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그 노래] “레옹”, Shape of My Heart

요즘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1994년에 나는 무슨 일을 하곤 했었나 곱씹어보다가 문득 그때 개봉한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그 영화의 제목은 바로 “레옹”. 뤽 베송 감독, 장 르노, 게리 올드만, 그리고 어린 시절 나탈리 포트만이 열연한 영화로 똥기마이 가득한 낭만 킬러가 주인공이다.

말하자면 순정마초 킬러와 소녀 수제자(?)라는 마치 무협지와도 흡사한 이야기인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전 세계적으로 굉장한 인기를 얻었고 흥행성적도 아주 좋았다. 그리고 홍콩협객총격물의 묘한 향내가 함께 겹쳐있는 이유로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었다.

이후 레옹은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고, 수많은 아류작이 뒤를 이었고, 지난 4월에는 개봉 20주년을 맞아 디렉터스 컷이 HD로 다시 개봉되기도 하였다.

이 영화에 삽입되어 영화 못지않게 큰 히트를 한 곡이 바로 스팅(Sting)의 “Shape of My Heart”. 실은 그 이전에 발표되어 많은 인기를 모았던 곡이지만 영화에 삽입되면서 스팅을 모르던 이들에게 까지 스팅을 널리 알리기도 한 곡이다.

마음이 스산할 때 들으면 딱 좋은 이 노래. 마침 눈도 오고 날씨도 그러해서 준비해 보았으니 함께 감상해 보시죠.

공동 작곡자인 도미니크 밀러와 함께 …

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And those he plays never suspect
He doesn’t play for the money he wins
He doesn’t play for the respect
He deals the cards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probable outcome
The numbers lead a dance

그는 명상을 위해 카드를 돌리지,
그는 상대방을 전혀 의심하지 않지,
그는 돈을 따기 위해 게임을 하지는 않아,
그는 명성을 얻기 위해 게임을 하지는 않아,
그는 해답을 찾기 위해 카드를 돌리지,
이길 수 있는 기회의 신성한 기하학,
나올 수 있는 결과의 숨겨진 법칙,
숫자들이 춤을 추네,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스페이드는 병사의 칼을 의미하지,
클로버는 전쟁 병기를 의미하지,
다이아몬드는 이 게임에서 돈을 의미하지,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마음(하트)의 모양은 아니야,

He may play the jack of diamonds
He may lay the queen of spades
He may conceal a king in his hand
While the memory of it fades

그는 다이아몬드 잭으로 플레이하기도 하지,
그는 스페이드 퀸을 내놓기도 하지,
그는 손 안에 킹을 들고있기도 한다네,
그 기억들이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

And if I told you that I loved you
You’d maybe think there’s something wrong
I’m not a man of too many faces
The mask I wear is one
Those who speak know nothing
And find out to their cost
Like those who curse their luck in too many places
And those who smile are lost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 말하면,
그대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겠지,
난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난 단 하나의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떠드는 사람은,
반드시 댓가를 치르게되지,
너무 많은 곳에서 자신의 행운을 바라는 이들,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이들,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스페이드는 병사의 칼을 의미하지,
클로버는 전쟁 병기를 의미하지,
다이아몬드는 이 게임에서 돈을 의미하지,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마음(하트)의 모양은 아니야,
그건 내 마음의 모양이 아니야,

영화의 장면들과 함께 하는 좀 다른 버전

노래 하나로는 좀 섭섭할 듯 하여 준비한, Lute 연주가 곁들여진 “Fields of Gold”.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 삽입곡이다.

“토르: 다크 월드”, 왜 토르를 그저 그런 영웅의 틀에 넣었을까?

 

<토르: 다크 월드>(이하 <토르 2>)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컸다. 1편의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아닌, ‘드라마’ 감독인 앨런 테일러가 연출을 맡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드라마와 영화는 엄연히 매체가 다르고 문법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언론시사회가 있었던 날로 짐작되는데, 트위터에 속속 “1편보다 재밌고 유머도 깨알 같다”는 기자들의 한줄평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개봉 전 <토르 : 천둥의 신>(이하 ‘<토르 1>’)과 <어벤져스>까지 복습하고서, 수요일에 개봉한 영화를 바로 그 다음 날 보고 왔다. 허나 적어도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들은 다 “더 재밌다”는 <토르 2>가 내게는 왜 실망스럽거나 재미없는 게 아닌 ‘당혹스러웠는지’ 여전히 생각 중이다.

*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무엇보다도 다크엘프족들의 우주선이 아스가드를 공격할 때 가장 당황했다. 고대 신화세계를 기반으로 장구한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그 중심축에 놓고 현대와 타임슬립물을 변주하는 것 같았던 <토르>가, 2편에 와서는 <스타워즈> 뉴 트릴로지와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우리가 익히 본 우주선들의 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는 일종의 우주활극 장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벤져스>에서 이미 공중전을 벌이는 우주인들이 등장했던 이상, 그리고 그 종족을 로키가 끌고 온 이상 <토르 2>에서 ‘날아다니는’ 우주인들이 등장하는 건 논리적으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토르 2>에서도 아스가드인들은 여전히 육중한 갑옷을 입고 지상에서 칼과 창 혹은 도끼와 방패를 들고 주로 지상전, 육박전을 벌이며 싸운다. 그러나 ‘토르’가 아스가드에서 특별한 존재였던 건 그가 묠니르의 힘을 통해 거의 유일하게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에 발을 꽉 붙였던 아스가드인들, 바이프로스트에서 떨어지면 추락해 죽는 신들을 보았는데, 우주선이라니 … 어쩌면 이 우주 활극이 진짜 <토르> 시리즈에 예정돼 있던 길이었고 1편의 고대 영웅신화적 서사가 오히려 예외적으로 선택된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의 ‘토르’가 이토록 성공적으로 어벤져스의 영웅 중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토르 1>의 매력, 그리고 <토르> 시리즈의 세계를 처음 세팅하며 제시했던 그 아스가드의 세계의 매력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본다면, <토르 2>의 변화는 다소 ‘뒷통수’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비단 장르나 스타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토르>의 주인공은, 아무리 로키가 활약한대도 결국은 ‘토르’이다. 우리는 이 ‘아버지 힘과 자신의 직위를 믿고 까불던’ 혈기방장하고 천둥벌거숭이던 작자가 어떻게 책임감을 배우고 통치군주의 진짜 조건을 익히며 ‘자기 희생’의 의미를 알게 되며 진지하게 성장하는지 1편을 통해 지켜봤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은 토르는 그저 멍청하고 힘 잘 쓰는 바보 마초영웅이 아니다. 애초 최고의 전사이기도 했던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헌신을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 이는 여러 차례 자신을 배반하고 (물리적으로, 말 그대로) 자신에게 칼을 꽂은 로키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여인과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우면서도 토르는 로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으며, <어벤져스>에 가서도 속 썩이는 동생 때문에 괴로워할지언정 여전히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거두지 않는다. 그런 토르가 <토르 2>의 로키에게는 불신을 넘어 증오도 내비치는 것 같다. 이건 우리가 알고 사랑하던 토르가 아니다. 그가 로키에게 번번이 속고 당했던 것은 그가 멍청하고 로키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속아’주었’고, 어느 정도는 로키의 선한 본성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너무 컸던 탓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하고 순진한 믿음이 바로 내가 사랑한 토르였다.

반면 로키는, 형 못지 않는 허세작렬에 과시적인 성격, 그리고 영악하게 꾀를 부리며 남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지, <토르 2>에서의 모습처럼 시종일관 깐죽대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원래의 로키가 아닌, 아이언맨의 성격이 이식된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로키가 아무리 매력적인 악당이고 주인공 중 하나인들, <토르 1>의 인기가 로키 한 사람만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르 2>를 보면, 마블 스튜디오는 높아져간 (그리고 그들 스스로는 예상하지 못한) 로키의 인기가 <토르 2>를 구원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확실히 <토르 1>에서 형에 대한 질투 때문에 소심하게 형을 모함했던 로키는 <어벤져스>를 거치면서 어벤져스의 영웅 모두를 상대한 전 우주적인 악당으로 우뚝 섰다. 토르와 크리스 헴스워스 못지 않게 로키와 톰 히들스턴을 좋아하기에 로키의 분량이 늘어난 것도 그에게 강력한 드라마를 부여해준 것도,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형 토르와 손을 잡는다는 설정도 좋다. 그러나 토르와 로키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 디테일은 턱없이 부족하고 얄팍하다.

<토르 1>이 ‘토르 시리즈를 런칭시켜 <어벤져스>에 토르와 로키를 합류시키는 가교가 된다’는 임무를 띄고 고대 영웅신화 전략을 택하면서도 그 둘의 관계를 비교적 밀도있게 그렸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토르 2>에서 이 둘이 협력관계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얄팍하게 그려진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토르 1> 개봉 당시엔 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그닥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안 했는데, 역설적으로 <토르 2>를 보고 <토르 1>이 얼마나 좋은 연출이었던가 새삼 상기하게 된다.

트위터에서 누군가 이렇게 쓴 것을 보았다. “<토르>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위해 보는 거야!” <어벤져스>의 영웅들 중 토르는 이 지상이 아닌 우주에서 날아온 (반)신이자,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가장 고대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전사였고, 그럼에도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지구뿐 아니라 우주의 아홉 세계를 보호하는 막강한 존재이고, 다른 세계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왕국을 위해 그 사람과의 이별을 스스로 선택한 남자였다. 헐크나 아이언맨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역사와 사연과 힘과 운명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토르 2>로 인해, 그는 이제 <어벤져스>에 복무하고자 하는 한낱 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영화가 아무리 말 그대로 ‘우주적 스케일’의 재난영화로서 거대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한들, 그 스펙터클의 쾌감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발레리(Valerie)의 편지

 


 


 



1980년대의 DC Comics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V for Vendetta”(2006).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Evey는 우연히(?) 발견한 “발레리”라는 여인의 편지를 통해 “공포”를 이겨내게 된다.

만화 원작에 나오는 이 편지의 원문을 옮겨 보았다.



 



 



I don’t know who you are. Please believe. There is no way I can convince you that this is not one of their tricks. But I don’t care. I am me, and I don’t know who you are, but I love you.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이 편지가 저들의 더러운 술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요. 나는 나예요. 그리고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I have a pencil. A little one they did not find. I am a women. I hid it inside me. Perhaps I won’t be able to write again, so this is a long letter about my life. It is the only autobiography I have ever written and oh God I’m writing it on toilet paper.

내겐 연필이 있어요. 아주 작아서 저들이 찾아내지 못했죠. 난 여자라서 몸 안에 감출 수 있었답니다. 더 이상은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여기에 나의 인생에 대해 긴 편지를 쓴답니다. 이건 하나 밖에 없는 내 자서전 인데, 그걸 화장실 휴지에다 쓰게 될 줄이야.

I was born in Nottingham in 1957, and it rained a lot. I passed my eleven plus and went to girl’s Grammar. I wanted to be an actress.

난 1957년 노팅엄에서 태어났어요. 비가 무척 많이 내렸죠. 열 한 살이 넘어서 여학교에 가게 되었죠. 난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I met my first girlfriend at school. Her name was Sara. She was fourteen and I was fifteen but we were both in Miss. Watson’s class. Her wrists. Her wrists were beautiful. I sat in biology class, staring at the picket rabbit foetus in its jar, listening while Mr. Hird said it was an adolescent phase that people outgrew. Sara did. I didn’t.

첫 여자친구, 사라를 그 학교에서 만났어요. 그때 사라는 열 네 살이었고 난 열 다섯 살이었지만 둘 다 왓슨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죠. 그녀의 손목. 그녀의 손목은 아름다왔어요. 생물시간에 유리병에 담긴 토끼의 태아를 바라보면서 허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죠. 청소년기에 겪는 혼란일 뿐이라고. 사라는 그랬지만 난 아니었어요.

In 1976 I stopped pretending and took a girl called Christine home to meet my parents. A week later I enrolled at drama college. My mother said I broke her heart.

1976년에 더 이상은 숨기지 않고 크리스틴을 부모님께 인사드렸죠. 일주일 후에 연기자 학교에 등록했고요. 어머님이 그러시대요. 내가 당신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고.

But it was my integrity that was important. Is that so selfish? It sells for so little, but it’s all we have left in this place. It is the very last inch of us. But within that inch we are free.

하지만 나는 나와 내 삶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내가 이기적인가요? 비록 아주 하찮을 지 몰라도 나와 내 삶에 충실하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이잖아요. 우리에게 허락된 아주 작은 것.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죠.

London. I was happy in London. In 1981 I played Dandini in Cinderella. My first rep work. The world was strange and rustling and busy, with invisible crowds behind the hot lights and all that breathless glamour. It was exciting and it was lonely. At nights I’d go to the Crew-Ins or one of the other clubs. But I was stand-offish and didn’t mix easily. I saw a lot of the scene, but I never felt comfortable there. So many of them just wanted to be gay. It was their life, their ambition. And I wanted more than that.

런던. 그 곳에서 난 행복했어요. 1981년에 난 신데렐라에서 단디니 역할을 했죠. 최초로 내 이름을 알린 작품이죠. 그때 세상은 기묘하고 소란스럽고 북적거렸죠. 밝은 조명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 관객들과 그 숨막히는 화려함. 재밌고 좋았지만 언제나 외로웠죠. 밤에는 크류-인같은 클럽에 놀러갔었죠. 하지만 난 항상 혼자 있었고 잘 어울리지 못했죠. 거기에서 많은 걸 보았지만 난 불편하기만 했어요. 그런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냥 게이가 되려고 했답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요. 하지만 난 그런 걸 원하진 않았어요.

Work improved. I got small film roles, then bigger ones. In 1986 I starred in “The Salt Flats.” It pulled in the awards but not the crowds. I met Ruth while working on that. We loved each other. We lived together and on Valentine’s Day she sent me roses and oh God, we had so much. Those were the best three years of my life.

일은 잘 풀려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죠. 처음엔 단역이었지만 차츰 큰 역할을 맡았죠. 1986년에는 “소금 평야”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답니다. 상은 많이 받았지만 관객 동원은 별로였죠. 그 영화를 찍을 때 루쓰를 만났답니다. 우린 서로를 사랑했어요. 우린 함께 살았고 발렌타이 데이에 그녀는 내게 장미를 보내주었죠. 아, 우린 행복했어요. 그 때가 내 생애 최고의 삼 년 간이었어요.

In 1988 there was the war, and after that there were no more roses. Not for anybody.

1988년에 전쟁이 발발했죠. 그 이후 장미는 자취를 감췄답니다. 그 누구에게서도요.


 


 




 



In 1992 they started rounding up the gays. They took Ruth while she was out looking for food. Why are they so frightened of us? They burned her with cigarette ends and made her give them my name. She signed a statement saying I’d seduced her. I didn’t blame her. God, I loved her. I didn’t blame her.

1992년에 그들은 게이를 잡아들이기 시작했죠. 먹을 걸 구하러 나갔던 루쓰를 그들이 잡아갔죠. 그들은 왜 우리를 그토록 무서워하는 걸까요? 그들은 루쓰를 담뱃불로 지지면서 내 이름을 불라고 했어요. 그녀는 내가 그녀를 유혹했다는 진술서에 서명을 했죠.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요. 하느님, 난 그녀를 사랑했어요.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요.

But she did. She killed herself in her cell. She couldn’t live with betraying me, with giving up that last inch. Oh Ruth. . . .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를 원망했답니다. 그녀는 감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녀는 나를 배신하고는 살아갈 수 없었나 봐요. 자신에게 허락 된 최소한의 것을 포기한 채로 살아갈 수 없었나 봐요. 아, 루쓰 …

They came for me. They told me that all of my films would be burned. They shaved off my hair and held my head down a toilet bowl and told jokes about lesbians. They brought me here and gave me drugs. I can’t feel my tongue anymore. I can’t speak.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죠. 그들은 내가 출연한 영화를 다 불 태워버렸다고 말하더군요. 그들은 내 머리를 깎고 내 얼굴을 변기 속에 박아넣었죠. 그러면서 레즈비언에 대한 농담을 주고 받더군요. 그들은 나를 여기에 데리고 와서는 약을 먹였어요. 난 이제 혀에 감각이 없어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The other gay women here, Rita, died two weeks ago. I imagine I’ll die quite soon. It’s strange that my life should end in such a terrible place, but for three years I had roses and I apologized to nobody.

이 곳에 있는 다른 게이 여자 리타는 이 주일 전에 죽었어요. 나도 곧 죽게 되겠죠. 내 삶이 이런 처참한 곳에서 끝난다는 게 너무 기막히지만 그래도 내겐 장미와 함께 한 삼 년의 세월이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아요.

I shall die here. Every last inch of me shall perish. Except one.

난 여기서 죽는답니다. 나의 것은 모두 다 썩어서 없어지겠죠. 단 하나만 남기고.

An inch. It’s small and it’s fragile and it’s the only thing in the world worth having. We must never lose it, or sell it, or give it away. We must never let them take it from us.

내게 허락된 최소한의 것. 작고 연약하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하나 가질 가치가 있는 그것. 우리는 절대 그걸 잃어서는 안되요. 팔아치워서도 안되고 남에게 내 던져 버려도 안되죠. 절대로 그들이 우리에게서 그걸 뺏어가게 해선 안된답니다.

I don’t know who you are. Or whether you’re a man or a woman. I may never see you or cry with you or get drunk with you. But I love you. I hope that you escape this place. I hope that the world turns and that things get better, and that one day people have roses again. I wish I could kiss you.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당신이 여잔지 남잔지도 모르죠. 난 당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당신과 함께 눈물 흘릴 수 없을지도 모르고 당신과 함께 술에 취할 수도 없을테지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부디 당신이 이 곳을 탈출 할 수 있기를 바래요. 세상이 변해서 사정이 나아지길 희망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장미를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대에게 입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Valerie

발레리가.


영진공 이규훈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아들의 발목을 잡은 애비의 한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의 태생적 한계란 참 거시기 하다.

하다못해 신약의 첫 구절부터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으로 해서 줄줄이도 낳아 44번째 가서야 예수의 족보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무려 1절에서 25절 까지다.

광산 김씨였던 내 친구 용준이는 자신이 사귀던 여자친구가 3종백숙부의 외3종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와 헤어지는 (여자로서는 참 다행스러운)결과를 도출하며 핏줄의 상관관계가 무에 그리 집착의 대상인지를 궁금케 하기도 했다. (이유가 참 자질구레스럽기도 하다) 요컨대 어디서 태어나고 누구의 핏줄이냐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인류가 짱돌을 들기 시작한 이래로 전지구적인 관심사인 것이라 하겠다.

흔히 현대를 정보의 유목민(유비쿼터스) 시대라 한다. 모든 인간의 창조물들이 디지털 컨버전스 되면서 정보는 곧 돈이 되었다. 뉴스를 만들 수만 있다면 돌팔매질만 잘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방대하고 다각적인 정보의 수용은 예기치 못한 정보의 생산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부작용으로 ‘탤런트 김모양이 지난주부터 테니스를 배운다’는 둥, ‘최근 결혼한 톱가수 A양의 아들이 두 돌이 되기도 전에 걷는다’는 둥 하는 약에 쓰이는 쥐똥만큼도 값어치 없는 기사가 당당히 신문의 한 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하는 지금이다.

따라서 나는 요즘은 정보제공자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마태복음과 3종백숙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정보는 위에 나열했듯 ‘누가’ 만드는 게 아니라 정보 자신의 자가발전에서 만들어지는 세상임을 철썩 같이 믿었다. 인간이 정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정보를 만드는 세상! 그런데, 대관절 이런 마당에 핏줄에 집착할 이유가 무엇이 더냔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혈연과 지연의 관계를 다시금 소 막창에 짱박혀 있던 여물을 다시 씹듯 곱씹게 된 건 다름 아닌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SF 서사극의 대표이자, 현대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총아이며, 미래를 예언하는 환타지의 교과서인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때문이었으니, 세상은 참으로 생뚱맞다.

“뉘신지?”
“내가 니 애비”

다스베이더의 마지막 고백은 스타워즈 시리즈 전체를 갈무리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개봉 당시에 운위된 ‘방대하며 유려하고 놀라운 3D’는 솔직히 30여년의 맥락에 따른 디자인 한계에 의해 별로 감탄사를 자극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애비와 자식의 갈등구조를 제공해야 하는 중간자적인 입장의 성격은 마지막편이라는 장엄한 타이틀만큼의 스케일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하고야 만다. “조지 루카스”가 언제부터 한시를 즐겨 읽으며 수미쌍관에 심취하셨는지 “니 애비의 갈등도 꼭 독고다이 맞짱으로 정점에 서리라”를 엔딩으로 가야만 했는지는 무척 궁금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인트로 부분의 거함들이 격돌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한 스케일은 ‘본 것 이상’을 갈구함이 자명하다. 우리는 말 그대로 『스타워즈』의 스펙터클을 기대한 것이지 『다찌마와리』의 합을 갈구한 것은 아니다.

문제의 요인은 또 있다.

우리는 이미 『인디펜던스 데이』의 1대 다수의 맞짱 스케일을 경험한 바, 대통령도 미지의 절대세력을 응징할 수 있다는 플롯을 감상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외계인도 MS 기반의 윈도우를 쓴다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고야 만 『인디펜던스 데이』의 충격은 이미 한번 겪은 터, 그러기에 한 『다찌마와리』 하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옹께옵서 ‘다스 시디어스’의 명에 따라 몇 타스는 족이 넘어 보이는 포스 기사단을 독고다이로 정리 하시는 거나 충직한 시디어스의 늙다리 부하들을 정리해대시는 모습은 어제 본 코미디 오늘 또 보는 것 수준의 심심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 아나킨옹이 무슨 잘못이랴? 몇 년 먼저 나와 설친 『인디펜던스 데이』가 나쁜 놈이지.

요컨대 콩심은 데 콩 나야하는 “조지 루카스”의 수미상관 식 영화구조는 심히 용두사미스러운 클라이막스로 봉착한 바 ‘자식이기는 애비 없다’는 끈적한 혈연의 정을 다시 확인하는 영화로 갈무리 되었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중간까지를 마무리해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웅장한 전편의 아우라의 끝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소구욕은 충족시키지 못한 한계를 가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는 아무래도 아쉽고 종결의 맛이 나지 않는다.

문득 생각하건대, 스타워즈의 자랑스러운 마무리는 좀 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 우주적 『다찌마와리』는 이미 『인디펜던스데이’에서 확인했고, 지난 영화사 연작 시리즈의 점층적 스케일 상승감의 극한은 『반지의 제왕』에서 경험했으며, 무엇보다 무술의 합은 “쇼브라더스”가 이미 30년 전에 보여줄 건 다 보여주지 않았냐는 말이다. 하물며 그 후세대인 “성룡”, “이연걸”, “홍금보”, “원화평” 형님들이 그만큼의 것들을 할리우드에서 소비하지 않았는가?

영진공 그럴껄

“블랙 스완”, 무대 위의 삶 그리고 이중 자아


<블랙 스완>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년 말 미국 개봉 직후부터 영화가 아주 대단하다는 소문이 들려왔었고 마침내 때가 차매, 나탈리 포트만은 골든블로브에 이어 아카데미에서까지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국내 개봉 이후 영화를 보는 이들마다 “압도적”이라는 표현을 공통적으로 내놓고 있는 작품이니까.

영화를 보는 이들마다 관점과 그에 따른 반응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작품 자체로부터 압도 당한다는 경험은 일상 생활에서와는 달리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휴식 같은 영화 관람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경험이 될 수도 있긴 하겠지만 관객을 2시간 동안 압도할 수 있는 영화란 의외로 많지가 않고 그런 만큼 상당한 가치를 인정해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개인적으로 <블랙 스완>은 관람하는 동안 정서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까지 매우 힘들게 느껴졌던 작품이다. 상영 시간 내내 온 몸을 긴장시키며 보느라 다른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르게 고생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2시간 내내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말하는 건 좀 과장인 것 같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는 150km 안팎의 속도로 계속 운전하고 난 뒤의 피로감 같은 것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날카로워진 감각이 다시 가라앉기까지 두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 <더 레슬러>(2008)의 다소 느슨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관객들을 시종일관 초긴장하게 만드는 영화가 바로 <블랙 스완>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뉴욕 발레단의 젊은 무용수 니나(나탈리 포트먼)가 <백조의 호수>의 주연으로 발탁되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초연을 마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제는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발레단 내부의 치열한 경쟁과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기 위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그 중심에 선 인물의 내면 세계는 매우 복잡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니나의 경우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으로 새로운 솔리스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만 흑조(블랙 스완)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한계를 경험하면서 노이로제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 <블랙 스완>은 결국 니나의 관점에서 경험하는 압박감과 신경증적 세계에 관한 작품이다.

<블랙 스완>은 언듯 90년대 초반에 한창 유행했던 사이코 스릴러의 내러티브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블랙 스완>에는 음모도 반전도 없이 오직 니나의 내면 세계와 그것이 바깥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만이 존재한다. 영화 속에 주인공과 직접적으로 갈등하는 타자 – 니나의 어머니(바바라 허쉬)나 릴리(밀라 쿠니스) 등이 유력한 후보이긴 하지만 – 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대중 영화로서 뭔가 허전한 감을 남기게 되는 이유가 되는 반면, 영화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리는 구조적인 이유가 된다.

<블랙 스완>은 얼토당토 않는 스릴러적인 재미의 구축에 힘을 쓰기 보다 니나를 중심으로 한 발레리나의 세계와 <백조의 호수>라는 텍스트가 갖고 있는 메타포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재능과 함께 나탈리 포트먼의 헌신적인 연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블랙 스완>이 남다른 완성도의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부분 중에 하나 – 그러나 가장 중요한 – 는 전문 무용수에 버금가는 주연 배우들의 동작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탈리 포트먼의 경우 투자가 결정되기도 전인 촬영 1년 전부터 자비로 훈련을 시작했다고 하니 이런 열정이 마침내 좋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 초반에 니나가 <백조의 호수>의 솔리스트로 뽑히고 나서 화장실에 들어가 엄마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나탈리 포트먼의 표정 연기는 이미 주연상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스펙타클하다. 물론 영화 전체의 하이라이트는 마침내 무대 위에서 완전한 블랙 스완으로 변모하여 관중들의 찬사를 받게 되는 니나의 모습이겠지만.



대략 10년 정도 숙성된 시나리오였다고 하는데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애초에 <더 레슬러>를 만들 당시 퇴물 레슬러와 발레리나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꾸밀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 모두 담기에는 너무 많다는 판단하에 지금의 <더 레슬러>와 <블랙 스완>, 두 편의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 하니 두 작품 간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두 말할 나위가 없을 듯 하다.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무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인물들의 이중 자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각자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성공적으로 완성해내는 결말도 유사하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