언제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건
바이 건이다. 현실은 머릿속과 다르게 상황이 진행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거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지 않는 걸까?”라는
기본적인 물음을 여자의 입장에서 알아내는 것이며, 여자의 마음이 모텔 앞에서 변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그 이유를 찾아
해결하고, 여자의 불안과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게 된다면 복잡한 상황 설정과 그 상황에 따른 시나리오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소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여자의 마음을 배려하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며, 이러한 노력과 훈련이 생활화 된다면
모텔 앞에서의 난감한 상황은 보다 쉽게 종료 될 수 있는 것이다.

섹스란. 다들 알다시피. 배려와 이해의 미학인 것이다.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

[영진공 64호]조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명랑성과학연구회
2006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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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의 동상이몽


[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자는 허탈한 표정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남자 간신히
고개를 들어 여자에게 말한다. “미안해.” 여자는 표정을 가다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아.” 여자의 괜찮다는
말에 남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괜찮다는데 무어라 말을 할 것인가?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실망감을
읽을 수 있다. 남자는 오늘도 1분을 넘기지 못했다. 이제 갓 체위 하나를 시도했을 뿐인데, 남자는 그대로 끝나 버렸다. 조루는
젊고 건강한 남성성의 표현일 따름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짧은 플레이 시간에 남자 스스로도 한심스러웠다. 사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여자도 괜찮지 않았다. 모텔에 들어와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치는데까지 걸린 시간이 30분이었다. 게다가 애무만 20분.
그런데 막상 본 행사는 1분이라니. 여자는 평소 신앙심 깊은 신자였지만, 오늘은 신이 인간의 섹스를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설계한
것이지 않을까라는 원망까지 하였다. 게다가 오늘은 가장 안전한 날이었다. 임신 가능성 제로인 오늘은 한 달을 기다려 얻은 신의
축복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긴, 30일 간의 기다림을 단 1분 만에 끝내다니. 그저 허탈한 마음뿐이었다. ]


어려운 상황이다. 남자로서는 한 없이 창피한 상황인 것이고, 여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장면이다. 그렇다고 남자는 계속
창피한 표정만 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체면이 있지. 이정도의 고난에 마음 약해져서, 고개 숙이고 있는 것은 가오가
서지 않는다. 상황을 역전시킬 무언가 액션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마땅한 것이 없다. 허풍이라도 치고 싶지만, 오히려
유치한 변명이 될까봐 고민스럽다. 여자 역시, 실망했지만 실망했다는 표현을 하기 쉽지 않다. 행여 남자가 상처라도 받는다면,
미안해 질 것 같다. 실수로 “풋”하고 웃었다가, 헤어진 커플도 여럿 봤다. 그래서 오히려 남자가 허풍이라도 쳐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옆에서 그 허풍에 맞장구라도 쳐 줄 텐데. 고개 숙이고 있는 남자에게 오히려 여자가 미안하다.

남녀는 서로의 생각에 잠시간 말이 없다.
침대 위로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남녀의 동상이몽은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조루에 대처하는 남자의 세 가지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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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지금 이 상황이 진심은 아니야.."

보통 이 경우, 입을 먼저 여는 것은 남자다. 어찌되었건, 현 상황의 원인제공자는 남자니까. 남자입장에서 특별히 할 말이 없을
것 같지만, 막상 말을 꺼내면 휘두를 수 있는 변명꺼리는 여럿 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변명은, 원인을 외부환경이나 평소와
다른 몸 상태에 돌리는 것이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더니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래. 게다가 왜 이리 조명은 밝은 거야?”
이런 변명, 의외로 효과적이다. 주위 환경이나 몸 상태가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섹스 시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여자 입장에서도 “그래. 다음에 잘 하면 되지.”라며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변명에는 부작용이 있다. “다음에는
정말로 잘해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되게 되며, 이 명제를 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에는 정말 잘 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또 못하면 “몸 상태 때문에 그런 것이야.”라는 지금의 변명은 거짓이 되며, 억지로 구겨 세웠던 남자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섹스를 할 때마다, “오늘도 몸이 이상하네? 오늘은 왜 이리 방이 어두운거야?”라는 변명으로 일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정말 다음에 잘 할 자신이 있거나, 혹은 열심히 단련하고 훈련하여 강해질(?) 자신이 있거나, 혹은
다음부터 이 여자와 섹스를 하지 않을 계획이 아니라면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변명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조금 현명한 남자라면 훨씬 더 담백한 변명을 하게 된다. “미안해.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이해해줘. 다음부터는
정말 잘 할게.” 이런 변명 얼핏 들으면 정말 쿨해 보인다. 남자라면 누구나, 침실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강력한 변강쇠가 되거나,
혹은 섹스를 온몸으로 마스터한 섹스 킹이 되고 싶고 싶어 한다. 그런 남자의 일반적인 침실 판타지를 이겨 내고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이런 종류의 변명을 하는 남자들에게 박수를! 용기를 내어 한 변명이고 고백이기에 여자들도
남자들의 진심을 이해한다. 정말 잘 하고 싶었는데, 안 된다는데 무어라 할 것인가? 그저 잘 하라고, 다음에는 더 잘 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밖에. 그러나 여자들도 알고 있다. “앞으로 더 잘 할께”라는 남자들의 이런 종류의 변명은, 학창시절
성적표를 받아온 자식이 부모님에게 무릎 꿇고 앉아서 하게 되는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받아올게요.”라는 변명처럼 진심만
가득하고 실천은 빈약한 고백이라는 것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은 믿어야지.

말로 승부를 하는 남자라면 로맨틱한
변명을 꺼내게 된다. “미안해. 참을 수가 없었어. 너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고개를 숙이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하는 남자의 이런 변명에 여자들은 할 말이 없다. 사랑한다는데.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는데. 현재의 상황이
실망스럽지만, 기분 나쁠 것까지는 없다. 상황을 아름답게 종료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변명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상당한
모순을 안고 있는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찍 끝난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래 섹스를 하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또한 사랑하면, 사랑하면 할수록 더 빨리 끝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돌려 생각하면, 변강쇠와 옹녀의 3시간짜리 한판은 미칠
듯이 미워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간이라는 결론이 되며,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섹스를 했다면 초단위로 결론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모순은 시간이 지나, 그대로 이 남자에게 되돌아올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몸 컨디션이
좋아 오랫동안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 이 남자는 여자에게 무어라 그러겠는가? “오늘은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조루에 대처하는 여자의 세 가지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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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나도 날고 싶어..."


어색한 상황에서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은 남자지만, 상황을 종결짓는 키를 갖고 있는 것은 여자다. 남자의 변명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위안이기도 하지만, 최종 목적은 여자의 이해를 구하는데 있다. 여자가 납득하고, 이해해야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향후 남녀간의 섹스라이프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여자가 하게 된다.

배려라는 단어는 안드로메다 정도에 날려 버린 여자, 혹은 남자에게 언젠가 한 방 펀치를 날려주기를 벼려왔던 여자, 혹은 쿨함을
가장한 아무 생각 없는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 그저 웃을 뿐이다. 그것도 비아냥을 섞어. “사정 한 거야? 아니면 흘린 거야?
흐흐” 남자 입장에서 이런 농담은 거의 치명적이다. 가슴에 칼이 꽂힌다. “째째하게 그러지 말고, 조금 더 힘을 써봐. 아낄 때
아껴야지.” 남자는 아끼고 싶어서 아낀 것이 아니다. 거기까지 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짜 끝난
거야? 장난하지 마.”이라며 생끗 웃는 여자의 순진한 웃음까지 더해지면, 남자는 처참한 확인사살을 당하게 된다. 어쩌라구.
어쩌라구. 마음속으로 눈물 흘리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자의 조루현상을 비웃는 여자. 이 남자와 더 이상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다. 물론, 남자가 받을 상처를 예상하지 못하는 순진한 여자거나, 그 정도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쿨한 여자라면, 남자의 상처를 가슴에 난 털뽑기 정도의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받는 상처는 털뽑기가
절대 아니다. 비유하자면 가슴털을 라이터로 지지는 정도가 될 것이다. 가슴에 난 털은 다시 솟아나기라도 하겠지만, 라이터로
지져버린 털은 다시 솟아나지 않는다. 남자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현명한
여자들은 이런 상황을 태연하게 받아 남긴다. 남자의 변명은 변명으로 인정하고, 그냥 기다린다. 담배라도 한 대 피던가,
텔레비전을 보던가, 아니면 다시 샤워를 하던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간을 보내며,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린다. 어떤 타이밍?
남자의 고추가 다시 서는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를 섹스 후에 바로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정
시간이 지나야, 남자의 페니스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정신을 차려 섹스가능한 자세가 갖추어진다. 남자마다 정신을 차리는 그
시간이 다르기에, 그 시간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남자의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그 시간이 달라지며, 여자의
노력이 더해지면 그 시간은 비례하여 짧아지게 된다는 것이 민간 성의학계의 정설이다. 기다림의 열매는 달다 했던가? 두 번째 하는
섹스는 처음에 비하면 훨씬 길어지게 된다. 남자 입장에서도 급한 불은 꺼진 상태이기에 훨씬 여유롭다. 이런 여자의 대응은 굉장히
현명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지만,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건 두 번째가 불가능한 남자가 많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라면 두 번째
섹스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한 번에 두 번하는 (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으리라.) 이런 섹스가 쉽지 않다. 삼십대가 넘어가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조루 현상이 심한
사람이라면 두 번째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런 예외 상황을 제한다면, 가장 효율적인 여자의 대처라 할 수 있다.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 가장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여자의 대처는 남자에게 화를 내는 상황이다. 이건 정말 회복 불능이다. 여자가
버럭 화를 낸다고 해서, 남자가 무릎 꿇고 빌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는 이런 행동은 더 이상 관용과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다. 따라서 화를 내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제
우리 섹스는 그만하자.”가 아니라,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자.”라는 의사표현이 된다. 실제 이렇게 여자가 화를 내서 깨진
커플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 여자는 남자가 아주 짧은 시간에 사정을 하며 자체 신기록을 달성하자, 그냥 옷 입고 말없이
모텔을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로, 그 여자의 소식을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는..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절대 화는 내지 말자는 것이다. -.-


조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남자의 변명을 세 가지로, 여자의 반응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지만, 이건 그저 상황에 따른 시나리오일 뿐이다. 사실, 상황 분석과 대처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 글 중간 중간 “어쩌라구”라는 추임새를 넣었는데 이게 남자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방법이 없다. 조절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 섹스 도중 애국가도 부르고, 이번 달 카드 값도 계산해 보고, 김정일 얼굴도 생각해 보고, 부모님 얼굴까지
그려 보고, 심지어는 이차 방정식까지 풀어 보지만, 그래도 조절이 안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저 스스로에 대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기에 뻔히 구질구질한 변명임을 알면서도, 구태여 변명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변명은 해도 안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했는데, 성적이 나오지 않는 수험생의 안타까운 마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당연히 아쉽다. 밥만 먹으면 바로 한 번씩 때리는 신혼부부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중년 부부, 혹은 젊은 연인의 섹스는 특별한
이벤트가 된다. 기대가 섞인 이벤트가 허무하게 끝나는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조급하게 화를 내거나, 비웃지는 않는다. 남자가 받을 상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속으로
화를 삼킬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다. 상황을 해결하는 열쇠는 여자에게 있다. 넓은 마음으로 남자를 이해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남자의 조루 상황을 이해하고, 다독여야 한다. 남자의 변명이 구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깊은 믿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음에 더 잘하겠다는 남자의 다짐 역시 유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랑 가득한 신뢰로 믿어 주어야 한다.

조루
란 육체적 감각의 예민함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의 미숙함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인 예민함이 그 원인인 경우가 더
많다. 육체적 예민함은 치료가 어렵지 않다. 비뇨기과 병원이나 성인용품 쇼핑몰을 뒤지면 남자 혼자서 수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예민함은 남자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온갖 상업적인 미사여구로
다양하게 포장된 여자의 몸을 단순히 몸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은밀한 판타지로 점철된 섹스라는 행위 역시, 남녀
간에 나누는 단순한 육체적 사랑 행위로 받아들이려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굵은 모래와 굵은 소금을 2대 1 비율로 섞어 남자의
페니스를 비비는 철사장 훈련을 30일간 아침저녁 식후 30분씩 하게 되면, 조루가 극복된다고 믿는 분들에게는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이건 정신적 조루 증상을 무시하는 발상일 따름이다. 여자의 따뜻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포용이 함께 할 때, 조루는
육체적 정신적 차원 모두에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섹스란 그저 남녀 간의 육체적 마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섹스가 단순한 육체의 향연이라면, 인간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결혼제도와 남녀 간의 섹스 갈등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금요일 밤에 하는 부부 클리닉 코너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육체적 마찰과 더불어 정신적인 감정의 교류가 존재하기에 섹스에
눈물 흘리는 여자와 섹스에 자부심을 느끼는 남자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섹스란, 서로의 감정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나오는 성과물 같은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얻게 되는 선물 같은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자의 따뜻한 배려와 이해만이
조루해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은, 그러기에 여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말은 아니다. 같은 곳을 향해 보기 위해 여자가 남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이며, 사랑이라는 긴 항해를 위해 올리는 돛단배의 돛처럼 남자의 사랑을 보듬기 위한 섹스의 한 과정일 따름인
것이다.

신앙심 가득한 여자는 문득, “신앙이란 어느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은 지금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신께서 남자와의 사랑을 시험하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과 신의 뜻으로 이 순간의 어려움을 극복하리라. 여자는 그렇게 기도한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하나. “왜 신은
우리의 사랑을 하필이면, 조루를 통해 시험하시고 계신 걸까?” 여자는 그렇게 자신의 신실한 믿음 위에 솟구치는 의심 하나를
지우지 못한다.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

[영진공 64호]크리스 리는 그 영어강사가 아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006년 12월 1일

야구결과 보려고 잠깐 네이버에 들어갔다가 검색 순위를 보고 깜짝 놀랐다.

크리스 리.. ?

기억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한국계 포르노 배우다. 그런데 어떻게 네이버의 검색순위 1위에 오를 수가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여기저기를 뒤지다, 오늘자 쿠키 뉴스 기사 때문인 것 같았다.

“어? 포르노 주인공이 우리학원 선생님?”…
해외서 포르노 배우 활동했던 女 붙잡혀


런데 기사를 자세히 보면, 저 영어 강사가 크리스 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크리스 리는 2000년경에 활동하던 포르노 배우다.
기사의 저 영어강사는 2005년 2월부터 9월까지 포르노를 찍었단다. 활동했던 시기가 같지 않다. 그래서 여기저기 둘러서
확인해보니, 캐나다에서 Almond tease 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것 같다. 외국인 남편과 같이 찍었다는 소문도 있고, 저
여선생이 그저 성실한 학생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나저나 억울하겠다. 포르노 찍을 때 한번에 200에서 300달러씩
받았다고 하니, 30차례를 받아봐야 6,000-9,000 달러였을텐데 대한민국에서의 벌금은 1,000만원 안쪽이 될 것이란다.
대충 계산해봐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승희라는 예전 플레이보이 잡지의 모델은 헤어누드를 수도 없이 찍어도, 다리 벌리고
노골적인 사진을 수도 없이 찍어도 우리나라와서는 “대한민국을 빛낸 스타”라고 해서 엄청난 스타 대접을 받았었는데, 어째 이 분은
망신만 당한채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인지.. 정치와 관습에 기대는 그 어눌한 법집행이 씁쓸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신고한 학생이라는 놈.. 정말 웃긴 놈이다. 자기는 어떻게 딸딸이라도 한번 치려고 뒤진 포르노
사이트였을테고, 다운받은 동영상이었을텐데, 그걸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하다니. 그 추잡한 준법정신에 몸서리가 쳐진다.

젠장. 기사보고 어이가 없어졌었는데, 야구도 졌다.
그것도 대만한테.

* 여기 저기 분위기 보니, 동영상 돌겠군..
* 다들 눈 빨개져서 찾아 볼 거면서.. “강사가 저러면 되나.” 라는 젊잖은 교훈을 해 댈 사람들도 많아지겠지..
* 저 여자.. 영어강사는 더 이상 힘들겠지?.. 이민가야 할라나..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

[영진공 61호]여성 유방에 대한 단상

명랑성과학연구회
2006년 10월 24일

1.

유방 확대 산업이 나날이 그 인기를 확대해가고 있다. 1963년 미국의 다우코닝사가 실리콘 백을 개발하면서 유방 확대술을 시작했을 때에는 단순히 크기를 키우는 작업 정도에 머물러 있던 유방확대산업은 이제 눈부시도록 발전한 과학기술에 힘입어, 통계학적으로 인정된 아름다운 가슴을 섬세하게 조각해내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 방법도 다양해져서, 실리콘 젤을 사용하는 기존의 방법부터, 식염수 팩을 사용하는 방법, 심지어는 다른 곳의 살을 떼어 내어 가슴에 가져다 붙이는 인체 구조조정의 기술까지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얼마 전, 한국에 원천기술이 있다며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줄기세포를 활용하여 가슴이 스스로 커지는 연구까지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다니, 유방에 쏟아 붇는 전 세계 과학자들의 노력은 놀랍기만 하다.

같은… 사람이다.

유방 확대 산업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은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이 어디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던가. 자본에 종속된 지 한참이며, 장사의 밑천이 된지 오래다. 장사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찾고 있다는 이야기다. 몸에 칼을 대어야 한다는 공포 때문에 확대술이 걱정인 분들을 위해 발 빠른 장사꾼들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구라 100%의 신 개념 제품인 뽕까지 제작해 팔고 있을 정도다. 뽕 산업 역시, 유방 확대 수술과 더불어 확대 일변도를 걷고 있는 산업이 된지 오래이며, 첨단 소재인 실리콘을 동원한 차세대 뽕이 인기를 얻고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여성의 유방 확대 산업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남자이지만, 아름다워지기 위한 여성들의 큰 가슴에 대한 욕망을 비난할 만큼 내 가슴이 작지는 않다. 오히려 삶에 대한 진지한 열정이라 생각하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감의 발로라 여기며,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분들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유명 연예인의 사진 중에서 …

여성들이 부동산도 아닌 유방을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 역시, 아름다운 유방이 팔리기 때문이다. 유방은 본능적으로 남성에게 섹시어필하게 만드는 기관이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모유 수유로 이어지는 종족번식의 과정들이 수 만 년의 역사를 거쳐 남성들의 유전자 어딘가에 아로새겨지며 유방을 성적인 대상의 하나로 인식하여 왔을 것이다. 여기에 아름다움의 한 축으로 오래전부터 유방이 널리 인정되면서, 아름다움을 가꾸고자 하는 여성 특유의 본능이 자극되며 유방 확대 산업이 호황을 맞이한 것이리라. 덧붙여 섹시함이 미(美)의 평가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유방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산하고자 하는 여성분들의 수요가 공급의 확대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2.

컴퓨터와 LCD 브라운관 산업, 그리고 광학기술의 발전은 터무니없게도, 유방의 섹시함을 공고히 하는데 크나큰 이바지를 하게 된다. 모니터 속에 섹시한 유방이 비춰지면서, 사람들은 여성의 유방을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맞은 크기로 봉긋이 솟은 유방이 적당한 위치에 놓인 모양새는 – 비록 그 위에 옷을 입고 있다고 할지라도 – 자체만으로 섹시함을 불러일으키는 최대의 소스가 되었으며, 살짝 살짝 노출되는 앙가슴은 대한민국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섹시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성의 유방은 19세 인증과 청소년 관람가 사이의 애매한 비무장지대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슴가”는 여성의 가슴을 부르는 인터넷 상의 말이다. 가슴을 가꾸러 발음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에, 일부의 비난처럼 비속어라기보다는 유행어 쪽에 가까운 이 말은, 남자들이 많은 인터넷 동호회에서 은밀히 여성의 유방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발 빠른 우리네 포털들은 슴가가 가진 섹슈얼리티를 포착해내고, 일찌감치 19세 마크를 달아 슴가를 검색하기 위해서는 어른임을 증명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게 만들었다. ( 다음(daum)은 성인인증을 하고 슴가를 검색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보이는 페이지가 다른데 반해, 네이버는 슴가라는 단어를 통째로 19세로 막아 버렸다. 조금 있으면, 네이버는 19세 이상만 이용하는 성인 사이트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

슴가 성형 논란이 일자, 기자회견을 통해 “진짜”임을 확인시켜주셨던 이지혜씨.
가수도 가슴이 예뻐야 서렁받는 가수가 된다. 게다가 자연산이기까지 해야 한다.
슴가를 검색하면 나온다.

유방이 19세 인증을 통과해야 하는 섹시함의 대명사가 된 것은 무엇보다 유방 장사꾼들이 유방을 21세기 최대의 장사 밑천인 섹스와 함께 패키지로 묶어서 팔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른 생식기관들이 사회적 심의에 걸려 노출이 불가능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의 노출이 허용되는 유방의 교환가치가 상승해 버렸고, 뉴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보여주는 유방의 가치가 점차 고평가되기 시작하면서, 현재와 같이 여성의 섹시함을 대표하는 대표 기관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으리라.

국기에 대한 새로운 경례

3.

조금 더 사용하기 편한 “가슴”이라는 단어를 두고, 이 글에서 계속 “유방 (乳房)”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이유는 “유방은 젖을 주기 위한 기관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미의 기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여성의 성감대로서 섹시함의 표현이 되는 것도 현실이지만, 사실 유방의 본래 기능은 젖을 주는데 있다. 젖 주는 기능에 이미지가 붙여지다 보니, 이게 미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이며, 섹시함의 대상물이 된 것일 뿐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모습.. 젖을 주기 위해 가슴을 노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서구의 섹슈얼리티가 인식되면서, 유방은 19세 접근불가 대상이 된다.

유방은 신이 처음 만들어 줄 때부터, “젖 줄 때” 사용하라고 만들어 준 것이다. 인간을 동물 속에서 분류할 때 포유류로 포함시키는데, 포유류(Mammalia)라는 말도 유방(Mammae)에 어원을 둔 “젖 주는 동물”이라는 뜻일 정도로 젖이 나오는 유방은, 인간을 규정하는 강력한 근거다. 젖이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는 생명수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희망수라는 점에서, 여성의 유방은 축복과 풍요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여성의 유방이 없었다면, 어떻게 인류가 수천 년간 유구한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재미있는 것은 서양은 오히려 이런 종류의 노출에 우리보다 덜 민감하다.
서구적 합리주의와 유교가 만남이 만들어낸 한국식 노출기준이라고나 할까
.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젖 주는 엄마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버스에서, 혹은 지하철에서 간간히 젖을 주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지만, 언젠가부터 “성의식이 굉장히 높아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 섹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하며 성도덕이 점차 강화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아기에게 젖을 주는 엄마의 모습은 섹시함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텔레비전 같은 곳에 젖 주는 광경만 나와도 시청자 게시판에 “너무 야하다!”라는 의견이 올라올 정도로, 젖 주는 기관으로서의 가치는 없어지고, 단순히 미의 기준으로, 혹은 섹슈얼함의 표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유방의 현실인 것이다.

4.

모유수유중인 필리핀 여성들

인간은 진화한다. 일부 종교인들과 일부 사회학자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인간은 분명 진화하고 있다. 여성의 유방은 이러한 생물학적, 사회학적인 진화를 뛰어넘어 과학을 통한 진화를 꾀하고 있다. 오랜 시간 갖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우성 유전자에 아로새겨졌던 진화의 과정을 뛰어 넘어, 과학과 의학과 그리고 뽕으로, 커지고, 예뻐지고, 모아지고, 미끈해지고, 봉긋해지는 진화를 순식간에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진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이다. 아무리 젖을 주는 기관이라 하지만, 유방 역시 사회 속에서 평가 되는 하나의 가치일 따름이다. 예쁜 가슴이 우대 받는 사회에서 예뻐지기 위한 노력이 왜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인가? 다만, 그 본연의 임무인 모유 수유가 유방의 상업화에 휩쓸려 가치가 경도되고, 더불어 아기에게 젖을 주는 행위마저도 섹시함으로 인식되어 창피해지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방의 외적 진화 과정 속에서 퇴화하고 있는 그 본연의 임무가 아쉬운 것이다.

인간의 그 어떤 조직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모든 생물학적인 기관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인간을 이토록 철저하게 이기적인 모양새로 설계한 것은, 인간과는 다르게 언제나 인간을 위해 희생하며 사랑하는 신을 더 경외하라는, 조물주의 깊은 계산에 의한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사용 가능한 여성의 유방”을 같이 만들었던 것은, 신이 베푸는 희생과 사랑을 인간끼리도 느끼며 살아가도록 했던 신의 작은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우리는 그러한 신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배려마저도 상업화된 과학으로 퇴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지.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