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다 죽어야 사는 이상한 신세계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은


즉시 뒷칸으로 돌아가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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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 대해서 좋다는 얘기, 싫다는 얘기, 뭔 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얘기 등을 다 듣고 난 뒤에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이 영화가 최근 몇 년새 본 영화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을만하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허나 이런 나의 평가는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독이 심어놓은 철학에 대한 것이어서, 소위 영화적 완성도라든가 관객과의 소통방식이라든가의 요소에 있어서는 최고가 아니라 지적해도 그닥 반박할 생각은 없다.


 


영화가 좋다고는 평가를 하지만 사실 관객이 왜 이렇게 많이들 보러 오시는지는 아리송하다. 캐릭터가 뜬금없기도 하고 전개의 개연성이 없는 장면도 많고 무엇보다 결론에 대한 모호함이 관객 동원력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리송하든 대단하든 일단 “설국열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영화 보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는 ‘나르는 신발짝’


2008년 이라크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에게,


이라크 출신 기자가 저항의 의미로 신발을 집어 던진 적이 있다.


 


 


 


1. 다 죽어야 산다


 


영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다 죽는다. 왜 그래야 했을까?


 


편의상 열차 안에서 업악받고 있는 꼬리칸 쪽을 좋은 편이라고 하고 체제를 장악하여 조정하는 쪽을 나쁜 편이라고 하자.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느 쪽에 있는 누가 좋고 누가 나쁜 건지 무척 헷갈리게 된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인 거다.  결국 중간에 희생당한 사람들만 불쌍한 거다.


 


그리고 좋은 편이 죽어서 더 애틋하다거나 나쁜 편이 죽는다고 해서 통쾌하다거나 하질 않는다. 영웅도 없고 악당도 없다. 그냥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죽음에 대한 거창한 명분이나 맥락도 없이 뜸들이지도 않고 그냥 죽임을 당한다.


 


그간 많이 보아온 영화처럼 하자면 … 거대한 악의 세력과 이에 맞서는 정당하지만 나약한 이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 짜릿한 죽음과 숭고한 죽음이 대비되면서 관객이 관람하기 편하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좋은 편이 승리하여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든지 아니면 처절하게 패배하면서 관객들에게 의문점과 고민을 안겨주든지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거 없다. 그냥 다 죽는다. 그리고 그게 옳다.


 


영웅이 되어야 할 등장인물이나 악당이 되어야 할 등장인물 모두 다 이미 체제 안에서 순이든 역이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주어진 에너지와 윤리 한계치를 다 지나치게 오버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전개에 적합한 긍정의 힘이 아니라 부정의 힘 퇴행의 힘으로 작용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대단히 수고하셨지만 이제 그만 안녕~


 


 


 



미안하다 … 다 안녕이다 … 한 명만 빼고


 


 


 


커티스가 메이슨을 잡기 위해 에드가를 포기하는 장면을 보자. 아무리 반란의 목적을 위해 절실했다 하여도 커티스는 에드가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거다.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란의 선봉장으로 다시 날 수 있었던 동기가 바로 에드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커티스는 대의를 위해 사람을 버린 죄를 저지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라면, 커티스는 에드가를 구하러 달려 갔을 것이다. 그래도 에드가는 죽었을 것이고 그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가 오히려 커티스를 더 달구어내 결국엔 어떻게든 메이슨을 잡고 복수의 행보를 가열차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저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모두들 커티스에게 전자를 요구할 것이다. 겉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메이슨을 잡기를 바랄 것이다. 후에 비인간적이지만 대의를 이끄는 냉철한 지도자로서 어쩔수 없었노라고 합리화 될 터이고.


 


후자의 커티스는 어떨까? 인간적이고 이해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결국엔 모두의 운명을 짊어져야 할 리더가 될 수는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이다.


 


대의를 좇아 사람을 버린 커티스든, 대의를 저버리고 사람의 정을 좇은 커티스든 자신의 역할이 마무리되면 어떻게든 속죄를 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다 사라져야 새 세상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봉감독의 의도된 메시지인 건지 아니면 나의 오역으로 인한 자뻑인 건지는 중요치 않다. 메시지가 있든 없든 옳든 그르든 그걸 결정하는 건 매우 당연하게도 순전히 관객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2. 플랜 같은 거 있기? 없기?


 


따지고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무모하고 생각 없는 인물은 주인공 커티스다.


 


그에게는 계획도 없고 정보도 없고 플랜B도 없다. 눈 앞에 보이는 한 가지 장애물 제거에만 온 신경을 쓸 뿐 애시당초 정체모를 소스가 보내주는 쪽지에 모든 상황판단을 의지하고, 물론 길리엄이 부추겼지만, 앞으로 가서 뭘 어떡해야 겠다는 목표도 없다.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일단 가는 거다. 가서 뭘해야 할지 생각하는 거다. 거기에는 여기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을 테니 거기가서 … 아 잠깐만 … 그 다음엔 뭘 해야지? … 그래! 그거야! 윌포드를 처단하고 엔진을 점령하고 그리고 … 그리고 …


 


아예 플랜이 없다. 있다면 그저 길리엄을 지도자로 옹립한다는 거. 그외엔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얻고 그걸 어떻게 활용하고 그리고 일정 지점에서 협상을 시작할지 더 나갈지 판단하고 뭐 이런 거 없는 거다 … 오로지 진격이다 … 나를 따르라!


 


어 그런데 또 잠깐 … 진격을 계속 하려면 앞칸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보안 전문가의 도움이 없이는 안된다. 그러니 그에게 가자  우르르 … 이게 뭐하자는 건가 지금 ….


 


 


 



여기 송강호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 계신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빼앗긴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해 나서서 싸우는 거는 너무도 당연하고 옳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 한다. 여기에는 아무 이견이 없다. 그런데 왜 계획을 안 세우냐고? 최소한의 준비는 왜 안 하는 건데, 분노만 쌓아 올릴뿐 … 뒤를 따르는 많은 이들 모두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거사를 하면서 왜 배수의 진으로 덤비는 건데, 안되면 다 죽자는 거야? 무슨 불사파야?


 


그래, 너무도 힘이 열세이고 전혀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계획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냐 하겠지. 그렇다면 단계적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도 되지 않을까. 여건의 변화를 유도해내면서 말이야. 한 칸 앞으로 가서 버티고 협상하고 또 한 칸 앞으로 더 나가서 협상하고 이렇게 말이다.


 


뭘 하더라도 사전에 최소한의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은 가지고 가야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일단 일을 저질렀다 해도 언젠가는 이기고 성공하려면 그 시점에서 주어진 조건을 살펴보고 계획을 세우는 정도는 해야 한다 … 이보시오 커티스씨,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문부터 따기 전에 일단 의견수렴과 대책강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


 


 


 


3. 세상 만사 다 단계가 있다.


 


윌포드와 길리엄에게는 계획이 있다.


 


균형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이 둘은 열차 내에 주기적으로 축적되는 역기능의 여분을 처리하기 위해 마스터 플랜을 세웠다. 간단하다.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74%에 맞춰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러려면 꼬리칸이 도발토록 해야 한다. 그리고 도발을 용인할 수 있는 한도와 도발이 닿아서는 안되는 칸을 정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자, 이제 거사의 날이 왔다. 덤벼라.


감옥칸, OK … 식량배급칸, 괜찮아 … 윌포드는 이때까지는 실탄이 없는 경찰력으로 대처를 하며 밀리는 척한다.


 


최악의 경우에 용인할 수 있는 한도는 용수칸까지 이다. 그래 용케 여기까지 왔군 … 이제 윌포드는 새로운 폭력을 동원하여 애초의 목적을 실현하려 한다.


 


그건 바로 도끼와 칼을 든 용역깡패의 투입이다. 영혼이 없는 맹목적인 이 놈들은 눈마저 가리워져 있다. 무자비하게 살육을 시작한다. 길리엄과 윌포드의 계획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의외의 동력이 나타난다. 횃불이다! 꼬리칸에서부터 피워올려진 횃불의 엄청난 포스에 힘입어 커티스는 용수칸을 장악하고 거물급 인물을 포획하게 된다. 물론 커다란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이쯤에서 계획이 틀어지게 된 길리엄은 말린다. 커티스는 가려고 한다. 그러자 길리엄은 뒤로 빠진다. 윌포드를 만나거든 입도 열기 전에 즉시 없애달라고 당부하면서.


 


당황한 윌포드는 밀리기 시작한다. 화원, 과수원, 수족관, 스시집까지 내주고 마침내는 절대 내주지 말아야 할 칸까지 커티스의 진입을 허용하고 만다.


 


학교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체제의 우월성과 충성심을 주입하고 체제에 거역하면 보복당하고 체제에 순종하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가르쳐 체제를 온존케하는 핵심기능을 수행하는 학교인 것이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됩니다른이름으로 저장 …


 


 


 


윌포드는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에 최후의 보루인 가장 강력한 무력을 투입한다. 군대다. 최후의 저지선을 지키기위해서 학교선생님까지 직접 손에 총을 들고 갈겨댄다.


 


결국 꼬리칸은 속절없이 밀리고 밀려 장악되고 선두는 고립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지도부는 내쳐 달릴 수 밖에 없다. 이제는 반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엔진룸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윌포드가 애초에 꾀했던 ‘균형유지’는 실행이 되고 …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의외로 준비가 잘 되어있으며 단계적 플랜이 있다. 그들이 원래 똑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을 내주지 않으려는 절실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실수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런 불의한 체제를 고쳐보겠다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뛰어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적어도 그들의 시나리오와 단계 설정 정도는 카피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 만사 다 단계가 있는 법인데 그걸 점프 한 방으로 다 뛰어 넘으려는게 과연 현명한 접근일까.


 


 


 


4.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순환고리를 …


 


꼬리칸은 버려진, 쓸모없는 잉여 공간이 아니다. 꼬리칸이 필요 없었으면 아예 만들지 않았거나 예전에 벌써 처치해 버렸을 터이다.


 


사실 이 열차 안에서 꼬리칸은 앞칸의 특권층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꼬리칸이 없으면 앞칸은 그들의 속성상 그 안에서 다시 지배와 피지배를 만들어 내게 돼있다. 그렇게 반복이 되면 결국의 그들의 앙상레짐은 자멸하고 말 것이고 그러기에 윌포드는 꼬리칸이 멸망방지장치라는 걸 잘 알고있다.


 


그리고 길리엄도 그걸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둘은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윌포드도 길리엄도 다 이유가 있고 자기 변호가 가능하다.


 


꼬리칸은 원래 가진 게 없어서 무임승차한 사람들이거든, 그렇다면 쾌적한 열차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희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 … 그렇다고 아예 기회가 없지도 않잖아, 재능이 있으면 언제라도 얼마든지 앞칸으로 갈 수가 있어, 그런데 뭔 불만이 그리 많아, 쯧쯧쯧 …


 


앞칸은 가진게 많아서 그걸 다 쓰지도 못하고 죽어, 그런데 절대 남과 나누려고는 하지 않아 … 그게 인간의 본성인가봐, 우리 꼬리칸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우리는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필요한 만큼만 가지자고 … 저 더러운 권력따위 필요하지 않아 … 팔, 다리가 잘리더라도 숭고하고 의롭게 살면 거기가 나만의 낙원인 거지, 허허허 …


 


 


 



윌포드가 어린 시절 즐겨 읽으며 미래의 꿈을 키웠다는 만화


 


 


 


커티스여도 좋고 커티스가 아니여도 좋다. 엔진룸에 가서 윌포드를 처단하고 나서는 어차피 자신이 그의 자리를 대체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의롭고 자애로운 지도자가 되어보자. 권력을 다 나누어주고 자원을 다 공유하고 뭐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자.


 


그러면 모든 이들이 스스로 현명하게 나누고 절제하며 동참하여 열차를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게 될까.


 


주어진 공간, 한정된 자원에 비추어 분명히 열차는 관리가 필요하다. 집단지도부를 형성하면 그게 될까. 그렇다고해도 역기능의 여분은 어떻게든 조치가 필요하다. 도대체 누가 그걸 정하고 누가 조치되어져야 하나. 제비를 뽑을 수도 없고.


 


결국 다시 이전 체제가 돌아올 것이다. 거기에 속하는 사람은 바뀌겠지만 꼬리칸은 다시 생길 거고 특권층 또한 생겨날 것이다. 그러면 또 제2, 제3의 윌포드와 커티스, 그리고 길리엄이 나오고 반란이 일어나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하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


 


아, 이를 어째야 하나, 어차피 똑같아질 거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나, 아니 그럴 순 없지, 좋은 방향으로 바꿔야지, 그렇다면 지도자라는 걸 아예 세우지 말자 … 어 그런데 Occupy Wall Street 도 그렇게 해보려다가 결국 권한을 가진 대표자가 없어서 흐지부지 된 거잖아 …  아 어쩌나 …


 


결국 영화는 아예 체제를 폭파시켜버린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파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인 건지 아니면 순전히 나의 지나친 상상력에 의한 오독인 건지는 중요치 않다. 그걸 결정하는 건 또 여전히 관객의 몫이니까.


 


 


 


5. 요나와 백곰


 


열차가 폭파되고나서 살아 남은 이는 요나와 꼬마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는 놀랍게도 빙하기를 견딘 백곰이 살아 있다.


 


새로운 세상은,


옛 체제를 유지하는데 좋든 싫든 관여한 이들이나 체제의 단물을 빨며 타락에 빠졌던 이들이 만들어 나가면 안된다는 건 당연할 터. 쾌락에 빠져 아무 생각없이 살던 이들도 결국에는 자신의 신분이 변하게되는 체제의 변동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한다는 건 영화 말미에 표현이 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나마 순수함을 간직하고 나름 혜안의 단초를 가지고 있는 이와 아직 때묻지 않은 어린이가 새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상징 정도로 해석해보면 어떨까싶다. 


 


 


 



지구온난화로 거주지인 빙산이 위협받고 있는 북극곰


 


 


 


북극곰의 경우는, 지구온난화가 거론될때마다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동물이다. 빙산이 녹아내려 살 곳을 잃어가는 백곰의 모습을 비추며 사태의 심각성과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상이나 이미지가 아주 많다.


 


그래서 그 백곰은 빙하기가 풀리면서 생물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지구가 다시 북극곰이 살아나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상징이라고 보여진다.


 


 


 


6. 마무리


 


간만에 뭐라도 생각할 거리가 있는 우리 영화를 감상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영어로 진행이 돼서 그런지 송강호 특유의 맛깔나는 보이스톤과 대사처리가 묻히면서 존재감이 예전같지 않아서 아쉽다.


 


북미 버전은 20분 가량이 잘려 나간다 한다.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 전개에서 날린다는데, 126분이 106분으로 준다니 한국에서 영화 본 우리가 원본을 보게 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 셈이다.


 


 




 


 


영진공 이규훈


 


 


 


 


 


     


 


 


 


 


 


 


 


 


 


 


 


 


 


 


 

 


 


 


 


 


 


 

“더 락(The Rock)”, 소품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




영화에는 여러 가지 소품이 등장합니다. 소품은 영화 전체의 맥락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눈 좋은 관객들도 그걸 알아차립니다. 사실 소품으로 분위기를 내는 건 영화만의 일은 아닙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이 양반은 주인공이 뭘 입고 뭘 신고 뭘 만들어먹는지를 꼼꼼히 서술해 놓고 있죠. 입는 옷이나 가방의 브랜드까지도 써놓습니다. 저 같이 그런 거에 무딘 사람도 그걸 읽으면 이 사람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기술방식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습니다.

헐리웃 영화에서 뉴욕이나 LA도 하나의 거대한 소품이죠.(다이하드3 에서)

그러니까 영화에 뭐가 등장하는지, 주인공이 뭘 입고 어디서 뭘 먹고 무슨 차를 타는지는 매우 중요한 연출 요소입니다. 액션 영화에서는 총도 바로 그런 중요한 소품 중에 하나죠.

『미션임파서블3』에서도 총이 한 시퀀스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간신히 오웬 데비언을 붙잡아서 호송하던 이단 헌트 일행은 체서피크만의 긴 다리 위에서 데비언 일파가 조종하는 무인기(UAV)의 습격을 받습니다. 무인기에서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차는 뒤집어지고 아수라장이 벌어진 와중에 오웬데비언은 호송차에서 빠져나와 유유히 헬기에 올라타려 하지요.

그걸 본 이단 헌트는 뒤집어진 자동차에서 총(독일군 제식소총인 G36이죠)이 담긴 가방을 간신히 꺼내는데 열어보니 이 총이 분해된 상태네요 …

이런 무인기 '글로벌 호크' 쯤 되면 그 정도 공습도 가능하겠죠 ...

사실 정밀 저격총도 아니고 G36같은 일반적인 소총을 분해해서 넣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PSG1 같은 2만불 짜리 저격총도 전용 가방에 통짜 그대로 들어갑니다. 게다가 이 G36 소총은 개머리판까지 접어지기 때문에 공간절약을 위해서라는 핑계도 안먹히죠.

근데 뭐하러 IMF 애들은 총을 분해해서 넣고 다닌 걸까요? 오로지 아찔아찔함을 연출하기 위해서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일 초가 급박한 상황에 총까지 세 토막 나 있으니 관객들은 더 조마조마합니다. 빨리 조립해야 하는 주인공의 입장에 감정이입 하는 거죠.

갈길이 바쁜데 별게 다 걸리적 거리네 ...

조립 다 했다!!!


영화 『더 록』(The Rock)을 살펴보자면,
저는 이 영화의 매력은 거의 소품 덕이라고 봅니다. 광고감독 출신인 “마이클 베이”의 현란하고 속도감있는 연출도 나쁘진 않았지만, “숀 코너리”와 “에드 해리스”라는 두 중량급 배우가 만드는 무게감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참 어설픈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을 겁니다.

이 영화, 스토리도 빈틈이 많고, 중간에 액션도 적고(의외로 이 영화에 액션장면이 적어요), 감옥 내부 묘사도 상당히 엉성하거든요.


숀 코네리와 에드 해리스, 이 둘은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소품 입니다.마이클 베이는 이런 배우 소품이 없으면 참 얄팍해지더라는....

여튼 이 영화에서 허멜 장군 역의 “에드 해리스”는 미국을 위해 죽어간 자기 부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책임감을 느끼고, 군상층부의 반성을 요구하기 위해 신경가스를 탈취해서 미국에 테러위협을 가합니다. 그는 알카트래즈 섬을 점령하고 관광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전사한 부하들의 명예회복과 응분의 보상금을 주지 않으면 인구밀집지역에 신경가스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협박하죠.

그래서 감옥에서 수십년 썩은 노친네 “숀 코너리”와 화학자 FBI요원 “니콜라스 케이지”가 특파되고 …… 결국 이들의 활약으로 미사일은 하나하나 제거되는 와중에 허멜은 자신의 협박 앞에 묵묵부답인 미국방성의 반응에 당황하지만, 미사일을 정말 쏴야 한다는 부하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결국 부하들은 하극상을 일으키는데, 부하들의 반란을 예감한 허멜은 미리 Colt .45를 허리춤 뒤에 감춥니다. 그리고 돈에 눈이 먼 부하들이 허멜에게 신경가스 미사일을 발사하라고 베레타 M92FS 를 겨눌 때, 그들의 미간에다 콜트 .45를 겨누죠.

니들이 감히 하극상을 일으켜?

왜 해리스는 남들이 다 새 권총으로 바꿀 때 여전히 구닥다리 콜트를 계속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냥 구닥다리도 아닙니다. 빤질빤질한게 예전 지급품을 계속 쓴다기 보다는 새로 하나 따로 장만한 모양새죠.

그 당시에는 이미 군의 제식권총은 베레타 M92F 로 바뀐 다음입니다. 그럼 그는 신형제식 권총이 지급된 다음에 일부러 예전에 쓰던 콜트45를 다시 구입해서 들고다녔다는 얘깁니다. 총알보급도 받기 귀찮은(베레타는 9mm 탄을 쓰고 콜트는 .45 구경탄을 씁니다. 권총이 바뀐 이후 군대 내에서 45구경탄은 사실상 쓸데가 없어졌으니 그만큼 보급도 희귀해지겠죠) 총을 계속 쓰고 있다는 거죠. 뭐 총알보급이야 부관이 좀 고생하면 되고, 하니까 그저 장군의 사치심이 발현된걸까요? 왜 그랬을까요?

이 장면은 총기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그냥 “어, 둘이 쓰는 권총이 다르네?” 혹은 “역시 멋진 주인공은 권총도 뭔가 다르군~” 정도로 넘어갔을 문제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장면은 총기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스토리와 이미지를 결정짓는 역할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에 등장하는 사소한 총기류에 대해서도 “많이 알수록 많이 보게 된다”는 경험의 규칙은 예외 없이 들어맞는 것이죠.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많이 앎으로서 영화를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고, 엉터리와 진짜를 구분함으로써 뭐가 진품인지 감별할 수 있는 기준을 하나 더 제공하고 싶거든요. 관객들의 눈이 높아지지 않는 한, 우리나라 영화의 총기 고증은 맨날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베레타 ...



베레타는 15연발 탄창과, 각종 안전장치를 장비한데다, 우아한 곡선미까지 가지고 있어 멋과 기능성을 다 가지고 있다고 칭찬받던 총입니다. 적어도 80년대 당시에는 이 총 참 멋졌습니다. 하지만, 이 총은 미국제가 아닙니다. 이탈리아제죠. 더구나 베레타가 사용하는 9mm탄이 뭡니까. 바로 미국의 적이었던 독일군이 루거 권총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파라블럼탄이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콜트 .45는 비록 7발밖에 장전할 수 없고, 안전장치도 부실해서 잘못 다루면 위험한 구닥다리죠. 그러나 이 콜트는 1911년부터 미군제식 권총으로 채용된 이후,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터에서 변함없이 60여년간 미군과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미군의 역사와 전통을 의미하는 총이죠.

콜트 45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해리스가 든 콜트와 부하들이 든 베레타는 단순한 권총이 아니라 두 집단이 가진 철학을 반영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멜 장군은 비록 인질범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그 바탕에는 미군 본연의 정신에서 벗어나버린 미군에게 반성을 촉구하려는 충성심이 있었다는 거죠. 즉, 허멜은 여전히 미국 군인입니다.

반면에 그의 부하들은 허멜이 내세운 막대한 보상금 때문에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미군의 정신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단지 돈을 벌수 있으니까 뭐든 하는 것이죠.

장군님 돈 줘여 ....


이런 배치를 하려면 소품 담당자가 총기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총기와 군장 관련 고증 수준이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이 좋습니다. 영화를 보면 초반부에는 주인공들의 군복 색이 제각각입니다. 누런 옷, 국방색 옷 … 철모도 없는 자가 부지기수고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군인들의 복장이 통일되고 제대로 갖추어집니다. 이건 전쟁 초반에 보급품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미군과 유엔의 지원을 받아 제모습을 갖춰가던 남한군의 상황을 적절히 반영한 소품 배치죠. 물론 총들도 거의 무리없이 사용되었구요.


군복 뿐만 아니라 자세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숙련도 차이가 보입니다

이렇게 소품활용의 수준이 높아진 배후에는 “김세랑”이라는 군장전문가가 영화의 고증을 담당했던 덕이 큽니다. 처음에는 ‘6.25때 군복이 다 거기서 거기지 …’ 라는 태도를 보이던 영화스탭들에게 당시의 군복이 시기별로 어떻게 달랐는지를 직접 보여주며(그는 온갖 진품 군복을 소장하고 있죠) 설득해서 그런 차이를 만들어냈던 것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에 제작비 투입할때, 스크립트 닥터와 고증 전문가에게 돈 좀 더 쓰시라는 겁니다. 그래야 오랫동안 먹히는 영화가 만들어지니까요.

영진공 짱가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 “좋은 만듬새 … 허전한 뒷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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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근작 <폭력의 역사>는 우선 제가 본 크로넨버그 영화들 가운데 가장 만듬새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상당히 허전한 뒷마무리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만 보면 미셸 푸코의 책 제목 마냥 ‘폭력’의 본질을 다룬 거대 담론 수준의 영화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 내용에 비추어보면 ‘한 남자의 매우 폭력적이었던 과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폭력의 역사성이나 대물림과 같은 주제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이 있을텐데, 저는 유독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2006)이 떠오르는군요. 그에 비하면 <폭력의 역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폭력의 의미를 지극히 개인의 수준, 관객에게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스크린 속 타인의 입장으로만 다루는데 그치고 맙니다. 더스틴 호프먼 주연, 샘 페킨파 감독의 <어둠의 표적>(Straw Dogs, 1971)처럼 전개되면서 관객들과 진실 게임을 벌이는 영화를 예상했지만 역시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두뇌 싸움을 즐기는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노출 수위가 꽤 높은 편입니다만 관객을 작정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두번의 정사 장면 가운데 속칭 69라고 불리우는, 대중 영화에서는 거의 금기시되는 체위가 나오고 계단에서의 장면(이럴 땐 계단씬이라고 해야 하나요?)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선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계단 장면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서로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적인 몸부림인 동시에 정서적인 탈출구로서의 강렬한 느낌을 전달해주는데요,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에서 <크래쉬>의 주인공들을 떠올린 게 혹시 저 뿐인지 궁금하네요) 그외 크로넨버그가 좋아라하는 신체 훼손 장면들이 몇 차례 여과 없이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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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가 누구랄 것 없이 하나 같이 훌륭하다는 점이 <폭력의 역사>를 봐야할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박한 식당 주인과 스티븐 시걸의 모습을 오가는 비고 모텐슨을 중심으로 전반부에는 에드 해리스가, 후반부에는 윌리엄 허트가 주요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두 명배우의 악역 연기, 이채롭고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에드 해리스의 분장과 캐릭터는 왜 저 배우가 여지껏 제대로된 악역을 맡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제대로더군요. 하지만 윌리엄 허트에게 주어진 배역은 약간 덜 떨어진 캐릭터로 설정이 되면서 엄청난 비장감이 감돌아야 맞을 것 같은 영화 후반부의 긴장을 오히려 이완시켜버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외의 주요 배역을 꼽으라면 당연히 주인공의 부인으로 등장한 마리아 벨로(<코요테 어글리>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의 열연을 꼽아야 할테구요, 저는 아들 역으로 나온 에쉬톤 홈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섬세한 시선 처리를 비롯해서 특출난 데가 있는 타고난 배우더군요. 제작자들 보다는 감독님들이 좋아할만한 타입의 젊은 배우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인상적인 배우는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낯선 두 남자인데요, 배우 보다는 그 캐릭터가 아주 가관입니다. 나른한 한 여름 아침에 모텔 체크아웃을 하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잔인함이라니. 이들은 드라마의 시작점인 동시에 한없이 선량해보이는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해보게 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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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해야 할 배우는 역시 비고 모텐슨이네요. 제가 갖고 있는 비고 모텐슨의 이미지는 이 배우의 얼굴을 처음 익힌 <퍼펙트 머더>에서의 비열함과 <반지의 제왕> 3부작에서의 영웅, 두 가지입니다. 사실 첫 인상을 좀 오래 남기는 편이라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도 별로 믿음이 안가더라구요. 그가 연기한 <폭력의 역사>에서의 톰 스톨과 조이 쿠색이라는 한 인물의 두 가지 면모는 마치 제가 알고 있는 비고 모텐스의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와의 두번째 영화인 매개봉작 <Eastern Promises>(2007)의 예고편과 스틸컷을 보면 나오미 왓츠를 주인공으로 그 주변을 맴도는 듯한 미스테릭한 악인처럼 나오고 있는데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전반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 같은 느낌도 주는 웨스턴 풍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필견, 비고 모텐슨 좋아하시는 분들도 필견, 그리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봐주시는 분들까지도 충분히 만족하실만한 영화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카핑 베토벤>, 위대한 영화란 바로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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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핑 베토벤>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루드비히 반 베토벤과 그의 필사가였던 안나 홀츠의 이야기입니다. 청력을 상실한 말년의 베토벤이 9번 합창 교향곡을 완성할 무렵, 연주용 악보를 써주는 유능한 카피스트가 필요했는데 작곡가의 꿈을 가진 젊은 여인 안나 홀츠가 그 일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안나 홀츠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좀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창조된 가공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베토벤과 안나 홀츠 사이에 있었던 일 역시 가공의 에피소드들입니다. 따라서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의 전기 영화가 아니라 베토벤의 삶을 소재로 예술 자체와 그외의 많은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만들어진 영화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럼에도 <카핑 베토벤>은 전기 영화로서의 요소가 가장 우선입니다. 오늘날 음악의 성인으로까지 불리우는 고독한 천재 음악가의 삶과 내면을 이처럼 선명하게 투영시켜준 영화도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1) 무엇보다 영화의 플롯으로서 작용하는 뛰어난 음악 자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베토벤의 것이니까요. 여기에 예술과 신앙, 여성과 사랑 등에 관한 묵직한 주제들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가 <카핑 베토벤>입니다. 물론 많은 주제들을 다루기만 하고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면 그리 성공적인 영화라고 할 수가 없을테지요. <카핑 베토벤>이 놀라운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다양하고 깊이 있는 주제들을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형상화하여 전달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구성 요소들이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데다가 그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 또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기 힘든 엄청난 힘과 감동이 있으니, 이런 영화야 말로 완전한 영화, 위대한 영화라고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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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핑 베토벤>에서는 신에게 선택된 자의 영광과 고통을 체현해낸 에드 해리스의 연기를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냉정한 인상의 외모로 많은 액션 영화에 등장해왔지만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잭슨 폴락의 전기 영화 <폴락>(2000)과 마이클 커닝햄 원작,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2002)에서의 면모를 기억한다면 베토벤을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가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입니다. 포스터에서의 사진과 달리 <카핑 베토벤>에서 에드 해리스는 모세와 같은 성인이자 한 인간이었던 베토벤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2) 에드 해리스의 존재감에 다소 가려지기는 했지만 <트로이>를 통해 널리 알려졌던 다이앤 크루거의 미모와 연기도 이 영화 속에는 잘 녹아들었다는 생각입니다.3) 물론 다른 어느 배우들도 이상하게 튀거나 쳐지는 일은 없었지만요.

<카핑 베토벤>은 폴란드 출신의 여성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유로파 유로파>(1990)와 <올리비에 올리비에>(1992)를 직접 쓰고 연출했던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93년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블루>(1993)의 공동 각본으로 참여해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더군요. 그외 <비밀의 화원>(1993)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프랑스 시인 랭보를 연기했던 <토탈 이클립스>(1995) 또한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주요 연출작입니다. 99년작 <세번째 기적>에서는 에드 해리스가 주연이었으니 <카핑 베토벤>이 이들에게는 두번째 만남이었던 셈입니다. 체코의 영화 학교에서는 밀로스 포먼의 학생이었으며 고국에 돌아와서는 크쥐시토프 자누시의 조감독을 지냈던 그녀 자신이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안나 홀츠와 같은 욕망과 고민을 경험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아그네츠카 홀란드에게 <카핑 베토벤>의 연출을 맡긴 일부터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술’ 영화가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의미있는 작품이 된다면 그것처럼 아쉬운 일이 없을 겁니다. 예술가의 삶을 소재로 삼는 영화가 위대한 영화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예술을 직접 하는 사람과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평소 예술 분야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에게까지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핑 베토벤>이 취하고 있는 플롯 상의 전략은 영화 중반에 일찌감치 합창 교향곡의 초연 장면을 통해 관객들을 일단 넉다운시킨 다음, 그와같이 ‘자기 영혼이 담긴 작품’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를 천천히 들려주는 방식입니다.4) 이런 영화의 플롯을 미리 알고 본다고 한들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를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이 영화 자체가 스스로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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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게리 올드먼 주연 주연의 <불멸의 연인>(1994) 또한 멜러 요소를 가미한 픽션이면서도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작품이죠. <불멸의 연인>이 베토벤의 유년 시절에서 중년까지의 삶을 다뤄주고 있다면 <카핑 베토벤>은 그의 말년과 죽음의 순간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바꿔 말하면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을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를 보고 나면 그를 대신했을 만한 다른 배우들의 얼굴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합창 교향곡을 지휘할 때의 모습은 오랜만에 배우의 연기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을 얻는 경험이 되었고 후반부 직접 바이얼린과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모습에서는 정말 보통 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찌기 안소니 홉킨스가 <광란의 시간>(1990)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미국 출신 배우 중에 안소니 홉킨스와 견줄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는 에드 해리스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3) 음악에 관해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대접받던 마에스트로 베토벤이 자신의 천사요 뮤즈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거나 괴팍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관객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상대역 캐릭터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아무래도 당장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부터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트로이>에서는 참 마네킹 같은 배우가 다 있구나 했었는데 다이앤 크루거에게 <카핑 베토벤>은 배우로서의 경력을 완전히 새롭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4) 때문에 합창 교향곡이 초연되는 장면까지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고 완성도 역시 뛰어난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말 그걸로 영화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러닝 타임은 이후로 3분의 1이나 5분의 2 정도가 더 진행됩니다.

ps. <카핑 베토벤>은 앞으로 <아마데우스>(1984)와 좋은 비교가 될만한 작품입니다. 베토벤과 모짜르트의 이야기라서 뿐만 아니라 두 음악가처럼 되고자 했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이면서 그 결말은 전혀 상반되니까요. 물론 안나 홀츠가 가공 인물인 반면 살리에르는 실존 인물이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카핑 베토벤> 속에서 살리에르에 대한 언급이 직접적으로 나온다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