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너희들은 주인공이 아니야!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또는 “불과 얼음의 노래(A Song of Ice Fire)” 저자인 조지 쌍알(R. R.) 마틴을 소개하자면 이 할배는 1948년 미국 뉴저지주 베이욘의 빈민가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일랜드인, 아버지는 이탈리아 혼혈이었답니다. 처음 만든 이야기가 자기가 기르는 거북이들이 자꾸 죽는 걸 보고 거북이들 사이에 흉흉한 음모와 모략이 펼쳐지는 이야기였다니 참으로 꾸준한 양반입니다. 마블코믹스 광팬으로 출판사에 독자투고로 시작해서 미국버전 동인지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하여 이후 SF 단편소설로 등단했고 휴고상, 네뷸러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범상치 않았는데 주로 판타지와 호러를 섞은 SF를 썻고, <환상특급> <맥스 헤드룸>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왕좌의 게임>에도 거대 장벽과 그 장벽에서 작동하는 기계들 같은 SF적 요소가 많이 나오죠.

<왕좌의 게임>을 요약하자면 “복잡한 스토리라인 속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놓고 이들이 멋진 대사를 치게 하고는 죽여 버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쌍알 마틴 옹이 “나한테 잘해. 안 그러면 다음은 티리온 차례가 될거야. (Be Nice To Me Or Tyrion Is Next)” 라는 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었는데, 정말 그러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나한테 다음 권이 언제 나오냐고 누가 물어볼 때마다 스타크家 애 하나씩 죽일거야”라고 협박하는 사진도 있고요.

“이번엔 내 차례인가?”

왕좌의 게임이 인기 있는 이유도 사실 그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늘 긴장해야 하죠, 누가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을지 모르니까요. 원래 주인공은 안죽고, 죽더라도 뭔가 의미있게 죽는 게 대부분의 소설들의 불문율인데 여기선 안 그럽니다. 그냥 갑자기 그냥 막 뜬금없이 죽어요. 즉,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를 처참히 박살내는데, 그럼으로써 그 어떤 판타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감을 느끼게 합니다. 개x끼들이 권력을 잡고 다 질 것 같던 전쟁에서도 이기고 약자들은 죽고 배신자들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정치판의 현실이 떠오르기도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판타지물의 전형은 톨킨 옹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J.R.R. 톨킨이 북유럽의 옛 설화들을 수집하고 조립해서 새로 만들어낸 유럽설화의 집대성판인데요, 이 양반은 189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살다가 73년에 사망했으므로 19세기부터 20세기를 산 사람입니다. 1925년부터 195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헌학과 언어학 교수로 재직한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호빗과 휴먼과 엘프와 드워프와 마법사, 그리고 드래곤과 오크와 기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세계가 이후 모든 서양판타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SF쪽으로 전환되어서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기본 틀이 되었고, 게임으로 전환되면서는 테이블 보드 게임에서 시작해서 “디아블로”나 “울티마 온라인”, “워크래프트”, 우리나라의 “리니지”의 바탕이 되었고요. <무협소설>이 중국문화권 사람들이 꿈꾸는 신화의 표현이라면, 이 반지의 제왕 속 판타지 세계는 영국미국 문화권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화입니다.

“마이 프레셔어스으리~“

사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의 옛 설화들과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장식된 1, 2차 세계대전의 판타지적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은 인간들과 엘프, 드워프로 구성된 반지원정대를, 사우론은 히틀러를, 사루만은 그 꼬붕인 무솔리니쯤을 상징하는 셈이고요, 인간 같지 않은 오크들은 식민지 주민들이나 일본사람들 쯤을 상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포된 계기라서 꽤 그럴듯한 전쟁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양쪽편 다 식민지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싸움질이었고요. 이건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거나 더 이상 가질 필요 없는 나라(미국과 영국, 뒤늦게 소련) vs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해서 식민지를 마구마구 필요로 했던 나라들(독일, 일본, 이태리)간의 싸움이었던 거죠.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놈의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청소라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덕분에 선과 악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국이나 영국이 히틀러가 나쁜 놈이라서 전쟁을 한 건 아니었고, 히틀러를 죽였다고 해서 악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2차 대전 덕분에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나면 1차 대전은 약 1천만 명이 죽었고, 2차 대전은 약 5천 만명이 죽어나간 비극일 뿐입니다. 사실 2차 대전 정리과정에서 지금의 중동 갈등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지금 테러가 난무하는 세상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반지의 제왕”은 신화이지만, 동시에 역사에 대한 거대한 왜곡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신화들은 다 이런 속성이 있죠. 우리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합니다. 그 사건을 이야기 구조로 바꾸어서 기억하게되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의미나 교훈은 그런 과정에서 추출되는데, 예를 들자면 “사필귀정”,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뭐 이런 거 말이죠.

허나 “왕좌의 게임”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왕좌의 게임은 지금까지 판타지에 대해서 기대하던 것들을 하나씩 배반하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배반이 마구 벌어지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의미나 교훈을 찾으려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노력에 대한 배반은 그보다 더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 정의, 원칙, 명예, 용기, 신의/성실, 심지어 지략이나 돈, 권력 조차도 소용이 없는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이 드라마의 모토는 “가차없는 세상”이지요.

원래 판타지 영화의 원칙대로라면 스타크 가문이 주인공일테지요. 위에 언급한 가치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작살나는 건 모두 바로 그 가치들 때문입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명예와 정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죠. 케이틀린 스타크가 티리온을 체포할 때 역시 명예와 신의성실에 따라 협력했던 사람들도 다 잦되고요. “피의 결혼식”도 결국 불문율은 안 깨겠지 라는 순진한 기대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원작에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오류 때문이었다던데 제이미 라니스터가 볼튼한테 스타크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한 말을 볼튼이 오해하면서 … 그렇다면 더 황당한 전개이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다고 지략과 돈과 권력까지 갖춘 라니스터 가문이 계속 떵떵거리고 잘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아직 본편인 얼음과 불의 전쟁은 시작도 안했는데 정작 그 본편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닐 거 같다는 점입니다. 불의 마녀가 말했듯이 지금까지 다섯 왕의 전쟁은 그냥 몽매한 인간들이 벌이는 왕좌의 게임이었을 뿐, 진짜 전쟁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얼음괴물들과의 전쟁이고, 여기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불뿜는 용들이 주인공이 될 듯합니다. 이 용들은 용 엄마 말도 잘 안듣는 애들인가 봐요.

Margaret Mahler 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우리의 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이걸 대상관계 이론이라고 하는데요, 말러에 따르면 우리는 처음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세상과 나의 구분이 없는 상태로부터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걸 정상적 자폐단계라고 하는데, 이때는 내 마음과 현실이 구분이 안되고요, 꿈꾸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꿈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인 것 처럼, 이때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곧 나입니다. 그러다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드디어 자아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죠.

내가 아닌 것은 뭐냐하면 결국 내 맘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들인데, 다시 말해서 세상이 내 맘과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사실, 즉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우리에게는 자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자아가 생기면 우리는 자아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게 됩니다. 자아의 영역을 넓힌다는 건 결국 내 자유를 늘리는 것인데, 3살 때쯤 이런 개념이 생기는데 그래서 그때 미운 세 살이 되는 것이랍니다. “싫어!” “안 해!”라는 말이 최초의 자유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다음에야 우리에게 지능이라는 것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지능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석을 찾고 조작하는 능력입니다.

이 드라마도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이런 성장과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정의가 이기고 불의가 패퇴하는 사건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때는 우리는 소설을 진짜 세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과 구분하지 못하는 자폐 단계인 것입니다. 이러면 소설 속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게되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기대한 대로 소설이 전개되지 않을 때,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애가 속절없이 댕강댕강 대가리가 잘려나갈 때, 이 세계가 나와 상관없이 내 외부에 존재하는 나와 독립적인 세계라는 걸 깨닫고 그제서야 이 세상의 작동에 대해서 진심으로 알려고 합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 자기 기대대로 드라마가 전개되지 않는다고 화내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발달을 거부하는 것인데요, 소설을 자기 소망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죠. 마치 여자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연애를 포기하고 2D에 만족하는 오덕과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요.

나는야 내 의지로 발달을 거부하지

사실 이 드라마를 제대로 즐기면 그런 깨달음을 경험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그가 단지 명예와 정의와 원칙을 따라서만이 아닙니다. 힘이 생존을 위해서 작동하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요. 바리스 경이 네드에게 “도대체 어쩌자는 생각으로 당신이 알게된 사실을 세르세이에게 말한 거요?” 라고 질문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롭도 마찬가지죠. 원칙을 따르다가 비극에 처합니다.

그런데 원칙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구현해냈을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걸 통해 그 사람의 능력이 증명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걸 구현한 인간을 따르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면 그게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전까지 원칙이나 정의는 그저 누군가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정의가 이겨야 되고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이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포기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정의는 언젠가 이길꺼야 따위 기대만 하며 손가락만 빨고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정의가 못이긴 건 그만큼 준비와 노력을 안했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니 뭐가 어쨌든 일단 이겨놔야 정의든 뭐든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가차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그저 겸손일 뿐이었습니다. 티리온 라니스터가 오래 사는 이유도 그것인 듯 보입니다. 그는 오만할 수 없는 존재죠. 제이미 라니스터도 겸손을 배우면서 오히려 쓸만한 인물이 되는 건지, 아닌 건지 …

데드스타 건설 청원에 대한 백악관의 공식 답변


 

 


 


 



 


 


 


농담으로 시작했겠지만,

백악관에 데드스타건설을 위한 예산확보에 대한 청원이 들어갔고 3만 4천명 이상이 서명을 했나봅니다.


 


내용이 어떻든 그정도 인원이 넘어가면 백악관은 심각하게 고려하거나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야한다고 하네요. 이에 백악관의 과학및 우주개발 수석참모인 Paul Shawcross가 공식적인 답변을 내놨습니다.


 


 








 



 



[2016년부터 데드스타 건설을 위한 모금청원 서명운동에 대한 미행정부의 입장]


 




여러분이 찾고있는 답변이 아님

This Isn’t the Petition Response You’re Looking For




본 정부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강력한 국방력에 대한 여러분들의 염원을 공감합니다만 데드스타건설은 하지 않을것입니다. 몇가지 이유들입니다.



☆ 데드스타의 건조에는 대략 850경 달러 이상이 소요될것으로 추산된 바가 있습니다. 지금은 예산적자를 줄여야지 늘일때가 아닙니다.

☆ 본 행정부는 행성의 파괴행위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 1인승 전투기 단 한대에 의해 파괴될수 있는 구조결함이 있는 데드스타에 국민의 혈세를 쓰는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요?



{이미 많은 우주관련 개발사업이 진행중이라는 중간내용 생략}




우리는 이미 미래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즐기세요. 아니 그뿐 아니라 그 미래를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과학 기술 엔지니어링과 수학관련 커리어를 추구하세요. … 그렇게 한다면 포스는 우리와 함께 할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행성을 파괴할수 있는 데드스타의 힘도 포스에 비하면 보잘것 없다는 것을요.



 










 


 



제목부터 오비완 캐노비의 대사, “너희가 찾는 드로이드가 아냐”를 패러디하는것으로 시작해서 재치있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서명운동을 하면서 노는게 한심해보이기도 하지만 유머를 잃지 않으며 이공계 발전을 강조하는 답변이 재밌네요.


 


이상 끝! ^^


 


 


 


영진공 플라팬 


 


 


 


 


 


 


 


 


 


 


 


 


 


 


 


 


 


 


 


 


 


 


 


 


 


 


 


 


 


 


 


 


 


 


 


 


 


 

“보디 히트” (1981), 로렌스 캐스단의 감독 데뷔작


참 의아하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연유로, 어떤 영화 때문에 졸지에 “로렌스 캐스단”이 “로맨틱 코미디의 귀재” 로 한때 불렸던 것일까? 『프렌치 키스』 때 그런 문구를 동원해 홍보를 했던 것 같은데, 『우연한 방문객』 때문인가? 아니면 『죽도록 사랑해』? 아니 어쩌면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캐스단 하면 언제나 『보디 히트』가 가장 먼저 언급되곤 한다. 새끈한 시절의 “윌리엄 허트”와 역시 새끈한 시절의 “캐슬린 터너”가 치정극의 주인공들로 나온다. IMDB를 찾아봤는데 이 영화가 데뷔작이란다. 이런, 결코 데뷔작같지 않은 데뷔작이다. 이렇게 능글능글할 데가 있나.

영화는 ‘치정극’, 그리고 ‘팜므파탈’이라는 단 두 단어로 설명이 충분할 만큼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이 예상 가능한 것의 과정 하나하나를 흥미롭게 엮어가고 있다. 정말로 그녀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일까? 정말로 그녀는 그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정말로 그녀는 그를 이용한 것인가? 혹은, 정말로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모든 답을 다 알면서도,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의심을 하게 된다.

역시나, “잔느 모로”나 “페이 더너웨이”처럼 서늘한 미녀과에 속하는 “캐슬린 터너”가 서늘한 매력을 발산한다. 마르고 팽팽한 피부의 “윌리엄 허트”는 매우 섹시하다. 영화를 보면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남자를 정말로 사랑해 버렸고 게다가 알고보니 팜므파탈이 아니라 가련한 희생자였던데다 비참한 죽음을 맞는 『차이나타운』의 “페이 더너웨이” 꼴이 나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그녀는 그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속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까지 위장해 더이상 추적과 의심을 받을 필요 없이 이국적인 곳에서 삶을 즐기고 있다.

고전 누아르에서 팜므파탈은 언제나 주인공 남자에게 파멸을 맞곤 했다. 나는 이 영화가, 결국 그녀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마음에 든다. 물론 ‘승리’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게, 그녀는 그를 죽일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믿고싶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을, 그의 진심을. 대체로 똑똑한 팜므파탈이 나오는 영화에서, 마지막까지 의심하지 않고 모든 걸 다 바치고, 그녀를 위해 기꺼이, 자기가 앞서 배신당해주는 남자주인공들이 마침내 여주인공에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간이라도 빼줄 듯 굴다가도 자기가 손해보는 것같으면 의심을 시작한다. 그러게 진짜 사랑은 바보들만 하는 것이다. 혹은 진짜 사랑할 때 바보가 된다.

숨막히는 밤, 숨막히는 유혹

대체로 이런 식의 스릴러는 인간의 신뢰와 배신에 대해 다룬다. 세상은 너무 순진하게만 살 수는 없다. 그런 경우 멍청함은 불행을 부르고 그는 결국 상대의 사악함 탓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엄밀한 계산의 와중에도 사람은, 누군가를 믿고 싶어한다. 그 믿음이 성취될 때, 막대한 돈을 능가하는 행복을 함께 얻는다. 많은 이들이 아름답고 똑똑하며 착하지 않은 그녀들을 욕하면서도 그녀들에게 매혹된다.

하지만 그녀들의 배신은, 말하자면 테스트이다. 그녀들은 사랑의 깊이를 테스트한다. 그의 사랑이 과연 세월에 금방 시들게 될 육체에만 홀려있는지, 아닌지. 손해와 상처를 감수할 자세가 되어있는지. 정말로 그녀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그 테스트를 통과하는 사람만이 궁극적으로 그녀들에게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아들의 발목을 잡은 애비의 한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의 태생적 한계란 참 거시기 하다.

하다못해 신약의 첫 구절부터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으로 해서 줄줄이도 낳아 44번째 가서야 예수의 족보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무려 1절에서 25절 까지다.

광산 김씨였던 내 친구 용준이는 자신이 사귀던 여자친구가 3종백숙부의 외3종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와 헤어지는 (여자로서는 참 다행스러운)결과를 도출하며 핏줄의 상관관계가 무에 그리 집착의 대상인지를 궁금케 하기도 했다. (이유가 참 자질구레스럽기도 하다) 요컨대 어디서 태어나고 누구의 핏줄이냐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인류가 짱돌을 들기 시작한 이래로 전지구적인 관심사인 것이라 하겠다.

흔히 현대를 정보의 유목민(유비쿼터스) 시대라 한다. 모든 인간의 창조물들이 디지털 컨버전스 되면서 정보는 곧 돈이 되었다. 뉴스를 만들 수만 있다면 돌팔매질만 잘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방대하고 다각적인 정보의 수용은 예기치 못한 정보의 생산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부작용으로 ‘탤런트 김모양이 지난주부터 테니스를 배운다’는 둥, ‘최근 결혼한 톱가수 A양의 아들이 두 돌이 되기도 전에 걷는다’는 둥 하는 약에 쓰이는 쥐똥만큼도 값어치 없는 기사가 당당히 신문의 한 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하는 지금이다.

따라서 나는 요즘은 정보제공자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마태복음과 3종백숙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정보는 위에 나열했듯 ‘누가’ 만드는 게 아니라 정보 자신의 자가발전에서 만들어지는 세상임을 철썩 같이 믿었다. 인간이 정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정보를 만드는 세상! 그런데, 대관절 이런 마당에 핏줄에 집착할 이유가 무엇이 더냔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혈연과 지연의 관계를 다시금 소 막창에 짱박혀 있던 여물을 다시 씹듯 곱씹게 된 건 다름 아닌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SF 서사극의 대표이자, 현대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총아이며, 미래를 예언하는 환타지의 교과서인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때문이었으니, 세상은 참으로 생뚱맞다.

“뉘신지?”
“내가 니 애비”

다스베이더의 마지막 고백은 스타워즈 시리즈 전체를 갈무리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개봉 당시에 운위된 ‘방대하며 유려하고 놀라운 3D’는 솔직히 30여년의 맥락에 따른 디자인 한계에 의해 별로 감탄사를 자극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애비와 자식의 갈등구조를 제공해야 하는 중간자적인 입장의 성격은 마지막편이라는 장엄한 타이틀만큼의 스케일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하고야 만다. “조지 루카스”가 언제부터 한시를 즐겨 읽으며 수미쌍관에 심취하셨는지 “니 애비의 갈등도 꼭 독고다이 맞짱으로 정점에 서리라”를 엔딩으로 가야만 했는지는 무척 궁금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인트로 부분의 거함들이 격돌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한 스케일은 ‘본 것 이상’을 갈구함이 자명하다. 우리는 말 그대로 『스타워즈』의 스펙터클을 기대한 것이지 『다찌마와리』의 합을 갈구한 것은 아니다.

문제의 요인은 또 있다.

우리는 이미 『인디펜던스 데이』의 1대 다수의 맞짱 스케일을 경험한 바, 대통령도 미지의 절대세력을 응징할 수 있다는 플롯을 감상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외계인도 MS 기반의 윈도우를 쓴다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고야 만 『인디펜던스 데이』의 충격은 이미 한번 겪은 터, 그러기에 한 『다찌마와리』 하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옹께옵서 ‘다스 시디어스’의 명에 따라 몇 타스는 족이 넘어 보이는 포스 기사단을 독고다이로 정리 하시는 거나 충직한 시디어스의 늙다리 부하들을 정리해대시는 모습은 어제 본 코미디 오늘 또 보는 것 수준의 심심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 아나킨옹이 무슨 잘못이랴? 몇 년 먼저 나와 설친 『인디펜던스 데이』가 나쁜 놈이지.

요컨대 콩심은 데 콩 나야하는 “조지 루카스”의 수미상관 식 영화구조는 심히 용두사미스러운 클라이막스로 봉착한 바 ‘자식이기는 애비 없다’는 끈적한 혈연의 정을 다시 확인하는 영화로 갈무리 되었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중간까지를 마무리해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웅장한 전편의 아우라의 끝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소구욕은 충족시키지 못한 한계를 가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는 아무래도 아쉽고 종결의 맛이 나지 않는다.

문득 생각하건대, 스타워즈의 자랑스러운 마무리는 좀 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 우주적 『다찌마와리』는 이미 『인디펜던스데이’에서 확인했고, 지난 영화사 연작 시리즈의 점층적 스케일 상승감의 극한은 『반지의 제왕』에서 경험했으며, 무엇보다 무술의 합은 “쇼브라더스”가 이미 30년 전에 보여줄 건 다 보여주지 않았냐는 말이다. 하물며 그 후세대인 “성룡”, “이연걸”, “홍금보”, “원화평” 형님들이 그만큼의 것들을 할리우드에서 소비하지 않았는가?

영진공 그럴껄

DSLR 촬영의 새 역사 2편, Then Why?

* 1편에서 계속 * 


Then Why?
그런데 대체 왜, 전문촬영장비로는 수많은 단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하우스 제작진은 5DmkII를 사용했을까요.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큰 사이즈

지난 번 글에서 언급했듯 5DmkII는 영화필름기준으로는 오버사이즈의 거대한 센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가지 특징을 가져다 주는데 훨씬 얕은 피사계심도와 빛에 대한 뛰어난 감응성입니다. 저조도 촬영능력은 사실 1DmkIV가 더 뛰어나지만 더 큰 센서의 5DmkII가 제공하는 심도의 잇점이 하우스의 스타일과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어두운밤, 무너진 건물 잔해 속 좁은공간은 자연스런 조명이 거의 불가능한 조건입니다. 하우스가 처음 생존자를 찾으러 플래시라이트 하나만 가지고 잔해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DSLR의 능력을 발휘하기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장면은 실제로 플래시라이트의 간접조명이외에 약간의 전체조명만을 더해 촬영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촬영에서도 DSLR의 향상된 감광력은 같은 화면을 위해 동원되어야할 조명의 양을 훨씬 줄일수 있습니다. 


5DmkII의 대형센서가 제공하는 얕은 심도가 도드라지는 장면이 많은 에피소드였습니다.
하우스 에피소드를 몇개 못봤지만 대부분 캐릭터들과 객관적이고 쿨한 거리를 두는듯한 접근이 많았던데 반해 이번화는 인물의 감정에 깊게 들어가는 장면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도 평소보다 더 인물에 밀착된 심도도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번 화의 주요공간은 아니었지만 하우스의 배경이 되는 병원씬들도,
 전혀 이질감없이 잘 묘사되었습니다.
 

2. 작은 사이즈

영화필름 사이즈의 이미지 센서를 가진 카메라들이 DSLR뿐만은 아니지만 그들중 DSLR이 가장 작은 사이즈입니다. 사이즈가 작다는것은 휴대가 간편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촬영에 동원되는 모든 부가장비와 인원도 줄일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사이즈가 작아진 촬영 및 조명팀의 기동력과 적응력이 대단히 증가하게 되지요.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배경으로 한 하우스의 이번 에피소드에는 작은 카메라와 장비의 기동력이 대단히 유효했습니다.
 


어차피 제작비용은 별 문제가 안되는 프라임타임 유명드라마인데 충분히 어떤 카메라로도 촬영가능한 상황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 – 물론 그럴수도 있습니다만 제임스 카메론이라 하더라도 제작비용을 무한대로 쓸수는 없는 법이고 누구든 비용을 절감하는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작아진 촬영장비로 얻어질수 있는 유연성과 비용절감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히 크고, 이번 경우에 특히 유효했습니다. 영화제작 스토리중 이와 비슷한 유명한 경우가 바로 인디아나 존스 죽음의 사원(Temple of Doom) 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제 손에 땀을 쥐게하고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었던 ,
탄광차 추격장면.  대놓고 롤러코스터 액션을 선보인 명시퀀스이죠.
 

오스카 시각효과상 8개(9 개인가?)를 받은 시각효과계의 전설 데니스 뮤런옹 입니다.
 (오리지널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거쳐 어비스의 CG 물 생명체, T2의 액체금속 터미네이터, 쥬라기공원의 CG공룡까지 영화역사상 시각효과의 이정표가 되는 영화는 거의 모조리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인디아나 존스 2편 죽음의 사원의 메이킹영상을 보다 보면 데니스 뮤런이 탄광차 추격신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 말이 ‘우리는 예산이 빡빡했어요’ 입니다. -_-;

’80년대 최고 블럭버스터 프랜차이즈중 하나인 인디아나 존스도 빠듯한 예산내에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는것이죠. 가장 비싼 시퀀스가 될 탄광차추격신은 배우들이 탄 실물 탄광차와 미니어쳐 시각효과가 함께 쓰여져야했는데 (CG 시대 한참 전이라서) 시각효과의 방법론을 정해야하는 뮤런은 결국 카메라의 크기가 전체 비용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메라의 크기에 따라 미니어쳐 터널의 크기가 맞춰져야하고, 미니어쳐 제작비용이 그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변할수 있다는걸 간파한 것이죠. 

 
그래서 그는 거대한 기존 영화필름 카메라 대신 니콘 필름카메라를 개조해서 사용하기로 합니다. 카메라의 뒷면을 뜯어내서 영화필름의 셔터와 필름메커니즘을 장착한 미니 영화카메라를 만들어낸 것이죠.

스틸 카메라 사이즈로 작아진 덕분에 미니어쳐 터널의 크기는 획기적으로 줄어들수 있었고, 같은 비용으로 훨씬 길고 다양한 터널과 열차 트랙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필름 사이즈는 그대로인데 미니어쳐는 실물크기에서 많이 줄었기때문에 같이 얕아진 피사계심도를 보상하기 위해 조리개를 최대한 닫고, 다시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셔터스티드를 아주 늘려야 했기 때문에 실제 탄광차는 아주 천천히 와이어로 움직이며 촬영되었습니다.

완성장면의 속도감은 완전히 구라인것이죠.

이 제작기의 압권은 터널의 제작 방법입니다. 크기가 줄었기 때문에 스치로폼같은 재료로 암석터널을 조각해서 만드는 대신 알루미눔 포일을 구긴뒤 적당히 색칠해서 터널을 만들수 있었답니다.

뮤런은 $1.98 어치 호일을 구입해서 썼다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작아진 카메라 – 작아진 미니어쳐 의 사이즈가 제작비용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최소비용으로 낸 최대효과라 할수 있죠. 

 

미니어쳐 쇼트, 윌리, 인디아나 인형.
탄광차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좀비가 되어버렸네요.
스톱모션으로 조금씩 움직임을 줬습니다.


완성된 장면의 하나.
용암강 위로 지나가는 탄광차 궤도는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지만 ,
정말 스릴 넘치는 액션이었습니다.
ILM과 데니스 뮤런은 이 영화로 오스카 시각효과상을 탔습니다. 

삼천포로 빠진 감이 있는데 인디아나존스의 예는 카메라 사이즈 이야기 뿐 아니라 제한된 리소스만을 가지고 원하는 영상을 얻어내기 위해 시각효과디자이너들이 가져야하는 창의성의 좋은 예이며, 이러한 창의성과 기존의 방식을 과감히 벗어난 참신한 시도는 비단 시각효과뿐 아니라 제한된 리소스로 가장 그럴싸한 영상을 얻어내야하는 영상제작자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자질이기도 합니다.

5DmkII의 사용은 바로 그러한 참신한 시도의 좋은 예입니다.  스토리와 장소가 요구하는 최적의 솔루션에 마침 캐논의 프로 스틸카메라가 조건을 만족해 준것입니다. 


촬영에 사용된 5DmkII A카메라.
B와 C까지 모두 세대가 사용되었으며,
A와 B는 포커싱을 위한 부가장비와 모니터등이 갖춰진 형태,
그리고 ‘닌자캠’이라고 불렸다는 C카메라는 뷰파인더외의 부가장비 거의 없이,
 손으로 들고 찍는 카메라였다고 합니다.
 

 
임팩트 있는 시즌 마지막화를 위해 거대한 세트와 대단한 물량이 동원된 에피소드 촬영에 ,
저예산 프로덕션에나 어울릴법한 DSLR만 사용되었다는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촬영감독 Gale Tattersall의 인터뷰에 따르면 5D의 선택은 이번 화의 스토리와 배경에 가장 적합했기때문이며 지금으로는 또 다른 에피소드를 5D로만 촬영할 계획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작은 사이즈의 카메라가 유용한 촬영에는 계속 사용할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구요. 

한 레드카메라 유저의 불평

[ http://reduser.net/forum/showthread.php?t=43987 ]


RED카메라의 유저포럼에 위와같은 글타래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우스가 5D로 촬영된다는 소식에 짜증난다며 올린 글이죠.

그의 요지는 ‘DSLR 영상촬영은 뭘 모르는 사람들이 흥분해서 생긴 인터넷의 유행일뿐이고 하우스의 촬영감독은 유행에 편승하기 위해 무식한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처음 열거한 DSLR의 단점을 생각하면 프로페셔널한 상황에서 사용한다는건 아주 용감무식한 일일뿐이라는 것이죠. 게다가 하우스가 방영되어 캐논카메라 사용이 화제가 되면 DSLR로 그 어떤것도 촬영가능하다는 미신이 더 퍼질 것이라는 걱정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2만불을 주고 구입한 레드카메라로 영상촬영일을 하는 그 유저는 자신의 클라이언트가 ‘$2500짜리 캐논 DSLR로도 충분히 훌륭한 영상을 찍을수 있다는데 그걸로 쓰지그래?’하며 사정 모르는 소리를 하는 통에 이미 신경질이 나있는 참이었습니다. 예상가능하듯 그후 글타래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목소리와 반대의견이 치고 박다가 모더레이터에 의해 잠겨져버렸습니다.

5D의 사용을 불평하는 의견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제가 열거한 단점들은 상황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하자가 될수 있는 심각한 제약들이고, 그런 디테일을 잘 모른체 제작비용절감만 관심있는 투자자나 프로듀서들이 Red 대신 5D로 촬영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해버리는것도 창작자들에겐 아주 골치아픈 상황이기도 합니다.

하우스를 보고난 후 ‘하우스도 5D를 쓰는데 고작 우리 회사 홍보영상에 왠 RED카메라냐’며 회사벽돌건물배경으로 인터뷰영상 찍자고 우기는 클라이언트를 만날 가능성이 커질테니까요.

그러나 이번 하우스 에피소드의 사용이 유행에 편승한다는 유치한 이유로 무리수를 둔것이라는 비난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특히 시청한 후의 감상은 촬영감독의 말대로 아주 적절하고 뛰어난 선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작은 바디에 큰 센서라는 새로운 영상카메라의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지금 DSLR이 독보적인 존재이지만 시장의 반응을 본 이상 좀더 비디오제작에 최적화된 새로운 카메라들이 속속 등장할테고 DSLR의 사용은 금방 줄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세에 뒤질세라 아직 한창 개발중인 컨셉을 급공개한 소니. APS-C센서와 소니 E마운트렌즈를 사용하는 캠코더입니다. 아마도 DSLR의 단점을 대부분 커버할테구요.

캐논과 니콘 등 각 렌즈 마운트에 맞춘 캠코더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영상촬영에는 DSLR을 금방 대체할테고 특히 5D의 대형센서를 가진 캠코더가 나오면 정말 대히트 할겁니다.

그러나 그 잠깐의 틈새기간에는 DSLR로 제작된 프로페셔널 영상들이 계속 화제를 만들어내길 기대해봅니다. 

 
5DmkII로 촬영되어 칸느에서 공개된 장편영화 ‘Road to Nowhere’.
그 레드카메라 사용자 더 신경질 나게 생겼습니다. 

심심한데 하우스나 한 편 찍어볼까나 …

당연한 소리지만 아쉽게도 5DmkII가 있다고 하우스 시즌피날레를 만들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각본과 연출, 연기와 세트디자인, 조명 등 모든 요소들이 일단 훌륭하게 갖춰진다면 정말 똑딱이 카메라로 찍어도 어느 이상의 퀄리티는 나올만큼 이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 기반위에 능숙한 촬영팀의 손으로 다뤄진 5DmkII는 DSLR의 동영상 기능이 가진  단점을 부드럽게 우회하여 평소 사용하는 몇십배, 몇백배 가격대의 촬영장비 이상의 퀄리티를 뽑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하우스 시즌피날레는 DSLR 영상촬영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만큼 좋은 스토리를 비롯한 영상제작의 기본요소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이 있는지를 다시 확인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영진공 노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