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은 국민을 금붕어로 보고 있는가

금붕어가 좁은 어항에서도 불편없이 지내는 이유는 기억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기억력이 의외로 길다는 학설이 나오고는 있지만, 붕어는 어항의 한쪽 면에 다다라 돌아서고는 금세 좁아서 돌아섰다는 사실을 까먹는다고 한다.

2003년 말 최병렬 대표 시절에 한나라당은 당시 열린우리당과 같이 수도이전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몇몇 의원이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했지만 한나라당은 무시했다. 선거가 눈 앞이었던 시절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시간이 좀 흐른 뒤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통과시켰던 수도이전 특별법을 수도분할이라며 반대했다. 급기야 위헌 소송을 냈다. 자신들이 국회에서 한 일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얘기였는데 그들은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위헌 판결을 받아냈다. 당분간 선거가 없는 시절이었다.  

출처: 중앙일보 2004년 6월 18일

그 위헌 판결 때문에 수도이전 특별법은 축소되어 세종시 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명박 당시 대통령후보는 대선 전 이 법에 따라 세종시 이전을 하겠다고 수차례 약속했다. 선거가 끝나고 이명박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세종시 이전을 지키지 않겠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은 수도이전 특별법을 선거 전에 찬성했다 선거 후에 반대해 세종시로 바꾸고, 선거 전에 세종시 이전을 지키겠다고 했다가 선거 후에 세종시를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은 국민을 금붕어로 알고 있는듯하다. 선거가 끝나면 모든 걸 다 까먹는 그런 존재로 말이다. 

부시 재임 말기 금융위기가 터지자 부시는 공적자금 투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의회에서 반대했는데, 그걸 주도한 건 부시의 소속당인 공화당이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공화당의 입장에 어긋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보수당이라면 못해도 이런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나라당에겐 그런게 없다. 한나라당은 사실 모든 것이 집중된 금싸리기 서울을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게다. 한나라당의 이해관계는 금싸라기 서울을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공익을 위하는 정당이 가져서는 안되는 천박한 욕망이라 대놓고 얘기했다가는 표가 떨어질터이니 선거 때마다 말을 바꾼다. 그렇게 사기 비스무리하게 하여도 우리 국민은 금붕어 기억력이라 금방 까먹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인걸까.

그러나 슬프게도 어쩌면 한나라당은 국민을 정확히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금붕어 취급하는데도 우리 국민은 한나라당을 가장 많이 지지하니 말이다.

영진공 철구

 

“더 문”, 미스테리라기 보다는 윤리적 문제 의식을 다룬 영화

<더 문>은 제목처럼 달을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입니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만나는 샘 록웰의 단독 주연작이지요. 스틸 컷들을 대충 보면서 스릴러물이거나 경우에 따라 공포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세한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막연하게 SF 공포영화류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문>은 SF이기는 하지만 스펙타클한 미스테리 보다는 차분한 분위기의 휴먼 드라마에 좀 더 가깝습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탄소 에너지 시대를 끝마치고 달 표면에서 청정 에너지원을 채굴해서 사용하는 미래의 어느 시점이라는 나레이션이 깔립니다. 그래서 <문라이트 마일>(2007) 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배경만 달 표면일 뿐 <더 문>에서는 국제 분쟁의 조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2주 후에는 3년 간의 근무 기간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가 가족들과 다시 만날 일만을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 샘 벨(샘 록웰)의 몹시 외롭지만 평화로운 달에서의 일상이 펼쳐질 따름입니다.

* 고강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더 문>에서의 분쟁 – 드라마를 구성하기 위한 갈등의 배치 – 은 다름아닌 샘 벨과 샘 벨 간에 발생합니다. 이게 뭔 소린고 하니 3년 간의 근무를 마치고 지구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던 외로운 달 나라 우주인 샘 벨이 사실은 복제인간이었던 것이죠. 작업 중 사고로 인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샘 벨이 의식불명에 빠지자 새로운 3년을 시작하게 될 또 다른 복제인간 샘 벨을 시스템이 깨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새로운 샘 벨이 회사의 지시를 무시한 채 사고를 당한 다른 샘 벨을 구출해오면서 시작됩니다. 새로운 샘 벨이 회사의 지시를 따라 구조대의 도착을 얌전히 기다리기만 했다면 샘 벨(들)은 영원히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을테지요. 그리고 지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와 어린 딸이 오래 전 과거의 기억에 불과하다는 사실도요.

갑자기 두 사람이 된 샘 벨은 서로가 진짜임을 주장하며 다투게 됩니다. 하지만 샘 벨과 샘 벨 간의 갈등이란 결국 자신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에서 오는 충격과 함께 그런 식으로 운영을 해온 회사의 비윤리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하여 <더 문>은 놀랍게도 리들리 스콧 감독의 클래식 <블레이드 러너>(1982)와 정서적으로 같은 연장선 상에 놓인 작품이 되고 맙니다. 물론 액션 씨퀀스의 스케일이나 존재론에 대한 고민의 깊이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분명하긴 하지만요.

<더 문>에서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인류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 사용량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이 중요한 작업에 어찌하여 단 한 명의 작업 인원만 파견해놓고 있느냐는 부분입니다. 최소한 기지 하나에 7 ~ 8명의 팀 조직은 갖다놔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나 싶은데 영화는 샘 벨과 샘 벨 간의 갈등과 해법을 위해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관객이라면 누구나 샘 벨이 근무하고 있는 달 기지의 이름 “SARANG – 사랑”을 영화 곳곳에서 발견하며 즐거워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데이빗 보위의 아들로 알려진 영국 출신의 감독 던칸 존스가 자신의 장편 데뷔작 <더 문>을 만들 당시 여자친구가 한국인(당시 런던필름스쿨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이사강)이었다고 하는군요.

감독의 말로는 미래의 달 에너지 채굴 사업을 하는 회사가 미국과 한국의 합자회사라는 설정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건 삼성이 첼시 유니폼의 스폰서를 하는 등 영국 내에서 우리나라 기업과 제품들의 입지가 엄청 좋아진 최근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일까요. 제 생각엔 중국어(한자)가 좀 더 어울렸을 것 같은데 영어권 사람들에겐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샘 록웰의 대표작은 아직까지는 조지 클루니가 연출한 <컨페션>(2003)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샘 록웰이 출연한 SF 영화라고 하면 역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 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죠.

어쨌든 <더 문>은 그야말로 샘 록웰 혼자 고군분투하는 1인 영화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케빈 스페이시가 친구 같은 컴퓨터 거티의 목소리로 출연했고 샘 벨의 아내나 다른 등장 인물들이 간간히 모습을 비추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씨퀀스에는 역시 샘 록웰이 연기하는 병든 샘 벨과 잠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된 팔팔한 샘 벨로 채워집니다.

혹시 샘 록웰이 아닌 다른 배우였다면 <더 문>은 어떤 영화가 되었을까요.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 제작비가 올라갔을 것이다, 입니다. 워낙 잘 하시는 데다가 인기도 많은 배우들이 많으니 샘 록웰이 아니었더라도 <더 문>은 좋은 영화로 만들어졌을 거라 생각한다는 거죠. 브래드 피트 주연의 <더 문>으로 한번 더 보고 싶어 하는 건 과연 저 혼자 뿐일까요.

 

영진공 신어지

 

 

부모가 귀찮은 일을 많이 할수록 아이는 올바르게 성장한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고 뛰고 먹는 등 자기 몸 하나는 가누는
것에 비해 아기는 도대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똥오줌도 못 가리고 엄마 젖 빠는 것도 서투르며 걷기는커녕 자기
머리조차 가누질 못한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는 존재로 이 세상에 떡하니 나온 것이니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

이런
인류가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번성하고 있으니 정말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뭔가 초월적인 존재가 뒤를 봐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너무도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아기를 보면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의 기원을 밝히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를
찾아내는 등 고도의 지능을 가진 완전체로 자랄 수 있는지 신기하다. 과연 인류의 어떤 능력이 이런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요즘에도 종종 신문에는 늑대라던가 원숭이 등 동물들에 의해 길러진 아이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실리곤 한다. 이런 아이들은 대부분
인간의 특성을 잃어버린 채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한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그렇다면 과연 인류의 특성은 환경에 의한 것인지 유전에
의한 것인지 궁금해 졌다.


1927
년 심리학자였던 윈스럽 캘로그는 이것을 밝히기 위해 침팬지를 인간의 가정에서 아기와 함께 키우기로 한다. 사실 아기를 침팬지들
사이에서 키우고 싶었지만 그런 미친 짓을 과학계와 사회가 승낙할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팬지와 함께 키우게 된 아기는 놀랍게도
10개월 된 자신의 아기였다. 물론 캘로그의 아내는 개념을 원숭이에게 팔아버린 남편의 제안에 적극 반대하였지만 결국 남편 이기는
아내 없다고 이 실험은 행하여진다.


침팬지 구아(Gua)와 인상파 도널드



캘로그 부부는 항상 침팬지 구아(Gua)를 사람의 아이로 다루었고 그들의 아이인 도널드와 같은 애정을 쏟고 똑같이 가르쳤다. 똑같이
포옹해주고 뽀뽀해주고 산책을 시키고 수저사용법과 변기사용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실험은 불현듯 9개월 만에 중단된다.

캘로그는 이 실험이 왜 중단하였는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후 심리학자 루디 벤저민이란 사람이 이 실험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실험 결과 침팬지 구아는 예상을 뛰어넘어 인간의 환경에 훨씬 잘 적응하였다.

도널드보다 말을 더 잘 들었고, 똥도 먼저 가렸다.
여러 가지 모습에는 도널드보다 더 나았던 것이다. 하지만 도널드는 한 가지 점에서 만큼은 구아보다 우월했다. 그건 바로
모방이었다.


구아는 모든 면에서 도널드보다 나았다. 

영화 혹성탈출은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도널드는 구아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구아가 장난감 놀이를 하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했으며 구아가 먹이를 달라고 할 때
내는 소리도 완벽하게 따라했다. 실험이 끝났을 때 19개월이었던 도널드는 단 세 개의 낱말만을 알고 있었다. 즉 윈스럽 켈로그는
침팬지를 인간으로 키우려 했지만, 거꾸로 인간을 침팬지로 키우고 말았던 것이다.


많은 교육 전문가들과 육아서는 부모가 아이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고 침을 흩뿌리며 이야기한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려면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다정한 아이로 키우려면 부부사이에 항상 다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단다. 다 지 잘되라고
시키는 것인데 그걸 내가 또 몸소 보여야 하다니 참으로 언행일치란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실험에서 보았듯이 이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가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였고 인류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부모가 귀찮은 일을 많이 할수록 아이는
그만큼 올바르게 성장하며 지구의 평화는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 이미지 출처

 http://www.psy.fsu.edu/history/wnk/ape.html입니다.

이 사이트에서 당시 촬영했던 동영상과 함께 실험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참고서적 

매드 사이언스 북, 레토 슈나이더, 뿌리와 이파리, 2008

영진공 self_fish

“파주”, 죄의식과 부채의식 그리고 상실과 두려움의 4중주

광포하고 매력적인 치정극으로 홍보되는 이 영화.
치정극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 … 인생이란게 … 전체가 욕망과 두려움이 뒤얽힌 한편의 치정극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가련한 두 남녀의 몸부림이 너무 안쓰럽고, 두 사람의 노력에 비해 삶이 너무 아이러니해서 보기에 많이 아렸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는 시작부터 죄의식을 자극하며 시작한다.
8년 전 수배 중이던 중식은 짝사랑하던 선배의 집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 선배의 남편도 함께 운동하던 선배이며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그 상황만 하더라도 중식의 마음엔 이미 부채의식과 죄의식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선배는 구속되었는데 자기는 피신을 해 가며 구속되지 않았다는 부채의식. 그리고 선배가 부재중인 상태에서 그 아내인 여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죄의식.

그런데 영화는 그 죄의식에 기름을 퍼붓는다. 그저 사랑하는 선배를 한번 안아보려는 인간적인 욕망은, 한 순간 방치된 아이에게 화상을 입히게 되고 중식에게는 그 화상만큼의 트라우마와 죄의식을 남긴다.

미친듯이 갚으려고 해서, 자꾸만 빚지는 남자 중식

그날 이후로, 중식은 그 죄의식을 감당하기 위해 자꾸만 부채를 갚으려 하고,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 버거운 짐을 갚는데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마 은수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상환자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성욕으로 인해 아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트라우마 때문에 은수와의 부부관계도 원만치 아니하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어느정도 죄의식을 취기로 덮은 후에 다시 아내를 찾았을 때 은수의 등에 확연하던 화상자국. 그 화상에 미친듯이 매달리며 외치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자신의 부채를 갚듯이 시작했던 결혼생활은 결국 ‘언니를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했어’라는 고백으로 끝나고, 속죄를 하려는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못한다. 게다가 그런 그녀를 가스 폭발로 인해 잃게 됨으로써 중식은 더 심한 죄책감을 집어 안게 된다.

철거대책위원회의 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른 때, 화염병 사용을 망설이는 철거민들에게 중식은 자신이 화염병 사용에 관한 혐의는 모두 뒤집어 쓸테니 쓰자고 말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보험사기혐의로 연행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려던 중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시 빚지게 됨으로써 죄의 부채를 늘려 나가기만 한다.

영화 말미 쯤에 ‘이런 일들(운동) 왜 해요. 무슨 의미에요’라고 하는 말에 중식은 ‘자꾸만 할일이 생긴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자꾸만 빚이 생기고, 자꾸만 속죄할 일이 생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한가지 죄의식이 지배할때 그것을 갚지 않으려 했다면 점점 더 부채가 불어나지는 않았을텐데, 죄를 짓고 갚으며 중식은 시지프스처럼 계속해서 그 삶을 살아간다.

잃고 싶지 않아 떠나기 때문에, 자꾸만 잃는 여자 은모

중식을 대표하는 말이 ‘속죄’라면 은모를 대표하는 말은 ‘상실’이다. 은모의 삶은 잃고, 또 잃고, 잃지 않으려고 떠나는 것으로 요약된다.

첫 등장부터 은모는 부모를 상실한 상태이며, 집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있다. 가진 것, 기댈 것이라고는 언니 은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식의 등장으로 은모는 언니 은수를 상실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두렵지만 결국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중식은 형부가 된다.

언니 은수가 중식과의 행복한 관계를 갈구하면 할 수록 은모의 두려움이 커져 나가는 가운데, 부부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언니 은수가 중식과 원만한 밤(?)을 보낸 후 은모를 제외한 둘만의 아침상을 차리는 순간 그 두려움은 극대화가 되고 은모는 또 다시 잃는 것이 두려워 떠난다.

가족사진에서 형부의 얼굴을 오려내고 친구와 며칠 밤 집을 나갔다 온 그 때, 은모는 자신이 두려워했던것 보다 훨씬 더 무섭게. 언니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다. 애초에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잃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그래도 형부한테 맘 붙이고 잘 살고 있던 은모에게 또 다시 상실의 두려움이 찾아온다. 바로 자신이 중학생이고 형부가 공부방 교사이던 시절 수업시간에 전해들었던 형부의 첫사랑의 등장. 든든한 보호자였던 형부가, 아기 사진을 들고 온 어떤 낯선 여자 앞에서 엎드려 속절없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고3이고, 바로 며칠 사이에 어른이라는 ‘선고’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형부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다시 혼자가 되게 될까봐 은모는 떠난다. 그리고 그 떠남이 결국 중식을 잃게 되는 전조가 된다.



속죄할 권리도, 떠날 권리도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가

자신의 죄의 댓가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발버둥쳐도,
잃지 않기 위해 자기가 먼저 떠나도,
자꾸만 더 깊은 늪으로 빨려들어가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삶을 보면 삶은 허무를 넘어 덫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과 똑같은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은모에게 지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그 진실을 부여잡고 지키려고 하는 중식.

대체 그 한가닥 진실을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은모를 지켜줄 수 있으랴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 들어앉는 중식과 나이트클럽/용역깡패 사장의 차창을 스쳐가는 은모.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 그 진실하나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풀잎처럼 얇기만 하다.

영화를 다 보고,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영화 참 … 독하다.’

어쩌면,
중식은 그토록 처절하게 속죄하려고 노력하는데도 죄의 짐을 조금씩 덜기는 커녕 물에 젖어가는 목화솜을 진 당나귀처럼 점점 그 짐이 더 무거워지기만 한다.

은모는 훌훌 털고 떠나려고 하는데도 삶이 가진 잔인한 힘은 은모를 ‘상실’과 대면하도록 자꾸만 끌어다 꿇어 앉힌다.

정확히 옮길 순 없지만 중식이 영화 막바지에 교도소 면회실에 앉아서 했던 대사가 마음에 자꾸 걸린다.
‘내가 교만했던 것 같아. 내가 얼마나 미욱한 놈인지’ 하는 말이 들어가 있던 그 대사.

그래,
사람은 다 미욱하지.
그렇다고 몸부림 치는 것 조차 ‘교만’인 것인지.
어쩌라고 … 대체 사람보고 어쩌라고.

영화 참, 독하다.

영진공 라이

 

“브로큰 임브레이스”, 비극적 멜로와 영화 만들기

<귀향>(2006) 이후 3년만에 찾아온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입니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다시 한번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 역을 맡고 있는데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작품치고는(?) 매우 통속적인 줄거리의 영화이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있어서는 역시나 감독 특유의 색깔을 재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대기업 총수의 정부가 영화배우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감독과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질투심에 가득찬 총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합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15년 전의 과거사로 설정해놓고 현재 시점으로부터 조금씩 캐내어 관객들 앞에 펼쳐보이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를 통해 고전적이라 할 만큼 뻔한 내용의 치정극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과거 시점의 아픔으로서 전달되게끔 하는 것이지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레나(페넬로페 크루즈)와 마테오(루이스 호마르)가 만나고 사랑한 것은 다름아닌 영화를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 사랑은 질투심에 눈이 먼 자본가 어네스토 마르텔(호세 루이스 고메즈)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지요.

레나와 함께 시력까지 잃어버린 마테오는 두 사람이 함께 묵었던 도피처에서의 이름, 해리 케인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마침내 마르텔의 죽음을 신문 기사로 접하고 과거의 사랑을 복원하기 시작합니다. 마르텔의 손에 의해 최악의 작품으로 편집되어 버린 영화 속 영화 “여인과 가방”이 마테오와 레나를 만나게 해준 작품이었던 동시에 두 사람의 사랑이 빚어낸 결실이었다고 본다면 이 영화를 복원하는 과정은 곧 마테오에게 있어 레나와의 사랑을 불멸의 것으로 남기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의 플롯에서 흥미로운 부분들 가운데 하나는 메이킹 필름을 찍는다며 마테오와 레나의 뒤를 쫓아다니던 마르텔의 게이 아들이 결과적으로는 맹인 작가 해리 케인으로 살고 있던 마테오가 레나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메이킹 필름의 카메라를 피해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그 카메라를 통해 레나가 마르텔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먼 훗날 마테오에게는 레나와의 마지막 순간을 추억하는 결정적인 매개체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조악한 디지털 화면 속에 담긴 마테오와 레나의 마지막 입맞춤 장면을 통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애절하게 표현되고, 그 뒤를 이어 레나가 연기했던 화려한 색감의 복원판 “여인과 가방”이 이어갑니다. 사랑의 기쁨도 슬픔도, 사랑에 대한 추억까지도 모두 영화와 함께 이루어지는 세계가 <브로큰 임브레이스>에 담겨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