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과 “군도”에 대한 단상

영화 <명량>은 역사 매니아도 아니고 밀덕후도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봐도 고증의 문제가 툭툭 걸립니다. 게다가 메이크업을 잔뜩 한 조총 스나이퍼 따위를 쓸 데 없이 만들어 넣는 등 영화의 매무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충무공이 장계를 쓰는 장면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글을 쓰는 이순신의 상반신 샷으로 시작하면서 다음은 글을 쓰는 손을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은 손까지 포함한 전체 샷이 나옵니다.

하지만 전체샷으로 넘어올 때 꼿꼿했던 충무공의 허리가 숙여져 있습니다. 첫 샷에서는 손이 안 잡히니 글은 쓰는 척만 하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을 테고 마지막 샷에서는 손까지 잡히니 신경써서 글을 써야 하는 터라 허리를 숙였겠지요. 허나 샷의 연결이 껄끄러울 정도로 튑니다.

그리고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에서 충무공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려 베는 모습을 정면에서 잡고 다음 샷에서 카메라는 적장의 등 뒤에 가 있는데, 이순신의 칼이 왼쪽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른쪽 아래에 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뭔가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 느끼게 되고 이 정도면 NG컷이라 할 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컷들이 꽤나 많아서 매무새가 조악합니다. 아무리 쌈마이 헐리웃 영화라고 하더라도 이런 컷들은 보기 힘듭니다.

정작 문제는 배우 최민식의 존재입니다. 자신없는 감독은 최민식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될듯 보입니다. 최민식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최민식 연기가 정말 잘 나올 때는 극 안 캐릭터의 개성이 매우 강할 때입니다. <파이란>에서의 강재,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장경철처럼 말입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취화선 동행취재기를 씨네21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과의 인터뷰를 인용하겠습니다.

– 임권택 감독님과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차이는 없죠. 그러면 큰일나게요. (웃음) 다만 지금 초상화냐, 풍경화냐, 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 굵은 붓으로 죽죽 그리고 싶은데, 그럴 때 감독님이 아니다, 굵은 붓으로 그리다가 가는 붓으로 바꿔라, 하시면 내가 성이 안 차는 부분이 생깁니다. (웃음) 자꾸만 내것이 나오니까 괴롭죠. 내 것을 버리고 감독님 것을 취해야 하는데, 나를 죽여야 하는데, 자꾸만 내 분석대로, 내 방식대로 몸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목표를 가는 거니까요.

다음은 임권택 감독 인터뷰 중에서 발췌입니다.

=장승업이 김병문 집에 담 넘어가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최민식씨가 눈물을 흘려서 NG를 내셨다면서요.

– 그것도 기품과 관련될지도 몰라요. 물론 울 수도 있는 거요. 그러나 사소한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장승업이를 찍어오지 않았다고. 거기서 느닷없이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안에는 깊은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놈인데, 여기 와서 울고 있으면 그게 맞겠냐고. 삐끗삐끗 감정이 튀어나오면 수렁을 밟는 거죠.

최민식은 이런 배우입니다. 영화는 여러 파트가 한 데 어우러져야 하는 장르인데 그는 연기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캐릭터만 살아나고 나머지는 죽어버린다는 것이죠. 저는 이 절정이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최민식은 과거처럼 자신의 연기로만 영화를 다 뒤덮진 않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에서는 많이 절제하는 연기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민식은 최민식이죠. <명량>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은 모든 대사, 모든 표정에 감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아들과 밥을 먹으면서 하는 간단한 대사 “같이 먹으니까 좋구나” 이 아홉 글자에도 목소리의 톤과 인토네이션을 써서 감정을 묻혀내죠. 그로써 최민식의 이순신은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나는 힘들어, 나는 괴로워, 나는 어려워 ……

그런데 과연 이순신이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마구 쏟아내는 인물이었을까요?
“난중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병신년 이월 열 나흘 –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을미년 칠월 초 하루 –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갑오년 이월 열 엿새 –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나 나라가 평정될 리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물론 아들이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격정적으로 비통함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어렵고, 외로울 때에도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뒤척거리고, 천장만 올려다보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이런 이순신의 모습과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의 모습은 격차가 큽니다. 아마 연출자가 이를 알고 최민식의 연기를 더 죽이려 해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둘 사이의 “짬밥” 차이가 얼만데 ……

오히려 류승룡이 이순신을 맡고 최민식이 구르지마를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소위 과도한 ‘국뽕’이나 텔레파시와 치마 시그널 등 무리한 설정이 있는데도 “명량”은 흥행가도를 힘차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리얼리즘을 정말 사랑하는 한국의 관객들, 그리고 문단 독자들의 성원 덕분에 말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게 리얼리즘이라 한다면 한국의 대부분 흥행 영화는 모두 리얼리즘이 베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가 좀 예외랄까? 실은 <괴물>도 리얼리즘이지요.

우리 관객이나 독자들이 왜 리얼리즘을 좋아하는지는 다른 차원의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군도>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매무새, 그러니깐 만들어 놓은 모양은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군도>는 현실의 이야기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묘사했고, 이는 관객에게 매우 불편한 접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현실의 이야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면 모르겠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이며 그 과거의 현실은 지금의 현실과 별로 다를 게 없죠. 그런데 그 현실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촬영하고 음악을 깔고 편집을 해 놓으니 관객은 혼란스럽지요.

김구 선생이 절정 무술을 사용하며 일본인을 때려 잡는데 거기다가 무협 스타일 자막으로 “흑심패룡장의 고수 백범 김구”라고 깔고, 고속 촬영에다 웨스턴 음악 넣고 영화 “300”처럼 편집하면서 재해석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김구 선생이 몸 담았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이처럼 재해석하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허나 <군도>가 보여주는  현실도 어쩌면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 백성은 현재와 흡사한 채권추심도 당합니다.

영화 속 현실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얘기하면서도 묘사는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누리끼리한 서부 영화 스타일 색보정, 음악과 무협 영화와 같은 캐릭터 구축과 샘 페킨파 같은 급격한 줌인 줌아웃 등을 써대니 당연히 언발란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군도>의 흥행이 주춤하는 것은 여타의 요인이 많겠지만 제 생각에는 <명량>과는 다르게 리얼리즘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메리칸 허슬” 출연진 만큼이나 음악이 빵빵한 영화

출연진의 빠방함으로 이미 판단할 수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아도 안 되는 영화는 안 되죠. 그런 면에서 <아메리칸 허슬>은 좋은 예상이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난 영화입니다. 미국서는 2013년 개봉이지만, 한국서는 2014년 개봉이니, 개인적으로 올해의 영화 후보 0순위로 올려놓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에이미 아담스를 그냥 이쁜 여배우로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최고의 여배우로 자신있게 꼽게 되었구요, 크리스천 베일의 변신과 연기도 환상이고, 정서 불안 역할에는 이제 여배우로 제니퍼 로렌스를 능가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집니다. 정서불안한 끝 간 데 없는 섹시함, 그리고 액션 히로인까지 … 안젤리나 졸리가 브란젤리카로 걍 셀러브리티가 되어 버린 지금 그 자리를 차근차근 다 차지하는 느낌입니다. 좀 측은하기도 한 또라이 역할의 끝장판입니다.

브래들리 쿠퍼, 제레미 레너, 깜짝 등장 로버트 드니로, 그 밖의 모든 배우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환상적인 연기를 펼쳐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19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1970년대의 정서가 진득하게 느껴지는 사운드트랙이 영화의 즐거움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거의 1970년대 미국 주류 팝계 총결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류 팝, 록, 디스코 장르를 널뛰며 환상적인 노래들이 영화 내내 흘러나옵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노래들이 그냥 좋아서 나온 게 아니라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나 느낌, 복선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음악감독은 대니 앨프먼입니다만, 대니 앨프먼이 각 등장인물들에게 부여한 테마보다 당대의 히트곡을 통해 생각하게 만드는 게 더 많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장면, 장면 삽입된 노래를 알면 두 배는 더 재밌는 작품이 됩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의 내용이나 약간의 스토리까지 알면 세 배는 더 재밌어 질 겁니다. 그래서 영화의 스포일러를 최소화 하면서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OST로 발매된 CD에는 15곡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데니 앨프먼이 작곡한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한 어빙의 테마 곡도 있습니다. 즉 현재 발매된 OST에는 영화 크레딧에 명기된 29곡 중에 절반 정도밖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나 의미를 알면 훨씬 더 영화의 재미가 확대될 곡들도 꽤 있습니다. 29곡 모두를 훑어볼 순 없고, 주요한 곡들만 살펴보겠습니다. OST 수록곡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곡도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노래들이 아주 진득합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을 엮어주는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Jeep’s Blues”는 영화의 오프닝, 만남 씬, 크레딧에 모두 등장하죠. 두 남녀가 듀크 엘링턴에 극찬을 보내는데, 사실 그것도 되게 웃기는 겁니다. 듀크 엘링턴은 한국에서도 재즈 팬이라면 다 아실테고, 미국서는 스티비 원더가 “Sir Duke”로 경의를 표할만큼 1930년대 아프리칸 아메리칸 아티스트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재즈 아티스트 입니다.

거기에 1974년 사망과 함께 미국사회에서 재조명을 받았기에 1978년에 이미 사기업계에서 이름을 알린 두 남녀가 만난 시점 즈음에 이 둘이 듀크의 이름을 들어보고 음반 한 두 장 아는 건 당연할 겁니다.

근데, amazing을 외치며, 어떻게 듀크는 이런 사운드를!를 외쳐대는 둘의 대화 자체가 두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걸 증명합니다. 이 곡이 분명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작품이지만 실은 오케스트라의 핵심 멤버였던 색소포니스트 자니 호지스의 곡이기 때문이죠. 제목부터 자니 호지스의 별명이고, 듀크와 자니의 공동 작곡이며, 자니의 플레이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베일이 충격의 올챙이 배를 보여준 후, 더 큰 쓰나미를 머리로 보여주시는 인트로에 흐르는 음악은 영국밴드 America의 첫 히트곡 “A Horse with No Name”. 이름 없는, 심지어 이름을 남길 수 없는, 그러나 열심히 달리는 말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반복되는 것이죠. 거기에 크리스천 베일, 에이미 아담스, 브래들리 쿠퍼가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며 자막이 흐르는 장면에는 OST에 수록되지 않은 스틸리 댄의 “Dirty Work”가 등장합니다. 제목과 가사 내용도 그렇고, 심지어 이 앨범이 수록된 스틸리 댄의 데뷔 음반 제목은 『Can’t Buy a Thrill』입니다. 앨범 제목에 곡명까지 영화 도입부에 영화가 하고픈 얘기가 다 드러나죠.

이 영화에는 ELO의 노래가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Electric Light Orchestra … 한때 한국의 FM에서도 이들의 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었지만 언제나 B급 냄새를 풍겼죠. 핑크 플로이드, 퀸, YES, 탐 패티 등의 밴드가 개척한 새로운 사운드의 세계를 쉬운 멜로디로 우려먹는 듯한 느낌이었달까요.

신념 있는 정치인의 현실적 한계를 표현하는 제레미 레너의 시장 역할 소개 장면에 흐르는 곡이 있습니다. OST에는 수록되지 않았는데요. Frank Sinatra의 “The Coffee Song”입니다. 그런데, 이 곡의 부제가 “They’ve Got An Awful Lot of Coffee In Brazil”입니다. 브라질은 아니지만 이 시장이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도박도 역시 미국 밖 무엇이죠.

돈 많은 아랍 수장이 등장하는 파티 장면에서 저는 빵 떠질 수 밖에 없었는데요, Jefferson Airplane이 부른 사이키델릭 록의 명곡인 “White Rabbit”이 아랍어로 흘렀기 때문이지요. 최고의 킬러 출신 로버트 드 니로와 만난 힘 없는 하얀 토끼라니 … 거기에 아랍어라뇨. 물론 원작의 흰 토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 얘깁니다. 그러나 아랍어로 바꿨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저 초특급 킬러 앞의 토끼만 알면 되죠. 물론 이 노래를 몰라도 그냥 아랍어로 된 긴장감 넘치는 곡이라고 넘겨도 되긴 합니다. 여튼, 레바논계 미국인 여가수 Mayssa Karaa에게 이 곡을 다시 부르게 한 건 거의 신의 한 수였습니다.

크리스천 베일의 두 여인이 만났을 때 흐르는 비지스의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도 제목이 죽이죠. 비지스가 디스코의 제왕이 되기 전, 발라드 그룹으로 날리던 시절 곡이죠. 이 노래의 주인공인 에이미 아담스와 Paul McCartney & Wings의 “Live and Let Die”가 표상하는 제니퍼 로렌스의 대비가 환상이죠.

제니퍼 로렌스의 헤드 뱅잉이 돋보이는 이 “Live and Let Die”는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해산 후, ‘존 레논 너만 마누라랑 음악 하는 줄 알아?’하면서 결성하신 윙즈의 노래죠.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의 수록곡이기도 하구요. 하드록/메탈 팬이라면 Guns & Roses의 버전으로도 유명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만 한 쪽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한 쪽은 죽거나 살거나 내꺼만 외치는 대비도 좋고, 두 곡 제목은 두 사람의 미래이기도 하죠. 스포일러가 될테니 그 이상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2시간 20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푹 빠져서 본 영화였는데, 일부에선 한 방 없이 자잘한 얘기를 주욱 늘어놔서 잔재미만 있었다고 평하는 분도 있더군요. 역시 취향은 다양한 겁니다. OST도 그렇겠죠. 1970년대인데 이 노래를 빼먹었다면 무효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정도면 최고의 곡들을 모아놓은 데다가 영화의 내용과 호흡이 딱이니 더 바랄게 없는 수준입니다. 연초부터 그 자체로도 좋고, 추억과 더해지면 금상첨화로 즐기실 수 있는 영화 한 편 만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 작업의 정석은 여기에 다 있다!

2012년 개봉작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리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영화이면서 매우 “쓸만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처음 이 영화 포스터를 보시고 저와 같은 의문을 품은 분들 아주 많으실 겁니다.

‘아니, 카사노바 역을 왜 저런 사람이 하고있어?’

별로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에 더럽게 수염은 왜 저렇게 길렀으며, 별로 키도 안크고 배 퉁퉁하고 완전 아저씨같은 배우가 나와서 전설의 카사노바 역을 하고 있잖아! 이게 완전 영화 말아먹겠다고 작정하고 만드는 거지.

현실에서 류승룡은 별로 호감이 가는 외모가 아니지요. 영화의 설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 두현이 장성기를 보고 처음 하는 말이 그거죠. 전설의 카사노바라면서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치는 대사를 보면 다 이런 식입니다. 그 사람이 왜 전설의 카사노바인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몰라요. 하지만 뭔가 있다는 식입니다.

정우성처럼 생긴 사람이 그랬다면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겠죠. 하지만 장성기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류승룡입니다. 류승룡의 외모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남자답게 생겼다. 딱 거기서 끝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그런 외모를 가진 장성기가 여자들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게 만드는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그 철벽같은 독설녀 정인까지 흔들리게 만드는 마력의 정체는?

제가 여자들에게 인기없는(-.-) 솔로남들에게 이 영화를 강추하는 이유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이 영화가 아주 교과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들의 영원불멸의 난제인, 도대체 여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해답을 내려 주고 있지요.

어차피 남자는 연애할 때 변해야 합니다. 이왕에 변하려면 확실하게 변해서 목표를 쟁취해야죠.

1. 주변 조사

아내를 유혹해달라고 말하는 두현에게 장성기가 처음으로 요구하는 것은 그녀에 대해 모든것을 적어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죠. 다시 말해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장성기처럼 손톱에 반달을 보고 변비까지 알아맞추는 초능력을 발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물어보면 돼요. 중요한 정보를 그녀가 알아서 줄줄 말해줍니다. 밑줄까지 쫙쫙 쳐가면서. 그리고, 아무리 문학에 관심이 없어도 알랭 드 보통 정도는 알아둡시다.

2. 예상되는 행동을 하지 말것

산골 한 구석에 사시는 할머니들도 이름은 알고 계시는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이 말했습니다. 나는 수비수들이 예상하는 대로 움직인 적이 한 번도 엄따! 영화속의 장성기의 행동이 그렇습니다. 뻔한 짓을 절대로 하지 않죠. 뭔가 말하려다가 갑자기 나가버리고, 칭찬을 할 때도 정색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슬쩍슬쩍 던지고, 이거 작업거는거 아니예요. 어차피 정인씨는 나 안좋아 할거니까. 그래서 정인씨가 편해요. 갑자기 사랑고백을 하는가 싶더니 노래 가사라고 한발 훅 빼버리고.

우리가 보았던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무수한 악역 중에 가장 공포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악당으로 기억하는 한니발 렉터가 더이상 무섭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게 되어버린 건? 바로 한니발 라이징에서 그의 과거를 전부 까발려 버린 이후부터입니다. 아무리 공포스러운 과거라고 해도 그것을 모를 때만큼 공포스럽지는 않습니다.

이 녀석이 이 타이밍에 나한테 고백을 하겠구나, 하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고백은 대부분 존 망합니다. 영화속에서 정인이 소녀처럼 설레이는 표정을 딱 세 번 보여주는데요, 지진 속에서 두현이 고백했을 때! 회전목마에 올라탄 그녀에게 장성기가 벼락같이 달려들어서 샹송 가사를 읊어댈 때!! 그리고 돌아서서 간 줄 알았던 장성기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안아버릴 때!!!

3. 너 때문에 내가 변했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이 연애사에 길이길이 남을 명대사 하나 날려줍니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었어요.” 제발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듣기 좋은 말 한마디만 해보라고 하던 헬렌 헌트는 이 고백에 완전 넘어가죠.

장성기도 마찬가지. 정인이 라디오 방송으로 잔뜩 씹어댔던 고깃집 간판을 방송 이후로 바꿔서 보여줍니다. 양떼 목장도 마찬가지. 당신이 무려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말해주지요. 사랑고백은? 샌드 아트로 잔재주를 부리긴 하지만 요점은 이겁니다. 바로 당신이 나를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었소. 보기와는 다르게 스스로를 쓸모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정인에게 당신이야말로 아주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죠. 이혼하던 마지막 날, 정인이 두현 곁에 하루 더 머물기로 결정하는 것도 바로 찌질하면 찌질한대로 남편이 변화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4. 여운을 남겨라

이거야말로 작업의 화룡점정. 예전에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서태지가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삼단 날아옆차기를 해도 나훈아의 뒷모습을 이기지 못한다고. 일은 다 벌어졌습니다. 정인을 꼬드기려는 장성기의 작업은 막바지에 이르러 사랑고백까지 해버렸고, 정인은 흔들려 버렸고, 밤은 늦었고, 집은 비었고. 길 건너편에선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가 사랑과 전쟁 삘의 촌스러운 막장 치정극으로 넘어가기 딱 한 발  전에서 장성기는 전설의 카사노바다운 신의 한수를 날립니다.

물러나는 거죠. 다만 그냥 물러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 노래를 읖조리면서 자신의 뒷모습을 절대 잊을 수 없게 만들죠. 이때 나오는 노래가 바로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입니다. 노래실력은 형편 없지만 선곡은 기가 막혔습니다. 전설의 카사노바가 함락 직전의 여자를 눈앞에 두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매일매일 그대와 함께하는 것이라면서 물러나다니요. 이 장면이야말로 장성기가 스스로 진지하고도 대책없이 사랑에 뽈링 인 러부 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작업의 정석은 이 정도로 정리하고요, 음악 얘기 좀 하겠습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 OST 앨범에는 영화 곳곳, 적재적소에서 귀를 간지럽히던 음악들이 실려 있습니다 – 간지럽히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한 것이, 이 영화는 정말 대사가 많고 명료합니다. 주인공들이 다 할말이 많은 사람들인데다가 자기 상태를 주절주절 말로 다 떠들어대기 때문에 음악이 영화 속에서 많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죠. 그냥 배경에 머무르는 소품 느낌이 강합니다.

원래는 발매 계획도 없었다고 하죠. 영화가 장기 흥행에 접어들고 나서야 관객들의 요청으로 정규 ost 앨범이 나왔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제작비가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굳이 음악으로 표현하기보단 대사의 감칠맛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은 대부분 소품이고 아주 경제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샹송처럼 들리는 노래들도 프랑스산이 아닙니다. 국산 샹송이지요. 정인과 두현이 함께 틀어놓고 춤을 추던 장면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사실 이 영화의 감독인 민규동 감독이 작사했습니다. 민규동 감독이 프랑스 제8대학 영화학과에서 석사를 취득했다고 하죠? 프랑스말 잘 할테고. 노래를 부른 사람은 “비비드”라는 걸그룹의 리더 박성희씨라고 하네요.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답니다.

개그콘서트에서 정여사의 등장음악으로 쓰이기도 해서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이 음악과 함께 작업의 정석 정리를 마무리 하렵니다.

“컨저링”, 안전하고 가벼운 공포영화(?)

<컨저링>(Conjuring, 2013) 을 거의 개봉 직후 주말 낮에 봤는데, 주변에 ‘아줌마’ 관객들이 많았다는 게 흥미로웠다. 대체로 호러영화 하면 생각나는 관객들은 그 장르 매니아들이나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하는 젊고 풋풋한 연인들이니까.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섭다”라는 카피가(원래 미국에서는 ‘잔인한 장면 없이 무섭다’였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기존 호러 관객뿐 아니라 광범위한 관객층을 공략할 수 있었던 건 이 영화가 가진 안전함과 가벼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는 스포일러가 상당수 포함돼 있으니 이를 피하고 싶은 분들은 이쯤에서 백스페이스를 눌러주시고 …

다분히 낚시성의 포스터 이미지

자, 나는 지금 ‘안전함’과 ‘가벼움’이라는, 언뜻 이 영화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단어들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컨저링>은 호러영화 중에서도 전형적인 폴터가이스트 혹은 ‘귀신들린 집’ 장르이다. 이사온 날부터 집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있고 다섯이나 되는 딸들 중 예민한 아이들은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헛것을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집에 귀신들만 있느냐. 그렇지 않다. 이 귀신들은 실은 귀신 중에서도 대빵, 무려 ‘세일럼의 마녀’ 배스시바의 귀신에 희생된 이들이다.

세일럼의 마녀는 사타니즘에 심취해 제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고, 이후 귀신이 되어 집에 거주하면서 이 집에 이사오는 엄마들을 조종해 제 아이를 살해하게 하고, 그렇게 새끼 귀신들을 파생시킨다. 그리하여 귀신을 몰아내기 위해 엑소시즘이 벌어지는데, 여기에서 슬쩍 크리스찬 호러(이른바 <오멘>, <엑소시스트> 등으로 대표되는)의 특징들이 얹힌다.

그런데 이 영화의 첫 시작은,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취했던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그 에피소드는 또 ‘저주받은 인형’ 이야기다. 이쯤 되면 폴터가이스트에 ‘귀신’과 관련된 거의 모든 호러의 서브장르들이 이것저것 짬뽕됐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 제임스 완 감독은 슬래셔와 스플래터만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잔인한 장면 없이 무섭다”는, 신체 훼손 장면은 꺼리지만 호러영화에는 호기심을 가진 관객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카피를 전면에 내걸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전함’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무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는다는 데서 완성된다.

직캠 공포영화의 원조, “블레어 위치”(1999)

마녀의 조종을 받아 제 아이를 죽일 뻔한 어머니는 엑소시즘 후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품에 안는다. 위험한 시험대에 올랐던 모성 역시 결국 악령의 저주를 이겨내고, 이러한 모성의 승리는 페론 가족뿐 아니라 워렌 가족에게도 성취된다. 실존인물인 미국의 유명한 퇴마사 부부 에드와 로레인 워렌 부부가 가장 사악한 케이스라고 밝혔음에도 결국 아무도 죽지 않고 무사히 사건이 해결된다. 더욱이, 이런저런 서브장르의 특징들을 별 고민 없이 마구 가져와 뒤섞음으로써 전혀 웃기거나 가볍지 않음에도 메타-장르적 특성을 띄며 특유의 ‘가벼움’의 특징을 획득한다.

메타-호러로서의 특징 외에, <컨저링>은 일반적으로 호러영화들이 저예산에서 기인하는 ‘무명배우의 기용’이라는 특징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예외적인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베라 파미가는 우리에게 하정우와 함께 출연한 <두 번째 사랑> 외에도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디파티드>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해 익숙한 배우이며, 제임스 완 감독과 <인시디어스>에서 작업한 바 있는 패트릭 윌슨 역시 연극 무대에서부터 실력을 다져 <오페라의 유령>에서 라울, <리틀 칠드런>에서 케이트 윈슬렛과의 공연, <왓치맨>에서의 나이트 아울 역으로 인지도가 있는 배우이다. 무엇보다도 배스시바의 귀신이 빙의된 페론 가족의 엄마 역을 맡은 릴리 테일러는 메리 해런(<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 아벨 페라라(<어딕션>), 로버트 알트먼(<숏 컷>) 등과 함께 작업한 바 있으며 전세계 작가-감독들과 독립영화 감독이 탐을 내는 실력파 배우이다.

‘귀신들린 집’ 장르 특성상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대신, 집 내부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전반적으로 꽉 찬 느낌을 주는 것도 <컨저링>이 가진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배우들이 집 안에 숨겨진 비밀통로 등을 통해 수직으로 낙하하거나 굴러떨어질 때의 추락감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불현듯한 속도감을 주며 주위를 환기시키곤 한다.

엑소시즘이 등장한다면 이런 장면이 필수죠!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 일행과 함께 “정말 오랜만에 본, 정통 호러영화였다”며 만족감을 표시했고, 더욱이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스트레스가 덜했다며 웃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메타-호러를 오히려 ‘정통적’이라 느꼈던 것도 재미있지만, 이는 아마도 <블레어 윗치> 시리즈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 이후로 조류가 크게 바뀐 듯한 호러영화 씬에서,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옛 장르들의 혼성이 주는 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컨저링>이 주는 폴터가이스트 장르의 공포가, 한국에서 얼마 전 흥행했던 <숨바꼭질>이 주는 공포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배급운을 잘 탄 예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가장 안전해야 할 보금자리가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고, 아이들의 보호자여야 할 부모(중 한 명)이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이 한국에서 크게 인기를 끄는 것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며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는 지금 우리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 같다.

ps1. 우리나라 극장판 자막에서 ‘배스시바’로 표기한 그 이름은, 서구에서 퍼스트 네임으로 사용되는 예를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성경에서 바로 다윗 왕이 목욕하는 모습에 홀려 원래 남편이던 부하를 사지에 내몰아 죽게 하고 뺏었다는 그 ‘밧세바’이다. 보통 밧세바는 다윗왕과의 이 에피소드로 유명하지만, 다윗왕 말년에 보면 반역 의지가 있었던 넷째 아들을 남편에게 일러바쳐 반역을 막고, 둘째 아들인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본인이 직접 건의하여 넷째를 처형시켰다고 한다. 왕비 – 대비마마의 입장에서는 할 만한 처신이지만 ‘아들을 죽인 어미’인 것도 사실이다.

ps2. ‘세일럼의 마녀’는 ‘마녀사냥’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리키는 대명사지만 이 영화에선 세일럼에 진짜 마녀가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마녀사냥의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어느 새 마녀의 고향이 돼 버린 세일럼에 애도를 …

ps3. 배스시바 역으로 나오는 이는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조셉 비샤라인데, 그는 제임스 완과 함께 한 전작 <인시디어스>에서도 귀신으로 출연한 바 있다.

“토르: 다크 월드”, 왜 토르를 그저 그런 영웅의 틀에 넣었을까?

 

<토르: 다크 월드>(이하 <토르 2>)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컸다. 1편의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아닌, ‘드라마’ 감독인 앨런 테일러가 연출을 맡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드라마와 영화는 엄연히 매체가 다르고 문법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언론시사회가 있었던 날로 짐작되는데, 트위터에 속속 “1편보다 재밌고 유머도 깨알 같다”는 기자들의 한줄평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개봉 전 <토르 : 천둥의 신>(이하 ‘<토르 1>’)과 <어벤져스>까지 복습하고서, 수요일에 개봉한 영화를 바로 그 다음 날 보고 왔다. 허나 적어도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들은 다 “더 재밌다”는 <토르 2>가 내게는 왜 실망스럽거나 재미없는 게 아닌 ‘당혹스러웠는지’ 여전히 생각 중이다.

*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무엇보다도 다크엘프족들의 우주선이 아스가드를 공격할 때 가장 당황했다. 고대 신화세계를 기반으로 장구한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그 중심축에 놓고 현대와 타임슬립물을 변주하는 것 같았던 <토르>가, 2편에 와서는 <스타워즈> 뉴 트릴로지와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우리가 익히 본 우주선들의 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는 일종의 우주활극 장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벤져스>에서 이미 공중전을 벌이는 우주인들이 등장했던 이상, 그리고 그 종족을 로키가 끌고 온 이상 <토르 2>에서 ‘날아다니는’ 우주인들이 등장하는 건 논리적으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토르 2>에서도 아스가드인들은 여전히 육중한 갑옷을 입고 지상에서 칼과 창 혹은 도끼와 방패를 들고 주로 지상전, 육박전을 벌이며 싸운다. 그러나 ‘토르’가 아스가드에서 특별한 존재였던 건 그가 묠니르의 힘을 통해 거의 유일하게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에 발을 꽉 붙였던 아스가드인들, 바이프로스트에서 떨어지면 추락해 죽는 신들을 보았는데, 우주선이라니 … 어쩌면 이 우주 활극이 진짜 <토르> 시리즈에 예정돼 있던 길이었고 1편의 고대 영웅신화적 서사가 오히려 예외적으로 선택된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의 ‘토르’가 이토록 성공적으로 어벤져스의 영웅 중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토르 1>의 매력, 그리고 <토르> 시리즈의 세계를 처음 세팅하며 제시했던 그 아스가드의 세계의 매력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본다면, <토르 2>의 변화는 다소 ‘뒷통수’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비단 장르나 스타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토르>의 주인공은, 아무리 로키가 활약한대도 결국은 ‘토르’이다. 우리는 이 ‘아버지 힘과 자신의 직위를 믿고 까불던’ 혈기방장하고 천둥벌거숭이던 작자가 어떻게 책임감을 배우고 통치군주의 진짜 조건을 익히며 ‘자기 희생’의 의미를 알게 되며 진지하게 성장하는지 1편을 통해 지켜봤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은 토르는 그저 멍청하고 힘 잘 쓰는 바보 마초영웅이 아니다. 애초 최고의 전사이기도 했던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헌신을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 이는 여러 차례 자신을 배반하고 (물리적으로, 말 그대로) 자신에게 칼을 꽂은 로키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여인과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우면서도 토르는 로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으며, <어벤져스>에 가서도 속 썩이는 동생 때문에 괴로워할지언정 여전히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거두지 않는다. 그런 토르가 <토르 2>의 로키에게는 불신을 넘어 증오도 내비치는 것 같다. 이건 우리가 알고 사랑하던 토르가 아니다. 그가 로키에게 번번이 속고 당했던 것은 그가 멍청하고 로키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속아’주었’고, 어느 정도는 로키의 선한 본성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너무 컸던 탓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하고 순진한 믿음이 바로 내가 사랑한 토르였다.

반면 로키는, 형 못지 않는 허세작렬에 과시적인 성격, 그리고 영악하게 꾀를 부리며 남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지, <토르 2>에서의 모습처럼 시종일관 깐죽대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원래의 로키가 아닌, 아이언맨의 성격이 이식된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로키가 아무리 매력적인 악당이고 주인공 중 하나인들, <토르 1>의 인기가 로키 한 사람만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르 2>를 보면, 마블 스튜디오는 높아져간 (그리고 그들 스스로는 예상하지 못한) 로키의 인기가 <토르 2>를 구원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확실히 <토르 1>에서 형에 대한 질투 때문에 소심하게 형을 모함했던 로키는 <어벤져스>를 거치면서 어벤져스의 영웅 모두를 상대한 전 우주적인 악당으로 우뚝 섰다. 토르와 크리스 헴스워스 못지 않게 로키와 톰 히들스턴을 좋아하기에 로키의 분량이 늘어난 것도 그에게 강력한 드라마를 부여해준 것도,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형 토르와 손을 잡는다는 설정도 좋다. 그러나 토르와 로키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 디테일은 턱없이 부족하고 얄팍하다.

<토르 1>이 ‘토르 시리즈를 런칭시켜 <어벤져스>에 토르와 로키를 합류시키는 가교가 된다’는 임무를 띄고 고대 영웅신화 전략을 택하면서도 그 둘의 관계를 비교적 밀도있게 그렸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토르 2>에서 이 둘이 협력관계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얄팍하게 그려진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토르 1> 개봉 당시엔 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그닥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안 했는데, 역설적으로 <토르 2>를 보고 <토르 1>이 얼마나 좋은 연출이었던가 새삼 상기하게 된다.

트위터에서 누군가 이렇게 쓴 것을 보았다. “<토르>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위해 보는 거야!” <어벤져스>의 영웅들 중 토르는 이 지상이 아닌 우주에서 날아온 (반)신이자,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가장 고대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전사였고, 그럼에도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지구뿐 아니라 우주의 아홉 세계를 보호하는 막강한 존재이고, 다른 세계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왕국을 위해 그 사람과의 이별을 스스로 선택한 남자였다. 헐크나 아이언맨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역사와 사연과 힘과 운명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토르 2>로 인해, 그는 이제 <어벤져스>에 복무하고자 하는 한낱 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영화가 아무리 말 그대로 ‘우주적 스케일’의 재난영화로서 거대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한들, 그 스펙터클의 쾌감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