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살인”이 조선으로 간 까닭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실은 추리를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상한 추리극이다. 시작은
그럴싸하다. 시커먼 밤 인적 없는 숲속에서 시신 한 구가 누군가의 손에 운반된다. 시체는 누구일까? 시체를 운반하는 자가
범인일까? 궁금증은 곧 풀린다. 시체는 고관대작의 아들로 밝혀지고 의학도 장광수(류덕환)가 해부실습을 위해 주워왔던 것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장광수는 누명을 벗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니 그가 바로 홍진호(황정민)! 홍진호는 발명가 순덕(엄지원)이 고안한
도구들로 진범 찾기에 나선다. 

박대민 감독의 <그림자 살인>은 여러 모에서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다.
충무로 보증수표 황정민에, <놈놈놈>의 조화성 미술감독이 참여한 볼거리 가득한 경성, 그리고 화려한 액션까지.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추리는 없다. 영화의 모든 패를 던져버리는 초반에 다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홍진호의 등장은
<차이나타운>(1974)의 기티스(잭 니콜슨)와 캐릭터 맥락이 일치한다. 남편이 집나간 사이 불륜을 벌이는 부인의
뒤꽁무니를 쫓아 벌거벗은 사진을 증거랍시고 찍어대는 한심한 사립탐정, 하지만 소싯적 지방검사를 지낸 적 있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정의감 따위 엿 바꿔 먹고 돈(혹은 여자)에 혹해 사건을 맡게 되는 점 등 두 인물은 판박이인 것이다. 고로, 이와
같은 상관관계를 통해 <그림자 살인>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던 사건이
핵심에 다가설수록 더 큰 음모와 연루되어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마주서게 되는 것. (<차이나타운>이
바로 그렇다!)

추리가 주가 되는 작품에서 예측 가능하다는 건 치명적이다. 게임오버다. <그림자
살인>처럼 홍진호가 기티스의 영향 하에 있고, 홍진호와 장광수의 관계가 홈즈․왓슨 콤비를 연상시켜도, 순덕의 존재가
<CSI 과학수사대>의 벤치마킹일지라도 설정은 설정일 뿐 오해하지 말지이니, 이에 관계없이 예측 불가한 전개를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추리극의 재미요, 백미다. 그래서 추리를 다루는 작가는 종종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벌인다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독자의 접근을 차단해 흥미를 배가시킨다.

물론 <그림자 살인>에도 관객의 접근을 차단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도무지 추리에 집중할 생각을 하지 않고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는 것이 문제일 뿐. 안타깝게도
<그림자 살인>의 작가들은 추리극을 쓸 능력이 없어 보인다. 가령, 범인의 정체를 초반에 노출하는데, 그것이 관객에게
혼란을 줄 목적이라지만 제2, 제3의 용의자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복선이 깔리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호기심을 자아내는
미스터리? 그런 거 없다.

대신 영화는 액션과 경성 풍경에 승부수를 띄운다.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는 초반 액션장면에 대해 길고 지루하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걸 보면 <그림자 살인>의 노림수는 분명하다. 추리에
대한 부족한 능력치를 강력한 볼거리로 메워보겠다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관심이 갔던 부분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라는
점이다.

<그림자 살인>뿐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추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를 보면 유독 조선시대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김대승의 <혈의 누>(2005)가 그랬고, 김미정의 <궁녀>(2007)가
그랬으며, 이 영화가 그렇다. 나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리물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의
DNA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이 중시되고 초자연적인 사고가 익숙한 문화 속에서는 과학과 증거가 뒷받침되는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추리물에 태생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는 법. 하여 한국인이 만드는 추리물은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질 뿐 아니라
이야기 얼개도 굉장히 약한 편인데 아마 그런 난점을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통해 가리려는 게 아닐까 추측해보는 것이다. 

가령, <그림자 살인>의 배경은 조선 중에서도 황제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일제 강점기라 부르는
1900년대 초반 경성이다. 전쟁과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신문물이 유입됐던 시대, 한복과 하이힐이,
양복과 상투가 자연스럽게 한 몸에 공존하며 문화충돌이 기승을 부리는 모순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요는 근대와 반(反)근대가
난립했던 시대의 이중성만큼 앙상한 추리 서사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기에 좋은 조건이 없다. 추리극의 면모를 유지하되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성보다 정에 호소함으로써, 과학보다 초자연주의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합리주의와는 가장 동떨어진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궁녀>이다.

<궁녀>는 <그림자 살인>의
순덕 이전 이미 내의녀 천령(박진희)을 등장시켜 과학수사를 보여준 전례가 있다. 물론 <그림자 살인>과 달리
<궁녀>는 배경이 정조시대지만 (극중 정확한 시대가 언급되지 않지만 정황상 유추가 어렵지 않다) 정조가 신문물을
들이는데 관대했고 개혁책을 앞세워 고문(古文)을 옹호하는 보수 세력과 대립을 이뤘다는 점에서 경성이 갖는 시대의 이중성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여 <궁녀> 역시 궁 내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두고 초반엔 천령의 과학수사를 앞세워
추리극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귀신의 존재를 암시하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극을 해결한다.

<
그림자 살인>은 <궁녀>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더 영리해 보이지도 않는다. <궁녀>처럼
시대의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면죄부 삼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논리적인 사건 해결을 통한 지적 유희의 전달보다 일제를 향한 민족적 복수심의 쾌감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중성은 결국 ‘타락한’ 일본인에 맞서는 ‘정의로운’ 한국인의 대립으로 구체화된다. 이성보다 복수심에 기대 합리주의를 무효화하는
민족주의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 살인>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라든지 소품들은
사건의 단서 혹은 복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철저히 무능력한 추리력을 감추려는 볼거리 혹은 일본을 제압하는 의미로써 작용한다.
사건 해결에 전혀 기능하지 못하는 은청기나 만시경 같은 신기한 도구들은 물론이요, ‘총’을 든 홍진호가 ‘칼’을 든 일본인을
이기는 이미지는 관객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얼마나 좋은가.

코언 형제는 자신들이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다루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과거는 이국적인 느낌을 줘요. 과거를 스토리의 배경으로 삼으면 더 심도 있게 허구의 세계를 만들
수 있죠. 그렇다고 회고담 같은 건 아닌데, 우리 영화는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과거를 다루기 때문이죠. 상상력에
의존한다고 봐야죠.” 조선으로 간 추리극 <그림자 살인>은 정확히 반대다. <그림자 살인>은 추리력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한 추리영화다.

영진공 나뭉

홍해의 기적?

보충대에서는 이런 말이 돌았다.
환상의 17사, 꿈의 30사, 질 수 없다 25사.

중학교 2학년 때 마음에 들던 여자애를 따라 교회에 나간 날이 부활절이었고 그때 부활절 달걀을 두 개 반 먹은 덕분인지 난, 25사를 발령받았다.  그리고 중대선임을 설레발로 꿰찰 수 있었다. 중대선임은 6박7일의 포상휴가가 주어지는 자리였다.

두 개의 중대가 한 연병장을 공유했다.  우리는 2주 먼저 들어온 중대와 연병장을 같이 썼다.  연병장 주위는 목책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탈영하기 쉬워보였다.

문제는 탈영을 하면 어디로 갈 지 모른다는 점이었으며, 우리는 아직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누구요?”라고 암구어를 외치는 신병들이었다.

일요일이면 공을 찼다.
선임중대가 아침식사 후 5개의 공으로 전투축구를 시작하면 하릴없는 우리들은 연병장 위 언덕에서 구경을 했다.  2개 소대씩 나눠 치르는 축구는 말이 축구지 갇혀 사는 성난 수컷들의 ㅈ랄과 다르지 않았다.

전투화 밑에는 공을 겨누지 않고 정강이는 겨누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고 그 날선 폭력 뒤에는 기간병들의 코 묻은 내기돈이 걸려 있었다.

신병교육 3 주차 되던 어느 일요일.

선임중대는 어김없이 전투축구를 했다.
공 하나가 골대를 넘어 목책 밖으로 날아갔다. 두 번의 바운드를 튀며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골키퍼를 보던 세 명 중 어떤 정의로운 신병 하나가 외쳤다.

“내가 다녀올게!!!”

정의로운 신병은 한걸음에 달려 살포시 목책을 손으로 짚더니 김연아 더블악셀처럼 날아올랐다.  곧이어 목책 밖으로 뛰던 정의로운 신병은 “억”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살려줘!!!”

목책 밖에는 민간인이 똥구덩이를 파 거름을 삭힐 요량으로 만들어 놓은 거대한 똥지뢰가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겉은 바삭하게 말랐고 낙옆이 떨어져 은폐, 엄폐를 시켜놨으므로 그 정의로운 신병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

선임중대와 우리중대를 포함한 499명은 감히 목책을 넘지 못하고 목책에 기대 그의 아쿠아댄스를 구경만 했다.

“살려줘~~!!! 살려줘!!”
몇 번이나 똥물을 들이키며 그는 절규했다.

신이 정의로운 신병을 구해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가 기어나오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지만 결코 그에게 손을 내미는 천사는 없었다.  그건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의로운 신병이 외쳤다.

“동료가 똥구덩이에 빠졌는데 다들 그냥 봐?”
“이게 전우야?”
“이게 전우애야!!!!”

그는 마치 바람개비처럼 온 몸을 휘둘러댔다.

6 개월에서 1 년은 삭았음직한 덩어리들이 맑은 하늘을 갈랐다.  동시에 암록색에서 암갈색의 분비물들이 춤을 췄다.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새파랗게 질린 하늘에 똥이 나빌댔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정의로운 신병은 자신의 외로움에 동참할 정의로운 동료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다.

난 그때 홍해를 가른 모세의 기적을 봤다.

그가 뛰는 방향마다 500명의 군중은 열과 오를 맞춰 20m씩 질서 정연하게 쫙쫙 갈라졌다.
너무나도 빠르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분열을 어떤 국군의 날 기념식에도 본 적이 없다.

“이게 전우냐, 이 *발놈들아!!”

외침은 외로웠고,
결국 중대장이 짬통 거를 때 쓰는 잠자리채 두 배만한 채를 들고 정의로운 신병의 머리를 낚아채 소화전 앞에 데리고 갈 때까지 그 기적은 멈추지 않았다.

소화전의 폭포같은 물세례는 차라리 경건해 보였다.  정의로운 신병의 눈에는 소화전 물인지 굵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흘렀다.

결국 똥독이 오른 정의로운 신병은 의무대로 갔다.

그 뒤, 오전 전투축구는 금지되었고 아무도 탈영을 생각하지 않았다. 정의로운 신병의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는 분당 2 톤씩 쏟아지는 소화전으로도 해결 안될 것이었다.

끗.

영진공 그럴껄

<프렌즈> 친구들의 피임 수다: 조이의 걱정


<프렌즈> 친구들의 피임 수다:
“조이의 걱정”






그 인간, 나랑 한 번 자더니 전화를 안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그랬어요!”
그동안 만나본 여자 셀 수 없음. 한번 자고 다시는 전화하지 않는 여자도 부지기수.
그런데도 미워하긴 어려운, 시트콤 <프렌즈>의 바람둥이 조이를 아시나용?




친구들이 피임에 대해 수다떠는 것을 듣고 있던 조이가 깜짝 놀랐다는데,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요?


(아래 내용은 <프렌즈> 실제 대본이 아닙니다.)






 


프렌즈 친구들의 아지트, 센트럴 퍼크 까페~


(레이첼, 로스, 모니카, 챈들러가 수다를 떨고 있다.
조이는 한쪽 구석에서 친구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팔 길이만한 커다란 샌드위치를 먹는 중.)


 


피비:  (까페에 뛰어들어오며 다급하게) 로스! 로스 여기 있니?
로스: .
피비: 밖에서 네 아들이 울고 있어!!
로스: ? (벌떡 일어나며) 내 아들 ‘이 와 있다고?



피비
: 아니. 벤은 아니야.


로스: 내 아들이라며??


피비: (의외라는 듯) , 아들이 벤 밖에 없니?


로스: 무슨 소리야? 당연히 벤 뿐이지. 내가 아들이 또 어딨다고?


피비: 오우. (급 실망)우리한테 말 안하고 조용히 키우는 아이가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지.


로스: 무슨 그런 오해를!


챈들러: 왜? 제법 설득력 있는 얘긴데? ㅋㅋ


피비: 게다가 저 꼬마는 로스 너랑 목 근육이 닮았다고. 목 근육이 그렇게 판박이로 닮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  


로스: 분명히 말하는데, 나한테 아이는 벤 뿐이야. 언젠가 결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싶어진다면 모를까, 그전엔 절대로 아이를 만들 생각이 없다고.


챈들러: 결혼을 또 하긴 할 거야? 결혼 횟수로 기네스북에라도 오르려고? ㅋㅋ


레이첼: 기네스북에 오르면 나한테도 한턱 내야지. 나도 기여를 한 셈이니까.


로스: 다들 왜 이래? 하여간 난 지금으로썬 정말 정말 정말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이 없어. 가끔 여자랑 데이트할 때도 피임을 완벽하게 하고 있다고.


일동: 와우~


로스: (으쓱하며) 언제나 콘돔을 준비해놓을 뿐인데, .


레이첼: 그리고 또?


로스: ?


레이첼: 그래. 그리고 또?


로스: ? 뭘 또???


레이첼: 피임을 완벽하게 하고 있다고 했잖아.


로스: 그래. 콘돔을 쓴다니까?


레이첼: 그게 다야?
로스: 그래. 또 뭐가 필요하지? ……설마 너희들은… 콘돔을 두 개씩 겹쳐서 쓰는 거야?
      


[#M_더보기|접기|
모니카: (한숨) 그게 아니고, 오빠. 완벽한 피임을 하고 있다니까 레이첼이 묻는 거야. 콘돔의 피임 성공률은 100%가 아니니까.

 


(구석에서 샌드위치 먹는 것에만 열중하며 친구들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던 조이, 물고 있던 샌드위치를 떨어뜨린다.)


 


조이: 뭐라고?? 콘돔의 피임 성공률이 100%가 아니라고? 그게 사실이야?



모니카
: 그럼. 그렇게 알고 있던 거야?


레이첼: 조이……. 너한테 아직 아이가 없다는 게 놀랍다.


챈들러: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 목 근육이 닮은 꼬마들이 여기, 저기ㅋㅋ.
           


피비: 조이가 만난 여자들을 떠올려봐. 그녀들이 아이를 하나씩만 데려와도 엄청난 광경이겠다.


조이: 맙소사. 성공률이 100%가 아니라면 대체 콘돔은 왜 쓰는 거지? 안 하는 게 훨씬 좋은데 뭐 하러 그런 걸 씌우냐고!


챈들러: 씌운 게 더 예쁘잖아.



일동:
   ……….


챈들러: ……그 반응은 뭐야. 나만 그런 거야?



피비: 난 그렇게 생각해.     

모니카: ㅋㅋ 못말리겠네.  콘돔이 간편하고 효율적이니까 쓰지. 성병을 예방할 수도 있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 피임 실패율이 10~15%까지 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어야 돼.


로스: ? 10~15%라고?!!


피비: (이미 거품 물고 쓰러진 조이를 흔들며)  조이! 정신차려! 콘돔 얘길 듣다가 죽는 건 아름답지 않아!


로스: 말도 안돼. 10~15%라니? 그럼 콘돔을 쓰는 열 명중에 한 명 이상은 피임에 실패한다는 얘기야? 여기에 있는 우리들 중에서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난 못 믿겠어. 챈들러, 너 이런 얘기 들어봤어?


챈들러: 아니.


모니카: 진정들 해. 콘돔의 피임 확률은 85%. 실패한 15%는 콘돔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 그리고 콘돔 자체가 불량한 경우가 되겠지.


로스: 나는 잘못 사용하는 경우 가같은 건 없으니까, 괜찮은 거지? 그렇지?
        


피비: 불쌍한 로스. 현실을 부정하며 말을 더듬고 있구나. (일어난다)



모니카
: 어디 가?


피비: 아까 울고 있던 꼬마아이. 이제 진짜 로스의 아이일 수도 있게 됐으니까 다시 나가 보려고. 그 목 근육은 정말 판박이였거든.


로스: (까페를 나가는 피비를 보며 울상) 콘돔을 잘잘못 사용하는 경우라는 건 뭐뭔데?



레이첼
: 뭐야. 콘돔 사용법을 나한테 알려달라고?


모니카: (챈들러에게 눈짓)


챈들러: 흠흠. 콘돔은 이렇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곳이 발기되고 난 후 착용합니다. 콘돔 끝부분의 돌출부위를 살짝 비틀어 납작하게 해서 공기를 뺀 후 사용합니다. 그렇게 해야 콘돔이 찢어져 피임에 실패하는 걸 방지할 수 있습니다. 에 또, 사정이 끝난 후에 콘돔이 빠져서 질 안쪽으로 정액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서 제거해야 합니다.


로스: 됐어. 난 또 뭐라고. 그 정도라면 나도 준수하게지키고 있어. ‘양호하게사용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나한텐 숨겨진 애가 있을리 없어.


챈들러: 피비가 꼬마를 데리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지. ㅋㅋ



모니카
: 여하간 바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도 성공률이 100%는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 콘돔만 착용하면서 ‘완벽하다’는 말을 하면 안 되지.


로스: 잠깐. 아까 레이첼이 나한테 그리고 또?’라고 물었지?
레이첼
: .


로스: 그렇다면 콘돔 말고 다른 피임으로 뭘 하고 있냐고 물은 거 아니야?


레이첼: 그렇지.


로스: …… …….



레이첼
: 뭐야. 설마 나한테 또다른 피임법에 대해서 말해달라는 거야? (모니카를 쳐다봄)


모니카: (기겁하며) 난 싫어!! 친오빠한테 피임법에 대해서 설명하긴 싫다고!  


챈들러: 그냥 친오빠가 아니지. ‘다 큰친오빠지.


레이첼: 나도 싫어. ‘다 큰 전남편에게 이제 와서 피임법 강의라니, 너무 괴상하잖아?
           


모니카: (한숨)  별 수 없지. 못난 오빠를 둔 업이라 생각하고 설명한다. 피임하는 방법 중에서 일단 자연주기법질외사정법에 대해 얘기해 보자.


조이: (기절했던 조이, 벌떡 일어나며) 그래, 질외사정! 그거! 그거!!!



모니카
: (무시하며) 이것들은 실패할 확률이 20%.


조이: (다시 기절)



모니카
: 자연주기법은 여성의 배란 후에 난자가 살아 있는 1일과, 정자가 여성의 생식기 내에 살아 있는 2~3일을 고려해서 배란을 전후로 한 임신 가능시기를 피하는 방법이야. 그런데 이건 생리주기가 정확한 여성에게만 가능한 방법이거든. 생리가 규칙적이더라도 심리적인 원인으로 배란주기가 변동될 수도 있고질외사정법은 당연히 질 내에 사정한 경우보다야 임신 가능성이 낮지. 하지만 사정하기 전에 이미 정자가 일부 정액에 섞여 분비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임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게다가 민감한 남성이나, 그… 관계가 능숙하지 않은 경우엔 질외사정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 이래저래 위험하다고.


로스: 그러면 그, 먹는 야…….


모니카: 먹는 약?


로스: , .


모니카: 먹는 피임약이 있지. 이건 여성의 몸 안에서 생리와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두 가지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통해 배란과 생리를 조절하는 방법이야. 성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피임 실패율도 낮은 방법이지. 0.5~2% 사이니까. 이것도 100%는 아니지만, 정관수술이나 난관수술 같은 영구불임시술이나, 자궁 내 장치를 하지 않는 한 가장 확실한 피임법이겠지.


챈들러: 하지만 먹는 약은 별로 몸에 좋지 않을 거 같거든.



모니카
: 아무래도 직접 먹어야 하는 거니까 꺼려질 수 있지. 실제로 초기 피임약은 먹으면 체중이 늘거나 여드름이 나는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대. 하지만 최근에 나오는 피임약은 그런 문제는 없어. 오히려 피임효과 말고도 생리 주기를 조절하고, 생리통이 줄어드는 거 같은 장점이 있기도 해. 최근엔 여드름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든지, 월경전증후군 증상을 감소시킨다든지 하는 피임약도 나오고 있고.



챈들러
: 그럼 누구나 안심하고 먹어도 된단 말인가?


모니카:  아니. 어떤 약이든 누구나 먹어도 되는 약은 없지. 고혈압, 당뇨, 간염, 정맥혈전증이 있는 여성은 피임약 사용을 하면 안 돼. 복용하는 동안엔 흡연도 삼가야 하고.


로스: 하지만 피임약을 먹다가 계속 불임이 되면 어떡하라고?


모니카:  ? 무슨 소리야? 먹는 피임약은 다른 대부분의 피임법처럼 사용을 멈추면 바로 임신 능력이 회복돼. 그리고 약 성분이 영양분처럼 몸 안에 쌓이는 것도 아니라고. 먹는 걸 멈추면, 약 성분도 남아 있지 않게 돼. 나도 산부인과에 정기 검진 받으러 갈 때마다 그참에 처방 받아 먹고 있는 걸.


챈들러: 사후피임약이란 것도 있지 않나?



모니카
: 아, 응급피임약. 그건 관계 72시간 내에 먹으면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걸 방해하는 약이야. 그런데 사전에 다른 피임 없이 그 약만 먹겠다고 생각하면 안돼. 그건 계획되지 않은 섹스, 콘돔이 찢어진 경우, 성폭력처럼 원하지 않는 임신의 가능성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게 좋아. 왜냐하면 응급피임약을 사용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피임 실패율이 높아지고, 호르몬이 고용량 투여되기 때문에 부작용도 커지거든. 피임 실패율도 높은 편이야. 처음 사용할 땐 11~25%, 두 번째 사용할 땐 19~38%까지 높아지지. 또 월경주기 장애, 어지러움, 두통, 복부 통증 같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오남용은 절대 안 돼.



레이첼
: 갑자기 생각난다. 예전에 만난 남자가 콘돔도, 뭐도, 아무 것도 없던 상태에서 자자고 꼬시는 거야. 절대 안된다고 거절했더니, 씩 웃으면서 서랍에서 응급피임약을 꺼내서 보여주더라고. 그거 하나면 안심이라면서 말야.
모니카: 그 인간을 가만 뒀어?


레이첼:  풉, 내가 그랬겠어?



피비: (까페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밖을 보며 외친다) 여기야! 네 아빠가 여기 있어!


로스: ? 그 아이를 정말 데려 온 거야?


피비: (손을 저으며) 장난이야 ㅋㅋ. 꼬마는 진짜 아빠가 데려갔어. 조이는 아직도 안 살아났니?


챈들러: 모니카가 로스에게 피임법을 강의하는 동안, 한번 살아났다 다시 죽었어.
         


피비:  오우, ‘다 큰친오빠한테 피임법 강의라니.



일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피비
: 혹시 화성과 목성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피임하는 방법도 강의했니? 아주 간편하고, 피임 성공률이 100%,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천체망원경만 있으면 할 수 있어서 요즘 인기야.


조이: (다시 일어나서 둥그래진 눈으로) 알려줘!!


피비: 농담이야.


조이: NO!!!! (울부짖으며 까페를 뛰쳐나간다)


피비: (친구들을 둘러보며) 조이 바보. 사실일 리가 없잖아. 남녀 구분 없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니 말야.  자, 화성과 목성을 이용한 여성 전용 피임법에 대해서 들어볼 사람??



일동
: (모두 고개를 저으며) , .

_M#]

영진공 도대체

“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최고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영화

영화의 홍보를 위해 동원되는 온갖 미사여구들 가운데 가장 흔해 빠졌던 만큼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된 표현이 바로 ‘최고의…’라는 수식어일 거다. 그런데 <사이드웨이>의 경우는 ‘전세계가 흠뻑 취해버린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포스터의 헤드카피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 사람의 오랜 영화 관객으로서 <사이드웨이>의 가치를 묘사하기 위한 개인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개봉한지 한참 지나 우연히 비디오로 빌려 보고는 아, 이 영화는 극장에서 꼭 봤어야 했는데!’라며 두고두고 오호통재라 하던 딱 그런 종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14인치 TV 화면에 비디오로 빌려 본다고 해서 좋은 영화의 가치가 반감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 제대로 된 스크린 비율에 가슴 한켠을 울리는 사운드트랙과 제대로 된 화면 색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주인공들을 따라 함께 떠나는 LA 근교의 와인 여행과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캐릭터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알렉산더 페인의 농익은 연출이 보는 동안 너무너무 즐겁고 보고 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렉스 피켓의 1인칭 소설이 영화의 질 좋은 재료들을 공급한 포도 농장이었다면 그곳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탁월한 2004년산 캘리포니아 와인 같은 영화를 빚어낸 것은 감독과 스텝들, 그리고 배우들의 공로다. 특히 <사이드웨이>는 낯익은 얼굴들이긴 하지만 그 자신들만으로는 관객 동원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그간의 조연이나 단역 전문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서 탁월한 연기력을 선보인 영화다.

<듀엣>(2000)에서 이미 ‘실패한 인생’의 중년 캐릭터로 눈에 익었던 폴 지아매티는 개인적으로 <사이드웨이>를 보기 싫게 만들었던 원인이기도 했었다. 코믹 연기를 잘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우울한 인상이었던 그가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라니, 어쩌면 <어바웃 슈미트> 만큼이나 꿀꿀하게 진행하다가 꿀꿀하게 끝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사이드웨이>에서 폴 지아매티가 연기한 마일스는 <사이드웨이>가 좋은 영화로서의 영화적 완성도를 갖추는 데에 필요한 거의 절반 이상의 공헌을 해냈다. 폴 지아매티를 캐스팅하고 그의 연기를 조율했던 것은 알렉산더 페인의 선택이었겠지만 <사이드웨이>는 감독보다도 주연이었던 폴 지아매티라는 배우의 영화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어바웃 슈미트>가 꿀꿀이 영화로 남겨진 이유는 어쩌면 잭 니콜슨 한 사람의 영화였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이드웨이>에는 바닥으로 푹푹 내려 앉기만 하는 주인공 마일스 옆에 또 한 명의 주인공 잭이 있음으로 해서 깊이와 재미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었지 않았냐는 얘기다. 토마스 해이든 처치가 연기한 잭의 비중은 폴 지아매티의 마일스 만큼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영화의 사건 사고들을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원동력으로서 <사이드웨이>의 이야기 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버지니아 매드슨과 산드라 오는 두 명의 여주인공으로서 적절한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긴 했지만 스토리 상에서 배역 자체가 워낙 제한적이라 답답한 감이 없지 않다. ‘두 명의’ 여주인공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사이드웨이>는 두 명의 남자 주인공과 그들의 여자들 다수가 등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마일스의 마야와 빅토리아, 그리고 잭의 스테파니와 얼굴도 제대로 안나오는 크리스틴,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뚱보 여종업원 간에 조차도 영화 속 존재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남자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줄곧 견지하면서 나머지 구성 요소들을 재배치하고 있다는 점은 <사이드웨이>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페인의 전작들, <일렉션>과 <어바웃 슈미트>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공통 분모다.

그렇다고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가 보편성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거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주인공들을 통해 어느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다가올 절망의 순간들을 묘사함으로써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보편적 진실에 줄곧 접근해왔다. 극장에서 보내는 두 시간의 여흥으로 누구나 바라는 그런 보편적인 즐거움은 아닐테지만 영화관 밖 실제 생활에서는 알렉산더 페인의 주인공들을 쉽게 잊을 수가 없는 것이 그 증거다.

영진공 신어지

“바보들의 행진”, 청춘영화 계보의 원조격인 작품

모두 바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면 배창호 감독의 1984년작 <고래사냥>(새 창으로 열기) 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했다.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은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과 상당부분 통해있으며, 다시 이 노래는 <바보들의 행진>에 쓰였을 뿐 아니라 그 가사가 고스란히 주인공 중 하나인 영철의 대사로 뱉어진다. 게다가 <바보들의 행진>의 가장 중심적인 주인공은 <고래사냥>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병태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두 영화 모두 원작, 각본이 최인호다.) 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이 영향을 준 것은 비단 <고래사냥>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한동안 양산됐던 청춘영화는 이승현의 얄개 시리즈(어린 이승현이 <바보들의 행진>에 신문팔이 소년으로 잠깐 출연한다.)나 그 유사의 여학생 버전으로 임예진이 출연한 ‘좋아해’ 시리즈 외에도, 순진한 남자주인공과 되바라진 여자주인공이 대학생 신분으로 공부는 않고 맨날 놀러다니며 술과 미팅과 (특히 여학생의 경우) 결혼에 열을 올리며 좌충우돌하다가 난데없이 어디론가 떠나거나 하는 식의 계보에 속한 영화들이 꽤 있다. 심지어 박중훈, 강수연 주연의 <철수와 미미의 청춘스케치>도 말하자면 그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맨날 술만 마시고 공부는 않는 것은, 실은 그 시대가 뻑하면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를 영화에 담았을 때엔 얄짤없이 검열의 칼날이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의 이 계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화로 보인다.

동해바다에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는 꿈은, 앞뒤옆위아래 꽉꽉 막힌 한국현실에서 젊음이 가질 수 있는 맨 마지막의 선택, 즉 ‘현실도피’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낙관주의자인 배창호 감독은 <바보들의 행진>과 달리 <고래사냥>의 끝을 더없는 해피엔딩으로 수놓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은 신검 장면으로 시작해 결국 주인공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맨날 콧대만 세우던 영자가 달려와 결국 울면서 이별의 키스까지 하는 이 장면이 결국 비극의 엔딩인 것은, 언제나 과도하게 깔깔깔 웃어제끼며 명랑하기 짝이 없었던, 도대체 병태에게 속을 보여주지 않았던 우리의 영자가 기어코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치기와 장난, 미팅과 술먹기 내기 등의 유희들이, 영화의 끝까지 이르고 나면, 비극의 끝을 이미 예정해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벌이는 처절한 유희처럼 보인다.

비록 데모하는 장면은 ‘체육전’을 하거나 축구를 하는 장면으로, 주인공이 교실 안에서 데모에 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장면이 그저 ‘인간의 신뢰’에 관한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갈등하는 것으로, 감독의 뜻과 무관하게 교체되고야 말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70년대 청춘들의 갈곳없는 막막함과 절망, 그 안에서의 무력감을 드러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정말로 원래 그 장면들이 원래 시대와 시위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들이었다면, 영철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시대는 그토록 순수한 영혼은 결국 견딜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의 순수는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떨어졌는데 심지어 군대까지 떨어진’ 무능함으로만 치부될 뿐이다.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그곳, 군대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 무능함을, 본래 그 이름대로 ‘순수’라 부를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흥청망청 노는 것이, 그리고 그깟 머리카락 안 자르겠다고 도망치다가 목숨을 걸고 육교에 매달리는 것이 ‘저항’이었던, 그런 시대였던 거다, 그때가. 그렇다면 결국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는 것은 이 사회에 어쨌든 순응하겠다는 패배 선언으로도 읽힌다.

바보들의 행진

목욕하는 남자들.

이 영화에서 영자 역을 맡은 이영옥을 보고 상당히 놀란 게, 굉장히 현대적이다. 75년작인데도 이 배우는 90년대 말적인 미모라 해야 하나. 기본적인 이목구비가 일단 최정윤과 상당히 비슷하다. 거기에 옷을 쫄티에 나팔바지, 통굽구두를 신으니 도저히 75년 영화라곤 보이지 않더라. 다만 버스비가 25원, 짬뽕이 한 그릇에 100원이었다고 한다. 지금보다 약 1/40 수준의 물가였던 셈이다. 또한… 이 영화의 인물들은 대체로 집이 부유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 쓴다. 미팅 참가비가 당시 돈으로 2천원일 걸 보고 조금 아찔… 했다. 물론 그때 2천원이 꼭 지금의 8만원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 초반 미팅을 하기로 하고 목욕탕에 가서 때빼고 광내는 장면을 보면서도 헉, 했는데, 남체를 그렇게 ‘탐스럽게 훑는 카메라’는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거의 파격이었다고 할 만하겠다. 그리고 이 영화의 그 키스씬은… 아마 한국영화 역사상 길이 남는 키스씬이 될 듯. 어쩌다 보니 <소문난 칠공주> 같은 드라마에서조차 한번 베낀 적이 있다고 하더란 얘기까지 알게 됐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심지어 남녀가 반투명 유리문 하나를 두고 나란히 샤워를 하며 비누를 주고받고 하는데도 이상하게 성적인 느낌이 없다. 키쓰신도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유일하게 에로틱한 맛이 느껴지는 게 저 목욕탕에서 두 남자가 미팅 전 목욕하는 씬이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중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으로 동성애를 묘사한 영화가 있다던데 …

바보들의 행진

무기력한 젊음, 과도한 명랑의 의지. 영철(맨 왼쪽)-순자, 병태-영자(맨 오른쪽) 커플.

영진공 노바리

ps1. 영상자료원 조선희 원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 하길종 30주기 추모전에서 상영한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 당시 삭제됐던 부분을 다시 삽입한 버전이라 한다. 일례로 저 목욕하는 장면, 영자의 룸메이트 순자가 담배 피우는 장면 등이 해당된다. 연고전/고연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체육전 장면과 축구경기 장면은 모두 원래 데모 장면이었던 것을 교체한 것. 고 하길종 감독의 부인인 전채린 교수(그 전채린이다, 전혜린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교실에 남은 병태가 고민하다가 떠올리는 ‘신문팔이 소년 에피소드’는 응원전에 나가냐 안 나가냐의 고민이 아니라, 데모에 나가냐 안 나가냐의 갈등 장면이었다고. 여기저기 편집이 튀고 결정적으로 막판에 가면 멀쩡하던 얼굴에 갑자기 핏자국 등의 싸운 티가 나는 것도 그 사이 씬이 통째로 검열돼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부산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 장면이었다고.

ps2. 개막식에서 하명중 감독이 말하기를, “형이 그 젊은 나이로 간 건, 그 시대가 작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이 이놈의 세상 그냥 미련없이 가자,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영원히 청년으로 봉인된 천재감독 하길종은 한국영화사에 있어 하나의 ‘섬’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한국의 영화풍경이 지금과 많이 바뀌었겠지 싶다. 단순히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그가 살았다면 펼쳤을 영화의 풍이 그의 제자나 후배에게 전수됐을 때, 특히 80년대의 영화풍경이 꽤 달라졌겠구나 싶어서다. 하길종은 당시의 ‘한국영화의 혁명’을 부르짖는 일종의 ‘신세대’였다. 그와 영화집단을 함께 했던 이가 대충 김호선, 이원세, 홍파 등의 감독과 평론가 변인식이라 한다. 이들 역시 지금의 감독들에겐 일찌감치부터 ‘극복해야 할 구세대’가 돼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독재정권에 분노하며 절망했던 하길종과 다른 길을 갔다. 불과 30년 사이에 한국영화 역사 역시 사회 전반 만큼이나 급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