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언 2”, 쓸데 없는 짓의 의미


영화를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정말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는 걸 보곤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하나하나 지적하기도 했지만, 공포영화에서 여자희생자들은 꼭 2층 3층으로 도망친다.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할 텐데 말이다. 그 높은 곳에서 밖으로 뛰어내릴 것도 아니면서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 결과 그들은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질질 짜다가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열지 않아도 될 문을 열거나,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을 건드려서 일을 그르치는 것도 영화 속에서 종종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이다. 그런 장면을 벌인 당사자는 또 얼마나 민망할까.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 1편에서 폐허가 된 드워프 왕국에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괜히 해골을 건드려 우물에 빠트리는 바람에 잠들어 있던 오크들을 죄다 깨워버린 피핀을 생각해보라. 그를 지켜보는 내가 대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한심이가 3편에서는 멋진 모습도 보여준다 ...

사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우연히 영화 『에일리언 2』를 다시 봤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리플리(“시고니 위버”)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 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이다.

그녀는 그 잘 훈련된 공수부대원 전부가 패닉에 빠져 있을 때도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팀원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면서 살 길을 찾아나간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능숙하게 기계를 다룰 줄도 안다. ‘파워로더’를 다루는 그녀를 보라.

57년간 냉동되어 있던 그녀가 어떻게 그 첨단 기계를 조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 전 컴퓨터의 인터페이스와 지금 컴퓨터 인터페이스는 거의 석기시대와 철기시대만큼의 차이가 있는데 건설용 중장비들은 안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그녀는 훌륭한 리더일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밝은 현장요원이다.

게다가 그녀는 용감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에일리언에게 납치된 어린아이 ‘뉴트’를 구출하기 위해서 홀홀단신 에일리언의 소굴까지 찾아 들어가는 그녀의 그 강인한 이미지는 이후에 등장하는 여자 영웅 영화의 원형이라 할 만큼 멋졌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그녀조차도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도 바로 그녀가 영웅의 모습을 한껏 드러낸 뉴트 구출장면에서 말이다.

그 상황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원자로 냉각기가 손상되어서 몇 분내에 공장시설 전체가 핵폭발을 일으킬 예정이다. 리플리는 천신만고 끝에 뉴트를 찾아냈고, 눈앞에 펼쳐진 에일리언 알 무더기를 볼모로 퀸 에일리언을 협박해서 퇴로를 확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합리적인 선택은 간단하다. 뉴트를 데리고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시설이 폭발하는 순간 퀸 에일리언도, 나머지 에일리언 떼거리들도, 그 괴물이 낳아놓은 수많은 알들도 모두 한줌 재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알들에 총질을 하고, 화염방사기를 쏘고, 그것도 모자라서 퀸 에일리언의 알집에 유탄을 쏘아댄다. 그 결과, 쓸데없이 분풀이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한 리플리는 시설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탈출하지 못하는데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퀸 에일리언까지 들이닥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연출하고야 만다.

죽음을 예감한 그녀가 어린 뉴트를 끌어않고 ‘눈 감으라’고 중얼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저지른 짓은 정말 아무런 쓸데가 없었다. 그건 에일리언들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고, 뉴트를 구출하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그 만용은 결국 아무 죄도 없는 뉴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후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탈출한 모선에까지 퀸 에일리언이 쫒아온 덕분에 충직한 사이보그 비숍은 반동강이가 나고, 결국 모선 전체가 위기에 처하고 만다. 물론 어찌어찌 리플리가 파워로더로 퀸 에일리언을 쫓아내면서 일이 마무리된 것 같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음은 『에일리언 3』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리플리?

이렇게 정리해보니 리플리가 저지른 그 만용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쓸데없는 짓 Top 10 리스트에 올릴 만큼 엄청난 과오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이런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곤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것일까?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그래야만 영화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이다.

리플리가 얌전하게 소굴에서 빠져나와 모선으로 탈출했다면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겠지만, 위기일발 탈출도 없었을 것이고 영화사상 가장 멋진 결투로 손꼽히는 퀸에일리언과 파워로더 대결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은 사실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진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 애한테서 손떼, 이 ㅆㄴ아!!!

파워로더 미니어쳐 ...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 아니, 사실 따져보면 쓸데없는 짓으로 점철된 곳이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짓 덕분에 세상을 사람을 더 잘 알게된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벌인 덕분에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그런 깨달음이 나중에 진짜 중요한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자기 할 일도 바쁘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게 가장 깔끔할 것 같은 사람들끼리 눈이 맞아서 쓸데없이 연애질을 벌인 결과, 자기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냥 얌전히 헤어져도 되는데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나면 후회가 든다. 그냥 서로 좋게 헤어져도 되는 거였는데 왜 쓸데없이 원한을 남겼을까 …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고, 그와 다시 마주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마치 쓸데없이 퀸 에일리언을 화나게 한 덕분에 그 괴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지를 확실하게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으면 다 용서된다니까 ...

어쨌든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들 덕분에 우리는 인생을 매끈하게 흘려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대끼며 고생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기계처럼 효율적이지만 무미건조한 활동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생명체의 그 변화무쌍함을 체험하며 살수 있게 된다.

요약하면, 영화 속에서 쓸데없는 짓은 영화를 재미있게 하고, 현실에서 벌이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에게 진정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뭐 아무리 그렇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결과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그 결과는 그저 한심할 뿐이라면 관객들이 짜증을 낼 것이고, 현실에서 쓸데없는 짓의 결과가 그저 고생뿐이라면 후회만이 남을 뿐 일테니 말이다.

영진공 짱가

“나이트 플라이트”,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한계


호러영화는 원래부터가 여성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스릴 혹은 샤커(shocker)를 주무기로 하는, 호러에서도 슬래셔라는 서브 장르는, 가장 약해보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갖 갖은 고생을 시키면서, 역으로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소외된 결과물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또다시 혐오와 공포를 강화시키는지) 그 어느 장르보다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
 

『스크림』 호러 컨벤션이 여기서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졌다

영화에서 섹스를 한 여자주인공이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잔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10대의 성에 대한 경고라는, 지극히 꼰대적인 가치관에서 비롯한다.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보여준 것은 이제껏 공고하게 쌓아올려진 호러장르의 가장 전통적인 장르 컨벤션을 정확히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었고, 내 눈에 가장 강하게 띈 것은 역시나 여주인공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옆집 여동생같은 여린 소녀(“니브 캠벨”이 TV 시리즈 『파티 파이브』를 통해 스타가 된 배우임을 상기하라.)는 단적으로 섹스를 하고도 살아남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듬직하고 믿음직한 남자주인공의 노력과 보호를 착취하다가 막판에서야 뭔가 시늉을 하고 살아남는 여자 캐릭터가 아니라, 철녀도 아닌 주제에 갖은 고생을 하며 오히려 옆집 오빠(“데이빗 아퀘트”)를 구해내고, 당연히 그녀를 지켜주다가 장렬히 죽을 것같았던 남자친구가 오히려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스크림 2, 3는 1에서 오히려 퇴행한 결과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몸은 젊은이라고, 또한 진보라고 떠들어대는 숱한 젊은 (남자) 호러감독들이 하지 못했던 것(혹은 하기 싫어했던 것을 오히려 “웨스 크레이븐”이 ‘아버지의 권위로’ 해낸 것이라는 점이다.

수꾸임~!

그러나 『스크림』시리즈가 가진 맹점은, 기존의 호러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었다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기존의 호러 컨벤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브장르가 바뀌긴 했지만(『나이트 플라이트』는 슬래셔가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결과, 그러나 아직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영화가 바로 『나이트 플라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0분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영화가 맥빠지고 심심한 영화로 느껴지는 것은 비행기가 도착한 후부터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안타까움과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절대적인 공포의 담지자일 것만 같았던 ‘그’는 알고보니 허풍쟁이 삼류에 어설픈 마초근성을 드러내다가 망신을 산다. 마초의 법칙은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다. ‘상황논리에 맞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숫컷의 법칙을 따르라’ 블라블라는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다.

‘그녀’가 눈부신 방어자이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폭력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폭력의 희생자와 다른 점은, 그녀가 단지 폭력의 ‘희생자'(Victim)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 폭력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다시는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것이, 그녀가 다시 닥친 일생 최대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고 다른 이의 목숨까지도 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참으로 눈부시게, 킬러가 초라해보일 정도로, 고난을 이겨낸다. 너무 쉽다 싶을 정도로.)

여기서 또다시 재미있는 것은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욕망을 느끼는 딸의 관계, 이른바 프로이트적인 아버지-딸의 고착은 스크린 안과 밖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호러영화의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새로운 여성성을 부여해준 존재가 B급 호러 영화의 대부, 즉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자’인 “웨스 크레이븐”이다.

아 그러게 폼만 그럴 듯하면 뭐하냐고 ... (그래도 넘 예뻐, 킬리안! ㅠ.ㅠ)

스크린 안에서, 다 큰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포악한 아버지'(“브라이언 콕스”, 『트로이』에서 아가멤논을 연기한 바 있는 그는 이제껏 너무나 자주 ‘포악한 아버지’를 연기해왔다)가 아니라 그녀 또래의 미성숙한 젊은 남자 잭슨(“킬리안 머피”, 뭇 젊은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게스모델 출신의 ‘예쁜’ 남자배우)이다.

이 영화의 갈등구도는 마치, 딸이 데려온 남자친구를 번번이 트집잡아 싫어하다가 딸이 마침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기자 ‘거봐, 내가 뭐랬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며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그녀 주변인물들은 이러한 딸에 대한 아버지의 욕망을 온통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뿐이다.

딸보다 어린 남자는 ‘연필을 잃어버리고 당황하는’ 바보일 뿐이고, 딸의 친모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그 친모의 친모는 막 죽었으며(그녀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딸의 어머니 세대의 다른 여성은 그녀의 호의를 입었으면서도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희망도 되지 못하고 실망만 끼친다. (그녀의 호의로 전달된 ‘책’은, 나중에 그녀의 SOS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개가 됨에도 부주의하게 분실되어 악당의 손으로 들어간다.)

반면 여전히 사회적인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을 단단히 보호하는 것은 아버지 또래의 남자, 키프 의원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딸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는 딸을 구한다. 딸에 대해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착된 딸의 이상한 근친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그들 부녀 사이에 이제는 아무도 (아무것도) 쉽게 끼어들 수 없다.

(유사) 아버지와 딸 - 아버지의 새로운 후계자이긴 한데 ...

아버지는 비리비리한 아들 – 여전히 남성적 권위를 지탱해주는 사회 제도와 법에 기대어 정작 그 자신의 주체는 나약할 대로 나약해져버린 아들 – 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게임을 치르고 그 누구도 돕지도 돌봐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살아남아 자기 혼자 훌쩍 선택해버린 딸을 선택했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의 세상이 아들이 아닌 딸들의 것이 될 것이라 예감한 아버지의 ‘약삭빠른’ 지분거림일 수도 있고,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폐기당한 것은 아닌 아버지의 권위로 승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이트 플라이트』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갖는 의미는 이것이다. 아버지는 호기롭게 딸을 승인한다. 딸을 통해 구원받은 아버지의 보상은 자랑스러운 딸에 대한 인정과 승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부와 키프 의원, 둘 다에게서 인정을 받는다.)

기존의 신화구조에서 언제나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다. 새로운 세대는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딸 역시, 아들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자신을 살해하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아들이 두려워 후계자를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되도록 오래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 존재로서 딸을 선택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받은 딸에게 굳이 아들처럼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 단계가 필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또다른 방식으로든 뭐든 아버지를 극복해야만 하는 단계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딸은 아버지 권력의 대리자, 즉 아버지를 제몸에 승화시킴으로서 구세대적 – 낡은 권력을 되도록 오래 지탱해주는 새로운 지지대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승인과 인정은, 아들이 아닌 딸의 가능성과 딸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한 발 나아간’ 진보에도 불구하고, 단지 아들이 아닌 딸을 자신의 ‘후계자’로 승인했을 뿐 여전히 자식에 대한 소유권과 그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굳건한 아버지의 권위’를 고수하며 자식에게 ‘아버지 살해’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앙시엥 레짐이다.

(브루주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에게 추파를 보내는 귀족?) 여전히 이것이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그리고 이미 ‘아버지’인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영진공 노바리

 

“왼편 마지막 집”, 굳이 리메이크를 한 이유가 뭔지???

“왼편 마지막 집”은 동명의1972년작을 리메이크한 영화 되겠습니다. 원작은 웨스 크레이븐의 초기작이자, 엄청난 충격을 전해주는
영상과 “분노의 13일”이라는 극촌빨 번역 제목으로 기억되고 있지요. 어려서부터 찢고 썰어대는 영화 잘 보던 저는 원작을 중학생
때 접했습니다 … 만 아쉽게도 ‘조낸 잔인하다’라는 기억 외에는 별로 떠올릴만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원작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그닥 들지 않는게, 보도자료에는 시놉시스 상의 수정을 가하지 않았다고 하고, 딱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70~80년대 유행했던 호러 영화들의 이야기를 거의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고 그 공식들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으니까요.

1. 나쁜 약먹고 헤롱대고, 밝히고 그러면 못써. 그러다가 잔인하게 죽는 수가 있다.

2. 엄마 아빠 말 안듣고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면 크-은일 나. 알겠어? 그나마 순결해서 살아 남은 거야.


3. 아무한테나 친절 베풀다가 조뙈는 수가 있어.


4. 나쁜 짓 하고 다니는 놈들은 결국 다 자업자득. 조낸 아프게 죽어요.

수꾸임!!!

뭐 이런, 고리타분한 교훈들 말이지요.
이렇게 거의 무수정판 리메이크가 나온 까닭은, 아마도 만드는 쪽에서 이 영화를 “스크림”처럼 기존의 호러 무비들의 법칙을 멋대로
비틀고 전복시키며 낄낄댈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이겠지요.

아마 감독이나 제작자 모두 장르의 틀을 벗어나는 일 따윈 없이 날씬하게
잘 빠진 상업영화를 만들 생각이었나 봅니다.(원작의 감독인 워스 크레이븐이 제작자로 참여했으니, 그 아자씨의 입김이
작용했을지도 …) 나쁜 놈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무난하게 먹히는 편이고, 원작이 나올 당시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는 30대 중후반이 되었으니 리메이크 시기도 적절하구요. 오히려 좀 늦은감이 있습니다.

만든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보자면 당 영화는 주인공인 사라 팩스톤의 스키니한 몸매만큼이나 미끈하게 잘 빠졌습니다. 이야기는
논리적 허점과 무리없이 평탄하고 세련되게 진행되어 ‘시발 경찰을 부르란 말이야!!!’식의 절규를 할 일도 없고, 요즘 대부분의
호러 영화들처럼 피로 떡칠을 하지도, 인간의 육체를 순대 썰어내듯 말도 안되게 썰어버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벗뜨.. 기본적으로 당 영화는 흉악무도한 범죄자들에게 무고한 젊은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고, 그 부모들이 악당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퍼붓는다는 내용입니다. 무난하고 보기 편한 영화는 절대로 아니지요.
특히나 미모의 젊은 여성 두명이, 마약 좀 하고 낯선 남자를 따라나설 정도로 철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들 중 한 명은 잔인하게 죽음을 당하고, 한 명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

별다른 여과 없이 성폭행  장면을 차분하게 잡아내는 카메라 덕분에(?) 보는 쪽에선 당장에 달려가서 저
놈들을 쳐 죽이고 미녀를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나지만 스크린을 뚫고 들어갈 재주가 없어 안절부절 못하는 식의 분노를
경험하게 되고, 그 분노는 고스란히 당 영화에서 정의의 주인공 역을 맡고 있는 그녀의 부모들에게의 감정이입으로 치환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다 썰어버리겠어.

….저 답지 않게 어려운 말 쓰는군요. 그냥 조낸 나쁜놈들이니, 별 죄책감없이 그 넘들의 머리에 구멍이 나고, 팔이 분쇄기에 갈리고, 눈에 총알이 박히고, 머리가 터져나가는 등의 장면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써 당 영화는 할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죠. 런닝타임을 꽉 채워서 두근두근 오밀조밀 쫄깃쫄깃하게 만들어 주고, 막판엔
그 불편한 감정들을 깔끔( … 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하게 정리할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니 말입니다.

거기서 끝입니다. 뭐 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습니다.
잔인함, 불편함의 강도야 오히려 원작이 더 쇼킹할 정도로 셌고, 사소한 몇몇 설정과 배우들만 바뀔 거면 … 도대체 리메이크를 왜 했냐능? … 뭐 딱히 대답해 줄 만한 사람도 없겠습니다만 …

그냥 헐리웃 영화공장의 기계는 계속 돌아가야 하고, 뭔가는 찍어내야 하니까. 뭐 이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영진공 거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