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교육감이 사퇴하면 안되는 이유




이번 곽노현 교육감 금품제공 건의 사실관계는 단순합니다.

당선자가 당시 경쟁후보자였던 이에게 선거 이후에 금품을 제공했다는 것.

이게 답니다.

여기서 문제는 “왜” 주었는냐인데 이 또한 단순합니다.

1. 지인의 곤란한 사정이 딱해서 “선의”로 지원한 건지,

2. 사전에 어떤 약속이 있어서 후보포기의 대가로 준 건지,

이것만 규명하면 됩니다.

1.의 경우라면 미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닥 문제삼을만한 일이 아닙니다.
2.의 경우는 범법이므로, 사실로 밝혀진다면 당연 자격박탈이고 처벌이 뛰따릅니다.

이러한 사실관계와 실체규명에 있어서 “사퇴”라는 방식은 별 연관성도 없고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왜 이슈가 되고 있는지 좀 아리송합니다.



⊙ 지금 시점에서의 사
퇴는 범법 인정을 의미한다.

곽 교육감은 이미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했으며, 이는 선의에 의한 행동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퇴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떳떳하기에 사퇴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사퇴를 한다? 그 사퇴의 변이 얼마나 진정성이 담긴 고뇌의 토로가 될지 몰라도 이는 곧 선의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으며 떳떳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사퇴하면 안될 일이며, 떳떳하지 못하다면 사퇴가 아니라 자백을 해야겠지요.

그리고 실체규명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과 자기 정파의 이익을 계산하여 사퇴를 압박하는 이들은 그에게 사퇴를 종용할 게 아니라 죄를 인정하라고 윽박질러야 맞는 표현이 될 겁니다.

사퇴의 시기는 지났다.

도덕적 견지라는 면에서라도 사퇴를 선택할 수 있는 시점은 지났습니다. 최초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하던 당시에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여 사퇴를 선택하였다면 모를까, 이미 그런 명분을 취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젠 길고 힘든 과정이 되겠지만, 검찰 수사와 이어 있을지 모를 재판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선의”의 진정성을 밝히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대가성이 밝혀지든가 하는 것이 오히려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사퇴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교육정책이 표류하니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글쎄요,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한 시점부터 정책수행의 표류는 시작된 겁니다. 이 표류가 사퇴로 인해 되돌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퇴로 인해 그 정책의 당위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평가가 더해지거나 덜해지지도 않습니다.

조직은 최고 책임자가 있어야 돌아갑니다. 정책은 그 책임자가 얼마나 성의있게 챙기느냐에 따라 진도가 결정됩니다. 그나마 책임자가 없으면 정책은 표류가 아니라 정지가 되고, 다른 성향의 책임자로 대체되면 아예 폐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정책을 반대하는 측은 책임자가 빨리 사라져서 정책이 정지되고 속히 자신들의 정책으로 대체할 사람을 넣고 싶어할 것이며, 찬성하는 측은 그나마 책임자가 남아서 그 정책이 적어도 정지되는 것은 막고 싶어할 겁니다.

결국 상황이 변하는 건 없고 다만 손익계산서만 남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번 건에 있어서 사퇴라는 방식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혼란만 더 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선의”를 주장하고 있고 상대방이 “대가”를 주장하는 상황에서는, 서울시 교육행정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를 가릴 수 있는 공권력에게 판단을 맡기는 게 가장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정파들은 이 건에 대해 지레 판단을 내리는 것을  자제하여 조속한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하여야 하고, 검찰은 늘상 하시던대로 공정한 수사를 진행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영진공 이규훈

 

“캐치 미 이프 유 캔”, 양키즈가 게임을 이기는 이유


왜 뉴욕양키즈가 맨날 이기는지 아니?
강타자 미키맨틀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아니, 상대팀이 양키즈의 줄무늬 유니폼을 보고 기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란다.

– 영화『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프랭크와 아버지의 대화 –

『Being There』(국내 출시명『찬스』) 라는 영화가 있다.

챈스 라는 이름의 나이 한 40 된 개인집 정원사가 그 주인공인데 이 아저씨, 고아출신에 워낙에 약간 머리가 둔한데다가 평생을 그 집에서 나무키우는 일만 해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나무키우는거 하고 TV 보는 거 밖엔 없다.

그런데 이 정원사가 살던 집 주인이 그만 죽고, 집도 정리가 되는 바람에 정원사는 졸지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이 아저씨, 그만 도로 한복판에서 어정대다가 차에 살짝 치이는데 하필이면 그 차가 미국 제일의 억만장자 재벌 차였던 덕분에 이 아저씨의 인생은 요상하게 풀려가기 시작한다.

차에 치일때 입고 있던 옷이 깔끔한 정장(그에겐 하나뿐인 정장이라 주인이 고급으로 사준 모양인데, 평소엔 입을 일이 없었으니)이었던 덕분에 이 아저씨는 억만장자에게 뭔가 그럴듯한 인물로 오해받는다. 그리고 그가 내뱉는 무의미한 몇마디들이 꽤 의미있는 뜻인것처럼 들리면서 억만장자는 그를 친구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덕분에 이 바보 정원사 아저씨는 갑자기 억만장자 곁에 나타난 신비의 인물로 주변사람들에게 비춰지게 되고 졸지에 주목받기 시작한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그의 뒤를 아무리 캐봐도 나오는게 없다는사실은 (당연하지, 원래 아무것도 없었으니) … 정보기관에서조차 더더욱 그를 대단하게 신비한 인물로 평가하게 만들고,

TV토크쇼에 나와서도 나무 키우는 얘기만 했는데 그게 현 정치상황에 대한 아주 훌륭한 통찰로 오해받으면서, 그는 비밀에 쌓여있지만 아주 머리가 좋고 영향력도 대단한 인물로 간주된다. 그 결과 그는 실제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되고, 나중에 억만장자가 죽고난 다음에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낙점찍히는데서 얘기는 끝난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오해를 통해서 뭔가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도 있다는 얘기였다. 챈스 역을 맡은 사람이 유명한 배우 “피터 샐러즈”(『닥터스트레인지 러브』의 바로 그 아저씨)였던 이 영화는 좀 길다는 거 빼놓고는 정말 재미있었다.


겨울에는 꽃이 피질 않아요. 하지만 봄이 되면 꽃이 피죠 …

그 말씀은 조만간 경제가 좋아진다는 뜻인가요??



실제로 이런게 사기라면, 사기는 우리 일상 속에 종종 일어나는 거 아닐까.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다이아몬드 자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이아몬드를 가치있다고 인정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생겨난 것일까? 나는 그 손톱보다도 작은 돌맹이가 몇백만원씩 해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그 돌 자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다이어몬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냥 여러 보석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처럼 보석의 왕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DeViers라는 남아공의 다이어몬드 회사에서 “Diamond is Forever”(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007영화의 제목이었기도 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결혼식=다이아몬드” 라는 공식을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킨 다음부터였다.

1980년대, 코카콜라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펩시콜라사에서는 펩시 챌린지(Pepsi Challenge) 라는 행사를 시도했다. 눈을 가린 시음자들에게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마시게 하고는 어느 콜라가 더 맛있는지 고르게 한 것이다.

그 결과 펩시콜라를 선택한 시음자가 절반을 넘었다. 이는 두 회사 콜라의 맛에는 감별할만한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펩시콜라가 더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였다. 만약 소비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코카콜라 대신에 펩시콜라를 선택할 것이라는 게 회사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코카콜라를 마셨다. 어째서 그랬을까?

트위첼의 책 Living it Up(럭셔리 신드롬)에는 또 다른 펩시챌린지가 등장한다. 사람들에게 컵에 따른 에비앙 생수와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생수, 그리고 수돗물을 마시게 한 후 어떤 물이 제일 맛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생수맛을 감별하지 못했다. 심지어 수돗물이 제일 맛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낀건 생수 자체의 맛이 아니라 생수의 상표였던게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에는 주인공인 네오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 소년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다.


숟가락꼬마: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 대신에 진실을 인식하려고 해봐요.
네오: 무슨 진실?
숟가락꼬마: 숟가락은 없다는 진실 말예요.
네오: 숟가락이 없다고?
숟가락꼬마: 그걸 깨닫고 나면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될 거예요.


숟가락은 없다(There is no spoon).
따라서 숟가락이 구부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숟가락을 보는 내 마음이 구부러지는 것이다.

이는 왜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에비앙 생수를 더 맛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콜라가, 생수 그 자체가 맛있는 것이 아니라 그 콜라와 생수를 보는 내 마음이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솝우화에 허영에 찬 까마귀 이야기가 있다. 대충 이렇게 진행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허영과 자만에 찬 어떤 까마귀가, 공작새들이 떨구고 간 깃털을 주워서 자기 털에다 꽂았다. 그리고는 그전 친구들을 얕잡아 보며 자신만만하게 아름다운 공작새들 무리 속으로 찾아갔다.

공작새들은 당장에 이 침입자를 간파하고, 작은 까마귀의 그 빌려 꽂은 깃털을 뽑고, 주둥이로 쪼면서 마구 쫓아냈다. 불행한 작은 까마귀는 가혹한 벌을 받아 몹시 슬퍼하면서, 그전 친구 있는 데로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기 친구들 틈에 끼려고 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이 작은 까마귀가 전에 얼마나 으시댔는가를 생각하고, 큰 소리로 호통치면서 자기네 무리에서 쫓아내자 이 작은 까마귀가 바로 조금 전에 얕잡아 본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자연이 만들어 준 그대로 만족해 있었다면 손윗 사람들의 징계도 받지 않고 또 친구들의 경멸도 받지 않았을 텐데.”


이솝 이야기에는 늘 교훈이 따라다니는데, 이 이야기의 교훈은 너 자신을 알아라(Know then thyself)이다.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네 분수를 알아라, 너의 본질에 충실하라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예들은 이 까마귀가 어쩌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한다.
까마귀의 잘못은 자기 주제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말 제대로 잘 연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공작새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그의 정체성 그의 본질은 까마귀가 아니라 공작새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드비어스의 상술이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다이아몬드는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보석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었고, 코카콜라의 유서깊은 반복광고가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그냥 맛있는 콜라를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어서 은행의 융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럴듯한 턱시도를 입혀서 그럴듯한 차의 운전기사처럼 연출하고 자기는 그 차의 뒷자석에 앉아 은행을 찾아간다. 그리고 왜 이래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아들에게 맨 처음 나온 교훈을 알려준다.


양키즈가 강해서 이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양키즈는 강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긴다는 교훈. 이건 너 자신을 알고 네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이솝의 이야기와는 정 반대의 아주 발칙한 교훈이다.

유감스럽게도, 공작새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실패한 까마귀처럼 아버지는 실패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교훈을 가슴깊이 새기고 실천에 나선다. 전학간 학교에서 일주일간 (학생이 아니라) 임시교사 노릇을 해보기도 하고, 가짜 결석계를 제출하러 온 여학생에게 진짜 결석계처럼 보이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몰락이 확인되자 아들은 집을 나가서 판을 더 크게 벌인다.

수표를 위조하고, 위조 수표가 먹혀들어가려면 수표를 내놓는 사람의 신분이 그럴듯해야 함을 깨닫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조한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인 비행기 조종사에서 의사로, 특수요원으로 다시 변호사로 그는 정체성을 바꾸어나간다. 프랑스에서 FBI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최소한 5년간, 그는 성공했다. 250만 달러를 위조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진짜 변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사람들은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5년간 잘 살았다 하더라도 그건 결국 일장춘몽이고 사기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미성년자에다 고등학교 중퇴에 불과한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수감생활의 대부분을 FBI에서 위조수표 수사 담당 요원으로 일하면서 보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수표위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진짜 요원이 된것이다.

이 수표는 ... 은행 직원 짓이네요.

게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서는 위조하기 어려운 수표 제조법에 대한 특허를 내서 그 특허로 수백만달러를 다시 벌어들였고, 지금도 잘 나가는 보안회사의 오너가 되어 있다. 그의 자서전은 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가 되어서 다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말이다 …


그는 양키즈의 승률에는 정말로 그 줄무늬 유니폼의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로 뭘 보여주려고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이미지의 승리, 이 발칙한 원칙의 승리였다.

물론 그가 그 증명을 위해서 단순히 사기만 친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의와 성의를 다해서 사기를 쳤다. 그 결과 그는 한가지 영역에서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쳐준 또 다른 교훈 처럼, 그는 우유에 빠졌으나 포기하고 빠져죽은 생쥐가 아니라 죽기살기로 헤엄을 쳐서 우유를 치즈로 만들어 디디고 살아남은 생쥐가 된 것이다.


PS.
앞에 인용한 영화 『Being There』의 원작자는 폴랜드 태생의 미국이민자인 Jerzy Kosinsky라는 양반인데, 이 양반 역시 상당한 구라꾼이었던 모양이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구라를 잘 치기로 유명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구라인지 잘 구분이 안됐다던가. 그의 인생도 구라와 사실의 오묘한 혼합이었던 모양이다.

배경도 명확하지 않던 이 양반(본인은 예일대 출신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구라였다던가 …)은 미국에 와서 백만장자와 결혼했고(곧바로 이혼했는데, 이혼후 여자는 자살했단다),

자크 모노 같은 유명한 철학자의 임종을 사진찍어서 유명해지기도 했고, “워런비티” 주연의 『Reds』라는 영화에서 단역이지만 중요한 역을 맡기도 했고, 소설과 희곡도 썼다. 그러다가 58세가 되던 1991년에 갑자기 자살해버렸단다.

이 영화 『Being There』 도 결국 본인의 인생을 은유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영진공 짱가

 

“피구의 제왕”, 진부하되 웃기는데 성공한 개그의 제왕


코미디 영화는 웃기면 된다.

좀처럼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에어플레인』, 『폴리스 아카데미』, 『총알 탄 사나이』, 『덤앤더머』의 슬랩스틱 개그는 심상의 복잡한 광경을 제로베이스로 만들어주는 일등 공신감이다.

최근에는 우울할때면 찾아보는게 『러브 액츄얼리』로 바뀌었으나 그 전에는 단연 『총알 탄 사나이』와 『에어플레인』이 톱랭크 되어 있었다.

슬랩스틱. 우리나라에서는 슬랩스틱=저질=심형래=(나아가서는)영구 시리즈의 이상한 공식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웃긴걸 어쩌라구? 웃긴게 죄야? 넘어지는게 유치해?

늘상 코미디를 영화의 하위분류가 아닌 저질의 하위분류로 놓고 이야기하는 몇몇 지인들의 머리통을 캔뚜껑으로 따주고 싶을 때 나는 또 우울해진다. 도대체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편가르는 의도가 궁금하거니와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건지도 웃기다.

코미디를 사랑한다고 모두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는 자는 모두 코미디를 사랑한다! (역시 ‘안믿으면 말구’투 대사다.)


『피구의제왕』(원제: Dodgeball, 2004)은 “빈스 본”과 “벤 스틸러”가 대립하는 영화다. 하나는 가난하고 하나는 부자이나 둘다 갑남을녀의 보편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전문용어로 “쪼다”에 속하는 인물들 … –;;;

피터(“빈스 본” 분)는 5만달러를 벌기 위해 피구시합에 얼떨결에 나가게 되고 특별한 플롯없이 우승한다. 미국 전역에서 모인 쟁쟁한 팀들과의 피튀기는 대결 따위는 애초에 없다. 그냥 이긴다. 이 허망하고 진부한 내용은 다시 곱씹어 보면 미치도록 웃긴 설정이다.

저 『소림축구』에서 봤던 마지막 시합의 비장감 따위조차 웃음의 방해요소라면 그냥 무시해버리는 내공. 영화에서 나오는 그 어떠한 장치(예를 들자면 “밴스틸러 사타구니”에 들어있는 뽕빤쓰, 중간중간 까메오로 등장하는 “데이빗 핫셀호프”, 심판장인 “척노리스”, “랜스 암스트롱”의 깜짝출연, 피터 관원들의 쪼다행각)도 그저 들러리 웃음 뿐이다.

그렇다고 출연자들의 캐릭터가 죽어 있느냐? 절대 아니다. 캐릭터 하나하나의 개그는 내 정신세계 수준에서 개그의 절대치를 보여주게 웃기다.

어쨌든, 뭣이 됐든 ……

이 영화. 웃겨 죽는줄 알았다.

영진공 그럴껄

“런던의 악마들”, 켄 러셀 – 단단히 마음 먹고 봐야 하는 영화




구교와 신교가 한참 충돌하던 때의 런던, 혹은 로우돈은, 막 죽은 총독의 신/구교간 화합 정책 댁에 종교전쟁의 광풍에 초토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도시의 자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랑디에 신부는, 도시의 자치를 위협하며 절대왕정을 완성하려는(실은 절대왕정 비즈니스라는 인형극의 조작자가 되고 싶어하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 리슐리외 추기경이 시도하는 농간 속에서, 자신의 난잡했던 여자관계를 꼬투리 잡히고 그를 남몰래 흠모하던 ‘뒤틀린’ 수녀원장 시스터 진의 무고를 계기로 ‘악마’로 몰리게 된다.

‘반기독교적’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고 이탈리아에서는 심지어 상영금지가 되기도 했던 영화라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기독교의 제도적 측면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그 누구보다 진지한 성찰을 하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신성모독이라는 딱지를 부여받았던 케빈 스미스의 『도그마』가 실제로는 더없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의 스미스 감독의 믿음을 증언해 주듯이. 혹은 더없이 ‘인간적인’ 예수를 다룬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더없이 절절한 신앙을 펼쳐내 보였듯이.


이성과 합리와 과학의 시대라는 ‘근대’는 그냥 온 것이 아니었다. 근대의 시대는 온갖 과학적 발명과 발견에 힘입기도 했지만, 그 태동기에는 오히려 당대 유일의 지식인층이라 할 수 있는 카톨릭 성직자 중 이단으로, 악마로 몰린 ‘근대적 인간’들의 무수한 순교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인공, 그랑디에 신부는 바로 그러한 근대적 정신을 가진 근대적 인간이며, 또한 순교자이다.

기독교라는 ‘종교 체제’에 대한 공격이 언제나 종교의 근원적 가르침에 대한 부정인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의 기독교 역사는 이 정도의 공격엔 ‘살살 해줘서 감사합니다’ 해야 할 정도로 처절하고 잔혹하고 피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수많은 안티-크리스트 세력을 키운 것은 기독교이다.

그러나 안티-크리스트 세력이 모두 안티-크리스트인 것이 아니다. 마치 예수가 여호와의 율법을, 깬 것이 아니라 완성시킨 것처럼. 그랑디에 신부가 예수의 이미지와 닮아있는 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이다. 물론 “켄 러셀”의 터치는 좀더 관능적이고 섹슈얼한 에너지가 넘치긴 하지만.

“올리버 리드”도 그렇지만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연기가 참으로 압권이다. 몸이 뒤틀리고 마음까지 뒤틀린 그녀의 절규와 고통을, 아버지-어머니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그랑디에가 기도했듯.

그랑디에와 쟌느 자신의 입으로 진술되듯, 수녀들의 난동과 광기를 만든 것은 그녀들을 향한 사회의 제도와 억압이었다. 그랑디에가 진에게 그토록 동정적이었던 것은, 그리고 여느 마초 신부들과 달리 매들린(“젬마 존스”)을 통해 비로소 진리를 향해 한 발 다가간 것은, 그가 이러한 상황들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난폭하고 관능적인 이미지 속에서 기독교를 다시 성찰하는 이 영화, 내게는 특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


ps.
1. 이 영화의 원작은 올더스 헉슬리의 ‘다큐멘터리 소설’을 각색한 연극
  『로우돈의 악마들』이다.

2. 매들린 역의 “젬마 존스”는 <브리짓 존스> 시리즈에서 브리짓의 주책바가지
   엄마 팸을 연기한 그 배우이다. 젊은 시절의 젬마 존스는 청초하고 순결한 아름
   다움과 지금 모습의 일부를 갖고 있다.

3. 그랑디에의 영혼은 애초부터 그랑디에의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녀들의
   영혼은 그렇지 못했다. 악마에게 소유되었다고?
   그 악마는 당시 교회가 아니었던가 ……


 


영진공 노바리

 

니코, 니코 삐라스마니, 너의 장미는 어디서 났는가?





니코 삐라스마니 (1862 ~ 1918)
[조지아의 원초주의 화가, 그의 생애와 약력]

 간판장이 니코, 니코 삐로스마니는 가난한 간판장이었다.
1800년대 말. 그루지야(지금의 조지아)에 살던 니코는,
 마르가리타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사랑에 빠진 니코는이기적이고 잘나가는 그녀를 잡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다.

 
마르가리타

니코는 수많은 마차를 빌려
마르가리타의 집과 정원에
장미꽃을 채워놓기 시작한다.

니코는 자신의 집과 그림, 가재도구를 몽땅 팔아
그녀의 집앞 한가득 꽃으로 채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한다.

마르가리타가 나왔을 때
집과 정원이 온통 장미로 덮힌 것을 보았고
그녀는 결국 니코에게 키스하며 결혼을 약속한다.

그리고

.
.
.
.
.

마르가리타는
가난뱅이 니코를 버리고 부자와 결혼한다.

그는 1918년 5월 5일 죽기 좋은 날에 죽었고

니코의 사랑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알라 푸가체바(Alla Pugacheva)의 노래,
가사가 노래의 사연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슬픈 사연의 노래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왕자’의 이야기로 불려지고 있다.


사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국민작곡가인 레이몬즈 파울즈의 곡으로,
원제는 ‘Dāvāja Māriņa’이며 우리 말로 하면 ‘여신 마라의 선물’이다.

곡의 내용은 강대국 사이에서 신음하는 라트비아의 현실을,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하는 여신 마라가 그 아이가 고초를 겪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에 빗대어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영진공 그럴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