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내 속의 또 다른 나

공부하면서 읽은 발달심리학 책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부분의 서두에 인터뷰 기록이 있었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은 “너는 누구니?” 라는 질문에 대해서 4살짜리와 8살짜리, 그리고 13살짜리가 한 대답을 녹취한 글이었다.

4살짜리는 아주 천진난만하다. 내 이름은 아무개이고, 나는 오렌지색 강아지와 아빠 엄마와 누나 둘이랑 같이 살고, 나는 힘도 세고 알파벳도 하고 숫자셈도 할 줄 안다고 자신 있게 자랑한다. 물론 그 아이는 알파벳도 제대로 못하고 숫자셈도 잘 못한다만, 상관없다. 이 나이때는 세상의 중심은 자기자신이니까.

8살짜리는 4살짜리와 약간 다르다. 남이 어떻게 보던 상관없는 나의 모습을 신나게 떠들던 4살짜리와는 달리 이 8살짜리 아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나는 아주 인기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인기는 내 능력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잘나도 인기를 얻기는커녕 왕따가 될 수도 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처럼,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고, 혼자서는 인기인이 될 수 없다. 남들이 그렇게 봐줘야 하는 거다.

즉, 인기는 내가 보는 나(철학자들은 이것을 주관적 자아라고 말한다)가 아니라 남들이 보는 나(이것은 객관적인 자아이다)의 문제이다. 남이 보는 나를 의식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나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왜 남들은 내 언니를 더 예쁘다고 하는 걸까 …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산수시험 성적이 나보다 좋은 애가 있을까 … 이 흔들림이 자아를 성장시킨다.

13살짜리는 더 달라진다. 그 아이의 인터뷰 첫 마디는 “나도 내가 어떤 애인지 잘 모르겠어요” 로 시작한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스스로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얻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인간의 자아는 간단명료하지 않다. 내 속에는 희망과 절망, 선의와 악의, 정직과 위선이 뒤섞여 존재한다. 천사와 악마는 모두 내 속에 존재한다.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by ~freys on deviantART

다중성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어쩌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정확히 다중성격장애로 진단된 사람은 거의 없다. 전문가들도 이 장애가 진짜 있는 건지 아니면 영악한 범죄자들의 교묘한 속임수일 뿐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논의가 분분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 증상에 대해서 대단한 호기심을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내 속에 존재하는 다른 나”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듯,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내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숨어있다면, 이거 상당히 무서운 얘기 아닐까?

『수퍼맨』 같은 만화 속 영웅들의 대오각성도 결국 자기 속에 숨어있던 영웅스러움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내가 잘 아는데 결코 영웅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숨겨진 미지의 존재는 영웅의 반대쪽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만약 자기 속에 숨겨진 게 영웅이 아니라 골룸 같은 비루함이나 짐승 같은 잔인함이라면? 내 마음속의 심연에 그런 괴물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다면? 아마 그 어떤 공포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을 거다.
 
다른 괴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다. 그 괴물과 맞서 싸워서 운이 좋다면 제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나 자신이라면 나는 도망칠 수도, 싸워 이길 수도 없다. 내가 존재하는 한 괴물도 존재할 것이니까 말이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도 하고 소설도 쓰는 한 남자가 한겨울 콜로라도산 속의 빈 호텔에 들어선다. 그는 널럴한 마음으로 폭설로 도로가 끊겨 5개월 간 휴관하는 이 호텔을 관리나 하면서 소설을 쓸 심산이었다. 그런데 호텔 지배인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몇 년 전에도 어떤 남자가 이 호텔이 휴관할 때 임시 관리인으로 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려서는 자기 가족을 다 죽였다는 거다. 얼마 후, 주인공은 호텔에 존재할 리 없는 사람들을 마주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그 살인사건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한다. “그 살인마가 바로 당신이잖소!” 라고 말이다.


『샤이닝』은 우리의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다.
내 속에 존재하는 살인마에 대해서, 내 마음속 심연에 존재하는 괴물에 대해서, 그것이 눈을 뜨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자기 속의 괴물을 느껴본 사람에게 이 영화는 정말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영진공 짱가

“그림자 살인”이 조선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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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실은 추리를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상한 추리극이다. 시작은
그럴싸하다. 시커먼 밤 인적 없는 숲속에서 시신 한 구가 누군가의 손에 운반된다. 시체는 누구일까? 시체를 운반하는 자가
범인일까? 궁금증은 곧 풀린다. 시체는 고관대작의 아들로 밝혀지고 의학도 장광수(류덕환)가 해부실습을 위해 주워왔던 것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장광수는 누명을 벗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니 그가 바로 홍진호(황정민)! 홍진호는 발명가 순덕(엄지원)이 고안한
도구들로 진범 찾기에 나선다. 

박대민 감독의 <그림자 살인>은 여러 모에서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다.
충무로 보증수표 황정민에, <놈놈놈>의 조화성 미술감독이 참여한 볼거리 가득한 경성, 그리고 화려한 액션까지.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추리는 없다. 영화의 모든 패를 던져버리는 초반에 다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홍진호의 등장은
<차이나타운>(1974)의 기티스(잭 니콜슨)와 캐릭터 맥락이 일치한다. 남편이 집나간 사이 불륜을 벌이는 부인의
뒤꽁무니를 쫓아 벌거벗은 사진을 증거랍시고 찍어대는 한심한 사립탐정, 하지만 소싯적 지방검사를 지낸 적 있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정의감 따위 엿 바꿔 먹고 돈(혹은 여자)에 혹해 사건을 맡게 되는 점 등 두 인물은 판박이인 것이다. 고로, 이와
같은 상관관계를 통해 <그림자 살인>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던 사건이
핵심에 다가설수록 더 큰 음모와 연루되어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마주서게 되는 것. (<차이나타운>이
바로 그렇다!)

추리가 주가 되는 작품에서 예측 가능하다는 건 치명적이다. 게임오버다. <그림자
살인>처럼 홍진호가 기티스의 영향 하에 있고, 홍진호와 장광수의 관계가 홈즈․왓슨 콤비를 연상시켜도, 순덕의 존재가
<CSI 과학수사대>의 벤치마킹일지라도 설정은 설정일 뿐 오해하지 말지이니, 이에 관계없이 예측 불가한 전개를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추리극의 재미요, 백미다. 그래서 추리를 다루는 작가는 종종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벌인다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독자의 접근을 차단해 흥미를 배가시킨다.

물론 <그림자 살인>에도 관객의 접근을 차단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도무지 추리에 집중할 생각을 하지 않고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는 것이 문제일 뿐. 안타깝게도
<그림자 살인>의 작가들은 추리극을 쓸 능력이 없어 보인다. 가령, 범인의 정체를 초반에 노출하는데, 그것이 관객에게
혼란을 줄 목적이라지만 제2, 제3의 용의자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복선이 깔리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호기심을 자아내는
미스터리? 그런 거 없다.

대신 영화는 액션과 경성 풍경에 승부수를 띄운다.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는 초반 액션장면에 대해 길고 지루하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걸 보면 <그림자 살인>의 노림수는 분명하다. 추리에
대한 부족한 능력치를 강력한 볼거리로 메워보겠다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관심이 갔던 부분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라는
점이다.

<그림자 살인>뿐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추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를 보면 유독 조선시대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김대승의 <혈의 누>(2005)가 그랬고, 김미정의 <궁녀>(2007)가
그랬으며, 이 영화가 그렇다. 나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리물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의
DNA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이 중시되고 초자연적인 사고가 익숙한 문화 속에서는 과학과 증거가 뒷받침되는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추리물에 태생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는 법. 하여 한국인이 만드는 추리물은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질 뿐 아니라
이야기 얼개도 굉장히 약한 편인데 아마 그런 난점을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통해 가리려는 게 아닐까 추측해보는 것이다. 

가령, <그림자 살인>의 배경은 조선 중에서도 황제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일제 강점기라 부르는
1900년대 초반 경성이다. 전쟁과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신문물이 유입됐던 시대, 한복과 하이힐이,
양복과 상투가 자연스럽게 한 몸에 공존하며 문화충돌이 기승을 부리는 모순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요는 근대와 반(反)근대가
난립했던 시대의 이중성만큼 앙상한 추리 서사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기에 좋은 조건이 없다. 추리극의 면모를 유지하되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성보다 정에 호소함으로써, 과학보다 초자연주의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합리주의와는 가장 동떨어진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궁녀>이다.

<궁녀>는 <그림자 살인>의
순덕 이전 이미 내의녀 천령(박진희)을 등장시켜 과학수사를 보여준 전례가 있다. 물론 <그림자 살인>과 달리
<궁녀>는 배경이 정조시대지만 (극중 정확한 시대가 언급되지 않지만 정황상 유추가 어렵지 않다) 정조가 신문물을
들이는데 관대했고 개혁책을 앞세워 고문(古文)을 옹호하는 보수 세력과 대립을 이뤘다는 점에서 경성이 갖는 시대의 이중성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여 <궁녀> 역시 궁 내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두고 초반엔 천령의 과학수사를 앞세워
추리극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귀신의 존재를 암시하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극을 해결한다.

<
그림자 살인>은 <궁녀>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더 영리해 보이지도 않는다. <궁녀>처럼
시대의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면죄부 삼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논리적인 사건 해결을 통한 지적 유희의 전달보다 일제를 향한 민족적 복수심의 쾌감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중성은 결국 ‘타락한’ 일본인에 맞서는 ‘정의로운’ 한국인의 대립으로 구체화된다. 이성보다 복수심에 기대 합리주의를 무효화하는
민족주의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 살인>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라든지 소품들은
사건의 단서 혹은 복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철저히 무능력한 추리력을 감추려는 볼거리 혹은 일본을 제압하는 의미로써 작용한다.
사건 해결에 전혀 기능하지 못하는 은청기나 만시경 같은 신기한 도구들은 물론이요, ‘총’을 든 홍진호가 ‘칼’을 든 일본인을
이기는 이미지는 관객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얼마나 좋은가.

코언 형제는 자신들이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다루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과거는 이국적인 느낌을 줘요. 과거를 스토리의 배경으로 삼으면 더 심도 있게 허구의 세계를 만들
수 있죠. 그렇다고 회고담 같은 건 아닌데, 우리 영화는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과거를 다루기 때문이죠. 상상력에
의존한다고 봐야죠.” 조선으로 간 추리극 <그림자 살인>은 정확히 반대다. <그림자 살인>은 추리력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한 추리영화다.

영진공 나뭉

“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최고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영화

영화의 홍보를 위해 동원되는 온갖 미사여구들 가운데 가장 흔해 빠졌던 만큼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된 표현이 바로 ‘최고의…’라는 수식어일 거다. 그런데 <사이드웨이>의 경우는 ‘전세계가 흠뻑 취해버린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포스터의 헤드카피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 사람의 오랜 영화 관객으로서 <사이드웨이>의 가치를 묘사하기 위한 개인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개봉한지 한참 지나 우연히 비디오로 빌려 보고는 아, 이 영화는 극장에서 꼭 봤어야 했는데!’라며 두고두고 오호통재라 하던 딱 그런 종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14인치 TV 화면에 비디오로 빌려 본다고 해서 좋은 영화의 가치가 반감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 제대로 된 스크린 비율에 가슴 한켠을 울리는 사운드트랙과 제대로 된 화면 색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주인공들을 따라 함께 떠나는 LA 근교의 와인 여행과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캐릭터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알렉산더 페인의 농익은 연출이 보는 동안 너무너무 즐겁고 보고 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렉스 피켓의 1인칭 소설이 영화의 질 좋은 재료들을 공급한 포도 농장이었다면 그곳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탁월한 2004년산 캘리포니아 와인 같은 영화를 빚어낸 것은 감독과 스텝들, 그리고 배우들의 공로다. 특히 <사이드웨이>는 낯익은 얼굴들이긴 하지만 그 자신들만으로는 관객 동원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그간의 조연이나 단역 전문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서 탁월한 연기력을 선보인 영화다.

<듀엣>(2000)에서 이미 ‘실패한 인생’의 중년 캐릭터로 눈에 익었던 폴 지아매티는 개인적으로 <사이드웨이>를 보기 싫게 만들었던 원인이기도 했었다. 코믹 연기를 잘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우울한 인상이었던 그가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라니, 어쩌면 <어바웃 슈미트> 만큼이나 꿀꿀하게 진행하다가 꿀꿀하게 끝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사이드웨이>에서 폴 지아매티가 연기한 마일스는 <사이드웨이>가 좋은 영화로서의 영화적 완성도를 갖추는 데에 필요한 거의 절반 이상의 공헌을 해냈다. 폴 지아매티를 캐스팅하고 그의 연기를 조율했던 것은 알렉산더 페인의 선택이었겠지만 <사이드웨이>는 감독보다도 주연이었던 폴 지아매티라는 배우의 영화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어바웃 슈미트>가 꿀꿀이 영화로 남겨진 이유는 어쩌면 잭 니콜슨 한 사람의 영화였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이드웨이>에는 바닥으로 푹푹 내려 앉기만 하는 주인공 마일스 옆에 또 한 명의 주인공 잭이 있음으로 해서 깊이와 재미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었지 않았냐는 얘기다. 토마스 해이든 처치가 연기한 잭의 비중은 폴 지아매티의 마일스 만큼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영화의 사건 사고들을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원동력으로서 <사이드웨이>의 이야기 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버지니아 매드슨과 산드라 오는 두 명의 여주인공으로서 적절한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긴 했지만 스토리 상에서 배역 자체가 워낙 제한적이라 답답한 감이 없지 않다. ‘두 명의’ 여주인공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사이드웨이>는 두 명의 남자 주인공과 그들의 여자들 다수가 등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마일스의 마야와 빅토리아, 그리고 잭의 스테파니와 얼굴도 제대로 안나오는 크리스틴,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뚱보 여종업원 간에 조차도 영화 속 존재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남자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줄곧 견지하면서 나머지 구성 요소들을 재배치하고 있다는 점은 <사이드웨이>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페인의 전작들, <일렉션>과 <어바웃 슈미트>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공통 분모다.

그렇다고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가 보편성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거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주인공들을 통해 어느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다가올 절망의 순간들을 묘사함으로써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보편적 진실에 줄곧 접근해왔다. 극장에서 보내는 두 시간의 여흥으로 누구나 바라는 그런 보편적인 즐거움은 아닐테지만 영화관 밖 실제 생활에서는 알렉산더 페인의 주인공들을 쉽게 잊을 수가 없는 것이 그 증거다.

영진공 신어지

이지 라이더 (Easy Rider, 1969), 어린 왕자의 영화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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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서 하도 자주 언급되는 고전이다 보니 어느새 이 영화 언젠가 한번쯤은 본 것도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지 라이더”는 주말의 극장이나 케이블 TV를 통해 몇 장면 스쳐 지나가듯이 본 일 조차 없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뉴 시네마 어쩌고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단골 손님인데다가 피터 폰다와 데니스 호퍼의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사진 또한 어렸을 적 미국으로 이민 간 그리운 친척 형들 사진 꺼내 보듯이 너무 자주 봐왔던 터라 ‘아직 한번도 안본 영화인데 이미 다 본 것 같은 착각’의 상당히 높은 수위를 차지하는 영화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보게 된 “이지 라이더”라는 영화는 과연 영화 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바 대로 피터 폰다와 대니스 호퍼가 오토바이를 타고 줄창 달리는 로드무비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요즘 기준으로는 별로 용납해주고 싶지 않은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가 촌빨 날리는 화면과 편집 기술 위에 제대로 어우러진 진짜 60년대 영화였다 … 까지가 내 미리 알고 있었거나 예상했던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직접 보고서야 알게된 부분들은,

잭 니콜슨은 처음부터 같이 달리는 또 하나의 바이커가 아니라 중간에 만나 얻어탔다가 영화 끝까지 가지도 못하고 중간에 사라지는 배역이었다. 그러나 잭 니콜슨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갑자기 엄청난 탄력이 붙는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그의 연기력과 타고난 존재감은 감탄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이지 라이더”에서 잭 니콜슨의 등장은 외롭고 건조한 두 주인공의 로드무비에 혜성 같이 나타났다가 아쉽게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델마와 루이스”에서의 브래드 피트가 했던 강력한 양념장 역할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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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지 라이더”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이게 정말 60년대에 만들어진 씨퀀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파격적이면서도 비주얼이 매우 놀라웠던 두 창녀와의 공동묘지 장면이다. 물론 상당히 쎈 약을 먹은 네 인물의 환각 상태를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수도 있겠고 엄청난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욕할 수도 있을 내용이지만 이제 이 영화의 이 장면을 본 이상 세상의 모든 비디오아트가 있기 이전에, 그리고 데이빗 린치나 다른 작가들이 하기 이전에 “이지 라이더”가 이미 있었노라고 해야 하게 생겼다.

전통적인 서부극의 플롯을 거꾸로 만들어보자고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본 “이지 라이더”의 전반적인 느낌은 오토바이를 타고 미 서부에서 동부로 여행하는 “어린 왕자”의 영화 버전 같다는 거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외모와 표정을 지닌 와이어트(피터 폰다)도 길 위에서 다른 이들을 만나며 세상과 살아가는 일들에 대해 무언의 메시지들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는 결국 길 위에서 사라지고 마는 결말까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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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