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게일”, 늦게 봐서 너무 미안한 영화

“데이비드 게일”에 대한 짧은 정보들은 실제 영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부정적인 오해와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우선 사형 제도 철폐 운동을 하던 철학과 교수가 그 자신이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었다는 설정에서 “데드맨 워킹”(1995)과 같이 ‘좋은 영화지만 너무 무거울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아메리칸 뷰티”(1999)에서의 성공을 정점으로 꾸준하기는 하지만 별로 인상적이지 못한 후속작들만 찍고 있는 ‘또 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영화’로서의 꿀꿀함이 작용한다. 여기에 최근 십 여 년 이상을 계속 되어온 알란 파커의 슬럼프까지 더해져 마치 ‘이래도 영화가 보고 싶으냐’고 묻는 것만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데이비드 게일”을 보게 되면 극히 짧았던 이 영화의 극장 상영이 못내 아쉬워진다. 비디오로 출시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보았다는 사실까지 몹시 미안하다. 곰곰히 따져보자면 근래에 “데이비드 게일” 만큼 까닭 없이 저평가된 영화도 없었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사실 “데이비드 게일”은 알란 파커와 케빈 스페이시의 장점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화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잘 빠진 스릴러.

영화는 이미 감옥에 갇혀 나흘 후면 사형대에 서야하는 한 남자를 중심에 놓고 회상체 형식으로 펼쳐지지만 그 구조는 조금 더 복잡하다. 영화 속 세상에서 알려져있는 주인공은 우선 ‘이력 있는’ 강간·살인범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데이비드 게일이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진실이 영화 속에서 밝혀지게 되길, 그가 억울하게 죽지 않게 되길 바라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관객들은 진짜 데이비드 게일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된다. 눈치 빠른 관객은 이미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른다’고 짐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드러난 주인공의 실체가 모든 관객들에게 마냥 편하게만 남겨지는 것은 아니다.

실력 있는 철학과 교수님이 주인공인 관계로 대사 속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에서 라깡까지 아우르는 여러 담론들이 영화의 격을 높이는 꽃장식을 해주는 동시에 전반적으로 너무 무겁게 느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데이비드 게일의 인생, 그의 결말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장치였음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영화를 다시 한번 보면서 그 연관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길 수도 있다. 시나리오가 이렇게 매력적이었으니 니콜라스 케이지가 제작자로 나서 알란 파커에게 연출을 맡기고 케빈 스페이시 역시 한번 더 ‘지적인 반전의 화신’으로 출연했겠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졌던 온갖 선입견들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영진공 신어지

데릭 저먼의 ‘가든’, 영화 예술에 대해 다시 묻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많은 제작 인원과 시간, 자본이 들어가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성을 목표로 하는 상업성을 띄게 된다. 이런 주류 영화들은 지난 100년의 시간 동안 관객들과 익혀온 문법의 틀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다. 너무 고답적인 방식으로 찍어서 식상한 느낌을 주는 영화들이 있는 한편 기존의 장르적 관심을 비틀거나 해서 신선한 감을 주는 영화들이 있긴 하지만 그 차이는 별반 다르지 않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지금까지 진정한 영화는 없었으며 나 자신 역시 그런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주 파격적인 영화들을 찍는 그 역시도 영화 이전부터 존재해온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내러티브에 의존하지 않는 ‘기존 문예 장르와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영화만의 영화’는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런 영화가 필요한 건지,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간혹 상업적인 목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영화, 즉 실험 영화들이 만들어져 소개된 일이 있기는 하다. 영화 학교 학생들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장편 영화가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파격적인 형식 실험을 하고 극장 상영까지 했던 경우는 그러나 진짜 영화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에 의해 시도되곤 했었다. 앤디 워홀이 그랬었고 데릭 저먼(Dereck Jarman, 1942 ~ 1994)이 그런 영화를 만든 이들이다.

국내 개봉시 펫샵 보이즈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상영되었던 “가든”은 데릭 저먼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상영 시간이었음에도 어떤 일관된 내러티브가 일절 없는 영화이다. 당시 영화가 끝나고 내 뒤를 따라 나오던 어떤 여자 관객은 함께 관람한 남자 친구에게 ‘또 한번 이런 영화 보자고 그러면 절교’라고 낭랑한 목소리로 선언을 하더라. 어떤 불쾌감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보는 동안에 도무지 정리가 안되고 관객으로서 따라갈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보면서 졸고 또 졸았다. 가끔씩 영화관에서 조는 경우가 있긴 했어도 이 영화처럼 중간에 그냥 일어 서고 싶었던 일은 아마 내 생애 처음이었던 것 같다. 계속 지켜본다고해서 뭔가 달라질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전 최야성의 “로켓트는 발사됐다”를 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재미있으라고 만든 영화가 아닌데 재미있게 보는게 오히려 이상한거 아닌가. “가든”은 아담과 하와의 에덴 동산과 그 자신이 정원사이기도 했던 데릭 저먼의 개인적 모티브를 기반으로 두 명의 게이 커플이 등장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인물들이 나왔다 사라졌다 하는 기묘한 영화다. 제작 방식 역시 상업 영화들과는 판이하게 달라 자연스러운 편집, 음향 등의 기본적인 기술들조차 가볍게 무시되고 있었다.

이런 영화는 대중들이 보고 즐기는, 영화라는 장르의 발전적 흐름과 상관 없이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히려 활동 사진이라는 매체로 구현된 미술과 문학의 형식 실험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겠나 싶다. “가든” 하나만 가지고 데릭 저먼의 영화가 전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위험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언급되는 “카라바조”나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영화를 보고서 평가해 볼 일이다.

영진공 신어지

1만 시간의 법칙과 과잉교육, “아웃라이어”

故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티핑포인트>와 <블링크>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이 쓴 새 책입니다.
저자가 쓴 앞의 두 책을 다 재미있게 읽었고, 이번에도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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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우리나라가 꽤 많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대한항공의 괌 추락사고에 얽힌 이야기,
권위주의와 계급문화가 어떻게 사고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죠.
그리고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놀라운 학업성취도 이야기가 나중에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어떤 지역의 농업보다 압도적으로 노동집약적일 수 밖에 없는 아시아의 쌀농사 문화가 근면성이라는 문화를 만들었고, 그 근면성이 학업성취도로 나타났다는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이 같이 나오죠. 근데 중국은 아마 중국 남부가 거기에 해당하겠죠. 북부는 글쎄 …

이제 본론입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원칙은 (역시 다들 아시겠지만) “1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무슨 일이든지 10,000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마스터가 될 최소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1만 시간을 투입해서 마스터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만 시간을 투입하지 않고서 마스터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거죠.

1만 시간, 하루에 3시간씩 매일 연습을 한다고 쳤을 때 9년에서 10년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하루에 3시간이 아니라 5시간이나 8시간씩 투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스터에 오르는데 걸리는 기간은 더 짧아지겠죠. 저자는 신동 모차르트 조차도, 이 1만 시간을 채운 다음부터 걸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진짜 어렸을 때 쓴 곡들은 유치하거나 혹은 아버지가 대신 써준 것으로 의심받는 것들이라는군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1만 시간입니다. 이걸 채우는 자가 성공의 최소 조건을 채우는 것이죠.





1만 시간의 법칙이 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죠.

첫 번째,
매일 하루에 3시간씩 10년간 뭔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개인의 의지로 될 일이 아닙니다. 주변 여건이 받쳐줘야 가능하죠. 10년은 발달단계의 한 두 단계에 해당합니다. 아동기에 시작하면 청소년기나 초기 성인기에 끝나고, 청소년기에 시작하면 성인 중기 쯤에 끝나는 거죠. 그런데 10년간 같은 일을 같은 의미로 계속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내게 중요한 거더라 … 라는 식의 경우가 더 많게 되겠죠. 결국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부모가 억지로 시키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러려면 문화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앞서의 아시아의 노동집약적 문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왜 흑인 아이들이 백인아이들보다 성적이 떨어지느냐. 저자가 지적한 거는 간단합니다. 흑인 아이들은 방학때 그냥 논다는 겁니다. 문화가 그러니까. 하지만 백인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은 방학 때 과외를 하죠. 네, 바로 그 과외. 방학 전에는 오히려 흑인아이들의 학업성적이 더 높지만, 방학을 끝내고 나면 백인아이들의 성적이 더 높아지는 비결이 그것이죠. 이것이 축적되어 결국 두 문화간의 거대한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두 번째,
차별화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도 1만 시간을 채우는 일을 똑같이 1만 시간 채워봤자 그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매일 3시간씩 최소 5년 이상 하는 게 뭔지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TV나 인터넷을 하는 거 정도더군요. 최근에는 출퇴근하는 데 평일에 한 2-3시간씩 쓰는 것이 추가되었고 … 다들 이런 거는 3시간씩 합니다. 거의 평생 동안 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소용이 없죠. 다들 하는 거니까. 즉, 1만 시간의 법칙이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남들이 안할 때부터 시작하는 1만 시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 그런 일이 생길까요? 일단 소수의 말 그대로 선택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자는 ‘빌 게이츠’가 그런 경우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다니던 고급 사립초등학교에는 자그마치 1968년(혹은 67년)에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펀칭기계로 입력을 하는 기존 컴퓨터가 아니라 키보드로 입력하는 (당시로선)최신형 컴퓨터가! 빌 게이츠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 컴퓨터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나중에는 그 동네 컴퓨터 회사에서 알바를 뛰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계속 되었죠.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1만 시간을 채웠습니다.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게이츠 부모와 같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되는 학부모가 기부금을 내서 컴퓨터실을 지어주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그 아이들 중에서도 빌 게이츠처럼 컴퓨터 논리에 금방 매혹당하는 컴퓨터 천재 자질이 충분한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죠.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한때는 그 가치가 별로 높이 평가받지 못하던 어떤 일을 억지로 해야 했던 사람들도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들 안하는 1만 시간을 채울 수 있죠. 책에서는 유태인들을 예로 듭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유태인들은 농지 소유를 금지당하고 유태인 거주구역(게토)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의 주류 산업인 농업이나 목축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시계 수리, 야금술, 혹은 고리대금업에 종사하게 되었죠. (여담이지만, 판타지에 등장하는 드워프들이 아마 유태인의 은유가 아니었나 싶더군요. 그들의 직업이 딱 저런 것들이죠)

당시에는 천대받는 일이었습니다만, 지금도 그렇던가요. 이런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그 가능성은 제대로 빛을 발휘합니다. 고리대금업은 금융이 되었고, 시계 제조기술이나 야금술은 정밀가공기술의 기초가 되었죠. 이렇게 성공한 유태인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법률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었지만, 이들에게도 역시 주변부에 해당하는 일들만이 주어졌죠. 1960년대 까지만 해도 기업의 인수합병 따위는 비신사적이고 지저분한 변호사업무였습니다. 잘나가는 로펌들은 아예 손도 대지 않던 일이었죠. 그 잘나가는 로펌들은 동시에 유태인을 동료로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태인 변호사들은 천시받던 기업 인수합병일을 해야 했고, 그 분야에서 1만 시간을 채울 시점에 천시 받던 인수합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버렸죠. 미운오리새끼가 따로 없더구만요. 결국 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난 덕분에, 주변부에서 마스터가 되었고 그들이 마스터한 기술이 주류가 되면서 성공한 부류가 되어 버린 것이죠.

여기에 든 것들은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예들 중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캐나다 프로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출생월이 대부분 1,2,3월에 몰려있는 이유도 설명하고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명예문화의 차이, 아시아의 완곡어법 문화의 특성, 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어떤 마을 사람들은 심장병이 그리도 적은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그리고 왜 아시아 아이들이 PISA 같은 수학능력 시험 점수가 높은지도 같이 설명하죠. 답을 간단히 하자면, 아시아 아이들은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도 계속 붙잡고 매달립니다. 풀릴 때까지. 미국 아이들은 그 도중에 포기하고요. 그저 그 차이 뿐이랍니다.

덧붙여, 미국 교육정책의 초기 입안자들은 ‘과잉교육’을 우려했다더군요. 즉, 지나치게 많은 교육을 받으면 사람이 맛이 간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속담도 있었죠. 놀지 않고 일만 하면 멍청이가 된다. 근데 그 사람들이 한 말들을 읽어보니 그냥 멍청이가 아니라 ‘또라이’ 가 된다는 투더군요. 영화 <샤이닝>에서 잭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긴 여름방학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과잉교육을 우려해온 전통 때문이라는군요. 읽을 때는 “참 그 양반들 별 (기특한) 걱정 다했네…” 싶었는데, 최근에 어떤 기사를 읽고 그들이 정말 지혜로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군가가 그랬다죠? 일주일에 뭔 책을 2-3권 읽고 신문은 매일 3시간씩 읽고 어쩌고 정부에서 내놓는 보고서도 … 주저리 주저리 …

이제 이해가 가는 거죠. 결국 그 동안의 그것들이 다 과잉교육의 폐해 였다는 사실이 …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교육도 자기 그릇에 맞게 받아야 한다 이겁니다.
안 그러면 그렇게 됩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