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썰 웨폰”, 권총 소품으로 표현하는 세대 차이



영화에서 주인공들 간의 차이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는 그 영화의 힘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영화 『친구』 의 네 친구들은 모두 친하지만 서로 다릅니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란 게 따로 있지요.

그것은 그들의 어릴 적 에피소드들에서부터 어른이 되었을 때까지 일관적으로 유지되고, 그래서 우리는 그 친구들을 실제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느낍니다.


외모 만큼이나 성격도 서로 달랐던 네 친구

『엑스파일』은 또 어떤가요. 사실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소재인 UFO와 외계인, 음모이론 등은 예전부터 여기저기서 써먹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엑스파일에는 이전 선배들이 갖지 못했던 것을 하나 더 가지고 있지요. 바로 등장인물들 간의 사고방식의 명백한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입니다.

멀더는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귀납적인 사고를 하는 반면에, 스컬리는 경험과 과학적 원칙을 중시하는 연역적인 사고를 하지요. 이 시리즈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대사가 “스컬리 나예요” 라는 멀더의 대사와, “멀더 지금 어디 있어요?”라는 스컬리의 대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멀더는 자기의 직관대로 좌충우돌하는 반면, 스컬리는 멀더가 흘리고 간 단서들을 주워 모으며 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는 얘기겠지요. 주로 이렇게 서로 다른 성격의 두 등장인물을 데리고 줄거리를 끌어가는 형식의 영화를 ‘버디영화’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차이를 보여주는 방식은 위에 말한 것처럼 아주 세련된 성격묘사도 있지만, 단순하게 선호하는 소품들이나 방식을 다르게 보여주는 것으로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숀 할아버지와 캐서린 양이 등장하는 영화 『엔트랩먼트』를 보면 이 두 도둑이 도둑질을 준비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우선 숀 영감은 구세대답게 레이저 광선을 빨간 털실로 재현해 놓고서는 캐서린양을 뺑이 돌리죠. 물론 그 덕분에 우리는 그녀가 아름다운 몸을 이리 뒤틀고 저리 뒤트는 광경을 감상하긴 하지만 … 쩝 …

… 정작 캐서린양은 감이 안 온다고 불만입니다. 그러던 그녀는 마침내 컴퓨터 3D그래픽으로 레이져 광선의 위치를 재현하고 나서야 ‘야! 이제 어떻게 하면 될지 알겠다!“ 라고 외치죠.

바로 이 장면

그렇습니다. 한 명은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시뮬레이션을 사용한 반면, 다른 한 명은 컴퓨터를 통해 묘사되는 3D 시뮬레이션을 선호했던 거죠. 도둑질에도 세대차이는 있어서 아날로그 세대인 숀 영감과 디지털 세대인 캐서린양은 이렇게 서로 달랐던 겁니다.

포스터에서부터 강조되는 베레타. 하지만 좌우가 바뀐데다 지금 막 오발직전 ... -_-;;;

그리고 영화 『리썰웨폰』(1987)에서는 그 세대차이가 바로 총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이 둘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선 한 명(로저 머터프 반장역의 “대니 글로버”)이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다정한 아내와 자녀들에게 둘러싸여 생일케이크를 뒤집어쓰며 나이 들었다는 걸 자랑합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 명(마틴 릭스 경사 역의 “멜 깁슨”)은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캠핑카에서 강아지랑 단 둘이 살며 벌거벗고 자다가 부스스 일어나서는 곧장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먹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장면 덕분에 한동안 멜깁슨은 헐리웃에서 가장 섹시한 엉덩이로 불렸습니다. 1991년 『델마와 루이스』에서 “브래드 피트”가 그 명칭을 Get 하기 전까지는 …)

이 영화에서 로저 머터프(“대니 글로버”)는 은퇴를 눈앞에 둔 노땅 경관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노장이고, 그만큼 안정되고 차분합니다. 반면에 마틴 릭스(“멜 깁슨”)는 특수부대 출신에 이제 막 경찰 일을 시작한 젊고 불안한 경찰입니다. 정서적으로는 불안하고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지만, 열의와 에너지는 펄펄 넘치죠.

빙글빙글 웃으며 노친네 기 죽이는 릭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는 서로가 선호하는 총기의 차이로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영화 초반부에 두 주인공이 주차장에서 서로 자기가 가진 총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머터프는 릭스의 총을 보며 이렇게 말하죠.
“흠, 베레타군, 자동발사에 15발이 장전되고, 탄피배출구가 넓어 잼이 걸릴 가능성이 낮다지?”


그러자 릭스 역시 머터프에게 선배님 총을 보여 달라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말하죠.
“스미스 웨슨 리볼버군요. 여섯 발 장전이죠. 근데 이 총, 나가기는 하나요?”

그리고 얼마 후에 사격장에서 둘이 자기 실력을 뽐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우선 머터프 아저씨가 사거리 7m쯤에서 자신의 리볼버로 표적의 정 가운데를 맞추고는 의기양양해 합니다. 그러자 릭스는 그 표적을 사거리 30m 정도로 밀어놓은 다음 자신의 권총으로 멋진 스마일마크로 장식해 줍니다. 이죽거리며 자리를 뜨는 멜과 순식간에 똥씹은 표정이 되어버리는 대니 영감의 대조 …


영화에서 머터프의 총으로 사용된 스미스웨슨 리볼버

로저 머터프 반장이 사용하는 총은 스미스 웨슨사의 전형적이고 미국적인 38구경, 혹은 .357 매그넘의 리볼버입니다. 리볼버들이 모두 그렇듯, 여섯 발 밖에 장전이 안되고 재장전도 오래 걸리고 귀찮습니다. 실제로 경찰용 총기로서 리볼버는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이라는 소릴 들을 만큼 구세대적인 물건이죠.

요즘 관점에서 심하게 말하자면 이건 그냥 총이 있다고 보여주기 위해 있는 물건이지, 실제로 누구와 총싸움을 하기 위해서 들고 다니는 물건은 좀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물론 .357 매그넘의 위력이나 실용성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탄약의 힘만 따진다면 같은 9mm라도 357 매그넘은 9미리 파라블럼 보다 훨씬 강력하고, 반동도 실용성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니까요)

영화에서 릭스의 총으로 사용된 바로 그 베레타. 일반형보다 슬라이드 멈치가 연장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마틴 릭스가 사용하는 베레타는 그야말로 (당시로서는)최첨단의 신세대 전투용 권총이죠.

미군에서 제식으로 채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최신형 자동장전식 권총인데다, (그리고 당시에 막 LAPD의 제식권총이 되었다죠) 디자인도 신세대답게 말끔하고, 사용하는 탄환도 당시 신형권총의 상징인 9mm 파라블럼 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열장전식 탄창(더블컬럼 이라 불리는)은 15발을 장전하고, 재장전도 아주 쉽습니다. 그야말로 쏘기 위해 들고 다니는, 총싸움에는 제격인 물건이죠.

결국 이 두 총은 등장인물의 서로 다른 성격을 부각시키는 소품으로서도 아주 적절한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 외에 이 영화에 등장한 총들을 한번 살펴보자면, 릭스가 사막에서 악당들을 저격할 때 사용한 게 독일 HK사의 저격전용 소총 PSG-1입니다. 1만 불 쯤 되는 고급저격총이지만 한계도 많은 총입니다.

정밀도는 높은데 스코프가 고정장착되어 있어서 600미터 이내에서의 저격에만 최적화되어 있고, 야시경도 못쓴다는 점. 총이 섬세해서 손질을 잘 해줘야 제대로 성능을 발휘한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무 무겁다는 점. 8kg 이 넘죠.

그리고 악당들은 대개가 역시 MP 시리즈와 M16 계열의 단축형 소총(흔히들 CAR이라 불리는), 그리고 우지 등등을 사용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다이하드』 만큼이나 이 영화에서도 베레타는 주인공 대접을 받습니다.
처음에 서로 가진 총을 소개할 때 10초 넘게 베레타가 보여지고 제원까지 소개 된데다
릭스가 혼자 앉아서 자살 쇼를 벌일 때의 장면은 거의 이 총의 조작 매뉴얼이죠. 어떻게 하면 베레타의 약실에 한 발을 안전하게 장전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먼저 탄창을 뽑고,
슬라이드를 뒤로 땡긴 다음,
안전장치를 안전상태로 내리고,
약실에 한발을 넣은 다음,
슬라이드 멈치를 누릅니다.
그러면 슬라이드는 앞으로 가면서 해머는 저절로 디코킹이 됩니다 …

여담 한 가지 더하자면, 베레타는 비교적 독특한 구조와 분해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이 영화 연작의 마지막편인 『리쎌웨폰 4』에서 인용되기도 합니다. 98년작 4편에서는 천하의 마틴 릭스도 더 이상 펄펄 나는 젊은이가 아니죠. 그래서 중국의 갱인 와싱쿠(“이연걸”)에게 졸라 두들겨 맞습니다. 그것도 그로서는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황당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릭스가 와싱쿠에게 베레타를 겨누자 우리의 손 빠른 연걸이는 순식간에 멜의 권총 슬라이드를 붙잡습니다. 붙잡으면서 슬라이드를 살짝 뒤로 밀었을 거고 이렇게 되면 방아쇠를 아무리 당겨도 헛놀게 되지요.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베레타의 분해래치를 내려버립니다. 그러자 어이없이 슬라이드와 프레임으로 나뉘어 버리는 베레타 … 황당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던 릭스는 그 다음부터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

붉은 원 안의 부품(분해 래치)을 화살표 방향으로 돌리면 즉시 슬라이드를 본체로부터 뽑아 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재주를 “성룡” 아저씨도 영화 『러시아워』 에서 보여준 적이 있었죠. 상대방이 겨눈 총을 순식간에 분해하기는 중국 무술가의 전매특허인 듯 합니다.

참고로, 이런 방식으로 분해되는 건 베레타 뿐이 아닙니다. SIG 계열도 마찬가지입니다. SIG는 오히려 더 쉽죠. 반면에 글록을 이런 식으로 분해하려 했다가는 오발이 나서 사망하기 딱 좋고, 콜트나 스미스웨슨 계열은 분해하려면 아예 슬라이드를 뒤로 잔뜩 밀어야 하기 때문에 역시 불가능 합니다.



SIG 사의 자동권총인 P229. 역시 베레타와 비슷한 분해래치가 보이죠.

스미스 웨슨 사의 전형적인 자동권총. 분해래치가 따로 없죠. 이런 총은 슬라이드 멈치가 분해핀 역할도 겸합니다.


영진공 짱가

 

“씬 (2004, The Sin Eater)”, 설정을 받쳐주지 못하는 느슨한 연출


한 편엔 『LA 컨피덴셜』과 『미스틱 리버』, 또 한 편엔 『페이백』과 『포스트맨』, 그 가운데쯤에 『기사 윌리엄』과 『맨 온 파이어』.
 
“브라이언 헬겔란드”는 사실 감독보다는 각본가로서 더 관심이 가고, 그건 단연코 『LA 컨피덴셜』과 『미스틱 리버』 때문입니다만, 이 사람은 작품의 수준 편차가 너무 심합니다.
 
『LA 컨피덴셜』과 『미스틱 리버』는 그보다 더 잘할 수 없는 최상의, 그리고 놀라운 각색이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맨』과 『페이백』의 존재는 이 사람의 능력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나쁘지 않은 흥행서적을 거둔 『기사 윌리엄』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영화고 저도 꽤 좋아하지만, 사실 ‘훌륭한’ 각본이라고 말하긴 힘들죠. 사실 이렇게까지 심하게 편차가 나는 것도 쉽지 않은 재능일 겁니다만. 하여간, 형편없는 각본(그리고 연출)쪽 그룹에다 『신 이터』를 추가해야 할 것같습니다.

설정은 매우 근사합니다. 어두운 바로크풍의 화면에서, 고뇌하는 우울한 표정의 카톨릭 내 소수파 신부 알렉스(“히스 레저”)는 (이전에 파문당한) 자신의 스승의 석연찮은 죽음을 맞게 되면서 배후에 교회의 적으로 간주되는 신 이터의 존재를 감지하게 됩니다.

신 이터(Sin Eater)는 말그대로 죄를 먹는 자, 교회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의식을 치러주어 그들이 죽기 전 그들의 죄를 대신 먹어주는 자입니다.

교회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치는 카톨릭(+개신교)에서 신 이터의 존재는 이단이자, 교회를 위협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 근사한 설정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상당히 헐렁해집니다. 플롯도 그렇지만 연출과 편집 자체가 어쩜 그렇게 헐렁하고 느슨한지. 전체적으로 영화는 상당히 B 분위기를 풍깁니다. 배우들도 좀 낯설죠.

하지만 이 영화가 돈을 별로 안 들인 게 아닙니다. 로마 로케이션에 성바오로 성당도 나오고요. B스런 화면에도 불구하고 『크로우』는 얼마나 광폭한 섹시 에너지로 넘치는 스타일리쉬한 화면이던가요. 이 영화도 그걸 하고 싶어합니다만, 그리고 일부는 성공합니다만, 문제는 말입니다. 전체적으로 일관성있는 스타일을 구축하지 못하고 파편화된다는 겁니다.

게다가 신 이터를 접하면서 자신의 신앙체계에 의문을 증폭시키고, 가슴 속에 은밀한 사랑의 욕망을 억제하고 있으며, 교회의 독선과 냉혹함과 배타성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복잡다단한 갈등을 가진 신부라는 설정이 “설명”만 될 뿐 “표현”되지는 않는 단점입니다. “히스 레저”는 마치 나무토막 같아요.

정작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젊고 섹시한 육체를 가지고 있고, 知에 대한 갈망으로 눈을 빛내고, 세상의 모든 고뇌, 그리고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 사이에서 창백한 낯빛을 한 수단 차림의 젊은 신부만큼 강렬한 매력을 발할 수 있는 영화 주인공이 누가 있을까요.

막 『기사 윌리엄』을 끝내고 주가가 오르고 있던 “히스 레저”가 창백한 얼굴로 수단을 입은 모습은 확실히, 영화 맨 처음엔 꽤나 자극적입니다. 문제라면, 그가 이 영화에서 너무나 뻣뻣하게 연기를 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자신의 매력들마저 다 깎아먹고 있단 사실이지만요.

도대체가, 이 캐릭터의 복잡다단한 갈등 요소들이 대사로 이래저래 주절주절 읊어지긴 하는데, 그는 이 캐릭터의 내적인 갈등을 좀처럼 표현해주질 못합니다. 하긴, 각본 상태에서 이미 글러버린 것 같지만요. 외국의 어떤 리뷰어가 이 영화를 이렇게 평해놨더군요. “이 영화는 미스테리 없는 미스테리이고, 호러 없는 호러영화, 사랑 없는 멜러영화, 종교비판이 없는 종교비판 영화다.” 그렇습니다. 설정만 그럴 듯할뿐 알맹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예정된 수순을 밟아갑니다. 심지어 악당이 밝혀지는 반전까지.

문제는, 훌륭한 감독들은 뻔한 플롯을 갖고도 엄청나게 강력한 영화를 만드는데, 그의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매치 포인트』만 해도, 그 줄거리를 말로 요약하고 나면 우리가 몇십년 동안 드라마로 영화로 줄창 보던 흔하디 흔한 치정극에 불과합니다만, 정작 영화는 얼마나 훌륭하던가요.

각본가 출신의 감독들의 문제는 대체로 이들이 화면의 구성에 서툴다는 점입니다.

단 5 분의 영상이 스크립트 열 페이지의 대사를 대신하며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전달해줄 수 있는지를 종종 까먹는 듯합니다. 언제나 ‘훌륭한 각본가’ 출신의 감독들은 ‘설정은 좋았는데 영화가 망가져~!!’라는 비판을 듣곤 하는데, 헬겔란드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모든 설정을 다 1차원의 얄팍한 대사로 주절주절 설명해 버리는 이 영화를 보다보면, 헬겔란드의 각본가로서의 능력에도 의심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가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영화 두 편이 모두 ‘원작’이 있었다는 사실이 상기돼 버리거든요.

그러나 영화팬의 비극이란, 때로 영화가 열라 후져도 그저 한 가지 마음에 드는 점 때문에 그 영화를 좋아하게 되곤 합니다. 이제 뭔가 나오려나, 기대만 하다가 영화가 끝났을 때의 그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설정이 워낙 마음에 들어서인지 저는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영화에 그럭저럭 관대하게 굴기로 합니다. (아쉬움은 크지만요.)

아무리 만담 콤비의 만담이 효과가 없고, 몇몇 씬은 씬 자체의 매력이 영화 전체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바보스럽게 되고, 캐릭터가 후지고, 배우들이 뻣뻣하다고 해도요.

모르겠습니다, 만약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봤다면 이 영화를 어느 정도 두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ps. 제가 신 이터로 생각하는 이미지와 이 영화에서 신 이터로 나오는 베노 퓌먼의 이미지가 너무 다릅니다. “베노 퓌먼”은 너무 매끈하고 젊어서, 응당한 냉소의 카리스마가 별로 나오질 않습니다. “섀닌 소새먼”은 아름답긴 하지만 왜 배우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my way’가 너무 강해서 모든 캐릭터를 지극히 평면적으로 만들어 버리는데요. 『기사 윌리엄』이나 『40일낮, 40일밤』이나 이 영화나, 이 배우가 그려내는 캐릭터는 언제나 비슷비슷합니다.

ps2.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씬』이란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왔고(극장 개봉은 했다고는 하는데 걍 땜빵프로였던 것같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The Order』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습니다.

영진공 노바리

 

“마크로스F VF-25S”, 3년 만의 프라모델 만들기 (1/2)




 아마도 향후 10년간은 못할 프라모델 만들기의 마지막이 될듯한 싶은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다키워서 보내고 나면 침침해진 눈과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해야지요.(정말?) 



1. 박스열기

 

반다이의 마크로스F 1/72 오즈마기 VF-25S입니다. 2008년에 나온 것이니 3년이 지나 만들어보는, 대세와는 전혀 무관한 갑작스런 만들기입니다. 건담쪽이 시들한데다, 전에 부터 만들어보고 싶었던 조립식이라 시작했습니다.








1년 반 전쯤 HLJ에서 반값세일하길래 언젠간 만들겠지 하며 질러두곤,
 묵혀왔던 오즈마기, 드디어 박스가 열렸습니다.
 




화려한 액션씬이 많았던 마크로스F. 

마크로스하면 꼭 나오는 상징적인 전탄발사!
(저렇게 하면 미사일들끼리 막 부딛혀 터지지 않을까?)





마크로스F는 액션중심으로 재밌게 봤습니다만은 시리즈에 대한 관심은 사실 크지 않습니다. (아, 노래들, 특히 요코 카노가 맡은 음악들은 정말 좋아합니다.)  우선은 SF물들중 외계인이 등장하는 스토리에 이상하게 흥미가 떨어지는 취향인지라 젠트라디라는 거인족이 나오는 마크로스 사가는 관심을 별로 못느꼈죠. 다만 80년대기준으로 봐도 튀는 뛰어난 액션연출이 기억에 남고, 또 외계종족이 나오고 뭔가 환타스틱한 스토리이어야할 시리즈가 유난히 많은 등장메카 VF시리즈는 건담을 부끄럽게할 만큼 리얼한 매력을 풍겨서 지나칠수가 없습니다.


2. 설정


이제 프라모델 만들기. 만들기야 그냥 그것으로 즐기면 되는것이지만 건플라 만들땐 이런저런 배경설정이 있어야 재밌어하는 제 성격상 처음 만들어보는 마크로스 기체에도 스토리를 넣고 싶은데  어떻게든 젠트라디니 거대우주전함이니가 없는 상황에서 존재하는 VF-25를 만들고 싶어서 궁리한끝에 생각한것이 미국방성의 실험기 개발사업입니다.

그것도 마크로스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에 착수된 가변형전투기라는것이죠. 찾아보니 실험기는 X-29 처럼 X로 시작하길래 이름을 X-74으로 잡아버렸습니다. (VF-25이니 X-25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쓰였더군요. )





어릴때 보면서 미래형 최신 전투기 처럼 각인된 X-29. 전진익 시험용. 

전진익 디자인인 마크로스 플러스의 YF-19 가변 프라모델이 제대로 나왔다면
 그걸 만들고 싶었을겁니다. 반다이, 쫌.







VF-1의 디자인 리파인이라 할수 있는 VF-0.
이것도 변형키트로 반다이가 신경써서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쫌.
 




원래 이름을 붙이고 싶었던 X-25의 실제기.
추락한 파일럿의 탈출용 초경량 자이로콥터로 1955년에 연구된 실험기라는군요.
 


3. 스토리


전투기로서의 기능과 함께 동체의 일부나 전체를 변형시켜 지상전 임무에 바로 투입 가능한 전천후 가변형 전투기 개발을 목표로한 실험기의 야심찬 개발 계획. 그 발단은 영화관. 트랜스포머에서 스타스크림의 전천후 전투장면에서 시작되었다.

군기밀상 신상이 공개되지 않은 신무기개발연구원인 L박사는 트랜스포머를 즐겁게 감상한후 변형전투기에 대한 구상(이라기보다 상상)을 시작하게 된다. 





오토봇과 지상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비상하여 공중전을 수행하는 스타스크림.
야비한 캐릭터만 아니면 참 멋진데.
 





하지만 비현실적인 영화속 캐릭터의 디자인을 보고 다른 사례를 찾던 L박사는 어릴적에 보던 Robotech(일본원제 마크로스)에 등장했던 Veritech (발키리)를 떠올리게 된다.





거대전투로봇이라는 다분히 아동적인 발상과는 달리 발키리가 보여줬던 비행기와 그 중간단계처럼 보이는 gerwalk 모드는 현재 사용되는 추력편향노즐 (thrust vectoring nozzle)의 확장된 개념으로서 충분한 의미와 실현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L은 전투기에서 제트엔진전체를 가동하여 엄청난 자유도의 추력편향은 물론 착지시 다리 역할도 하도록 하는 연구에 대한 개발사업계획서를 제출하여 주변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기적적으로 예산을 따내게 된다. (어차피 지어내는 이야기이니 대충 그런줄…^^)  



L박사의 개발팀에는아니메메카 오타쿠성향의 연구원들이 대거 지원하는 바람에 인원 선정에 애를 먹을만큼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고, 그 덕분인지 일반적인 프로젝트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인, 마크로스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비밀리에 접촉하고 메카디자인을 담당했던 디자이너를 초청하는 일까지 쉽게 성사되었다.  복잡한 판권문제로 80년대 마크로스 (로보텍) 이후의 속편 시리즈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제작팀은 오리지널 이후 지속적으로 진화한 후속 VF기들의 변형메커니즘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화면상에서만 그럴듯해 보이는데서 만족하지 않고 마치 가상의 병기를 설계라도 하듯 집착적으로 디테일에 신경을 쓴 메카디자인의 퀄리티 때문이었다.

당시 기획단계이던 마크로스 신작에 등장하는 최신판 발키리 VF-25의 디자인과 CAD 자료까지 얻게된 개발팀은 vf-25의 비행체 형태가 실제 비행에 적합하다는 의외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바탕으로 아예 VF-25을 실제 개발의 베이스로 선택하여 연구를 시작하여 아니메의 메카를 두고 한쪽에서는 장난감/프라모델 설계를, 동시에 다른쪽에서는 실제 기체의 설계가 진행되는 상당히 만화적인 상황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VF-25의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CAD로 모델링되어 극중에 CG로 등장할 VF-25기








미그29기의 추력편향노즐.
이것이 발가락을 까딱까딱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다리 전체를 쓰는 시대가 온다!
 




VF-25의 완구 이미지.
완구시제품 역시 개발진에 보내어져 참고자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연구원들의 책상마다 액션피겨들이 다양하게 진열되어있는
보기드문 광경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전투기와 거워크 형태의 비교적 단순한(?) 변형을 목표로 삼았던 개발작업은 고층건물이 밀집된 지상에서의 본격적인 시가전에서의 대응성에 대한 추가연구를 지시받고 비행체를 수직으로 세울 경우 얻어지는 전술적인 우위에 주목 인간형 모드(배트로이드)로의 변형까지 연구를 확대하고 애초의 개발예산의 400%를 초과한 추가예산을 배당받는다. (일본방위성이 건담을 실제 병기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소식에 흥분했던 오타쿠들이 미국방성에도 꽤 많지 않았나 추측이 된다.)






세부는 다르겠으나 전체적인 실루엣은 완성기와 흡사한
VF-25의 인간형 배트로이드 모드 (완구 이미지)
 


4. 놀고 있네.


재밌게 놀아봤습니다 ^^. SF영화에 등장했던 상상의 물건에서 영감을 얻어 실제로 개발되는 무기나 도구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크로스라고 못할쏘냐 싶은겁니다. 손목시계에 들어간 스파이 카메라 뭐 이런거보다 덩치나 규모가 좀 크다 뿐이지 결국 비슷한 케이스 아니겠습니까? 흠흠


어차피 프라모델은 만들 시간도 여건도 잘 안되는 상황에서 급하게 후다닥 하나 만들면서 정작 더 즐기는건 이런 (말도 안되는) 뒷얘기 만들어내기입니다. 뭐 이게 제가 프라모델을 즐기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해야겠죠.  잘은 못만들고 시간도 많이 못들이지만 오랫만에 조립식 하려니 즐겁습니다. ^^




영진공 노타입

“고백”, 과연 만점을 받을 만한 영화인가


<킹스 스피치>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신작 <고백>도 일본 아카데미상의 주요 부문 –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 편집상 – 을 석권하면서 관객들의 기대치를 한껏 올려놓으며 국내 개봉이 이루어진 작품이다.

<킹스 스피치>가 미국 아카데미 주요 부문 석권이라는 화려한 후광을 입고 개봉한 것에 비해 실제 작품은 상당히 수수한 편이더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고백>은 일본 내에서의 수상 경력 뿐만 아니라 그간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뜨거운 관심이 조금도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관람이 되었다.

영화를 보자마자 월척을 낚아올린 강태공 마냥 만점의 영화를 보았노라며 트윗질을 해버렸건만, 그래놓고선 막상 감상문을 적으려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과연 만점 영화의 자격이 – 워낙에 기분 내키는 대로 후하게 쳐주는 별점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공개할 때에는 그 객관성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 충분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무난하게 추천까지 해드릴 수 있을 만한 작품들의 카테고리인 별 네 개의 영화인 것은 분명한데 <고백>이 과연 그 이상의 무언가를 더 갖춘 영화인 것인지, 최소한 나 스스로에게만이더라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분명히 해두어야 별 다섯 개 만점 그대로 표기를 해놓고도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으리란 생각에 약간의 뜸 들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특유의 과장과 과잉의 스타일은 국내 개봉된 전작들, <불량공주 모모코>(2004)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그리고 <파코와 마법 동화책>(2008) 중에서 아무 작품이나 한 편만 보더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특징인데 이것이 1인칭 독백체로 진행되는 독특한 형식의 베스트셀러 소설 <고백>과 만나 매우 독창적인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영화 <고백>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첫번째 이유다.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가려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고백>은 감독의 스타일은 스타일대로 잘 살아있으면서 베스트셀러의 영화화라는 과제는 그 나름 성공적으로 완수를 해낸, 매우 보기 좋은 사례를 남겨주었다는 얘기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오래 전에 만점 영화로 치켜주었던 또 한 편의 영화 –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는 사실 역시 <고백>에 만점을 주게 된 이유였던 걸로 기억한다. 두 작품 모두 십대들의 어두운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소재와 내용에서의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그 보다는 기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이 보다 더 잘 만들 방법이 없어 보일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점 역시 두 작품을 흔쾌히 비교해보게 만드는 것이다.

예고편을 보면 중학교 교사인 여주인공(마츠 다카코)이 담임을 맡고있는 학생들 앞에서 “내 아이를 죽인 범인이 이 학생들 중에 있다”는 설정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이 부분은 전체 작품의 그저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그 만큼 관객으로서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되었다. 한 마디로 기본적인 설정만을 알고나서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상상해볼 수 있는 한계를 계속 돌파해나가며 전개되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감독은 2002년작 <아들>에서 자기 아이를 죽인 또 다른 아이를 상대해야 하는 주인공 어른의 딜레마를 다룬 바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고백>은 결말 부분이 상당히 작위적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영화를 통해 던져진 수많은 화두들이 주인공 한 사람의 복수극의 틀 안에 갇혀버리게 된다는 한계점을 지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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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때문에 <고백>이 과연 만점 영화로서 충분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인지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것도 작품의 수준을 크게 좌우할 수 있는 마무리 부분에서 한계를 노출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만점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영화 평점이라는 것은 영화를 통해 얻은 각자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나는 <고백>에게 처음 감정 그대로 만점을 주기로 했다.


영진공 신어지


 

“더 락(The Rock)”, 소품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




영화에는 여러 가지 소품이 등장합니다. 소품은 영화 전체의 맥락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눈 좋은 관객들도 그걸 알아차립니다. 사실 소품으로 분위기를 내는 건 영화만의 일은 아닙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이 양반은 주인공이 뭘 입고 뭘 신고 뭘 만들어먹는지를 꼼꼼히 서술해 놓고 있죠. 입는 옷이나 가방의 브랜드까지도 써놓습니다. 저 같이 그런 거에 무딘 사람도 그걸 읽으면 이 사람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기술방식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습니다.

헐리웃 영화에서 뉴욕이나 LA도 하나의 거대한 소품이죠.(다이하드3 에서)

그러니까 영화에 뭐가 등장하는지, 주인공이 뭘 입고 어디서 뭘 먹고 무슨 차를 타는지는 매우 중요한 연출 요소입니다. 액션 영화에서는 총도 바로 그런 중요한 소품 중에 하나죠.

『미션임파서블3』에서도 총이 한 시퀀스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간신히 오웬 데비언을 붙잡아서 호송하던 이단 헌트 일행은 체서피크만의 긴 다리 위에서 데비언 일파가 조종하는 무인기(UAV)의 습격을 받습니다. 무인기에서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차는 뒤집어지고 아수라장이 벌어진 와중에 오웬데비언은 호송차에서 빠져나와 유유히 헬기에 올라타려 하지요.

그걸 본 이단 헌트는 뒤집어진 자동차에서 총(독일군 제식소총인 G36이죠)이 담긴 가방을 간신히 꺼내는데 열어보니 이 총이 분해된 상태네요 …

이런 무인기 '글로벌 호크' 쯤 되면 그 정도 공습도 가능하겠죠 ...

사실 정밀 저격총도 아니고 G36같은 일반적인 소총을 분해해서 넣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PSG1 같은 2만불 짜리 저격총도 전용 가방에 통짜 그대로 들어갑니다. 게다가 이 G36 소총은 개머리판까지 접어지기 때문에 공간절약을 위해서라는 핑계도 안먹히죠.

근데 뭐하러 IMF 애들은 총을 분해해서 넣고 다닌 걸까요? 오로지 아찔아찔함을 연출하기 위해서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일 초가 급박한 상황에 총까지 세 토막 나 있으니 관객들은 더 조마조마합니다. 빨리 조립해야 하는 주인공의 입장에 감정이입 하는 거죠.

갈길이 바쁜데 별게 다 걸리적 거리네 ...

조립 다 했다!!!


영화 『더 록』(The Rock)을 살펴보자면,
저는 이 영화의 매력은 거의 소품 덕이라고 봅니다. 광고감독 출신인 “마이클 베이”의 현란하고 속도감있는 연출도 나쁘진 않았지만, “숀 코너리”와 “에드 해리스”라는 두 중량급 배우가 만드는 무게감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참 어설픈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을 겁니다.

이 영화, 스토리도 빈틈이 많고, 중간에 액션도 적고(의외로 이 영화에 액션장면이 적어요), 감옥 내부 묘사도 상당히 엉성하거든요.


숀 코네리와 에드 해리스, 이 둘은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소품 입니다.마이클 베이는 이런 배우 소품이 없으면 참 얄팍해지더라는....

여튼 이 영화에서 허멜 장군 역의 “에드 해리스”는 미국을 위해 죽어간 자기 부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책임감을 느끼고, 군상층부의 반성을 요구하기 위해 신경가스를 탈취해서 미국에 테러위협을 가합니다. 그는 알카트래즈 섬을 점령하고 관광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전사한 부하들의 명예회복과 응분의 보상금을 주지 않으면 인구밀집지역에 신경가스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협박하죠.

그래서 감옥에서 수십년 썩은 노친네 “숀 코너리”와 화학자 FBI요원 “니콜라스 케이지”가 특파되고 …… 결국 이들의 활약으로 미사일은 하나하나 제거되는 와중에 허멜은 자신의 협박 앞에 묵묵부답인 미국방성의 반응에 당황하지만, 미사일을 정말 쏴야 한다는 부하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결국 부하들은 하극상을 일으키는데, 부하들의 반란을 예감한 허멜은 미리 Colt .45를 허리춤 뒤에 감춥니다. 그리고 돈에 눈이 먼 부하들이 허멜에게 신경가스 미사일을 발사하라고 베레타 M92FS 를 겨눌 때, 그들의 미간에다 콜트 .45를 겨누죠.

니들이 감히 하극상을 일으켜?

왜 해리스는 남들이 다 새 권총으로 바꿀 때 여전히 구닥다리 콜트를 계속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냥 구닥다리도 아닙니다. 빤질빤질한게 예전 지급품을 계속 쓴다기 보다는 새로 하나 따로 장만한 모양새죠.

그 당시에는 이미 군의 제식권총은 베레타 M92F 로 바뀐 다음입니다. 그럼 그는 신형제식 권총이 지급된 다음에 일부러 예전에 쓰던 콜트45를 다시 구입해서 들고다녔다는 얘깁니다. 총알보급도 받기 귀찮은(베레타는 9mm 탄을 쓰고 콜트는 .45 구경탄을 씁니다. 권총이 바뀐 이후 군대 내에서 45구경탄은 사실상 쓸데가 없어졌으니 그만큼 보급도 희귀해지겠죠) 총을 계속 쓰고 있다는 거죠. 뭐 총알보급이야 부관이 좀 고생하면 되고, 하니까 그저 장군의 사치심이 발현된걸까요? 왜 그랬을까요?

이 장면은 총기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그냥 “어, 둘이 쓰는 권총이 다르네?” 혹은 “역시 멋진 주인공은 권총도 뭔가 다르군~” 정도로 넘어갔을 문제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장면은 총기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스토리와 이미지를 결정짓는 역할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에 등장하는 사소한 총기류에 대해서도 “많이 알수록 많이 보게 된다”는 경험의 규칙은 예외 없이 들어맞는 것이죠.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많이 앎으로서 영화를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고, 엉터리와 진짜를 구분함으로써 뭐가 진품인지 감별할 수 있는 기준을 하나 더 제공하고 싶거든요. 관객들의 눈이 높아지지 않는 한, 우리나라 영화의 총기 고증은 맨날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베레타 ...



베레타는 15연발 탄창과, 각종 안전장치를 장비한데다, 우아한 곡선미까지 가지고 있어 멋과 기능성을 다 가지고 있다고 칭찬받던 총입니다. 적어도 80년대 당시에는 이 총 참 멋졌습니다. 하지만, 이 총은 미국제가 아닙니다. 이탈리아제죠. 더구나 베레타가 사용하는 9mm탄이 뭡니까. 바로 미국의 적이었던 독일군이 루거 권총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파라블럼탄이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콜트 .45는 비록 7발밖에 장전할 수 없고, 안전장치도 부실해서 잘못 다루면 위험한 구닥다리죠. 그러나 이 콜트는 1911년부터 미군제식 권총으로 채용된 이후,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터에서 변함없이 60여년간 미군과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미군의 역사와 전통을 의미하는 총이죠.

콜트 45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해리스가 든 콜트와 부하들이 든 베레타는 단순한 권총이 아니라 두 집단이 가진 철학을 반영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멜 장군은 비록 인질범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그 바탕에는 미군 본연의 정신에서 벗어나버린 미군에게 반성을 촉구하려는 충성심이 있었다는 거죠. 즉, 허멜은 여전히 미국 군인입니다.

반면에 그의 부하들은 허멜이 내세운 막대한 보상금 때문에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미군의 정신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단지 돈을 벌수 있으니까 뭐든 하는 것이죠.

장군님 돈 줘여 ....


이런 배치를 하려면 소품 담당자가 총기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총기와 군장 관련 고증 수준이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이 좋습니다. 영화를 보면 초반부에는 주인공들의 군복 색이 제각각입니다. 누런 옷, 국방색 옷 … 철모도 없는 자가 부지기수고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군인들의 복장이 통일되고 제대로 갖추어집니다. 이건 전쟁 초반에 보급품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미군과 유엔의 지원을 받아 제모습을 갖춰가던 남한군의 상황을 적절히 반영한 소품 배치죠. 물론 총들도 거의 무리없이 사용되었구요.


군복 뿐만 아니라 자세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숙련도 차이가 보입니다

이렇게 소품활용의 수준이 높아진 배후에는 “김세랑”이라는 군장전문가가 영화의 고증을 담당했던 덕이 큽니다. 처음에는 ‘6.25때 군복이 다 거기서 거기지 …’ 라는 태도를 보이던 영화스탭들에게 당시의 군복이 시기별로 어떻게 달랐는지를 직접 보여주며(그는 온갖 진품 군복을 소장하고 있죠) 설득해서 그런 차이를 만들어냈던 것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에 제작비 투입할때, 스크립트 닥터와 고증 전문가에게 돈 좀 더 쓰시라는 겁니다. 그래야 오랫동안 먹히는 영화가 만들어지니까요.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