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 줄리아”,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

오랜만에 보는 노라 에프런 감독 작품이네요.


필모그래피를 보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의 각본을 썼었고 – 그 동안 로브 라이너 감독과 배우들만 기억해서 미안했습니다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과 <유브 갓 메일>(1998)은 직접 연출까지 했었군요.

이번 <줄리 & 줄리아>에서 줄리아 차일드 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과 노라 에프런 감독의 인연은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노라 에프런이 시나리오 작가로서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작품은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실크우드>(1983)였는데 메릴 스트립이 주연으로 출연해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었죠.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86년작 <제 2의 연인>(Heartburn)은 노라 에프런 본인의 소설을 직접 각색했던 작품으로 메릴 스트립이 다시 한번 주연으로 출연해 잭 니콜슨과 공연했던 작품입니다.

그렇게 일찌감치 시나리오 작가와 주연배우로서 만났었던 두 사람이지만 그때로부터 2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에 와서야 감독과 주연배우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 그간 노라 에프런 감독 작품에는 늘씬한 미녀 배우들만 주연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표적으로 멕 라이언이 있었고, 앤디 맥도웰, 리사 쿠드로, 그리고 니콜 키드먼까지 나름대로 당대에 가장 잘 나가던 여배우들이 노라 에프런 감독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줄리 & 줄리아>는 지금까지 노라 에프런 감독이 작업해왔던 작품들과 특히 상업성이라는 측면에서 한 발자욱 물러나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니콜 키드먼과 윌 패럴을 캐스팅했던 코미디 <그녀는 요술쟁이>(2005)가 흥행에 참패했던 일이 노라 에프런에게 어떤 전환점이 되었던 것일 수도 있겠고요, 내용 면에서도 <줄리 & 줄리아>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노라 에프런 감독의 영화들과 차별성을 갖습니다. 그와 동시에 노라 에프런이 시나리오 작가로서 처음 참여했던 작품 <실크우드>와 동질성을 갖게 되기도 하죠.

자막으로 밝히고 있듯이 <줄리 & 줄리아>는 두 실존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한 명은 40년대 후반 남편을 따라 프랑스에 가서 살다가 요리를 배운 이후 귀국하여 프랑스 요리 전문가로 명성을 떨친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이고, 다른 한 명은 삶의 활력을 얻기 위해 요리 블로그를 운영하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줄리
파웰(에이미 아담스)입니다.

줄리아 차일드는 전설적인 프랑스 요리책 외에 <프랑스에서 나의 삶>이라는 자서전을 썼고 – 2004년에 돌아가셨는데 책은 2년 후에 출간되었습니다 – 줄리 파웰은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법을 1년간 따라해보는 요리 블로그를 운영했고 – 이 블로그는 정확히 줄리아 차일드의 사망일에 올린 줄리 파웰의 마지막 포스팅 이후 업데이트가 중단된 상태로군요 – 이후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묶은 책 <Julie & Julia: 365 Days, 524 Recipes, 1 Tiny Apartment Kitchen>을 냈는데 노라 에프런이 두 사람의 책을 각색하여 한 편의 영화로 만들게 된 것이죠.

줄리아 차일드와 줄리 파웰은 공통점이 많아 보입니다. 두 미국인 여성 모두 요리를 좋아했고 요리와 관련된 출판을 했으며 각자 관계가 좋은 남편이 있었으되 아이는 없었죠 – 그 덕분에 두 사람은 모두 요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줄리아 차일드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슬픔을 안고 살았는데 마침내 출간된 자신의 책 <프랑스 요리 예술 정복하기>(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 1961)을 받아들고 기뻐하던 마지막 컷은 그 책이 줄리아 차일드에게는 평생을 기다려온 아이와 다름없는 존재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줄리 & 줄리아>는 훌륭한 프랑스 요리법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고 출판이나 블로깅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 결국 우리 모두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나 통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안에서 새로운 희로애락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인지상정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테니까요.

영진공 신어지

현실과 포르노


머리에 뇌라는 것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는 남자라면 포르노가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노를 안 본 남자를 찾지 못해 연구를 접어야 했다는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 연구팀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도 여성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다.

포르노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은 슈퍼맨 영화를 보고서 스판바지를 입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짓과 같으며 우린 이런 부류를 일컬어 변태라고 일컫는데에 남녀모두 사회적 합의를 보고있다. 그래서 누구도 바바리맨이나 강간범, 성추행범을 향해 나의 꿈을 이뤄줘서 고마워라고 만세 삼창하지 않으며, 그 놈을 호되게 처벌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다.
  


나이 80을 먹어도 야동에 끌리는건 어쩔 수 없다지만 …
포르노는 포르노일 뿐 환타지에서 그쳐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의 격이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했다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를 깨고 바바리맨을 상상력의 총아로 덧칠하는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광화문 중앙분리대에서 펼쳐진 스노보드 경기를 놓고선 자신의 좁디좁았던 상상력을 한탄한다든지 하는 등의 일이다.

난 그런 거 상상도 못했다능, 그래서 내심 걱정했지만 해놓고 보니 내 졸렬했던 상상력이 부끄러웠다능,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편견을 버리자능 … 등등 …

아 … 정말 상상력은 안드로메다에 두고 국영수만 열심히 들고파야만 했던 주입식 교육의 병폐가 뼈져리게 느껴진다. 고작 그런 상상조차 못하고 살았다니. 지금도 애들 상상력을 홍어 거시기 마냥 만들어놓는 교육부는 정말 줄빠따 맞아야 쓰겠다.


광장의 의미가 무언가. 요즘 언제 광장이 ‘광장’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촛불시위 이후 광화문에 급조되어 광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중앙분리대가 실은 시민의 의사표현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광장도 아닌 곳에 스노보드 대회를 하든 스키 대회를 하든 물을 채워서 요트 경기를 하든 놀랄 일은 아니다. 저 곳은 그렇게 쓸려고 만든 거니까.
 
그런데 그 곳이 정말 광장이라면,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인시위조차 강제연행 하면서 카드회사의 마케팅에는 얼씨구나 통째로 내주는 건 상상력이 아니라 그냥 횡포일 뿐이다.

게다가 저 저렴한 상상력은 이미 아랍의 졸부들이 두바이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 사막 위의 스키장? 인공섬? … 그 막대한 에너지들은 그 졸부들 만의 것도 아닌데, 그들이 안 그래도 피곤한 지구를 쥐어짜서 한다는 짓이 고작 사막에서 스키를 타기 위함이라니 이건 재앙에 가깝다.

 

사막에선 낙타를 타고 스키는 스키장 가서 타라.

근데 그런 아랍 졸부를 보고 우리도 그 뒤를 따르잔다. 그러니  4대강에 콘크리트 부어서 유람선 띄우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머릿 속에서 끝내야 할 일과 현실로 끌고 나와도 될 일들을 구분을 못하고 있다.

포르노는 그냥 포르노에서 끝내야 하는데 현실로 가져와 재현을 하려고 하면 변태가 되듯 두바이에서 벌어지는 저 돈지랄이나 4대강 살리기나, 펌프로 물 끌어다가 수도물 쏟아붙는 ‘하천’ 을 만든 것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게 아니라 현실을 재앙으로 만드는 행위다. 이래선 남극대륙에 사파리를 건설하겠다는 놈이 나와도 하등 이상할게 없는 현실이 되어버릴 지경이다.

이대통령은 그의 변태스런 삽질 정책을 녹색성장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녹색 삽으로 삽질할 건지 녹색 시멘트를 바를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녹색성장’ 만큼이나 모순적인 제목이 붙은 ‘그린 포르노(Green Porno)’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이 단편영화는 여배우 출신인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각본, 감독, 출연한 영화다. 자연보호와 생태를 주제로 담고 있는 이 짧막한 영상들은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직접 곤충이나 생물들로 분장하여 교미장면을 코믹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짝짓기 행위는 정확한 고증을 통해 묘사하였다고 한다.

선댄스 영화제 측의 지원으로 모바일 동영상 플레이어 포맷으로 제작되었으며 링크를 따라가면 전편을 볼 수 있다. 재밌으니 한번 보시길.

이런게 포르노와 그린이라는 모순적인 단어를 접목시켜 만들어낸 ‘상상력’이란거다. 녹색 삽으로 삽질하는게 녹색 성장이 아니라.

각설하고, 상상력타령 따위의 설레발은 서울 시장이 광화문 광장에 제대로 된 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차량 통행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개선할 때나 경기도 의회에서 당론에 개의치않고 상큼한 모습으로 초등생 전원 무료급식을 통과시키거나 할 때에 쳐주시기 바란다.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대로 다 하는 걸 상상력이라든가 신념이라든가라는 말로 포장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의 모든 패륜이 용납되어지고, 모든 횡포와 배신에 대한 비판이 편견으로 인한 오해로 해석되고 말터이니.

영진공 self_fish 

이드, 에고, 슈퍼에고 (Id, Ego, SuperEgo)


이상한 게 말이야.

다른 것들은 모두 이상 쪽으로 가는데
미술만큼은 이드(ID)쪽으로 회귀해.

왜, 프로이트 형이 말했잖아. 이드, 에고, 슈퍼에고.

예를 들면,
MB 횽아가 전 국토를 삽으로 평정하겠다고
웃통 까고 강바닥 뒤집어 엎는건 이드

정색을 하며 
세종시는 자긴 잘 몰랐고 정치 초년병이라 오케이 한거다는 에고

어린이날 놀러온 아이들과 뽀뽀하며
완전 자상한 할아버지 흉내 내는 건 슈퍼에고….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횽아들은 말이지.
최대한 현실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왜곡해서 그렸어.

물론, ‘그럴듯함’이 빠지면 안되지.

보면 딱, “아, ㅅㅂ, 존나 아름답구나” 하잖아.

그러다 모네 본좌가 딱 나오는거야.
니들 눈까리에 보이는 게 보이는 게 아니다 하면서 말이지.

현실이 a1, a2, a3….. 졸라 관점에 따라 바뀐다고 그림으로 말해.
급존경 감이야.

거기에 달리 같은 양반이 등장하면서
미술이 이제 막 가지.

막가자는 거지요?

사실, 이말은
노통이 검사들한테
“막하자는 거지요?”
를 조선일보가 왜곡한 거잖아.

이 이야기를 왜 하냐고?

현실은 내 이념의 상자를 어떻게 꺼내냐에 따라 다른거거든.
위에 봤던 모네형 그림처럼
똑같은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졸 달라진다니까.

1991년도에 처음으로 케텔을 썼어.
그러다 93년도에 피씨-서브로 옮긴건,
순전히 모자이크란 최초의 웹브라우저 때문이었지.

그 때 피씨-서브에서 AOL(아메리카온라인) 접속하는 비용이
국제전화에 1/10정도였거든, 올레.

모자이크가 왜 모자이크냐면
사진 한 장을 받을 때
처음 사진은 까맣거나 빨개.
그러나 한 몇분 지나면 이게 4분할 되면서
빨노파깜, 이렇게 색이 분할되지.

그리고 또 한 몇분지나면 이 4분할들이 다시 4분할,  다시 4분할 …

이렇게 되면서 그림 한 장이 완성되는거야.
한 반나절이면 사진 한 장을 전송 받을 수 있어.
물론 19금.

후, 몬드리안 본좌 그림을 보면서
“ㅅㅂ, 저건 유치원생도 그리겠다”라고 생각한 횽아들은 반성해.

몬드리안은 저걸 80년 전에 이미 그려놓고
미래를 예견한거야.
이미지의 원초적인 상은 바로 저 몬드리안의 그림부터 시작해.

말이 좀 빗나갔는데… 어쨌든…


이드

에고

슈퍼에고

누군가의 욕망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나타났으면 좋겠어.

누군가의 이드가 현실이 될 때
어쩌면 우리는 지옥에 있을지도 몰라.

영진공 그럴껄

아바타가 던진 떡밥들

3D로 안봤습니다. 그냥 2D로 봤죠. 조금 아쉽네요 …

늘 느끼는 거지만 카메론은 정말 꼼꼼합니다.
“개스! 개스!!” 를 기억하실 겁니다. 두팔을 양 옆으로 펼쳤다 굽혔다.
영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적절한 순간에.

게다가 매우 친절하기까지 하죠.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기술을 시연하려는 목적과,
관객들에게 지금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목적을 모두 달성합니다.

예를 들면, 멋지라고 슬로모션이 아니라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들을 관객들이 봐야하니까 슬로모션을 쓰는 거죠. 그리고 이 영화는 아무리 밤이라도 어두운데서 뭐 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다 잘 보이는 곳에서 합니다. 나무가 자체발광 아몰레드 나무들이라.

-= IMAGE 1 =-



“우선은 이야기와 설정이 있고 그 다음에 그걸 구현하기 위해서 기술을 썼다”는 카메론 본인의 말에 100%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기술사용으로 영화의 CG는 말 그대로 현실과 융합합니다.

그래도 이 영화에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같이 본 사람도 처음엔 깊이감과 움직임을 강조하는 시점 탓에 어지러웠고,
나중에는 너무 익숙하게 흘러갔다고 …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전통을 지키지만 고루한 원주민,
상대를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용기만 내세우는 전투,
영화와는 달리 현실에서 그런 전투의 결말은 대부분 비극이었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21세기의 가장 앞선 기술로 70년대의 낭만적 SF를 풀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카메론 다운 이야기입니다.
본인도 투자자들에게 그렇게 설명했다네요. 이 영화는 <포카혼타스>와 <늑대와의 춤을>, <푸른골짜기>를 가져다가 믹서기에 넣고 갈아 만든 것 같은 영화라고요.
물론 그 말에 투자자들이 덜덜떠니까 사실은 우주에서 벌어지는 <주라기 공원>이라고 달래주었다지만 …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이 영화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정말 행복한 경험일 거라는 거죠.

영화의 스토리가 <포카혼타스> + <늑대와 춤을> + <미션> 이라면
영화의 설정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배틀필드 2142> 입니다.
실제로 이런 게임 만들어도 괜찮을 듯 … 뭐 비슷한 게임들이 좀 있죠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가 도달한 곳이야말로
MMORPG 폐인들이 꿈꾸는 궁극의 상태죠.

예전에 무슨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하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봐라.

당신이 외국의 어떤 나라에 자주 출입국을 하며 지냈는데,


그 나라에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들과 당신에게 중요한 일들이 다 있고,


그 나라의 풍경과 삶이 당신 마음에 쏙 들고,


그 나라에서 당신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면,


당신은 진지하게 그 나라로 이민 갈 생각을 하지 않겠나.


그게 MMOG 폐인들의 상태다.


네,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럼 여기서 <아바타>가 투척한 떡밥들을 고찰해보자면,

첫째, 이제 카메론은 자기 영화를 어떻게 선보여야 할지 아는 것 같습니다.
<타이타닉> 때도 엄청난 규모의 세트를 지어서 실제로는 CG 떡칠인 영화에 전통적인 대작의 이미지를 입혔죠.

이번에는 12년의 공백과 첨단 CG를 결합시켜서 시너지효과를 냈습니다.
이건 그냥 카메론의 영화가 아닙니다. 그가 12년간 준비한 기술이 집약된 영화죠. 그 “12년 공백” 이 빠졌더라면 이 영화에 대한 평단의 열광은 조금 덜 했을수도 있습니다.

둘째, 이 영화는 줄거리보다 그 설정에 더 많은 꺼리들이 있습니다.
일단 그 아바타 링크 시스템, 이건 그 자체로 엄청난 상업적 가치를 가진 기술입니다.
이걸 조금 발전시키면 “신체교환” 이 되겠죠.
이 영화의 결말을 보자면 전 세계의 갑부들이 모두 판도라로 올지도 모릅니다.
왜? 몸 바꾸러. 물론 판도라 주민들이 허락을 안해주겠지만.

사실 이 영화 <아바타>의 설정을 주워듣기 시작하던 올해 초 쯤,
<노인의 전쟁>이라는 SF 소설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 정말 재미있습니다.
근데 그 소설의 설정이 <아바타>와 상당히 비슷하죠.

소설에서는 나이 70넘은 노인들만 모아다가 행성간 전쟁터에 내보냅니다.
물론 그냥 보낼 리는 없죠.  그 노인들의 DNA와 외계인의 유전자를 조합한 하이브리드 전사의 새 몸에 정신을 전송시킵니다. 그래서, 기저귀 차고 휠체어 끌던 노인들이 새로운 몸과 새로운 삶을 얻는 겁니다. 물론 그 몸은 전쟁터에서 부질없이 스러질 운명이지만 모질게도 운 좋은 몇몇은 결국 끝까지 살아남기도 하죠.

그런데, <아바타>를 보니 이것과 같은 얘기네요?


노인(들)의 전쟁, 아주 재미있음

물론 요즘 SF의 트랜드중 하나가 바로 이 신체교환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 보면 신체교환이야 말로 늙어가는 우리 모두의 판타지가 아니던가요.

젊은 독자들은 아무리 말해줘도 실감 안날 겁니다만,
하지만 저처럼 나이 40넘어가 보세요.
이게 궁극의 인생 판타지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겁니다.

이런 거죠.

열라 고생해서 돈은 많이 벌었는데, 정작 즐기려고 보니까 몸이 늙었네?

걱정 마시라. 이제 당신의 DNA와 우성인자를 적당히 칵테일해서


업그레이드한 젊은 몸에 당신의 정신을 전송하면,


당신은 말 그대로 인생 리셋 할 수 있다.


예전 몸의 스펙이 루저였다고? 울지마시라.


이번에는 위너의 스펙으로 다시 태어난다.


얼굴은 원빈을 닮고 싶다고? 좋다.


새 얼굴은 당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조금 원빈st로 개수되어 있을 거다.


블라블라 …


이건 브루스 윌리스가 나왔던 <서로게이트> 보다 몇차원 높은 기술입니다.
서로게이트는 대리로봇이지만 아바타는 진짜 나 자신이죠.
그러니 나이 든 부자들 중에 이 기술에 돈을 쓰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리요?
아니, 심지어 젊은 부자들 중에도 수요자가 있을지 모르죠.
누구나 자기 몸 혹은 자기의 아바타를 업그레이드 하고 싶을테니까요.

10억 유로는 아니더라도 1억 유로 쯤은 충분히 낼 사람 줄을 설겁니다.
그러니 이 기술만 있어도 그 회사는 판도라에서 입은 손실(?)을 충분히 복구하고도 남을 거예요. 힘 내세요.

셋째, 판도라에 있다는 그 언옵타늄. 그것도 대단한 떡밥이죠.
설정상 그 광물질은 중력에 저항합니다. 만유인력을 거스르는 물질이란 거죠.
그럼 그 광물로 섬을 둥둥 떠다니게 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냐고요?

간단히 말하면 영구기관을 만들 수 있겠죠.
그래서 자석하고 중력하고 그 언옵타늄만 있으면 영원히 돌아가는 발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한한 에너지를 아무런 에너지 소모 없이 뽑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자원 고갈된 지구에서 이것만큼 대단한 물질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막 둥둥 떠나닌다능 …

이런 떡밥들은 나중에 또 다른 이야기로 찾아올지 모릅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디서는 <아바타>가 3부작으로 기획됐다고들 하던데,
거기서 나올지도 모르죠.

여튼 이제 CG는 현실과 거의 완전히 융합했고
게임은 기존의 내러티브들과 완전히 융합했군요.

울라!!

영진공 짱가