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게임”, 성공으로 인한 성격장애 치료하기



샌프란시스코의 비싸고 경치 좋은 곳에서 사는 백만장자 증권 중개인 니콜라스 밴 오튼(“마이클 더글러스”)은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남의 실수는 용납하지 못하는
자칭 타칭 완벽주의자이다.

그러니 주변에 친구도 없고 아내도 떠나고 동생 콘래드(“숀펜”)와도 연락을 끊고 지내지만 별 문제의식이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난 척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무안을 주던 어느 날, 동생이 CRS라는 체험서비스회사의 가입신청서를 보내온다. 호기심으로 가입신청서에 서명하고, 귀가하던 오튼은 집 앞에 드러 누워있던 사람을 차로 치고는 대경실색한다. 알고 보니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이 자꾸만 꼬이다가 결국 경찰에 쫓겨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이건 이후 그가 겪을 고난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가입한 체험서비스의 시작이었다 ……

『세븐』으로 유명한 “데이빗 핀쳐”의 1997년작 『더 게임』(The Game)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은 대부분 나쁘다. 그런 평에는 나도 동감이다. 어디까지가 게임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놓고 끝까지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의 전개 자체는 그럭저럭 참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결말은 여전히 황당했다.

왜 동생은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며 형에게 죽을 고생을 시키고 결국에는 절망의 나락에까지 떨어트리는 게임서비스를 하게 만든 건지, 그래서 결국 뭐 어쩌자는 거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돈지랄하는구나’ 라는 생각 뿐 이었다.

온갖 스턴트와 특수효과로 치장한 영화 자체도 그렇고, 좌절을 겪을 일이 워낙 없어서 비싼 돈주고 “좌절을 겪게 해주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 자체도 그저 ‘돈지랄’ 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이게 단순한 돈지랄 이야기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힘이 생길수록, 돈을 더 많이 벌수록, 망가진다 ……

그게 완전히 돈이나 지위 권력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그런 사람에게는 망가질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권력이나 지위가 적을 때는 스스로 조심도 했고, 약자로서의 인식이 나름의 정의감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서서히 숨겨두었던 어두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에게 새로 주어진 권력이 그 어두움을 그냥 개인적인 어두움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만들게 된다. 결국 이런 사람은 성공할수록 더 나빠지고 망가진다. 그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좋은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성공하는 바람에 추악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거다.

사실 이건 일부 인간들만의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소위 잘 나가거나 높은 자리하시는 분들 치고 망가지지 않는 인간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동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잘나가도 망가지지 않을 인간성은 없을지도 모른다.

1969년에 로렌스 피터라는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관료제도하에서) 인간은 자신이 감당 할 수 없는 지위까지 승진한다.
그 결과 모든 관료는 무능해진다”

‘피터의 원리’ 라고도 불리는 이 명제를 인간성과 성공에 적용하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 감당할 수 없는 지위까지 성공한다.
그 결과 모든 성공한 자는 흉악해진다”

그건 그렇다 치자.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 것이냐는 거다.
진심 어린 충고를 하면 될까? 천만에, 이런 사람들은 이미 간이 배 밖으로 나와버렸고, 귀는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골라듣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오히려 그 충고를 비수로 바꾸어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앙갚음을 할 뿐이다.

심리치료를 한다면? 자기 합리화와 방어기제로 든든하게 무장한 그의 심성에는 그 어떤 치료사도 소용이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은 아예 상담이나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길 테니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 모든 인간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이 변화하고자 할 때는 자신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했을 때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압박이 자신에게 절박하게 다가올 때에만 변화를 시작하려 한다는 거다.

그럼 이런 사람들이 왜 굳이 자기 자신을 고치려 해야 할까? 그럴 이유가 없다.
남들을 무시하고 이용하고 사기를 쳐도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약간 문제가 생겨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진압하고 무시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이 계속 잘 나가는 한, 이들의 문제는 고칠 수 없다는 얘기다 된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치료법은 그들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진짜로 절박한 상황에 집어넣고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진짜 좌절을 겪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그 사람을 도와주자는 건지 실제 공격하는 건지 구분이 안된다. 특히 상대가 당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런 시도를 해서 성공해봐야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어설프게 해서 실패하면 역으로 당신에게 진정한 위기가 닥칠 것이다.

결국 남에게 비난 받지도 않고, 자신도 안전하고, 효과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짜 같지만 진짜는 아닌” 좌절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마치 스쿠루지 영감에게 찾아온 친구 귀신이 제공해 준 것과 같은 체험 말이다. 이런 맥락을 알고 나면, 영화에서 하고자 했던 것이 뭔지 이해가 된다.

“다 게임이었어. 형이 더 이상 망가지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거든…”

이라는 동생의 마지막 말은 바로 그 얘기였다. 너무 늦어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기 전에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형을 돌이켜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아! 이 아름다운 형제애여 ……

그러나, 이런 이해에 도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의 우리에게 이 영화는 환상일 뿐이다.

우리에겐 그런 쑈를 할 돈도 없고, 돈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실감나는 체험서비스를 제공할 회사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런 어둠의 포스에 먹혀가는 인간을 걱정해주기 보다는 그들로 인해 황폐해져 가는 우리 자신의 삶을 더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부 인간은 지나치게 성공해서 망가지고, 더 많은 다른 인간들은 그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망가진 작자 때문에 성공하기도 전에 망가진다는 거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

영진공 짱가

1만 시간의 법칙과 과잉교육, “아웃라이어”

故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티핑포인트>와 <블링크>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이 쓴 새 책입니다.
저자가 쓴 앞의 두 책을 다 재미있게 읽었고, 이번에도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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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우리나라가 꽤 많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대한항공의 괌 추락사고에 얽힌 이야기,
권위주의와 계급문화가 어떻게 사고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죠.
그리고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놀라운 학업성취도 이야기가 나중에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어떤 지역의 농업보다 압도적으로 노동집약적일 수 밖에 없는 아시아의 쌀농사 문화가 근면성이라는 문화를 만들었고, 그 근면성이 학업성취도로 나타났다는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이 같이 나오죠. 근데 중국은 아마 중국 남부가 거기에 해당하겠죠. 북부는 글쎄 …

이제 본론입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원칙은 (역시 다들 아시겠지만) “1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무슨 일이든지 10,000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마스터가 될 최소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1만 시간을 투입해서 마스터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만 시간을 투입하지 않고서 마스터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거죠.

1만 시간, 하루에 3시간씩 매일 연습을 한다고 쳤을 때 9년에서 10년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하루에 3시간이 아니라 5시간이나 8시간씩 투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스터에 오르는데 걸리는 기간은 더 짧아지겠죠. 저자는 신동 모차르트 조차도, 이 1만 시간을 채운 다음부터 걸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진짜 어렸을 때 쓴 곡들은 유치하거나 혹은 아버지가 대신 써준 것으로 의심받는 것들이라는군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1만 시간입니다. 이걸 채우는 자가 성공의 최소 조건을 채우는 것이죠.





1만 시간의 법칙이 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죠.

첫 번째,
매일 하루에 3시간씩 10년간 뭔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개인의 의지로 될 일이 아닙니다. 주변 여건이 받쳐줘야 가능하죠. 10년은 발달단계의 한 두 단계에 해당합니다. 아동기에 시작하면 청소년기나 초기 성인기에 끝나고, 청소년기에 시작하면 성인 중기 쯤에 끝나는 거죠. 그런데 10년간 같은 일을 같은 의미로 계속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내게 중요한 거더라 … 라는 식의 경우가 더 많게 되겠죠. 결국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부모가 억지로 시키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러려면 문화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앞서의 아시아의 노동집약적 문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왜 흑인 아이들이 백인아이들보다 성적이 떨어지느냐. 저자가 지적한 거는 간단합니다. 흑인 아이들은 방학때 그냥 논다는 겁니다. 문화가 그러니까. 하지만 백인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은 방학 때 과외를 하죠. 네, 바로 그 과외. 방학 전에는 오히려 흑인아이들의 학업성적이 더 높지만, 방학을 끝내고 나면 백인아이들의 성적이 더 높아지는 비결이 그것이죠. 이것이 축적되어 결국 두 문화간의 거대한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두 번째,
차별화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도 1만 시간을 채우는 일을 똑같이 1만 시간 채워봤자 그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매일 3시간씩 최소 5년 이상 하는 게 뭔지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TV나 인터넷을 하는 거 정도더군요. 최근에는 출퇴근하는 데 평일에 한 2-3시간씩 쓰는 것이 추가되었고 … 다들 이런 거는 3시간씩 합니다. 거의 평생 동안 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소용이 없죠. 다들 하는 거니까. 즉, 1만 시간의 법칙이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남들이 안할 때부터 시작하는 1만 시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 그런 일이 생길까요? 일단 소수의 말 그대로 선택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자는 ‘빌 게이츠’가 그런 경우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다니던 고급 사립초등학교에는 자그마치 1968년(혹은 67년)에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펀칭기계로 입력을 하는 기존 컴퓨터가 아니라 키보드로 입력하는 (당시로선)최신형 컴퓨터가! 빌 게이츠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 컴퓨터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나중에는 그 동네 컴퓨터 회사에서 알바를 뛰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계속 되었죠.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1만 시간을 채웠습니다.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게이츠 부모와 같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되는 학부모가 기부금을 내서 컴퓨터실을 지어주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그 아이들 중에서도 빌 게이츠처럼 컴퓨터 논리에 금방 매혹당하는 컴퓨터 천재 자질이 충분한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죠.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한때는 그 가치가 별로 높이 평가받지 못하던 어떤 일을 억지로 해야 했던 사람들도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들 안하는 1만 시간을 채울 수 있죠. 책에서는 유태인들을 예로 듭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유태인들은 농지 소유를 금지당하고 유태인 거주구역(게토)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의 주류 산업인 농업이나 목축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시계 수리, 야금술, 혹은 고리대금업에 종사하게 되었죠. (여담이지만, 판타지에 등장하는 드워프들이 아마 유태인의 은유가 아니었나 싶더군요. 그들의 직업이 딱 저런 것들이죠)

당시에는 천대받는 일이었습니다만, 지금도 그렇던가요. 이런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그 가능성은 제대로 빛을 발휘합니다. 고리대금업은 금융이 되었고, 시계 제조기술이나 야금술은 정밀가공기술의 기초가 되었죠. 이렇게 성공한 유태인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법률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었지만, 이들에게도 역시 주변부에 해당하는 일들만이 주어졌죠. 1960년대 까지만 해도 기업의 인수합병 따위는 비신사적이고 지저분한 변호사업무였습니다. 잘나가는 로펌들은 아예 손도 대지 않던 일이었죠. 그 잘나가는 로펌들은 동시에 유태인을 동료로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태인 변호사들은 천시받던 기업 인수합병일을 해야 했고, 그 분야에서 1만 시간을 채울 시점에 천시 받던 인수합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버렸죠. 미운오리새끼가 따로 없더구만요. 결국 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난 덕분에, 주변부에서 마스터가 되었고 그들이 마스터한 기술이 주류가 되면서 성공한 부류가 되어 버린 것이죠.

여기에 든 것들은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예들 중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캐나다 프로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출생월이 대부분 1,2,3월에 몰려있는 이유도 설명하고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명예문화의 차이, 아시아의 완곡어법 문화의 특성, 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어떤 마을 사람들은 심장병이 그리도 적은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그리고 왜 아시아 아이들이 PISA 같은 수학능력 시험 점수가 높은지도 같이 설명하죠. 답을 간단히 하자면, 아시아 아이들은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도 계속 붙잡고 매달립니다. 풀릴 때까지. 미국 아이들은 그 도중에 포기하고요. 그저 그 차이 뿐이랍니다.

덧붙여, 미국 교육정책의 초기 입안자들은 ‘과잉교육’을 우려했다더군요. 즉, 지나치게 많은 교육을 받으면 사람이 맛이 간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속담도 있었죠. 놀지 않고 일만 하면 멍청이가 된다. 근데 그 사람들이 한 말들을 읽어보니 그냥 멍청이가 아니라 ‘또라이’ 가 된다는 투더군요. 영화 <샤이닝>에서 잭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긴 여름방학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과잉교육을 우려해온 전통 때문이라는군요. 읽을 때는 “참 그 양반들 별 (기특한) 걱정 다했네…” 싶었는데, 최근에 어떤 기사를 읽고 그들이 정말 지혜로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군가가 그랬다죠? 일주일에 뭔 책을 2-3권 읽고 신문은 매일 3시간씩 읽고 어쩌고 정부에서 내놓는 보고서도 … 주저리 주저리 …

이제 이해가 가는 거죠. 결국 그 동안의 그것들이 다 과잉교육의 폐해 였다는 사실이 …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교육도 자기 그릇에 맞게 받아야 한다 이겁니다.
안 그러면 그렇게 됩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