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악마들”, 켄 러셀 – 단단히 마음 먹고 봐야 하는 영화




구교와 신교가 한참 충돌하던 때의 런던, 혹은 로우돈은, 막 죽은 총독의 신/구교간 화합 정책 댁에 종교전쟁의 광풍에 초토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도시의 자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랑디에 신부는, 도시의 자치를 위협하며 절대왕정을 완성하려는(실은 절대왕정 비즈니스라는 인형극의 조작자가 되고 싶어하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 리슐리외 추기경이 시도하는 농간 속에서, 자신의 난잡했던 여자관계를 꼬투리 잡히고 그를 남몰래 흠모하던 ‘뒤틀린’ 수녀원장 시스터 진의 무고를 계기로 ‘악마’로 몰리게 된다.

‘반기독교적’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고 이탈리아에서는 심지어 상영금지가 되기도 했던 영화라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기독교의 제도적 측면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그 누구보다 진지한 성찰을 하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신성모독이라는 딱지를 부여받았던 케빈 스미스의 『도그마』가 실제로는 더없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의 스미스 감독의 믿음을 증언해 주듯이. 혹은 더없이 ‘인간적인’ 예수를 다룬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더없이 절절한 신앙을 펼쳐내 보였듯이.


이성과 합리와 과학의 시대라는 ‘근대’는 그냥 온 것이 아니었다. 근대의 시대는 온갖 과학적 발명과 발견에 힘입기도 했지만, 그 태동기에는 오히려 당대 유일의 지식인층이라 할 수 있는 카톨릭 성직자 중 이단으로, 악마로 몰린 ‘근대적 인간’들의 무수한 순교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인공, 그랑디에 신부는 바로 그러한 근대적 정신을 가진 근대적 인간이며, 또한 순교자이다.

기독교라는 ‘종교 체제’에 대한 공격이 언제나 종교의 근원적 가르침에 대한 부정인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의 기독교 역사는 이 정도의 공격엔 ‘살살 해줘서 감사합니다’ 해야 할 정도로 처절하고 잔혹하고 피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수많은 안티-크리스트 세력을 키운 것은 기독교이다.

그러나 안티-크리스트 세력이 모두 안티-크리스트인 것이 아니다. 마치 예수가 여호와의 율법을, 깬 것이 아니라 완성시킨 것처럼. 그랑디에 신부가 예수의 이미지와 닮아있는 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이다. 물론 “켄 러셀”의 터치는 좀더 관능적이고 섹슈얼한 에너지가 넘치긴 하지만.

“올리버 리드”도 그렇지만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연기가 참으로 압권이다. 몸이 뒤틀리고 마음까지 뒤틀린 그녀의 절규와 고통을, 아버지-어머니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그랑디에가 기도했듯.

그랑디에와 쟌느 자신의 입으로 진술되듯, 수녀들의 난동과 광기를 만든 것은 그녀들을 향한 사회의 제도와 억압이었다. 그랑디에가 진에게 그토록 동정적이었던 것은, 그리고 여느 마초 신부들과 달리 매들린(“젬마 존스”)을 통해 비로소 진리를 향해 한 발 다가간 것은, 그가 이러한 상황들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난폭하고 관능적인 이미지 속에서 기독교를 다시 성찰하는 이 영화, 내게는 특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


ps.
1. 이 영화의 원작은 올더스 헉슬리의 ‘다큐멘터리 소설’을 각색한 연극
  『로우돈의 악마들』이다.

2. 매들린 역의 “젬마 존스”는 <브리짓 존스> 시리즈에서 브리짓의 주책바가지
   엄마 팸을 연기한 그 배우이다. 젊은 시절의 젬마 존스는 청초하고 순결한 아름
   다움과 지금 모습의 일부를 갖고 있다.

3. 그랑디에의 영혼은 애초부터 그랑디에의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녀들의
   영혼은 그렇지 못했다. 악마에게 소유되었다고?
   그 악마는 당시 교회가 아니었던가 ……


 


영진공 노바리

 

“환상의 그대”, 홍상수 영화와 닮은 우디 앨런 영화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환상의 그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참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제껏 오랫동안 두 감독의 영화를 봐왔지만 이번처럼 비슷하게 느껴졌던 경우는 처음인지라 내심 놀랍다는 생각도 들고, 이게 이번 작품에서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두 감독의 영화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까지 눈에 띄게 드러나지를 않았던 것인지를 판가름해보게 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처음부터 닮아있었다고 보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는 결론이다. 특히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들이 내용과 스타일 면에서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되며 – 단순히 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 그런 와중에 이번 <환상의 그대>를 통해서 우연찮게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무척 닮아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환상의 그대>가 유난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생각나게 만드는 이유는 등장 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기분 좋은 결말을 – 영화가 끝난 이후의 더 나은 미래를 – 맞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가 언제부터 이토록 삶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을 취했었던가 싶기도 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고 해서 항상 암담한 결말만을 그렸던 것도 아닐진데, 이를 통해 두 감독의 영화가 접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 그렇게 느껴졌다는 사실이 – 무척 흥미롭게만 느껴진다.

<환상의 그대>는 전지적 나레이션을 활용해서 – 홍상수 감독 역시 종종 나레이션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던가 – 씨퀀스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편인데, 그 중 영화의 시작과 함께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경구,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대주제가 되고 만다.




등장 인물들이 자기 삶의 현주소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다른 곳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 그리고 그런 허영과 욕망의 추구가 하나 같이 낭패를 불러오고 만다는 점에서 – <환상의 그대>는 기존의 우디 앨런 영화와는 상당히 차별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는 인물은 남편 알피(안소니 홉킨스)에게서 버림을 받은 후 사이비 심령술사에게 푹 빠져 주변 사람들을 전부 열 받게 만들어버리던 헬레나(젬마 존스)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혼자서 외롭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과연 잘 된 일이라고 해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다.

이토록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으면서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에서 그나마 답이 되어줄 수 있는 건 헬레나가 의존했던 바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식의 결론은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원제목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는 우리가 삶에 대해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란 “(누구나 언젠가는) 저승사자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로이(조쉬 브롤린)의 대사였지만, 이 말의 의미가 영화 초반에 언급된 셰익스피어의 냉소적인 경구와 맞물리면서 결국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적인 기조를 이루게 된다. 노년의 알피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창녀(루시 펀치)와 재혼까지 하지만 물질적인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알피의 허영은 결국 좌초를 하게 된다.

알피의 딸 샐리(나오미 왓츠)의 남편인 작가 로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흠모하던 “환상의 그대” 디아(프리다 핀토)의 마음을 얻는 데에 성공은 하지만 작가로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짓을 하게 되면서 그 역시 인생의 바닥으로 완전히 침몰을 하고 만다. 큐레이터인 샐리 역시 갤러리의 사장 그렉(안토리오 반데라스)과의 연애에 헛물을 켠 데다가 어머니 헬레나가 예언을 핑계로 창업 자금 제공을 거부하자 몹시 분노를 하게 된다.



<환상의 그대>는 분명 우디 앨런의 최고작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 솜씨 좋고 지칠 줄도 모르는 시네아스트의 현재를 확인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세태 풍자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스꽝스러운 해학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혹시나 자신의 삶에도 그와 같이 허탈하고도 몹시 짜증스러운 일이 실제로 닥치지나 않을까 싶어 맘 놓고 웃지도 못하는 애매한 감정에 휩쌓이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희비극을 넘나드는 거장의 행보는 이처럼 현재진행형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