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 내가 다시 지겨워지게 될지도 몰라요.”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만류인력의 법칙에 따라 땅껍질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한번이 되었든 수십번이 되었든 어떤 모양이든지간에 사랑을 하고 만들고, 그 기억을 가슴 한켠에 붙박이장처럼 붙여 들여놓고 살기 마련이다.



결점투성이인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나누고 보듬는 일 또한 실수와 오발의 연속이며 유치한 이기심과 알량한 속셈의 퍼레이드다. 누구라고 그 혐의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동화같은 사랑이야기는 사람들이 원해서 만들어 지는 것. 화면 안의 해피엔딩-영원히 행복했답니다-은 악성 변비환자의 내일 아침 쾌변처럼 이상향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눈꺼풀에 씌워져있던 얇디 얇던 콩깍지는 햇빛에 직격당한 흡혈귀의 피부처럼 재가 돼버려 바람에 날려 흩어지기 마련이고 진실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라만 봐도 밤잠을 설치고 심박수를 무한대로 끌어올리던 사람의 사소한 단점들이 100원짜리 망치게임의 두더지 대가리처럼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순간, 꿈같던 사랑은 구질구질한 현실로 돌변하고 대부분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그렇게 끝나버린다.


 


전혀 남남이던 사람을 순식간에 내 반쪽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얄팍한 감정의 반대편은 이렇게 냉정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을 조작한다. 유치한 짓거리지만 인간은 그렇게 한다. 내가 쪽팔렸던 부분, 내가 싫었던 부분을 싸그리 들어내 봉투 속에 꼭꼭 눌러담아 폐기 처분하고 좋은 기억, 아름다운 기억들만 붙박이 장속에 예쁘게 정리해 넣어 두고 가장 사랑스럽게 나온 사진을 커다랗게 찍어내 철퍼덕 붙여 자기를 속이고 남들을 속인다. 내 사랑은 아름다웠네, 내 사랑은 달콤하고 짜릿했네라고.


 


니체가 말한 망각의 축복은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폐기 처분하는 편리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들은 “정말 그랬던 것”으로 바뀌고 아예 그것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림으로써, 애틋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추억 : 사랑편]은 완성된다.


사랑은 어쩌면, 뿌연 생크림이 잔뜩 얹어진 커피처럼 망각으로 덮인 기억 속에서만 달콤한 것일지도.

조엘(“짐 캐리”)도 언젠가 자신만의 기억을 만들어냈을 거다.
기억을 제거하는 따위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녀가 남긴 필름들을 잘라내고 이어붙여 가슴떨리게 만들던 그녀의 모습과 귓가에 속삭이던 설레이는 단어들과 예쁜 기억들만으로 만든 추억편을 완성했을 거다.



너무 많은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미처 정리를 못했을 뿐. 그는 혼자 힘으로 꾸역꾸역 지근지근 정리하고 골라내고 지워내서 예쁜 이야기책을 완성했을 거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이야기책을 혼자 몇번이고 반복해 읽다보면 또 , 그는 예정된 실패는 까맣게 잊게 되었을 것이고(잊기를 원했으므로),


 


그렇게 스스로 골라내 꼭꼭 담아 버린 것들을 완전히 잊어먹었을 때, 사랑했던 시간보다 몇배의 아픔을 견뎌내던 시간들을 완전히 망각했을 때,


 


그는 클레멘타인을 생각나게 하는 또다른 누군가(기억이 전부 지워지지 않았다면 다시 클레멘타인이 되지는 않았을거다)에게 더듬거리며 손을 내밀었을 것이고 비슷한 지점의 그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당신 … 내가 다시 지겨워지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을 거에요. 아마도.”



그렇게 막연한 희망으로 또 가슴이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유치해도 인간은 그렇게 한다.


 


 


 


영진공 신어지


 


 


 


 


 


 


 


 


 


 


 


 


 


 


 


 


 


 


 


 


 


 


 


 


 


 


 


 


 


 


 


 

“고백”, 과연 만점을 받을 만한 영화인가


<킹스 스피치>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신작 <고백>도 일본 아카데미상의 주요 부문 –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 편집상 – 을 석권하면서 관객들의 기대치를 한껏 올려놓으며 국내 개봉이 이루어진 작품이다.

<킹스 스피치>가 미국 아카데미 주요 부문 석권이라는 화려한 후광을 입고 개봉한 것에 비해 실제 작품은 상당히 수수한 편이더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고백>은 일본 내에서의 수상 경력 뿐만 아니라 그간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뜨거운 관심이 조금도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관람이 되었다.

영화를 보자마자 월척을 낚아올린 강태공 마냥 만점의 영화를 보았노라며 트윗질을 해버렸건만, 그래놓고선 막상 감상문을 적으려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과연 만점 영화의 자격이 – 워낙에 기분 내키는 대로 후하게 쳐주는 별점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공개할 때에는 그 객관성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 충분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무난하게 추천까지 해드릴 수 있을 만한 작품들의 카테고리인 별 네 개의 영화인 것은 분명한데 <고백>이 과연 그 이상의 무언가를 더 갖춘 영화인 것인지, 최소한 나 스스로에게만이더라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분명히 해두어야 별 다섯 개 만점 그대로 표기를 해놓고도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으리란 생각에 약간의 뜸 들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특유의 과장과 과잉의 스타일은 국내 개봉된 전작들, <불량공주 모모코>(2004)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그리고 <파코와 마법 동화책>(2008) 중에서 아무 작품이나 한 편만 보더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특징인데 이것이 1인칭 독백체로 진행되는 독특한 형식의 베스트셀러 소설 <고백>과 만나 매우 독창적인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영화 <고백>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첫번째 이유다.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가려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고백>은 감독의 스타일은 스타일대로 잘 살아있으면서 베스트셀러의 영화화라는 과제는 그 나름 성공적으로 완수를 해낸, 매우 보기 좋은 사례를 남겨주었다는 얘기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오래 전에 만점 영화로 치켜주었던 또 한 편의 영화 –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는 사실 역시 <고백>에 만점을 주게 된 이유였던 걸로 기억한다. 두 작품 모두 십대들의 어두운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소재와 내용에서의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그 보다는 기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이 보다 더 잘 만들 방법이 없어 보일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점 역시 두 작품을 흔쾌히 비교해보게 만드는 것이다.

예고편을 보면 중학교 교사인 여주인공(마츠 다카코)이 담임을 맡고있는 학생들 앞에서 “내 아이를 죽인 범인이 이 학생들 중에 있다”는 설정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이 부분은 전체 작품의 그저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그 만큼 관객으로서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되었다. 한 마디로 기본적인 설정만을 알고나서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상상해볼 수 있는 한계를 계속 돌파해나가며 전개되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감독은 2002년작 <아들>에서 자기 아이를 죽인 또 다른 아이를 상대해야 하는 주인공 어른의 딜레마를 다룬 바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고백>은 결말 부분이 상당히 작위적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영화를 통해 던져진 수많은 화두들이 주인공 한 사람의 복수극의 틀 안에 갇혀버리게 된다는 한계점을 지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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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때문에 <고백>이 과연 만점 영화로서 충분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인지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것도 작품의 수준을 크게 좌우할 수 있는 마무리 부분에서 한계를 노출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만점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영화 평점이라는 것은 영화를 통해 얻은 각자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나는 <고백>에게 처음 감정 그대로 만점을 주기로 했다.


영진공 신어지


 

“써커 펀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표현력이 주는 쾌감


잭 스나이더 감독의 다섯번째 장편 연출작인 동시에 처음으로 다른 원작 없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 자신의 원안을 바탕으로 스티브 시부야와 함께 공동 각본을 완성해냈다. 그래서인지 지나치게 게임식 진행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거나 설득력이 완전 부족한 – 한 마디로 눈요기 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작품이라는 평을 많이 듣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기대치를 잔뜩 낮추었던 덕분인지 꽤 재미있게 보고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다. 가급적 대형 스크린과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이 잘 완비된 상영관에서 봐야만 최소한 <써커 펀치>의 현란한 액션 스펙타클을 만끽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물론 한 편의 영화로서 갖춰야 할 스토리텔링의 완성도는 그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어차피 대단한 걸작을 기대했던 것도 아닌 바에야 뭐 하나 참신한 구석이라도 있는 편이 지나치게 정형화된 스토리텔링을 반복하는 일 보다 차라리 낫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써커 펀치>는 내러티브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어설픈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대신 화려한 비주얼과 스펙타클에 있어서 만큼은 보기 드물게 자유분방함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이따금 TV에서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게임 CF를 보면 차라리 저런 비주얼로 만들어진 장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써커 펀치>는 마치 그런 상상력과 욕망을 실제로 구현해놓은 듯한 장면을 연출해낸다. 꿈 속이거나 게임 속 상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하면서도 거침 없는 액션 활극이 장르별로 다양하게 펼쳐지는 작품이 <써커 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관객의 일반적인 요구란 화려한 비주얼과 액션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런 장면들이 펼쳐지게 되는 충분한 이유와 전후 맥락 상의 사실성까지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써커 펀치>에서의 화려한 액션은 말하자면 베이비 돌(에밀리 브라우닝)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에 빠져드는 혼자만의 상상 속 세계, 또는 그에 관한 은유법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런 식의 설정은 다른 영화에서는 도통 본 적이 없었던 경우라서 무척 참신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 그렇다 치고” 하는 기분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혹시나 베이비 돌이 춤을 추는 동안 머리 속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루는 상상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점을 되새겨보길 바란다 – 주인공이 베이비 돌이라 불리며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상황 자체가 이미 주인공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영화 <써커 펀치>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신병원에 갇힌 소녀의 상상 속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설정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 영화의 주제이자 메시지 또는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된 이유에 대해 영화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끝나기 마지막 몇 분 동안에 등장 인물의 대사(나레이션)으로 성급하게 정리를 해버린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라는 측면에서 <써커 펀치>는 <매트릭스> 3부작의 그것과 적잖이 비슷한 맥락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게임식 스펙타클의 전시에 할애한 뒤에 막상 영화의 주제는 ‘말로 때우는’ 식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환영받기 어려운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만들고 나니 관객들이 영화의 본 뜻을 잘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 나레이션을 추가로 구성해 넣은 것이든 아니면 처음부터 주제 부분은 적당히 말로 떼울 생각이었든지 간에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써커 펀치>를 꽤 재미있게 봤던 탓에 작품의 수준을 놓고 맹비난을 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 만큼도 없다. 수준 높은 작품은 아니지만 적당히 볼만 했다, 라는 정도로만 언급하기에는 오히려 –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 혼자만 보기에는 몹시 아까운 훌륭한 구석도 많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베이비 돌을 중심으로 하는 5인조 걸파워 액션을 내세우고 있지만 일단 액션 씨퀀스가 시작되면 정말 다들 진지하게 액션에만 열중하는 모습이라서 등장 인물들이 처해있는 열악한 상황에 비해 막상 관객들 앞에 펼쳐지는 것은 오히려 순수한 액션 그 자체로 제한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각각의 전투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다치거나 죽게 될 일이 없다는 것 쯤은 쉽게 알아채고 – 그 만큼 긴장감은 덜 할 수 밖에 없겠지만 – 자세를 편하게 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액션의 향연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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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한나”, 소녀적 감성의 성장과 탐험



<오만과 편견>(2005), <어톤먼트>(2007), <솔로이스트>(2009)에 이은 조 라이트 감독의 네번째 장편 영화다. 시대극과 드라마로 알려진 감독이신데 갑자기 16살 나이의 소녀 살인병기가 등장하는 총기 액션물이라니,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의아하다는 생각을 갖고 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조 라이트 감독이라면 이런 류의 영화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풀어냈을런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면 <한나>는 바로 그런 궁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물론 그런 궁금증 해소만을 목적으로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작품의 기본 설정과 줄거리의 신선도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는 영화다. 신비로우면서도 무시무시한 능력의 소유자 한나는 과연 어떤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것인지를 붙들고 달려보는 것이 내러티브의 기본 골격인데 주인공 한나가 “DNA 조작으로 살인병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CIA의 실험으로 태어났고 모든 실험 결과가 폐기되는 참극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였다는 대목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런 한나의 출생 배경 자체가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은 너무 흔한 설정이라서가 아니라 조 라이트 감독의 연출이 이런 막후 배경이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드러나는 순간에 대해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세 명의 주인공, 소녀 한나(시얼샤 로넌)와 그녀의 혹독한 아버지 역할을 해온 에릭(에릭 바나), 그리고 두 사람과 오랜 악연을 피로 매듭짓고자 하는 CIA 간부 마리사(케이트 윈슬렛)의 얽히고 섥힌 관계는 영화 후반부의 어느 시점에서야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충분히 암시되고 있는 편이다.


조 라이트 감독이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스릴러의 창출이나 액션 씨퀀스의 스펙타클함이 아니라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어느 소녀의 감정을 탐험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핀란드의 설원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한나가 CIA에 의해 발견되는 순간 북아프리카의 사막 지대로 이동한 이후 스페인을 거쳐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밟아나가는 모습을 띄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나는 추격자들을 따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격렬한 육박전을 치르기도 하지만 감독의 관심은 그런 액션 활극의 전시 보다 백지장과도 같았던 소녀의 감정이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채색이 되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뤄보는 쪽에 있었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시얼샤 로넌이 소녀 살인병기로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설정의 액션 영화 <한나>는 조 라이트 감독에 의해 액션물로서는 다소 지루한 편이기는 하되 만일 속편이 제작된다면 – 그때는 좀 더 액션물에 정통한 다른 연출자가 맡아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겠지만 – 그 시리즈의 첫 시작으로서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작품이 되었다.

언젠가 <한나>의 속편이 만들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한 말씀 남기자면, 최근 액션 영화의 대세는 단연 ‘압도적인 주인공의 능력’이다. 제이슨 본 시리즈와는 다른 영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한나>에 묻어나고 있는 걸 보면 더욱 답답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 한나도 제이슨 본처럼 좀 더 화끈한 캐릭터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대부분 관객들이 보고 싶었던 한나의 모습은 바로 그런 부분이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좀 더 대담하고 강력한 모습의 20대 한나를 속편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이번 <한나>의 비기닝은 썩 괜찮았던 출발점으로 기억될 것이란 얘기다.


영진공 신어지


 


 

“파이터”, 영웅 아닌 평범한 인물들의 감동 실화


최근 헐리웃 영화의 한 가지 경향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실화”를 극영화로 재연하고 있는 작품들이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파이터>는 권투를 소재로 하는 평범한 스포츠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픽션이 아닌 실화이기 때문에 ‘최근의 경향’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영화로 작년 4월에 국내 개봉했던 <블라인드 사이드>(2009)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작품 모두가 실화이고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안에는 수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감동의 메시지를 발굴해내려는 노력이 담겨있는데, 물론 노력의 이유는 최근에 이런 류의 이야기가 그 만큼 잘 팔리기 때문이렷다. 그리고 아마도 비교적 저렴한 예산으로도 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평범한 인물들의 감동 실화’라는 건 전통적인 극장 상영용 영화의 영역이라기 보다 – 물론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화는 아니었다 – <오프라 윈프리 쇼>와 같은 TV 프로그램의 영역이란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침마당>이나 <인간시대> 같은 프로그램이고, 이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실제 인물들의 사연과 그 안의 감동 코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최근에 왜 이런 이야기들을 더욱 부지런히 발굴하고 또 영화화까지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 정말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검증과 함께 –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따라서 <파이터>라는 작품이 그 자체로 유난한 영화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다루기에 따라서는 아침 대담 프로에 실제 인물들이 나와서 진행자와 함께 50분 정도 채워주는 정도만으로도 제 역할을 충분할 수도 있을 법한데, 그 중에 <파이터> – 니키 에클런드와 미키 워드 형제와 그 가족들 – 의 이야기가 유독 각별하게 받아들여지고야 마는 이유란 결국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의 힘인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을 통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그외 여러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전부 쓸어모으며 만장일치의 지지를 이끌어낸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는 2000년작 <머시니스트>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만큼의, 기대할 수 있었던 것 이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 배우가 최근에 다시 만들어져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수퍼히어로물과 SF 블럭버스터에서도 주연 배우로 활약 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찬 베일과 달리 마크 월버그는 어느 작품에 나오건 똑같은 마크 월버그만 보여주다가 마는 편이지만 – 마크 월버그가 별로인 것이 아니라 크리스찬 베일이 워낙 연기의 지존이라 이런 식으로 비교가 되는 것일 뿐! – 이번 <파이터>에서는 직접 제작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나서면서 평소에 하던 그 이상의 몫을 해냈다고 생각된다.

나탈리 포트먼이 <블랙 스완>(2010)을 위해 1년 전부터 발레 훈련을 해왔다는 대목에서 가점을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파이터>를 위해 무려 4년 전부터 몸 만들기와 권투 훈련을 했다는 마크 월버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 그러면서도 자신의 출연료는 한푼도 챙기지 않았다는군요. 크리스찬 베일은 전체 제작비의 1% 수준인 25만불을 받았다고 합니다 – 도대체 뭐라고 칭찬을 해줘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마크 월버크도 이제 그만 아이돌 가수 출신 배우라는 딱지를 떼고 뭔가 다른 전기를 마련하고 싶어하는 듯 한데 아쉽게도 그런 전환점이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디키(크리스찬 베일)와 미키(마크 월버그)의 인터뷰 장면은 각본에 미리 짜여졌던 장면이 아니라 데이비드 O. 러셀 감독과 세 명이서 즉흥적으로 촬영한 것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크리스찬 베일이 살짝 울컥하려다 마는 연기를 보여준 부분이 참 좋았다.

어찌 보면 이 장면은 영화 전체적으로 감동을 강요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해서 관객들에게 무언가 감정적인 방향성을 잡아주기 위한 부가적인 연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과하지도 않았고, 이런 정도의 개입은 극영화에서는 오히려 바람직한 편이라 생각한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