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너희들은 주인공이 아니야!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또는 “불과 얼음의 노래(A Song of Ice Fire)” 저자인 조지 쌍알(R. R.) 마틴을 소개하자면 이 할배는 1948년 미국 뉴저지주 베이욘의 빈민가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일랜드인, 아버지는 이탈리아 혼혈이었답니다. 처음 만든 이야기가 자기가 기르는 거북이들이 자꾸 죽는 걸 보고 거북이들 사이에 흉흉한 음모와 모략이 펼쳐지는 이야기였다니 참으로 꾸준한 양반입니다. 마블코믹스 광팬으로 출판사에 독자투고로 시작해서 미국버전 동인지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하여 이후 SF 단편소설로 등단했고 휴고상, 네뷸러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범상치 않았는데 주로 판타지와 호러를 섞은 SF를 썻고, <환상특급> <맥스 헤드룸>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왕좌의 게임>에도 거대 장벽과 그 장벽에서 작동하는 기계들 같은 SF적 요소가 많이 나오죠.

<왕좌의 게임>을 요약하자면 “복잡한 스토리라인 속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놓고 이들이 멋진 대사를 치게 하고는 죽여 버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쌍알 마틴 옹이 “나한테 잘해. 안 그러면 다음은 티리온 차례가 될거야. (Be Nice To Me Or Tyrion Is Next)” 라는 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었는데, 정말 그러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나한테 다음 권이 언제 나오냐고 누가 물어볼 때마다 스타크家 애 하나씩 죽일거야”라고 협박하는 사진도 있고요.

“이번엔 내 차례인가?”

왕좌의 게임이 인기 있는 이유도 사실 그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늘 긴장해야 하죠, 누가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을지 모르니까요. 원래 주인공은 안죽고, 죽더라도 뭔가 의미있게 죽는 게 대부분의 소설들의 불문율인데 여기선 안 그럽니다. 그냥 갑자기 그냥 막 뜬금없이 죽어요. 즉,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를 처참히 박살내는데, 그럼으로써 그 어떤 판타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감을 느끼게 합니다. 개x끼들이 권력을 잡고 다 질 것 같던 전쟁에서도 이기고 약자들은 죽고 배신자들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정치판의 현실이 떠오르기도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판타지물의 전형은 톨킨 옹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J.R.R. 톨킨이 북유럽의 옛 설화들을 수집하고 조립해서 새로 만들어낸 유럽설화의 집대성판인데요, 이 양반은 189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살다가 73년에 사망했으므로 19세기부터 20세기를 산 사람입니다. 1925년부터 195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헌학과 언어학 교수로 재직한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호빗과 휴먼과 엘프와 드워프와 마법사, 그리고 드래곤과 오크와 기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세계가 이후 모든 서양판타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SF쪽으로 전환되어서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기본 틀이 되었고, 게임으로 전환되면서는 테이블 보드 게임에서 시작해서 “디아블로”나 “울티마 온라인”, “워크래프트”, 우리나라의 “리니지”의 바탕이 되었고요. <무협소설>이 중국문화권 사람들이 꿈꾸는 신화의 표현이라면, 이 반지의 제왕 속 판타지 세계는 영국미국 문화권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화입니다.

“마이 프레셔어스으리~“

사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의 옛 설화들과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장식된 1, 2차 세계대전의 판타지적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은 인간들과 엘프, 드워프로 구성된 반지원정대를, 사우론은 히틀러를, 사루만은 그 꼬붕인 무솔리니쯤을 상징하는 셈이고요, 인간 같지 않은 오크들은 식민지 주민들이나 일본사람들 쯤을 상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포된 계기라서 꽤 그럴듯한 전쟁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양쪽편 다 식민지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싸움질이었고요. 이건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거나 더 이상 가질 필요 없는 나라(미국과 영국, 뒤늦게 소련) vs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해서 식민지를 마구마구 필요로 했던 나라들(독일, 일본, 이태리)간의 싸움이었던 거죠.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놈의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청소라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덕분에 선과 악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국이나 영국이 히틀러가 나쁜 놈이라서 전쟁을 한 건 아니었고, 히틀러를 죽였다고 해서 악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2차 대전 덕분에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나면 1차 대전은 약 1천만 명이 죽었고, 2차 대전은 약 5천 만명이 죽어나간 비극일 뿐입니다. 사실 2차 대전 정리과정에서 지금의 중동 갈등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지금 테러가 난무하는 세상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반지의 제왕”은 신화이지만, 동시에 역사에 대한 거대한 왜곡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신화들은 다 이런 속성이 있죠. 우리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합니다. 그 사건을 이야기 구조로 바꾸어서 기억하게되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의미나 교훈은 그런 과정에서 추출되는데, 예를 들자면 “사필귀정”,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뭐 이런 거 말이죠.

허나 “왕좌의 게임”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왕좌의 게임은 지금까지 판타지에 대해서 기대하던 것들을 하나씩 배반하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배반이 마구 벌어지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의미나 교훈을 찾으려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노력에 대한 배반은 그보다 더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 정의, 원칙, 명예, 용기, 신의/성실, 심지어 지략이나 돈, 권력 조차도 소용이 없는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이 드라마의 모토는 “가차없는 세상”이지요.

원래 판타지 영화의 원칙대로라면 스타크 가문이 주인공일테지요. 위에 언급한 가치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작살나는 건 모두 바로 그 가치들 때문입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명예와 정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죠. 케이틀린 스타크가 티리온을 체포할 때 역시 명예와 신의성실에 따라 협력했던 사람들도 다 잦되고요. “피의 결혼식”도 결국 불문율은 안 깨겠지 라는 순진한 기대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원작에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오류 때문이었다던데 제이미 라니스터가 볼튼한테 스타크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한 말을 볼튼이 오해하면서 … 그렇다면 더 황당한 전개이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다고 지략과 돈과 권력까지 갖춘 라니스터 가문이 계속 떵떵거리고 잘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아직 본편인 얼음과 불의 전쟁은 시작도 안했는데 정작 그 본편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닐 거 같다는 점입니다. 불의 마녀가 말했듯이 지금까지 다섯 왕의 전쟁은 그냥 몽매한 인간들이 벌이는 왕좌의 게임이었을 뿐, 진짜 전쟁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얼음괴물들과의 전쟁이고, 여기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불뿜는 용들이 주인공이 될 듯합니다. 이 용들은 용 엄마 말도 잘 안듣는 애들인가 봐요.

Margaret Mahler 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우리의 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이걸 대상관계 이론이라고 하는데요, 말러에 따르면 우리는 처음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세상과 나의 구분이 없는 상태로부터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걸 정상적 자폐단계라고 하는데, 이때는 내 마음과 현실이 구분이 안되고요, 꿈꾸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꿈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인 것 처럼, 이때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곧 나입니다. 그러다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드디어 자아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죠.

내가 아닌 것은 뭐냐하면 결국 내 맘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들인데, 다시 말해서 세상이 내 맘과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사실, 즉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우리에게는 자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자아가 생기면 우리는 자아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게 됩니다. 자아의 영역을 넓힌다는 건 결국 내 자유를 늘리는 것인데, 3살 때쯤 이런 개념이 생기는데 그래서 그때 미운 세 살이 되는 것이랍니다. “싫어!” “안 해!”라는 말이 최초의 자유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다음에야 우리에게 지능이라는 것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지능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석을 찾고 조작하는 능력입니다.

이 드라마도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이런 성장과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정의가 이기고 불의가 패퇴하는 사건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때는 우리는 소설을 진짜 세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과 구분하지 못하는 자폐 단계인 것입니다. 이러면 소설 속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게되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기대한 대로 소설이 전개되지 않을 때,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애가 속절없이 댕강댕강 대가리가 잘려나갈 때, 이 세계가 나와 상관없이 내 외부에 존재하는 나와 독립적인 세계라는 걸 깨닫고 그제서야 이 세상의 작동에 대해서 진심으로 알려고 합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 자기 기대대로 드라마가 전개되지 않는다고 화내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발달을 거부하는 것인데요, 소설을 자기 소망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죠. 마치 여자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연애를 포기하고 2D에 만족하는 오덕과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요.

나는야 내 의지로 발달을 거부하지

사실 이 드라마를 제대로 즐기면 그런 깨달음을 경험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그가 단지 명예와 정의와 원칙을 따라서만이 아닙니다. 힘이 생존을 위해서 작동하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요. 바리스 경이 네드에게 “도대체 어쩌자는 생각으로 당신이 알게된 사실을 세르세이에게 말한 거요?” 라고 질문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롭도 마찬가지죠. 원칙을 따르다가 비극에 처합니다.

그런데 원칙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구현해냈을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걸 통해 그 사람의 능력이 증명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걸 구현한 인간을 따르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면 그게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전까지 원칙이나 정의는 그저 누군가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정의가 이겨야 되고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이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포기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정의는 언젠가 이길꺼야 따위 기대만 하며 손가락만 빨고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정의가 못이긴 건 그만큼 준비와 노력을 안했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니 뭐가 어쨌든 일단 이겨놔야 정의든 뭐든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가차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그저 겸손일 뿐이었습니다. 티리온 라니스터가 오래 사는 이유도 그것인 듯 보입니다. 그는 오만할 수 없는 존재죠. 제이미 라니스터도 겸손을 배우면서 오히려 쓸만한 인물이 되는 건지, 아닌 건지 …

“프리실라”, 누구라도 드랙퀸이 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4년에 개봉한 호주 영화가 있다.


영화의 원제는 “The Adventures Of Priscilla, Queen Of The Dessert”.

긴 제목을 줄여 간단히 “프리실라”라고 불리는 이 영화는 세 Drag Queen(여장남자)가 공연을 위해 떠나는 전국 버스 여행을 그 소재로 삼고 있다.


 


199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폐막식에 등장할 정도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긴 영화이다.

재밌는 건 드랙퀸으로 나온 세 주연 배우의 면면인데,


 


 



 


 


저 세 아가씨 혹은 청년 혹은 아줌마 혹은 아저씨 …… 그냥 언니라고 부르기로 하자.


암튼 저 세 언니들은 누굴까?


 


가운데 언니는 바로 이 분이시다.


 


 



 


그러하다. 바로 스미스 요원 되시겠다.


 


 



 


한 눈에 척봐도 스미스요원이지 않은가.


 


 


 


그리고 왼쪽 언니,


그 언니는 이 분이시다.


 


 



 


남장이 잘 어울리는 이 분은 바로 “LA 컨피덴셜”의 에드 엑슬리 형사님이시다.


 


 



 


불타는듯한 긴 빨간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녀.


 


 


 


그리고 오른쪽 언니.


실은 이 분은 좀 고위층 이시다.


 


 



 


짜잔, “스타워즈”에 나오시는 발로럼 의장님.


 


 



 


그 분의 고우신 자태를 보라.


 


 


 


그럼 이 시점에서 세 언니들의 활약상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세 언니의 본명을 차례로 말씀 드리면,


휴고 위빙(Hugo Weaving),


가이 피어스(Guy Pearce),


테렌스 스탬프(Terence Stamp) 이다.


 


휴고 언니는,


“반지의 제왕”에서 리벤델의 영주 엘론드 였고 “브이 포 벤데타”에서는 가이 포크스 였으며 “해피 피트” 에서는 대장펭귄 노아, “트랜스포머”에서는 메가트론인 분이시다.


 


가이 언니는,


“메멘토”에서 레오나드 였으며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페르난도 였고 “허트로커”에서 매트 상사, “킹스 스피치”에서 에드워드 8세, “로크아웃”에서 마리온 이시다.


 


테렌스 언니는,


“콜렉터”에서 프레디로 나와 칸느 남우주연상 받아주시고, 원조 “슈퍼맨”에서부터 조드 장군이셨으며 “원티드”에서 페크와르스키 였고 “작전명 발키리”에서는 루드빅 벡 장군이셨다.


 


이러고보니, 영화 “인 앤 아웃”에서 조안 쿠삭의 명대사가 퍼뜩 떠오르고야 만다.


 


 



Is everybody gay?!


(게이 아닌 남자는 없는게냐?!)



 


 


어찌 보면 쌩”마초”의 대명사랄 수 있는 역할들이 너~무 잘 어울리는 이 세 배우가 영화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다른 역할도 아닌 드랙퀸으로 나온 이 영화를 통해서 였다는 게 어찌 아니 흥미로울 수 있겠는가 … 뭐 물론 테렌스 언니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후에 커밍아웃한 거겠지만 …


 


어쨌든 당 영화에서 많은 이들이 좋아라 하는 장면은 세 언니(?)들이 호주의 사막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 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에 맞춰 공연을 하는 장면인데, 그거 한 번 보도록 하자.


 


 


 






 


 


아 참, 프리실라는 이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의 이름 되시겠다.


 


 



이 녀석 말이다.



 


 


이 영화에 삽입(응?)되어있는 노래들은 꽤나 많은데, 그 중에 영화의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I’ve Never Been To Me”는 한때 드랙퀸들의 주제가로 널리 쓰여졌다.


 


그런데 이 노래, 많은 분들이 Charlene의 1982년 버전이 오리지널이라고 알고들 계신데 … 실은 1976년 Randy Crawford가 오리지널이고 Charlene 버전은 1977년에 처음 발매되었다가 Hot 100차트에 97위로 살짝 인사만 하고 사라지고 말았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1982년에 모타운 레코드 직원이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고 사장에게 재녹음을 건의하여 Charlene이 다시 불렀는데, 이게 그만 …… 대박을 치고 말았다는 그런 전설같은 레전드 사연이 있는 노래이다.


 


그냥 뭐 그렇다는 얘기고 이쯤에서 그 노래를 감상하며 이 글을 급정리하고자 한다.


 


I’ve Never Been To Me
By Charlene (1977, 1982)
영화 “프리실라” 중에서 …



 


 




Hey lady, you lady, cursing at your life
You’re a discontented mother and a regimented wife
I’ve no doubt you dream about the things you’ll never do
But, I wish someone had talked to me
Like I wanna talk to you ……


 


여인이여, 그래요 당신, 지금의 삶에 진저리 치시나요,


당신은 지금 엄마 역할이 싫증나고 아내라는 틀에 얽매어있는게 불만이죠,


분명 당신은 앞으로도 절대 못해 볼 일들을 해 보는 꿈을 꾸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지금 당신에게 하려는 말을,


누군가 이전에 내게 해 줬기를 바라고 있어요,


 


 


Oh, I’ve been to Georgia and California and anywhere I could run
I took the hand of a preacher man and we made love in the sun
But I ran out of places and friendly faces because I had to be free
I’ve been to paradise but I’ve never been to me


 


그래요 난 조지아, 캘리포니아 그리고 갈 수 있는 곳 어디라도 가보았어요,


난 성직자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태양 아래서 사랑을 나눈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난 고향을 떠나야 했고 친한 이들을 멀리 했어요,


난 천국에 있었지만, 한 번도 원래의 나로 살아보지 못했죠,


 


 


Please lady, please lady, don’t just walk away
‘Cause I have this need to tell you why I’m all alone today
I can see so much of me still living in your eyes
Won’t you share a part of a weary heart that has lived million lies….


 


여인이여, 여인이여, 가지말고 내 말 마저 들어보아요,


내가 왜 지금 이렇게 외로운 처지가 되었는지 당신께 꼭 얘기하고 싶으니까요,


난 당신의 눈빛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백 만가지 거짓말에 지친 당신 마음의 일부만이라도 내게 털어놓지 않으실건가요,  


 



Oh, I’ve been to Niece and the Isle of Greece while I’ve sipped champagne on a yacht
I’ve moved like Harlow in Monte Carlo and showed ’em what I’ve got
I’ve been undressed by kings and I’ve seen some things that a woman ain’t supposed to see
I’ve been to paradise, but I’ve never been to me


 


그래요 난 니스에 가봤고 그리스의 섬에서 요트에 앉아 샴페인을 맛보기도 했죠,


난 몬테카를로에서 진 할로우처럼 행동하며 남정네들에게 내 몸매를 뽐냈죠,


난 왕의 손에 옷고름이 풀려보았고 여자에게 보여져선 안될 것들을 보기도 했죠,


난 천국에 있었지만, 한 번도 원래의 나로 살아보지 못했죠, 


Hey, you know what paradise is?
It’s a lie, a fantasy we create about people and places as we’d like them to be
But you know what truth is?
It’s that little baby you’re holding, it’s that man you fought with this morning
The same one you’re going to make love with tonight
That’s truth, that’s love ……


 


그대여, 천국이 뭔지 아시나요,


그건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가고 싶어하는 곳에 대한 환상을 섞어 만들어낸 거짓이예요,


그대여 진정한 천국을 알고 싶으세요,


그건 바로 지금 당신이 품에 안고있는 아기,


오늘 아침 다투었지만 밤이 오면 어김없이 사랑을 나눌 당신의 남편이예요,


그게 진실이고 그게 사랑이예요,


 



Sometimes I’ve been to crying for unborn children that might have made me complete
But I took the sweet life, I never knew I’d be bitter from the sweet
I’ve spent my life exploring the subtle whoring that costs too much to be free
Hey lady……
I’ve been to paradise, (I’ve been to paradise)
But I’ve never been to me


 


가끔 난 나를 완전하게 해주었을,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이를 생각하며 울어요,


그 대신 선택한 달콤한 인생, 그게 이리도 쓸줄은 절대 알지 못했죠,


난 우아하지만 결국 웃음을 파는 인생을 사느라 너무 큰 댓가를 치렀죠,


여인이여,


난 천국에 있었지만, 한 번도 원래의 나로 살아보지 못했어요,



 


 



영진공 이규훈


 


 


 


 


 


 


 


 


 


 


 


 


 


 


 


 


 


 


 


 


 


 


 


 


 


 


 


 


 


 


 


 


 


 


 


 

“에일리언 2”, 쓸데 없는 짓의 의미


영화를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정말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는 걸 보곤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하나하나 지적하기도 했지만, 공포영화에서 여자희생자들은 꼭 2층 3층으로 도망친다.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할 텐데 말이다. 그 높은 곳에서 밖으로 뛰어내릴 것도 아니면서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 결과 그들은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질질 짜다가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열지 않아도 될 문을 열거나,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을 건드려서 일을 그르치는 것도 영화 속에서 종종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이다. 그런 장면을 벌인 당사자는 또 얼마나 민망할까.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 1편에서 폐허가 된 드워프 왕국에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괜히 해골을 건드려 우물에 빠트리는 바람에 잠들어 있던 오크들을 죄다 깨워버린 피핀을 생각해보라. 그를 지켜보는 내가 대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한심이가 3편에서는 멋진 모습도 보여준다 ...

사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우연히 영화 『에일리언 2』를 다시 봤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리플리(“시고니 위버”)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 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이다.

그녀는 그 잘 훈련된 공수부대원 전부가 패닉에 빠져 있을 때도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팀원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면서 살 길을 찾아나간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능숙하게 기계를 다룰 줄도 안다. ‘파워로더’를 다루는 그녀를 보라.

57년간 냉동되어 있던 그녀가 어떻게 그 첨단 기계를 조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 전 컴퓨터의 인터페이스와 지금 컴퓨터 인터페이스는 거의 석기시대와 철기시대만큼의 차이가 있는데 건설용 중장비들은 안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그녀는 훌륭한 리더일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밝은 현장요원이다.

게다가 그녀는 용감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에일리언에게 납치된 어린아이 ‘뉴트’를 구출하기 위해서 홀홀단신 에일리언의 소굴까지 찾아 들어가는 그녀의 그 강인한 이미지는 이후에 등장하는 여자 영웅 영화의 원형이라 할 만큼 멋졌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그녀조차도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도 바로 그녀가 영웅의 모습을 한껏 드러낸 뉴트 구출장면에서 말이다.

그 상황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원자로 냉각기가 손상되어서 몇 분내에 공장시설 전체가 핵폭발을 일으킬 예정이다. 리플리는 천신만고 끝에 뉴트를 찾아냈고, 눈앞에 펼쳐진 에일리언 알 무더기를 볼모로 퀸 에일리언을 협박해서 퇴로를 확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합리적인 선택은 간단하다. 뉴트를 데리고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시설이 폭발하는 순간 퀸 에일리언도, 나머지 에일리언 떼거리들도, 그 괴물이 낳아놓은 수많은 알들도 모두 한줌 재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알들에 총질을 하고, 화염방사기를 쏘고, 그것도 모자라서 퀸 에일리언의 알집에 유탄을 쏘아댄다. 그 결과, 쓸데없이 분풀이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한 리플리는 시설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탈출하지 못하는데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퀸 에일리언까지 들이닥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연출하고야 만다.

죽음을 예감한 그녀가 어린 뉴트를 끌어않고 ‘눈 감으라’고 중얼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저지른 짓은 정말 아무런 쓸데가 없었다. 그건 에일리언들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고, 뉴트를 구출하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그 만용은 결국 아무 죄도 없는 뉴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후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탈출한 모선에까지 퀸 에일리언이 쫒아온 덕분에 충직한 사이보그 비숍은 반동강이가 나고, 결국 모선 전체가 위기에 처하고 만다. 물론 어찌어찌 리플리가 파워로더로 퀸 에일리언을 쫓아내면서 일이 마무리된 것 같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음은 『에일리언 3』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리플리?

이렇게 정리해보니 리플리가 저지른 그 만용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쓸데없는 짓 Top 10 리스트에 올릴 만큼 엄청난 과오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이런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곤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것일까?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그래야만 영화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이다.

리플리가 얌전하게 소굴에서 빠져나와 모선으로 탈출했다면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겠지만, 위기일발 탈출도 없었을 것이고 영화사상 가장 멋진 결투로 손꼽히는 퀸에일리언과 파워로더 대결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은 사실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진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 애한테서 손떼, 이 ㅆㄴ아!!!

파워로더 미니어쳐 ...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 아니, 사실 따져보면 쓸데없는 짓으로 점철된 곳이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짓 덕분에 세상을 사람을 더 잘 알게된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벌인 덕분에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그런 깨달음이 나중에 진짜 중요한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자기 할 일도 바쁘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게 가장 깔끔할 것 같은 사람들끼리 눈이 맞아서 쓸데없이 연애질을 벌인 결과, 자기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냥 얌전히 헤어져도 되는데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나면 후회가 든다. 그냥 서로 좋게 헤어져도 되는 거였는데 왜 쓸데없이 원한을 남겼을까 …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고, 그와 다시 마주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마치 쓸데없이 퀸 에일리언을 화나게 한 덕분에 그 괴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지를 확실하게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으면 다 용서된다니까 ...

어쨌든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들 덕분에 우리는 인생을 매끈하게 흘려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대끼며 고생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기계처럼 효율적이지만 무미건조한 활동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생명체의 그 변화무쌍함을 체험하며 살수 있게 된다.

요약하면, 영화 속에서 쓸데없는 짓은 영화를 재미있게 하고, 현실에서 벌이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에게 진정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뭐 아무리 그렇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결과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그 결과는 그저 한심할 뿐이라면 관객들이 짜증을 낼 것이고, 현실에서 쓸데없는 짓의 결과가 그저 고생뿐이라면 후회만이 남을 뿐 일테니 말이다.

영진공 짱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아들의 발목을 잡은 애비의 한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의 태생적 한계란 참 거시기 하다.

하다못해 신약의 첫 구절부터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으로 해서 줄줄이도 낳아 44번째 가서야 예수의 족보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무려 1절에서 25절 까지다.

광산 김씨였던 내 친구 용준이는 자신이 사귀던 여자친구가 3종백숙부의 외3종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와 헤어지는 (여자로서는 참 다행스러운)결과를 도출하며 핏줄의 상관관계가 무에 그리 집착의 대상인지를 궁금케 하기도 했다. (이유가 참 자질구레스럽기도 하다) 요컨대 어디서 태어나고 누구의 핏줄이냐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인류가 짱돌을 들기 시작한 이래로 전지구적인 관심사인 것이라 하겠다.

흔히 현대를 정보의 유목민(유비쿼터스) 시대라 한다. 모든 인간의 창조물들이 디지털 컨버전스 되면서 정보는 곧 돈이 되었다. 뉴스를 만들 수만 있다면 돌팔매질만 잘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방대하고 다각적인 정보의 수용은 예기치 못한 정보의 생산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부작용으로 ‘탤런트 김모양이 지난주부터 테니스를 배운다’는 둥, ‘최근 결혼한 톱가수 A양의 아들이 두 돌이 되기도 전에 걷는다’는 둥 하는 약에 쓰이는 쥐똥만큼도 값어치 없는 기사가 당당히 신문의 한 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하는 지금이다.

따라서 나는 요즘은 정보제공자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마태복음과 3종백숙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정보는 위에 나열했듯 ‘누가’ 만드는 게 아니라 정보 자신의 자가발전에서 만들어지는 세상임을 철썩 같이 믿었다. 인간이 정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정보를 만드는 세상! 그런데, 대관절 이런 마당에 핏줄에 집착할 이유가 무엇이 더냔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혈연과 지연의 관계를 다시금 소 막창에 짱박혀 있던 여물을 다시 씹듯 곱씹게 된 건 다름 아닌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SF 서사극의 대표이자, 현대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총아이며, 미래를 예언하는 환타지의 교과서인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때문이었으니, 세상은 참으로 생뚱맞다.

“뉘신지?”
“내가 니 애비”

다스베이더의 마지막 고백은 스타워즈 시리즈 전체를 갈무리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개봉 당시에 운위된 ‘방대하며 유려하고 놀라운 3D’는 솔직히 30여년의 맥락에 따른 디자인 한계에 의해 별로 감탄사를 자극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애비와 자식의 갈등구조를 제공해야 하는 중간자적인 입장의 성격은 마지막편이라는 장엄한 타이틀만큼의 스케일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하고야 만다. “조지 루카스”가 언제부터 한시를 즐겨 읽으며 수미쌍관에 심취하셨는지 “니 애비의 갈등도 꼭 독고다이 맞짱으로 정점에 서리라”를 엔딩으로 가야만 했는지는 무척 궁금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인트로 부분의 거함들이 격돌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한 스케일은 ‘본 것 이상’을 갈구함이 자명하다. 우리는 말 그대로 『스타워즈』의 스펙터클을 기대한 것이지 『다찌마와리』의 합을 갈구한 것은 아니다.

문제의 요인은 또 있다.

우리는 이미 『인디펜던스 데이』의 1대 다수의 맞짱 스케일을 경험한 바, 대통령도 미지의 절대세력을 응징할 수 있다는 플롯을 감상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외계인도 MS 기반의 윈도우를 쓴다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고야 만 『인디펜던스 데이』의 충격은 이미 한번 겪은 터, 그러기에 한 『다찌마와리』 하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옹께옵서 ‘다스 시디어스’의 명에 따라 몇 타스는 족이 넘어 보이는 포스 기사단을 독고다이로 정리 하시는 거나 충직한 시디어스의 늙다리 부하들을 정리해대시는 모습은 어제 본 코미디 오늘 또 보는 것 수준의 심심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 아나킨옹이 무슨 잘못이랴? 몇 년 먼저 나와 설친 『인디펜던스 데이』가 나쁜 놈이지.

요컨대 콩심은 데 콩 나야하는 “조지 루카스”의 수미상관 식 영화구조는 심히 용두사미스러운 클라이막스로 봉착한 바 ‘자식이기는 애비 없다’는 끈적한 혈연의 정을 다시 확인하는 영화로 갈무리 되었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중간까지를 마무리해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웅장한 전편의 아우라의 끝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소구욕은 충족시키지 못한 한계를 가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는 아무래도 아쉽고 종결의 맛이 나지 않는다.

문득 생각하건대, 스타워즈의 자랑스러운 마무리는 좀 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 우주적 『다찌마와리』는 이미 『인디펜던스데이’에서 확인했고, 지난 영화사 연작 시리즈의 점층적 스케일 상승감의 극한은 『반지의 제왕』에서 경험했으며, 무엇보다 무술의 합은 “쇼브라더스”가 이미 30년 전에 보여줄 건 다 보여주지 않았냐는 말이다. 하물며 그 후세대인 “성룡”, “이연걸”, “홍금보”, “원화평” 형님들이 그만큼의 것들을 할리우드에서 소비하지 않았는가?

영진공 그럴껄

“타이탄”, 싼티 작렬!!!

영화 <타이탄>은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A급 인척 하는 B급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제작비는 1억2천5백만불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보다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나 싼티가 작렬할 수 있나 …

물론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3편을 통으로 찍어서 편당 제작비가 9 천4 백만불로 균일하다.
게다가 벌써 9 년 전 영화이니 화폐가치를 반영하면 비슷하거나 더 적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세트 티 팍팍 나는 배경들, 딱 소품으로 만든 티 나는 소품들,
스틱스 강의 뱃사공은 무슨 놀이공원 유령의 집에 나올 것 같고,
인간 이외의 크리쳐들은 가면 뒤집어쓰고 나온 분위기 팍팍.
CG 크리쳐들, 특히 메두사는 CG 티 팍팍 …

이 영화를 보면 피터 잭슨, 리들리 스콧, 길레르모 델 토로 같은 감독이
왜 A급 감독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아니, 그 감독들의 스탭 수준 차이일지도…

똑같이 돈들여 CG 쓰는데 그 결과물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거다.

요건 오리지널의 한 장면 ...

그나마 이야기는 꽤나 속도감 있는데,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얄팍하고 줏대없다.
일단 제우스부터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는 놈이다.

물고기 씨를 말려서 인간들의 원망을 사더니, 인간을 징벌하라는 하데스의 말에 홀랑 넘어가질 않나, 그러면서도 페르세우스는 또 왜 돕나?
얘 하는 짓을 보면 지능이 낮거나 정신분열이거나, 아니면 다중인격이거나 셋 중 하나다.

나머지 애들도 일관성 없기로는 다 비슷하다.
드라코(카지노 로얄의 르쉬프)가 신이나 데미갓을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들쭉날쭉,
페르세우스가 데미갓이라고 죽일려고 들때는 언제고, 갑자기 스승님 행세를 하시네 …

들쭉날쭉으로는 페르세우스도 빠지지 않는다.
제우스 싫다며 칼을 안써서 결국 동료들 다 죽게 만들더니 동료들이 진짜로 다 죽어버리니까 제우스가 준 칼을 냉큼 칼집에 넣는다. 그래도 그 동작은 꽤나 멋진데, 결정적으로 그 이후에는 그 칼을 안써 …-_-;;;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중에 그나마 꾸준한 애는 하데스 뿐이다.
언행일치에 동기와 행동에 일관성이 있다.
단지 어둠속에 있어서 좀 삐뚤어졌을 뿐이지 가장 정상적인 애다.

그 와중에 지 어미가 목숨걸고 자랑질 하던 안드로메다 공주는 턱이 권투선수 급이라 옆에 서 있는 시녀가 더 예쁘니, 영화를 보는 내 마음은 말 그대로 안드로메다로 …

결정적으로 이 영화 제목은 붕어가 없는 붕어빵과 비슷하다.
이미 타이탄족은 멸망한 다음의 이야기라서 타이탄 족은 안나온다.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앞뒤 안맞고 구멍은 숭숭 뚫린데다,
싼티 작렬!!!!!!!!!!!!!!!!!!

웃으며 보기에는 적절하나 그 이상은 무리다.
 

* ps1: 스토리의 엉성함은 이 영화가 리메이크 라는 점을 고려해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근데 레이 해리하우젠 시절에야 거대한 괴물들이 움직이는 것만 보여줘도 관객들이 감동했다지만 지금은 다들 그게 CG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만들다니 …


* ps2: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원래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제작사의 입김으로 이야기가 완전히 재구성되었다고 하더라. 근데 원래 이야기의 상태도 그닥 나았을 것 같지는 않다. 결정적으로 그 싼티작렬 화면은 그딴 변명으로 어쩔 수 있는게 아니잖아!!!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