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레이커스”, 매트릭스는 아무나 하나

에단 호크가 오랜만에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섰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의 앳된 소년으로 출연했을 때에는 존재감이 그리 큰 편은 아니었었죠. 하지만 지금은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모든 배우들 가운데 – 심지어 로빈 윌리엄스까지 포함해서 –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인상이 그리 강해보이지 않은 탓에 출연작들 대부분이 드라마 쪽이고, 그나마도 저예산 영화에 자주 출연하면서 이제는 ‘독립영화의 친구’쯤 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데이브레이커스>의 초반부는 몇 편 안되는 에단 호크의 액션물 또는 SF 출연작들 중에서 특히 <가타카>(1997)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미래 사회이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카프카의 느낌이 나는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0년이니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일에 불과하건만 사람들이 중절모를 쓰고 다니질 않나 참 묘한 느낌을 전달해줍니다. 이것을 굳이 어색하다고 하기 힘든 것은 <데이브레이커스>의 세상이 뱀파이어들 – 굳이 부류를 지정하자면 <트와일라잇>의 착한 뱀파이어가 되겠네요 – 의 것으로 바뀌었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세상이 온통 좀비들로 넘쳐나가된 상황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몇 편 있었지만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윌 스미스 주연의 < 나는 전설이다>(2007)는 변종 인류들로 창궐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아 해독제를 찾고자 하는 주인공의 외로운 사투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이 변종 인류들을 뱀파이어라기 보다는 역시 좀비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죠.

여기에 비하면 <데이브레이커스>의 뱀파이어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트와일라잇>에 등장한 착한 – 또는 착하려고 노력하는 – 뱀파이어에 가까운 존재들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영생을 얻었지만 인간의 피를 먹어줘야 하는 관계로 새로운 인류 역사가 시작된지 10년 만에 전세계적인 식량난(?)이 닥쳐오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시급히 대체재를 만들어만 하는 상황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빈부격차로 인해 인간의 피를 섭취하지 못한 뱀파이어들이 서서히 변이를 일으켜 끔찍한 괴물 뱀파이어 – 서브사이더 – 로 바뀌게 된다는 점입니다.

<데이브레이커스>의 테마는 뱀파이어에서 다시 인간으로의 회복입니다. 우연히 그 과정을 겪게된 라이오넬(윌렘 데포)을 만난 에드워드(에단 호크)는 자신도 다시 인간이 되고자 기꺼이 실험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완전히 망가져가는 뱀파이어 세상에서 인간으로의 복귀를 통한 구원의 희망을 전해주는 메시아의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중심 내러티브 보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마치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학살을 재연하는 듯한 괴물 뱀파이어들의 화형식 장면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탐욕 추구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한 씨퀀스라고 하겠지만 어찌보면 마이클 & 피터 스피어리그 형제 감독이 독일 출신으로서의 자의식을 투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좀비가 되었든 뱀파이어가 되었든, 너무 번성하면 수요 공급의 문제 때문에 다시 쇠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역설적이면서도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28일 후…>(2002)의 속편으로 만들어진 <28주 후…>(2007)가 바로 이런 설정에서 시작하는 작품이었죠. 그러고 보면 <데이브레이커스>는 기존의 여러 공포물과 SF 영화들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재구성한 듯한 느낌이 역력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 의외로 전체적인 줄거리에 있어서는 <매트릭스>와 비슷합니다.

물론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발상의 작품을 내놓는 것은 아주 해내기 어렵고 관객 입장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경험이기 때문에 <데이브레이커스>와 같은 시도가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얼마나 신선한 재해석과 설득력 있는 연출을 보여주느냐가 될 뿐이지요.

주제도 좋고 배우들 연기도 좋고, 전반적인 연출도 그리 흠잡을 데가 없는 ‘기술적인 완성도가 훌륭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데이브레이커스>가 그닥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역시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 그로 인한 공포나 신비로움과 애절함을 –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인류와 뱀파이어가 공생하는 상황을 그린 TV 시리즈 <트루 블러드>도 그래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좀비 세상은 뭐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스펜스가 있어 좋고 그 자체로 풍자극이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벰파이어 세상이란 건 일단 설정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데다가 그 비밀스러운 맛이 없어서 그야말로 김 빠진 콜라 같은 게 되는 거 아닐까요. <렛 미 인>(2008)과 < 트와일라잇>(2008)의 중요한 차이점 역시 바로 그 점이라 생각합니다.

영진공 신어지

슬픈 동화 “공기인형”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바라는 바가 있었다. 더 과감하게 현실을 그려주기를.
<아무도 모른다>에서처럼 섬뜩한 신음소리가 심장을 타고 흐르더라도 한발 먼저 개인화되고 비극이 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그런 면에서 공기인형은 애초부터 나의 바램을 빗겨간다. 주인공부터가 존재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인형 이니까. 하지만 공기인형(섹스 돌)에게 마음(고코로)가 생긴다는 영화의 시작은 충분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후에 일어날 비극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감독의 전작에 비추어 봐도 그렇다. 그는 헛되이 희망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공기인형은 막 갖기 시작한 마음을 남용해 사랑도 하려 든다. 배꼽에 공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으면 타지 않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설레어 한다. 머지않아 인형은 마음을 다칠 것이다.

영화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 세상을 하나 둘 알아가며 하늘, 물방울, 바다, 죽음, 나이 듦을 긍정하는 공기인형에게 파멸의 기운을 드리우니 말이다. 그건 마치 마음을 저버리라는 메시지 같기도 해서 말이다.

마음이 귀찮아서 널 택한건데 …
왜 마음을 가졌니 …
그냥 예전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니. 인형이었던 그때로 말이야.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징글징글한 것, 이 모든 게 지겨워서 마음을 주자 말자고 다짐해 본 적이 있다. 사랑마저도 그렇게 해보자 한 적이 있다. 상처받기 두려웠고 다치는 게 싫었다. 지금은 어떠냐하면 …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세상사는 데에 굳이 마음이 동원되지 않는 것같다.
외롭지 않냐고? … 그러게.. 공기인형은 마음을 동하게 하는 슬픈 동화다.

영진공 애플

“마더” vs “셔터 아일랜드”, 진실을 대하는 두 가지 방법

천안함 전사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 진실이 놀랍거나 거대하거나 처참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당연하게 여기고 의지하던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식스센스>의 주인공이 직면했던 진실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스스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현실을 왜곡해왔던,
자신의 모습이 그 진실 속에 담겨있었다.


걔네들은 지가 보고 싶은 것만 봐요

내가 그리 잘못 알았던 것이 누군가에게 속은 탓이라면,
나를 속인 그를 비난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그 거짓말을 받아들여왔다면,
그래서 내 삶을 지금까지 그 거짓말에 기초해서 쌓아올렸다면,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존재 자체를 뭉개야 한다.

결국 진실이냐 내 존재냐의 갈림길에 서는 것이다.

<셔터 아일랜드>와 <마더>,
전자는 2차 대전과 매카시즘을 배경삼은 미국 영화고,
후자는 피끓는 모정을 소재로 한 우리나라 영화다.
하지만 두 영화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면이 있다.

일단 두 영화의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진실을 찾는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그 진실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달한 진실은 탈출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끔찍한 절망과 죄책감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입구였을 뿐이다.


진실을 찾아내겠어!! 정의를 구현하겠어!!!


이게 진실이라니…


 

 



우리 애 그런 애 아니거등? 내가 진실을 찾아내 보여주게써!!!


아, 이게 진실이라니 … -_-

거기서 두 주인공은 진실이냐 아니면 내 존재냐의 갈림길에 마주친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다.

<셔터 아일랜드>의 테디는 ‘괴물로 살기보다는 결백하게 죽기’를 선택한다.
영원히 죄책감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인간으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지우기로 한다.
죄책감이 자신을 먹어치우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지우기로 한 것이다.


그래, 이게 차라리 낫지 …

하지만 <마더>의 엄마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자신과 자식을 위해서 진실을 지우기로 한다.
망각의 침 한 뜸과 묻지마 관광버스의 음률에 모든 것을 흘려보내기로 한다.

비록 자신의 내면은 죄책감으로 조금씩 썩어가겠지만,
겉보기의 삶은 평온할 것이며 모두가 만족할 것이라고 스스로 안위하며 …
이는 ‘결백하게 죽기보다는 괴물로 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


침맞고 묻지마 관광 가자!!!

<마더>의 결말을 보던 당시에는 그저 그녀가 안쓰러웠다.
과연 그녀의 삶이 그 소망대로 이루어질까.
그의 삶이 과연 평온할까. 아들은 그녀를 이제 어떻게 대할까?
그녀는 예전처럼 자신있게 아들을 변호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른 뒤, 그녀의 삶에 진실이라곤 뭐가 남아있을까?
괴물로 산다는 것은 이미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고,
그저 복에 겨운 한때의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봉준호는 알고 있었던 거다.
이 나라가 바로 그런 수많은 마더들의 나라라는 것을.
괴물도 한 둘 일 때야 이상하지만 허구헌날 괴물들만 출몰하는 곳에선,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테디, 너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치료받을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좀 살아봐야 했다.
그랬더라면 “괴물로 오래 사느니 순수하게 죽을래” 따위의 헛소리는 애저녁에 치워버리고 똘망똘망 괴물로 천수를 누리며 잘 살다가 죽었을 거다.


테디, 너 그 딴 마음가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일년도 못버틸거야 …


서해에서 또 수많은 젊음이 스러졌는데
온갖 ‘라면’ 을 팔고 주접을 떨어대며
진실을 눈물, 아니 콧물로 덮으려는 누군가의 면상에서
괴물로 살기의 한 경지에 이른 초고수 괴물의 악취를 느끼며

영진공 짱가

“예언자”, 생존에서 성장으로 나아가는 범죄 느와르

프랑스에서 온 <예언자>라는 제목의 이 영화. 뭔가 신비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어줄 것만 같았습니다. 와 너무 정신없는 영화면 어쩌지. 아니면 사회성이 매우 강한 영화 같기도 하고요. 허남웅 기자가 프랑스 감옥 영화의 계보를 잇는 걸작이라는 요지의 리뷰를 썼는데, 여기에서 저는 ‘감옥’과 ‘걸작’ 두 개의 단어만 참고 했습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저 역시 영화를 직접 보고 감상문을 다 쓰기 전에는 관련 글의 본문을 안읽습니다)

깐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 수상, 황금종려상 후보, 세자르에서는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주요 9개 부문을 휩쓸었고 바다 건너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도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으니 만듦새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증된 작품이라는 얘기죠. 그리하여 저는 이 영화를 ‘감옥에서 어떻게 예언자 활동을 한다는 걸까’ 라는 질문을 안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이 질문을 영화 시작 1시간이 조금 안된 시점에 버렸습니다.

감옥 영화인 것은 맞습니다만 제 생각엔 보다 범주를 넓혀서 범죄물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말리(타하 라힘)은 알제리계 고아 출신에 꼬맹이 시절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다가 19세의 나이에 경찰관 폭행죄로 6년형을 받고 드디어 ‘어른 범죄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감옥 생활을 시작합니다. 만기 출소까지 6년 간의 감옥 생활을 다룬 작품이긴 합니다만 가석방 제도 덕분에 영화의 줄거리는 바깥 세상과도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말리끄에게 감옥은 새로운 탄생과 성장의 베이스캠프와 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역시 영화의 제목은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가이드가 되기 보다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언자>라는 제목 때문에 초현실적인 전개를 상상하고 그게 아니라면 뭔가 사회성이 강한 드라마를 연상했습니다만, 실제 영화의 내용은 매우 사실적인 톤으로 다뤄진 범죄 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범죄 드라마도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 될 수 있겠지요. 제가 본 바로 <예언자>는 <스카 페이스>(1983), 나아가 <대부>(1972)와도 – 둘 다 알 파치노 주연 영화로군요 –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최근에 본 프랑스 영화들 중에서 헐리웃, 나아가 세계 대중영화의 흐름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독자적인 화법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작품은 매우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와 유럽 영화계가 모두들 쌍수를 들고 환호해준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아랍계와 코르시카계가 뒤섞인 프랑스 감옥에서 인종적인 문제가 다뤄지지 않을 수가 없긴 하지만 그런 정치, 사회적인 이슈는 <예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프랑스 내 이민자들에 의한 범죄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참 잘 만들어진 범죄 드라마 한 편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주인공 말리크가 ‘예언’을 하는 부분 역시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말리크의 예언은 그저 남들 보다 예민한 성격 탓에 죽은 이의 혼령을 자신의 수호 천사로 삼아 지내고 아주 가끔,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도록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지몽을 꾸는 정도입니다. 자신이 통제 가능한 예언의 능력이 있어서 초현실적인 상황 전개를 이끌어낸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때의 말리끄는 흑인 짝패에게 신발이나 뺏기는 조무래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원치 않은 감옥 내 살인을 강요받게 되고 그 대가로 코르시카계 마피아의 꼬붕이 됩니다. 그렇게 감옥 내에서의 생존과 적응 문제를 해결한 말리끄는 출소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곱상한 얼굴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보였던 말리끄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의 범죄적 본능 – 다른 말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몸 담게 된 범죄 세계에서의 생존 본능을 발휘합니다. 그 덕분에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추스리기 힘겨웠던 험악한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놓고 당당히 감옥 문을 걸어나오기까지 합니다.

<예언자>의 마지막 장면은 갑자기 밝은 톤의 영어 노래가 나오는 바람에 영화 전반의 톤과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얼마 전에 본 한국영화 <의형제>의 엔딩도 약간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해피엔딩이었는데 <예언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역시 이런 식으로 상영관 밖으로 나가는 관객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드리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서 그런 걸까요. <예언자>의 엔딩은 그놈의 배경음악만 걷어낼 수 있다면 정말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습니다.

말리끄를 연기한 타하 라힘은 흡사 젊은 시절의 로버트 드 니로의 얼굴에 톰 크루즈의 미소를 얹어놓은 듯한 외모입니다. 분장으로 추레함을 입혀놓긴 했지만 그래도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갈수록 젊은 대장군의 면모를 보이는 영화 속 캐릭터는 마치 20대 초반의 나이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팀의 주장으로 뛰고 있는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 둘은 인상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요.

이 타하 라힘의 말리끄가 까까머리 시절부터 시작해서 거물이 되어 감옥을 나오기까지를 정신없이 지켜보게 만드는 영화가 <예언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의 훌륭한 캐스팅과 연기력 덕분에 타하 라힘은 여러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트로피들을 들어올렸습니다. 앞으로 보게 될 젊은 재능의 활약이 더욱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영화 시작 때와는 달리 <예언자>의 엔딩 크리딧이 올라갈 때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감독의 이름을 확인하게 됩니다. 자끄 오디아르 감독은 1974년 <Bons Baisers… à Lundi>(Kisses Till Monday, 1974)의 각색 작업으로 영화계에 처음 데뷔한 이후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가과 편집 일을 하다가 1994년 <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Regarde Les Hommes Tomber)로 처음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이후 마띠유 카소비츠, 벵상 카셀, 로맹 뒤리스 주연의 영화들을 만들다가 젊은 신인 배우 타하 라힘을 캐스팅한 이번 <예언자>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는 전체적인 흐름으로는 전형적인 범죄물이요 성장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따라가고 있는 영화이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자세한 설명을 아끼는 편이라 관객에 따라 살짝 불친절하게 느낄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154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 타임 역시 약간의 장벽처럼 느껴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리 긴 시간이 흐르는지를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영화의 몰입도는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초중반에 살짝 쳐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 외에는 시종일관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영화 끝난 후 시간을 확인하고는 예상했던 것 보다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나버려서 깜짝 놀랬던 건 <예언자>가 저에게 남겨준 기분 좋은 추억거리가 될 듯 싶네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긴 합니다만 혹시 만들어진다면 <예언자>의 속편도 기대해볼만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25살이 된 말리끄의 출소 이후의 이야기가 될테고 본격적인 하드보일드 범죄 느와르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스카페이스>와는 다른 결말을 선택했으니 <대부>와 같은 걸작 대서사의 반열에 도전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어보이긴 합니다.

Co-writer and Director Jacques Audiard (France, 1952 ~)

영진공 신어지

“타이탄”, 싼티 작렬!!!

영화 <타이탄>은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A급 인척 하는 B급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제작비는 1억2천5백만불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보다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나 싼티가 작렬할 수 있나 …

물론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3편을 통으로 찍어서 편당 제작비가 9 천4 백만불로 균일하다.
게다가 벌써 9 년 전 영화이니 화폐가치를 반영하면 비슷하거나 더 적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세트 티 팍팍 나는 배경들, 딱 소품으로 만든 티 나는 소품들,
스틱스 강의 뱃사공은 무슨 놀이공원 유령의 집에 나올 것 같고,
인간 이외의 크리쳐들은 가면 뒤집어쓰고 나온 분위기 팍팍.
CG 크리쳐들, 특히 메두사는 CG 티 팍팍 …

이 영화를 보면 피터 잭슨, 리들리 스콧, 길레르모 델 토로 같은 감독이
왜 A급 감독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아니, 그 감독들의 스탭 수준 차이일지도…

똑같이 돈들여 CG 쓰는데 그 결과물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거다.

요건 오리지널의 한 장면 ...

그나마 이야기는 꽤나 속도감 있는데,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얄팍하고 줏대없다.
일단 제우스부터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는 놈이다.

물고기 씨를 말려서 인간들의 원망을 사더니, 인간을 징벌하라는 하데스의 말에 홀랑 넘어가질 않나, 그러면서도 페르세우스는 또 왜 돕나?
얘 하는 짓을 보면 지능이 낮거나 정신분열이거나, 아니면 다중인격이거나 셋 중 하나다.

나머지 애들도 일관성 없기로는 다 비슷하다.
드라코(카지노 로얄의 르쉬프)가 신이나 데미갓을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들쭉날쭉,
페르세우스가 데미갓이라고 죽일려고 들때는 언제고, 갑자기 스승님 행세를 하시네 …

들쭉날쭉으로는 페르세우스도 빠지지 않는다.
제우스 싫다며 칼을 안써서 결국 동료들 다 죽게 만들더니 동료들이 진짜로 다 죽어버리니까 제우스가 준 칼을 냉큼 칼집에 넣는다. 그래도 그 동작은 꽤나 멋진데, 결정적으로 그 이후에는 그 칼을 안써 …-_-;;;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중에 그나마 꾸준한 애는 하데스 뿐이다.
언행일치에 동기와 행동에 일관성이 있다.
단지 어둠속에 있어서 좀 삐뚤어졌을 뿐이지 가장 정상적인 애다.

그 와중에 지 어미가 목숨걸고 자랑질 하던 안드로메다 공주는 턱이 권투선수 급이라 옆에 서 있는 시녀가 더 예쁘니, 영화를 보는 내 마음은 말 그대로 안드로메다로 …

결정적으로 이 영화 제목은 붕어가 없는 붕어빵과 비슷하다.
이미 타이탄족은 멸망한 다음의 이야기라서 타이탄 족은 안나온다.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앞뒤 안맞고 구멍은 숭숭 뚫린데다,
싼티 작렬!!!!!!!!!!!!!!!!!!

웃으며 보기에는 적절하나 그 이상은 무리다.
 

* ps1: 스토리의 엉성함은 이 영화가 리메이크 라는 점을 고려해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근데 레이 해리하우젠 시절에야 거대한 괴물들이 움직이는 것만 보여줘도 관객들이 감동했다지만 지금은 다들 그게 CG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만들다니 …


* ps2: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원래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제작사의 입김으로 이야기가 완전히 재구성되었다고 하더라. 근데 원래 이야기의 상태도 그닥 나았을 것 같지는 않다. 결정적으로 그 싼티작렬 화면은 그딴 변명으로 어쩔 수 있는게 아니잖아!!!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