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오히려 현실은 이 영화보다 더 무섭지 않을까?



서울의 모초등학교에 다니는 3학년 여학생C는 공부를 잘하는 얌전한 소녀다. 그녀는 초딩때부터 피해갈 수 없는, ‘한국학교’라는 공부지옥에서도 최상위권 학생이다. 다재다능을 요구하는 한국의 우수학생답게 다방면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고 그중에 초딩들의 필수항목, 독서골든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학기에 한번 있는 전교 독서골든벨 결전의 날, 벼르고 벼르던 C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섰고, 초반부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실력을 모르는 다른 반 선생님이 그 교실의 감독관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시험감독의 공정성을 위해, 각 반의 감독은 다른 반 선생님들이 했던 것이다.

드디어 각반의 대표를 뽑는 마지막 문제까지 몇 문제 안 남았던 순간, C가 순간의 착각으로 썼던 답을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한 순간 … 분명 자세나 행동이 어색했다. 그런 경우가 없다보니 더더욱 본인도 당황해서, 눈치도 보고, 지우고 다시 쓰는 행동도 이상했다.

cfile24.uf.1322AA4F4E1F8F26040057.bmp

그 순간 그녀의 진가를 모르는 타 반 선생님은 커닝을 의심했다. 선생님은 그녀를 지적하고 탈락을 선고했다. 이제 겨우 초딩 3학년의 어리고 여린 소녀는 울먹이면서도 순순히 자리에 일어나서 탈락자 자리로 옮겼다. 그 아이의 실력을 아는 아이들은 놀랐고 무언가 조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상황은 결론났고, 모든 것은 그대로 진행됐다.

만약 담임이라면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커닝하면 했지 그녀가 다른 아이를 커닝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을거다.하지만 늘 사건은 그렇게 이어가는 거 아니겠는가.

처음 다소 울먹이던 아이는 그칠줄 모르는 눈물에 어지러웠고, 돌아온 담임은 깜짝 놀랐다. 탈락과 울먹임 모두에. 그러나 누구에게 항변할 상황이 아니였다. 나름 공정했고, 그 학교에서 늘상 있는 수많은 시험중 하나였을 뿐이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이였다. 아이는 하루종일 울먹였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놀랐고, 사정이야길 듣고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아이가 말했다.
’그 선생님 죽이고 싶어.’ ….
엄마는 C가 너무도 가여웠다 ….

그 뒤에 조금 시끄러웠던 이야기는 그만두겠다.

난 그냥 그 아이의 무서운 생각과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엄마에게 집중했다. 그 뒤 사건은 그냥 사건이다.

같은 또래의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전율이었다. 쇼크로 잠시 멍할 정도였다. 왜냐? 현실이니까. 무서운 이야기인가? 10살짜리의 ‘殺意’에 대해 엄마는 별다른 가르침을 주지못하고, 그저 가엽고 불쌍해서 같이 분노했다. 세상과 엄마는 그 열 살 총명한 아이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 엄마역시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걸 누가 욕하랴. 요즘같은 세상에서 어느것이 진짜 가르침인지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세상은 그렇게 모두를 경쟁으로 몰아가고있고, 남을 짓밟아 이겨냄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닥달하고, 분노를 참지 말라고 타이르고있다. 변해버린 세상에서, 그녀는 욕할 수 없는 엄마고, 또 그런식으로 살아남도록 훈련받은 아이다. 우리의 왕따와 일본의 이지메는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결과일 뿐이다.


영화 “고백”을 보았다. 혹여 이 영화가 오버스럽다고 느낀 분이 계시다면, 난 역시’다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오해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넓고 크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현실을 세련되게 그리고 있다.

자신의 사랑스런 어린 딸을 살해한 두 명의 제자에게 가하는 복수는 좀 ‘오버’지만, 이해못 할 바가 아니다. 나역시 그랬을것이다. 아니 좀 더 잔인한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오버가 아니다. (일본 ‘실사영화’의 오버스러움은 아마도 우리와 다름이지, 틀렸음이 아닐것이다. 생각하려한다.)

범인B군의 어머니는 죽은 선생님의 딸이 아니라 자기 자식B가 가엽다. 친절하고 착한 아이가 이렇게 험한 일을 겪었다는 게(?저질렀다는게) 너무도 가슴아프다. 아마도 범죄는 맨 처음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A군의 엄마가 A를 버린 것 역시 마찬가지다. A와 B가 선생님의 딸이 아닌 다른 이를 살해했다면, 혹시 남편이나 심지어 선생님의 부모를 살해했어도, 선생님은 이런 복수를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엄마가 가해자가 되고, 모든 아이가 희생자다. 가슴아픈 현실이 됐다.

“고백”은 여러 사람의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그 여러 사람이 바라보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각각의 입장에 따른 차이가 없다. 흔히들 취하는 방식의 ‘시각 차’내지 ‘입장 차’가 없다. 얼음같이 차가운 이야기가, 후반부의 (한국인이 보기에) 다소 오버스러움을 제외한다면 그대로 얼음같이 흘러간다.

스타일리쉬한 비주얼은 볼만하다. 소재는 나름 자극적이지만 적나라하게 풀어가진 않는다. 작가의 감각도 인정할만하고 절제력도 적절하다 하겠다.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들 관계와 그 단절을 이렇게 잔인하게 그렸다. 가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부담스럽게 묘사하는 그 잔인한 상상력(어쩌면 현실감)에 경탄한다.

일본여행 중, 다가서는 여러 사람의 친절함에 감동감탄하면서 여러 곳을 다녔다. 이렇게 깨끗하고 살기좋은 곳이 있을까? … 그리고 우연히 들어가게 된 전철 화장실에서, 벽에 붙어있던 실종 여학생의 전단지를 본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어쩌면 그건 그 순간 이전까지 환상이었을거다. 그건 뉴스로, TV로, 영화로만 보던 일본, 바로 상상속의 일본이다. 그러나 그게 진실이다. 한국의 상황이 그 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거짓말은 그만하자. 제발.

“고백”은 영화가 보편적으로 가졌으면 … 하는 덕목을 대단히 훌륭히 갖추고 있다. 그래서 모두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다만 그 영화가 주는 교훈 역시 재미 못지않게 대단하지만 그 교훈을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 꼬집어 얘기하기도 쉽지 않다. 그게 아쉽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가족의 문제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고, 더불어 사회가 가지는 책임의 문제다. 소재는 낯설지 않지만 이야기는 독특하고, 이야기는 독특하지만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되서 무섭다.

ps. 우린 오래전부터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영화들을 봐왔다. 참 오랬동안 많이 그랬다. 이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영화에 감정적으로 더 공감한다.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나오고 있고, 그렇게 또 세상은 변해있나 보다.



영진공 버디



슬픈 동화 “공기인형”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바라는 바가 있었다. 더 과감하게 현실을 그려주기를.
<아무도 모른다>에서처럼 섬뜩한 신음소리가 심장을 타고 흐르더라도 한발 먼저 개인화되고 비극이 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그런 면에서 공기인형은 애초부터 나의 바램을 빗겨간다. 주인공부터가 존재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인형 이니까. 하지만 공기인형(섹스 돌)에게 마음(고코로)가 생긴다는 영화의 시작은 충분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후에 일어날 비극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감독의 전작에 비추어 봐도 그렇다. 그는 헛되이 희망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공기인형은 막 갖기 시작한 마음을 남용해 사랑도 하려 든다. 배꼽에 공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으면 타지 않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설레어 한다. 머지않아 인형은 마음을 다칠 것이다.

영화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 세상을 하나 둘 알아가며 하늘, 물방울, 바다, 죽음, 나이 듦을 긍정하는 공기인형에게 파멸의 기운을 드리우니 말이다. 그건 마치 마음을 저버리라는 메시지 같기도 해서 말이다.

마음이 귀찮아서 널 택한건데 …
왜 마음을 가졌니 …
그냥 예전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니. 인형이었던 그때로 말이야.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징글징글한 것, 이 모든 게 지겨워서 마음을 주자 말자고 다짐해 본 적이 있다. 사랑마저도 그렇게 해보자 한 적이 있다. 상처받기 두려웠고 다치는 게 싫었다. 지금은 어떠냐하면 …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세상사는 데에 굳이 마음이 동원되지 않는 것같다.
외롭지 않냐고? … 그러게.. 공기인형은 마음을 동하게 하는 슬픈 동화다.

영진공 애플

“용의자 X의 헌신”, 대결 보다는 감동 그리고 고민들

‘두 남자의 뜨거운 대결’이라는 헤드카피와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낯선 제목만으로는 극장에 가볼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영화가 꽤 괜찮다는 평도 접했지만 여태 미루기만 하다가 드디어 감상을 했네요. <용의자 X의 헌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신 분들은 조금 다른 평을 하시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원작이나 영화 보다 앞선 TV 시리즈 <갈릴레오> 등에 관한 사전 지식 없이 영화만 본 입장에서 <용의자 X의 헌신>은 정말 오랜만에 접하는 만점짜리 작품입니다.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1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TV 시리즈도 바로 구해서 보고 있는 중입니다만 역시 영화의 감동 만큼은 아니로군요.

원작과 TV 시리즈에는 단편 마다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성격의 말단 여형사 우츠미 카오루(시바사키 코우)가 불가사의한 사건을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마노부 교수(후쿠야마 마사하루)에게 의뢰하면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고 범인을 잡아내는 식입니다.

마치 <양들의 침묵>(1991)에서 클라리스 스털링 형사와 한니발 렉터 박사의 관계와 유사한 두 사람 앞에 범인들이 하나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식이지요. 원작이나 TV 시리즈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와 동일한 패턴 내에서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을 감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판은 TV 시리즈와 달리 용의자 X에 해당하는 천재 수학자(직업은 고등학교 수학 교사)이며 유카와 교수의 대학 시절 친구인 이시가미 테츠야(츠츠미 신이치)의 입장 쪽으로 관점을 이동시켜 전개해나가는 작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기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수 문제”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작품 자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범죄 수사극으로 시작해서 두 남자의 두뇌 싸움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결국은 지독한 순애보인 동시에 삶과 진실에 관한 감동적인 드라마로 끝나고 있으니까요.

용의자 X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처음부터 밝히고 있음에도 범행의 자세한 경위와 용의자 X 이시가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감춰놓기 때문에 미스테리 스릴러로서의 재미도 결코 포기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용의자 X의 헌신>이 선사하는 최고의 미덕은 진득한 인간적인 감정을 담고 있으면서도 결코 감정을 구걸하거나 특정한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전달하지 않는 성숙함에 있습니다. 이시가미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가 하나오카 모녀(마츠유키 야스코 & 카나자와 미호)에게서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심지어 그들의 미래에 관해서도 관객 각자가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대중 영화의 차원을 넘어선 품격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츠츠미 신이치의 열연은 <용의자 X의 헌신>가 진득한 감정의 영화가 될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입니다. 용의자 X 이시가미가 어떤 인물로 비춰지느냐에 따라 <용의자 X의 헌신>은 그 내용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온 천재 수학자의 자폐적인 성격을 표현하가다 때로는 싸이코패스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 츠츠미 신이치의 섬세한 표정 연기는 정말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쏟아내는 이시가미의 오열은 <용의자 X의 헌신>에서 가장 격렬한 액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TV 시리즈에 비해 우츠미 카오루 형사의 비중이 매우 작은 편이지만 유카와 교수는 <갈릴레오>의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충분히 균형잡혀 있습니다. 물론 이처럼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는 다름아닌 TV 시리즈와는 다른 영화판만의 고유한 호흡과 균형추를 잘 잡아낸 니시타니 히로시 감독(TV 시리즈도 연출)의 역량 덕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직접 각본까지 쓴 <아말피 여인의 보수>(2009)는 어떤 작품일런지 궁금하네요.


영진공 신어지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죠.

 

많은 사람들에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은 여전히 생소하다. 그래서 종종 낮선 사람들과의 소개 자리에서 ‘아..그 직업은 뭐하는 거죠?’ 라는 질문을 받아서 대화를 이어가는 좋은 수단이 되곤 한다. 프리랜서라는 것과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그럴듯한 직업명 때문에 가끔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어느 직업이나 그렇듯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문화 쪽으로 돈 벌어먹기가 참으로 힘들고 척박한 짓이기에 뭔가 놀면서 돈 벌겠다는 생각으로 이쪽 일을 준비한다면 돈은 커녕 손가락의 깊은 맛만 느끼기 쉽상이다.



귀염둥이 이케와키 치즈루가 나온다!!

도쿄에 사는 4명의 처자들의 홀로서기 고통과 아픔을 그린 일본 영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는 일본판 ‘고양이를 부탁해’로 소개되며 국내에서도 젊은 여성들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낸 좋은 작품이다. 재밌는건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오는 ‘토오코’ 역에 본 영화의 원작 만화의 작가인 나나난 키리코가 직접 나와 연기를 펼쳤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종영했던 모 드라마에서의 헐랭이 일러스트레이터완 달리 당 영화 속 일러스트레이터의 모습은 꽤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작곡가나 소설가 등 창작직업이 그러하듯 일러스트 작업도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데 마감일 마저 다가오면 정신줄을 놓기 일쑤다.

일을 끝냈는데 그 다음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공황상태에 빠진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회사원인 치히로와 프리랜서인 토오코의 관계였다. 쳇바퀴 도는 일상과 비전없는 회사생활에 시달리며 그저 남자 한명 잘 꼬셔서 시집가려는 치히로와 프리랜서이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토오코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치히로는 그런 토오코를 부러워한다.

“토오코 넌 그래도 좋은 편이야.
돈도 많이 벌지, 이름도 꽤 알려졌지 …
네 의견도 눈치 안보고 말할 수 있고

너는 모를거야. 나 같은 사람이 고생하고 불안하게 사는걸 …

네가 정말 부러워.”



아마 프리랜서를 하는 이들이라면 위와 같은 치히로의 말을 쉽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란게 어딨겠는가. (아. 국개의원 빼고.) 불안정한 수입과 모든 문제를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프리랜서들이 행복하고 여유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회사생활 힘든데 프리랜서나 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난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프리랜서로 하려는 일이 정말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시작하세요. 하지만 단지 회사가 싫고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아서 시작하려는 거라면  하지마세요.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닐 때는 회사만 벗어나면 천국이었지만 하기 싫은 일을 프리랜서로 한다면 일상이 지옥이 될 테니까요.’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